② 다산묘각중건기(茶山墓閣重建記)
조상이 사당을 떠나게 되면 보본(報本)의 정성을 펼 곳이 없다. 이러므로 묘제(墓祭)가 있다. 이미 묘제를 지내게 되면 제수(祭需)를 장만하는데 정성을 들여야 하고 조촐하게 장만해야 하는데 장소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러므로 묘각(墓閣)이 있어야 하는 것이니 이 또한 천리(天理)와 인정(人情)이 용납(容納)되어 마지아니할 바다.
이에 생각하건대 우리나라 사대부(士大夫)의 벌족한 집안들은 대개 열성조(列聖朝)께서 효로 다스리고 예로 이끌어온 교화(敎化)를 입어 더욱 더 선조를 받들고 원조(遠祖)를 추모(追慕)하는 절차를 서로 권장(勸獎)하여 반드시 묘소에다 제각을 만들어 정성스럽게 고하고 그렇지 못하면 마음이 편치 못하듯 정성을 펴지 못한 것 같은지라.
아! 아름답도다. 우리 선조 습독공묘(習讀公墓)가 장흥치소(長興治所)의 남쪽 10리 못되는 곳 평화촌(平和村) 다전등(茶田嶝)에 있었고 그 아래에 옛 제실(祭室)이 있었는데 비록 어느 때에 세운지는 알 수 없으나 항상 그 곳이 낮고 좁아 제계하며 잘 수 없음을 근심하였다. 지나간 병인(丙寅)년에 문의(門議)의 결정으로 육동(六棟)을 세워 새롭게 하니 보기에 옛날 것보다는 조금 넓은 듯하였다.
그러나 겨우 초가집이었기 때문에 모두가 수하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바야흐로 질기와로 덮을 것을 계획하는데 운암공(雲岩公) 11대손으로 원량군(元良君)이 있어 훌륭하였다. 재물을 가볍게 여겨 베풀기를 좋아하였으니 천성(天性)이라 선조를 위하고 일가를 도와주기를 숭상하였으며 궁한 이를 구제(救濟)해 주고 가난한 분을 도와주는 것이 또한 사람들의 생각 밖에서 나오니 간간히 외출하다 돌아오면 횃불을 들고 기다린 자가 거의 손꼽아 셀 수 없는 정도였다.
우리 문중의 각 묘소 중 연하동(烟霞洞)과 장천재(長川齋) 그리고 운주동(雲珠洞)의 세제시(歲祭時)에 방차일(方遮日)이며 향로합(香爐盒)이며 반기(飯器) 잔대(盞臺) 수저 변두(邊豆) 등 물건들이 일그러질 때마다 보충하지 않을 때가 없으니 한 문중이 이미 칭찬하여 물건이 쌓여졌다가 사라지고 한 지가 오래되었다.
군이 진즉 그 바깥사랑채를 지었는데 그 장려함이 말할 수 없었다. 이윽고 선비는 감히 할 바가 아님을 갑자기 깨닫고 철거하려고 하니 이에 원매자가 만금을 더하여 사려고 계속 드나드나 끝내 듣지 아니하고 다산묘 아래로 옮기기를 청하니 문중 의론이 엇갈려 합의를 보지 못하였다. 지난해 장천재 문회 때에 군에게 알아서 처리하라고 전임하였는데 와서 단연히 혼자 힘으로 이건하겠다고 말한지라.
아! 사람의 인심(仁心)을 누가 능히 막으리오. 금년 봄에 문재(門財)로 옛집을 좌우로 나누어 옮겨 직실(直室)과 익랑(翼廊)을 세우니 옛터가 넓고 큰지라 이에 군이 만여금을 출자하여 이건하니 하루아침에 묘하에 우뚝 솟아 산천도 모양을 바꾸었고 초목도 빛을 더하였다. 이 전후의 경비가 흡족히 누만금(累萬金)은 될 것이다.
아! 세상에 다시 이런 사람이 있으리오. 가만히 세상의 윤옥자(潤屋者)를 보건대 대체적으로 재물을 기르는 데만 풍요롭고 베푸는 데는 인색하여 하지 아니하니 마원(馬援)의 이른바 수전노요 양자(楊子)의 이른바 사슴 우리에다 난간(欄干)을 만든 자 거의 드문지라 이 소문을 들은 자 땀이 촉촉이 이마를 젖어들어 마침내 그치지 아니할 것이다.
하루는 문중(門中)의 여러분들이 묘각의 상량문은 춘헌옹(春軒翁)께서 여러 사람의 간절한 부탁에 따라 이미 써 놓았으니, 건축의 전말은 오자로 하여금 기록해야 하지 않겠는가 하며 내게 이르신지라. 내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다른 사람보다 능하지 못한 일에 능한 것이 전혀 없다고 사양하였으나 더 이상 굽히지 못하였다.
이 사람이여! 아름답도다. 이 사람이여! 세인은 이익에 임해서는 얼마간의 이익에도 다투는데 이 사람은 누거만(累鉅萬)을 아끼지 않았으니 홍범(洪範)에 이른바 부(富)하고 또한 착하다 함은 이 사람을 가리켜 말한 것이 아니겠는가! 맹자(孟子)가 인용한 바 부(富)를 위하여 불인한 자가 과연 세인을 위하겠는가 하였으니 경계해야 할 것이다. 아! 효하도다. 이와 같은 사람이여! 인하도다. 이와 같은 사람이여! 진실로 마땅히 대서특필을 한번만 써서 그칠 것이 아니다.
하물며 지금이 이 어떠한 시절인가 삼강이 윤몰되고 구법이 패퇴(敗頹)되어 부자가 서로 원수 되고 형제가 서로 원수를 삼은 자 목덜미와 등을 서로 바라본 이러한 때에 이 사람은 이에 원조를 추모하여 능히 이 일을 판출(辦出)하니 더욱 가히 복을 받을 것이다. 옛날 송현(宋賢)이 말하기를 두기공(杜祁公)이 재물을 쓰는 데는 나도 따라갈 수 있으나 그의 마땅히 쓸 곳에 쓰는 데는 내가 따라갈 수 없다고 하였다. 만약 송현이 이 사람의 쓰는 곳에 있었다면 어떻다고 말하였을까?
이와 같은 일들이 그 근본 한 바가 있으니 군은 문학이 있어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간에 우애하며 제사를 받들되 예로써 하고 자손을 가르치되 의로써 하였으며 빈객(賓客)을 접대하고 동복(僮僕)을 부리는데 이르기까지 지적하건대 하나도 그 도리를 다하지 않은 것이 없으니 불인하고서 능하겠는가? 아름답구나. 이 사람이여! 사람마다 모두 이 사람 같다면 우리의 문중이 어찌 반드시 창대(昌大)하지 않겠는가.
시에 이르기를 영원히 효를 생각함에 효를 생각함이 법이 된다고 하였으며 또 이르기를 효자가 끊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고 기리 복과 자손을 준다고 하였다. 생각하건대 이로써 군을 위한 송도를 사양하지 않고 이와 같이 쓰노라. 호산(湖山)의 환공(環拱)과 운연(雲煙)의 탄토(呑吐)며 죽수(竹樹)와 날짐승 물고기며 천석(泉石)과 화목(花木) 등 사람들의 눈으로 볼 수 있는 것들은 이 제각(祭閣)에 올라와 보면 알 것이다. 가히 간략하게 쓴 것이 마땅하며 또한 미칠 겨를이 없다. 때는 공부자(孔夫子) 탄강(誕降) 2487년 병자(丙子) 오월 하순이다.
습독공(習讀公) 13대손 계룡(啓龍) 삼가 기술(記述)
명문장입니다~~,
다산묘각중건기 잘보고 공부하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