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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전쟁 (Korean War)
* 시기 : 1950.6.25~ 현재
(휴전: 1953.7.27)
* 장소 : 제주도를 제외한 한반도 전역
* 원인 :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에 의한 북한의 남침
[결과]
무승부 및 휴전, 명목상 현재 진행 중
[영향]
수많은 사상자와 이산가족의 발생
전 한반도의 피폐화
분단의 고착화와 상호 적대감 심화
일본의 경제적 부활
향후 수십 년간 남한에서의 좌익 이념의 금기시화
북한에서의 남로당 계열의 숙청
주한미군의 대한민국 주둔
[참전 병력]
최소 92만 명+전투협조 병력 - 최대 200만여 명
[인명 피해]
군인 26만 명, 민간인 99만 명 추정, 일부 민간인이 납북당하거나 월북함
군인과 민간인을 합쳐 최소 250만여 명, 수백만 명의 민간인이 월남함
[경제적 피해]
공업기반의 절반, 30억달러 또는 국부의 1/4
전력의 74%, 연료 공업 89%, 화학공업의 70%
1. 개요
한반도 근현대사상 최대 비극
김일성의 적화통일 야욕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에 내려진 전무후무한 재앙.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에서 1950년 6월 25일에 북한이 대한민국을 침공하여 발발했고, 1953년 7월 27일 부로 휴전된 전쟁이다. 정확히 말하면 정전협정에 따라 정전된 것이라서 만일 남한과 북한 사이에 다시 전쟁이 터진다면 그건 2차 한국 전쟁이 아니라 한국 전쟁이 재발한다고 봐야 할지도 모른다. 다만 대한민국[15]은 정전협정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종전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2. 명칭
이 전쟁은 한국전쟁이라는 명칭으로도 불리는데, 이는 주로 영미권에서 이 전쟁을 가리키는 명칭인 Korean War를 번역한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는 1973년 제정한 〈각종 기념일에 관한 규정〉에서 6·25 사변일(六二五事變日)을 공식 명칭으로 써왔으나, 2014년 3월 24일 개정으로 6·25 전쟁일이라고 규정한다. 대한민국의 국정 국사 교과서에는 6·25 전쟁으로 표기했는데, 이는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따른 것이며, 대한민국에서는 공식적으로 한국 전쟁보다 6·25 전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한다.
반면 학술용어로는 "한국전쟁(Korean War)"라는 용어도 쓰인다. 6.25는 이 전쟁의 배경과 과정, 그 결과 및 여파를 아우르기 어려운 단어라는 의견이 있다. 또는 경인공란(庚寅共亂)이라고 불린다. 6.25라고 부르는 것은 전쟁이 6월 25일 그날 시작되었다는 의미밖에 안되어 여러 복잡한 사건의 추이와 전개과정을 포괄하는데 적절치 않은 용어라는 것이다. 어쨌거나, 우리나라는 해방 후 오랜 기간 이 전쟁을 6.25라고 불렀고 많은 논란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6.25라는 말이 자주 쓰이며, 현재는 6.25를 혼용해서 쓰이고도 있다. 어르신들은 6.25 사변이 입에 붙어 있어 6.25 사변이라 부르고 있다.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방부 지정 공식용어는 '6.25전쟁'이며, 정부에서도 6.25전쟁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다.
6.25동란(動亂) 이란 표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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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6.25 전쟁이란 명칭은 사람들의 인식이 '6월 25일'에 일어난 전쟁에 그치고 그 3년간의 나머지 역사는 잘 인식되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는 견해도 있다. 이 때문인지 한때 많은 사람들이 이 전쟁의 개전년도를 몰라서 기사까지 나오는 경우가 흔했지만 2016년에는 개전년도를 모르는 경우가 많이 줄었다. 그러나 아직까지 휴전연도는 성인들도 모르는 사람이 많다.
참고로 휴전은 정확히 3년 1개월 2일 후인 1953년 7월 27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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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전쟁 발발
굳이 끼워 맞추자면 저 상황은 애치슨 라인이 설정된 직후라고 보면 된다. 다만 스탈린은 저 그림 상의 상황과는 달리 김일성이 전쟁 일으키자는 땡깡을 48번이나 기각시켰다. 그러나 애치슨라인을 알게 된 스탈린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거라 생각하고 결국 김일성의 남침을 허락하는 상황으로 끼워 맞출 수도 있다.
그러나 이미 과거 소련의 비밀공문서가 공개된 현재, 애치슨라인의 설정이 6.25 전쟁 발발에 끼친 영향이 미미한 것이 밝혀진 시점에서 위와 같은 기존의 가설들은 모두 유보되고 있는 실정이다.
실제로는 해방 이후 남북 간에 크고 작은 충돌이 벌어지고 있었다. 전쟁은 6월 25일 갑자기 뻥 하고 터진 것이 아니라, 이전에 이미 교전 상태였다. 나이 드신 분들은 45년 해방 후부터 전쟁 전까지 있던 여러 소란을 기억한다. 디테일한 부분에는 논란이 있으며, 이 기간 동안의 문제는 이데올로기 또는 남북한 양쪽 정부의 기원 내지는 본질 문제와 결합되어 매우 혼탁하다.
3.1. 침략을 주도한 전쟁범죄자
•김일성 : 북한 영토와 인민 전체를 도박판에 올인해 놓고, 그 실책마저 박헌영을 비롯한 정적에게 뒤집어씌워 자신의 권력 공고화에 써먹은 자.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수상
•박헌영 : 6.25전쟁의 시나리오를 제안한 진 주인공이자 흑막이다. 전쟁을 일으키면 남로당 잔존 세력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는 주장[19]으로 전쟁을 선동한 선동가. 직책은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 & 부수상 & 외무상.
•테렌티 시티코프 : 소련군정 사령관을 역임했고, 김일성의 침략을 적극적으로 도운 인물.
•이오시프 스탈린 : 스탈린이 김일성의 침략 요구를 거절한 것은 사실이나, 최종적으로 침략을 승인해준 것은 스탈린이며, 지원은 물론이고 침공 계획까지 짜서 준 게 스탈린이었다.
•중공군 참여 관련
◦마오쩌둥 : 마오쩌둥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도와주기로 했으며, 이는 김일성이 스탈린을 설득하는데 영향을 준다.
◦쑹스룬 : 마오쩌둥의 명령에 의해 김일성을 도와줬다.
3.2. 들어가기에 앞서, 용어 설명
현재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6.25 전쟁은 북한이 남한으로 침략하면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구나 안다. 다만 한자어의 어감 문제로, 제대로 이해하고 있으면서도 '남침'이라는 용어만 '북침'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한자어에서의 동서남북 방위는 부사어로 해석된다. 즉 '남침'은 '(북쪽에서) 남쪽으로 침략했다'라는 의미로, 방위가 들어간 다른 한자어인 '남하, 북상, 동진, 서정' 역시 '남쪽으로 내려감, 북쪽으로 올라감, 동쪽으로 나아감, 서쪽으로 정벌함'으로 해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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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1. 북한의 남침 증거들
2010년대까지 밝혀진 자료에 의하면, 정권 확립과 당시의 우세를 활용해 조기에 남한을 제압하려던 김일성과 공산 파르티잔 세력을 비롯한 남조선로동당 인맥을 통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던 박헌영의 주도로 전쟁이 일어났다는 것이 정설이다. 북한이나 남한의 극소수 세력은 북침이나 소련의 배후 조종설을 주장하기도 했으나, 소련 기밀문서의 공개 등으로 대부분 설득력을 잃었다. 그렇다고 소련과 중국이 전쟁의 원흉이 아니라는 뜻도 아니다. 애초에 소련, 중국이 개전 허가를 안 하고 지원을 안 해줬다면 6.25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대표적으로 지목되는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에서도 6월 25일날 먼저 총공세를 펼친 것은 북한이 맞다고 서술하고 있다. 다만 그 이전에 38선 부근에서 서로 2 ~ 10㎞씩 전진과 후퇴를 반복하는 국지전이 있었다는 사실을 국내 학계에선 최초로 도마 위에 올렸고, 6.25 전쟁은 그것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주장했을 뿐이다. 참고로 브루스 커밍스는 대표적인 수정주의 학자로, 미국 외교 기밀문서가 공개되면서 그에 기반해서 냉전사를 해석하였다.
그러나 국지전은 매우 소규모의 무력시위에 불과했다. 일단 규모 자체도 어떤 경우엔 분대급에 불과했고 보통 중대급, 커봐야 대대급에 불과했다. 그리고 이런 국지전이 6.25 전쟁과 직접적인 연관은 없다는 것이 학계의 결론. 굳이 6.25 전쟁과 국지전이 관련이 있다면 당시 교전 규모를 봤을 때, 38선 부근의 국지전은 신생 북한군의 전투 경험 습득과 교리 시험을 위해 북한이 지속적으로 남한지역을 내습한 것이라고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 전면전 발발 이전부터 북한은 부단히 전쟁 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 실제로 1949년 쯤 가면 개성시시에서 북한군 부대가 박격포로 하도 공격을 해대는 지경에 주민들이 항의하는 수준까지 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커밍스가 틀렸다.
사실 북한군이 미리 전쟁을 준비했다는 가장 큰 증거는 남침 직후 수십~수백 킬로미터 수준의 작전기동을 했다는 것 자체다. 군대 갔다 온 사람은 누구나 알겠지만, 미리 계획을 세우고 충분한 준비를 해두지 않았다면 부대는 자기 주둔지를 함부로 떠날 수 없다. 게다가 개전 직후 전황을 보면 더 참담하다.
3.3. 전쟁 전야
전쟁 직전 남북한 병력 상황 비교 (단위 : 명)
국군 :
계 육군 소계 육군 전투 병력 지원 • 특수 병력 해군 공군
103,827 94,974 67,416(8개 사단•22개 연대) 27,558 6,956 1,897
인민군 :
201,050 182,680 120,860(10개 사단•30개 연대) 61,820 15,570 2,800
6.25전쟁 관련 문서 공개 이전까지는 1945년 2월 얄타회담에서 미,영,소 3국 수뇌가 38선을 경계로 신탁통치안을 합의했다고 여겼다.
미국 국립문서기록관리청(NARA) 문서번호 (319-ABC File 1942-1948, NO.387), 케네디 정부 시절 국무장관을 지낸, 당시 정책과장補 딘 러스크 (Dean Rusk)의 냉전비망록 (내가 본 대로?)에 따르면 38선은 1945년 8월 10일 일본이 항복 의사를 표명한 당일 자정 무렵 소련이 한반도 전역을 점령하려 하자 전쟁부 전략정책단 정책과장 본스틸과 함께 급히 그은 군사적 저지선이었다. 소련도 미국의 의견을 인정하고 38선에서 진군을 멈췄다. 이를 군사적 편의론이라 한다.
하지만, 남북한 모두 남북 분단이 가시화된 시점부터 상대 지역을 '미수복 영토'로 보고 북한에서는 '북한을 먼저 공산주의화시켜 민주 기지로 삼은 뒤 남한을 점령해 공산주의화시킨다'는 민주 기지론을, 남한에서는 이승만 정권이 주장했던 북진 통일론을 주장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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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남한에는 전차가 0대, 전투기도 0대로 연습기만 10여 대가 있었던 반면 북한은 소련제 T-34 242대와 전투기 170여대를 보유한 상태. 당연히 김일성으로서는 적화통일의 구미가 당기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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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차 세계대전을 걱정했던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인지라 1.4 후퇴 당시 소련이 북한에 공군을 지원한 걸 미군이 눈치챘으나, 미군은 제3차 세계대전을 우려하여 이 공군이 소련군인 것을 알면서도 중공군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미국과 소련은 서로의 눈치를 엄청나게 봤다. 결국 김일성 혼자만의 야욕 하나 때문에 인류사에 크게 악영향을 끼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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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한국에서도 북한의 남침을 예측하기도 했다. 1949년 12월 17일 정보국이 상부에 올린 '연말종합적정판단서'인데, 놀라울 정도로 북한의 초기 작전을 예측하고 있다. 하지만 미국과 한국 정부는 이 보고서를 무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북한은 1949년 말까지 남침 준비를 완료했다. 적의 병력은 전차 150대, 항공기 200여 대, 각종 포 2000여 문으로 장비된 10개 보병사단 약 19만여명으로 판단된다. 적은 주공을 동두천-의정부-서울로, 조공을 개성-문산-서울, 춘천-원주, 속초-강릉으로 하여 선제공격할 것이다. 적의 기습 시기는 50년 3월경으로 예측되나 동북 지방의 중공군 출신 의용군 편입이 늦어질 경우 6~8월로 연기될 가능성도 있다. 적의 전차는 아군에 대한 결정적 위협이 될 것이며 공중 지원과 해상 게릴라의 상륙 침투를 병행할 것이다. 남침을 전후해서 무장 공비에 의한 남한 후방 교란 활동을 격화시킬 것이다. 적은 위장된 평화 정치 공세를 더욱 강화할 것이다.
이 보고서는 우파에서 간혹 이야기하는, 박정희가 작성했다는 문서다. 출처는 정재경이 쓴 한국전쟁사 115~116p. 참고.
그리고 6월 중순, 하순은 남한 지역의 농번기였고 당시에는 농업이 국가의 주력산업이었다. 실제로 인구의 60~70%가 농업에 종사하고 있었다. 한국군에서는 농번기에 장병들에게 모내기 휴가를 대대적으로 보내어 6.25 전쟁 개전 당시 한국 육군 전 병력의 3분의 1 가량이 휴가 상태였다. 물론 한국 정부나 국군이 바보라서 이렇게 휴가를 내보낸 건 아니었다.
1950년 2월에 총선거 일정이 그 해 5월로 결정되면서 한국군은 비상대비태세에 돌입했다.
당시만 해도 전후방을 가리지 않고 무장빨치산이 준동하던 때였고 3~4월에 걸쳐 전선에서 '위기설'이 퍼지고 있었던 시기다. 1950년 초반의 신문들을 찾아보면 이때까지도 빨치산 소탕작전으로 정신없던 모습을 볼 수 있다. 문제는 계속적으로 비상대비태세가 발령후 해제되지 않아 전군의 피로도는 심각한 수준에 달해 있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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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명칭에 관하여
미국을 비롯한 해외에서 부르는 'Korean War'의 번역된 명칭인 한국 전쟁 역시 국내에서 널리 사용된다. 위키백과에서는 이 명칭을 쓰고 있다. 한국 전쟁이란 명칭을 사용하는 데에는 대한민국(ROK) 역사상 본토에서 치른 사실상 유일한 전쟁이라는 점, (표면적으로는) 두 'Korea' 간의 전쟁이었다는 점,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학술적 명칭이라는 점 등의 이유가 존재한다. 반대측에서는 자국에서 일어난 전쟁을 외국식으로 불러야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반박한다. 그러나 현재 학술적으로는 '한국 전쟁' 이라는 표현이 "6.25 전쟁"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쓰이는 것으로 보인다.
6.25 전쟁은 한국 전쟁 발발일을 강조하여 북한의 남침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이라는 시각도 존재한다. 서방에서는 가끔씩 Korean war말고도 The forgotten war(잊혀진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2차 세계대전 이후 현재까지 가장 많은 미군 사상자가 난 전쟁인데도 불구하고, 베트남 전쟁과 이라크 전쟁에 묻혀 그리 알려진 전쟁이 아니기 때문. 물론 단순히 이런 이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 문단에 자세히 후술.
한편 6.25 사변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사변'은 선전포고 없이 다른 나라를 공격하는 것이다.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에는 '육이오 전쟁'과 '한국 전쟁'으로 올라와 있다. 옛날에는 남북전쟁이라고 불리기도 했지만 단어 자체가 1860년대 미국의 내전을 지칭하는 단어로 인식되는 경향이 강해서인지 요즘은 잘 안 쓰이는 추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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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주한UN군의 참전과 국제적 인식
당사국인 대한민국과 북한에 더해, 전투병을 파병한 참전국의 숫자로 보면 미국 이외에 영국, 프랑스,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그리스, 터키, 필리핀, 태국, 콜롬비아, 에티오피아,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캐나다, 남아프리카공화국으로 구성된 UN군 16개국과 중국의 총 17개국.
의료지원부대를 파병한 국가는 스웨덴, 인도 공화국,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체코슬로바키아 6개국이다. 여기서 이탈리아는 UN에도 가입하지 못한 상황에서 적십자 소속의 의료지원팀을 꾸려 파견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는 북한측으로 파병했다.
그 외에 물자 지원과 전투, 물자 협력국을 포함, 대한민국을 지원한 국가는 총 67개국이다.
6.25 전쟁은 한편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국가가 단 한 나라(대한민국)를 돕고자 지원한 것으로 기록된 전쟁이며 이에 따라 기네스북에 오른 전쟁이기도 하다. 당시 대한민국에 병력, 물자, 전후복구를 지원한 나라는 자그마치 67개국으로, 당시 세계 국가들 중 73%에 달한다. 이 중에는 아이티, 인도네시아처럼 별다른 이해관계가 없었거나 경제력이 낙후된 국가들조차 포함될 정도다. 특히 영국이나 프랑스 등은 이전에 2차 세계대전까지 타국의 침공을 당했던 경험도 있었기 때문에 이들 국가들은 그 때의 참상을 기억하면서 참전하였다고 한다.
7.3. 유엔과 국제 세계의 시각 및 활동
6.25전쟁은 사실상 거의 유일하게 유엔군이 전쟁의 한 쪽 당사자로 참전한 전쟁이다.
유엔이 성립한 후 개입한 전쟁이나 국제분쟁에서 유엔은 거의 예외 없이 평화유지군, 즉 양측의 성격이 어쨌건 간에 서로를 중재시키고 양측을 대신해 치안을 수호하는 '중재자' 역으로 참여한 반면, 6.25 전쟁에서만큼은 유엔군이 UN 깃발을 달고 북한 및 중공군을 상대로 전투를 수행하였다. 이것은 본 전쟁이 최초이자 거의 마지막이며 이후 벌어진 전쟁에서 유엔군이 한쪽을 위해서만 유엔 명의로 참전한 적은 없다. 베트남 전쟁, 걸프 전쟁, 이라크 전쟁에서도 예외는 아니다. '걸프 전쟁'이나 '리비아 내전'처럼 '안전보장이사회 승인'을 얻은 전쟁이라 하더라도 거기에 참여한 각 나라 군대들은 각자의 명의로 참전하였다.
- 유호 작사, 박시춘 작곡, 현인 노래, 전우여 잘 자라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 간 전우야 잘 자라
우거진 수풀을 헤치면서 앞으로 앞으로
추풍령아 잘 있거라 우리는 돌진한다
달빛어린 고개에서 마지막 나누어 먹던
화랑 담배 연기 속에 사라진 전우야
고개를 넘어서 물을 건너 앞으로 앞으로
한강수야 잘 있더냐 우리는 돌아왔다
들국화도 송이송이 피어나 반기어주는
노들강변 언덕 위에 잠들은 전우야
터지는 포탄을 무릅쓰고 앞으로 앞으로
우리들이 가는 곳에 삼팔선 무너진다
흙이 묻은 철갑모를 손으로 어루만지니
떠오른다 네 얼굴이 꽃같이 별같이
- 6.25의 노래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조국을 원수들이 짓밟아 오던 날을
맨 주먹 붉은 피로 원수를 막아내어 발을 굴러 땅을 치며 의분에 떤 날을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불의의 역도들을 멧도적 오랑캐를
하늘의 힘을 빌려 모조리 쳐부수어 흘려온 값진 피의 원한을 씻으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아 아 잊으랴! 어찌 우리 이 날을 정의는 이기는 것 이기고야 마는 것
자유를 위하여서 싸우고 또 싸워 다시는 이런 날이 오지 않게하리
이제야 갚으리 그날의 원수를 쫓기는 적의 무리 쫓고 또 쫓아
원수의 하나까지 쳐서 무찔러 이제야 빛내리 이 나라 이 겨레
~ 생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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