뭔 일이든지 첫 번째는 잘 잊혀지지 않고 기억에 오래 남는다. 나에게도 6월이면 계절병처럼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그러고 보니 그와 헤어진 지도 햇수로 10년이 넘었다. 사람이나 물건이나 10년을 넘기면 잊혀지게 마련이라고들 한다. 그런데 나에게 그 사람만은 그렇지 않다. 그는 성인이 된 뒤에 내가 만난 첫‘남자’이다. 그러니 쉽게 말해 나의‘첫사랑’이다. ‘첫사랑’이었기 때문에 이루어지지 않았는지 모르겠다.
그리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외로움이다. 보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다. 외로움도, 그리움도, 미움조차도 사랑이라고 했던가. 사람이 이 세상에 나와 돌아가는 그 순간까지 그 모두에 사랑이 있다. 그 사실을 모르고 살다가 다 지난 뒤에야 비로소 사랑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래서 나는 강산이 한 번 변한 이 쯤에도 외로움과 그리움에 그를 사랑한다.
6월이 되니 그가 생각난다. 그 해 6월은 유난히 더웠다. 학교 도서관은 에어컨을 늘 틀어놓기 때문에 더위를 피해 재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외부인들도 많이 찾았다. 점심을 먹고 리포트를 쓴다고 한참 애쓰고 있는데 옆자리에 앉은 남자가 내 어깨를 건드리며 말을 걸어왔다.
“저, 점심 먹었는지요? 점심 먹었다면 밖에 나가 차라도 한 잔 하실래 요?”
그 말을 듣고 속으로는 좋아죽으면서도 깜짝 놀라는 척을 했다. 겁은 나지 않았다. ‘척하기’는 억만금을 준다고 해도 못하던 순진했던 내가 그 때는 어디서 그런 연기력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내 가슴은 이 세상 모두를 다 가진 듯 ‘쿵쾅쿵쾅’ 두근반 세근반이 되어 있었다. 이 기분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고 싶었다. 사랑하는 애인으로부터 프러포즈 받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말로만 들었던 설레는 마음. 얄밉게 시간을 좀 끌면서 고민하는 척도 좀 하다가 나는 대답했다.
“흠, 좋아요, 그럼 데이트 신청한 사람이 쏘는 거죠?”
내가 다리가 불편한 걸 알았던지 에스코트(escort)는 확실했다. 운동장 벤취에 나가 내가 자리를 잡을 때 그는 자동판매기에서 커피와 우유를 뽑아 왔다.
그는 고향은 문경이고 아버지가 초등학교 교장 선생님이며 5형제 가운데 넷째라고 하였다. 대구에서 대학교를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여 발령을 기다리던 중이라고 했다. 서로 나이를 묻다가 내가 어떠한 힌트도 없이 정확하게 말해버리자 그는 깜짝 놀랐다.
“처음 만난 사람의 나이를 어떻게 그렇게 정확하게 맞힐 수가 있나요?”
장난기가 발동했다.
“제가 대학교 졸업하고 계룡산에서 3개월, 지리산에서 2개월 도(道)를 닦 았습니다. 많이 모자라지만 앞으로 저를 ‘사부님’으로 모셔야 될 걸 요?”
“네, 사부님. 오늘은 제가 커피 한 잔 올리겠습니다.”
그와 나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그날부터 우리는 만나면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게 공식적인 절차가 되었다. 우리는 서로 이름을 부르지 않고 그는 나를 ‘사부님’이라 부르고 나는 그를 ‘제자’라고 불렀다.
“제자! 여사부님을 잘 모시려면 밖에 나와 벤취에 앉을 때는 사부님이 앉 을 자리를 닦아주거나 손수건이라도 깔아줘야 하는 거라네.”
이렇게 으름장을 놓았더니 다음부터 그의 손수건을 깔고 앉는 건 사소한 일상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첫날 내가 그로부터 굉장히 대접을 받은 것 같다.
어느날 점심을 먹은 뒤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벤취에 앉아서 우유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참을 기다려도 그가 오지 않아 이상하여 뒤돌아보았다. 그가 조금 떨어진 데에서 나를 불렀다.
“사부님! 오늘 오후에는 이 성실한 제자와 자연과 만남의 시간을 가져보 는 건 어떠신지요?”
법대를 졸업했다고 하여 차갑다고만 생각했던 나의 고정 관념이 엎어진 날이었다. ‘뭔 꿍꿍이속일까?’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착한 사람임을 믿고 승낙했다. 내 다리가 불편한 걸 배려하여 학교 가까이 뒷산으로 갔다. 나무가 많아서 학교 주변과는 공기부터 달랐다. 시원한 바람이 온 몸을 휩싸 안았다. 중턱에 올랐을 때 그가 나에게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사부님!”
그의 음성이 보통 때와는 다른 분위기여서 나도 사뭇 긴장되었다.
“사부님은 몸은 좀 불편하지만 마음이 참 긍정적이고 올곧아 제 마음을 훔치셨습니다. 이 제자의 마음을 훔치셨습니다. 이 제자의 반쪽이 되어 주 시겠습니까? 결정적으로 제 마음을 움직인 것은 첫날 제 나이를 한 번에 맞히신 거였습니다. 저 또한 도가(道家) 분야를 공부하고 있던 터에 사부 님의 고속도로처럼 확 트인 도력(道力)에 반했다고나 할까요?”
그의 말을 듣자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나도 그가 좋았지만 ‘결혼(結婚)’이라는 큰 일을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인륜지대사(人倫之大事)인데 부모님께 여쭤 보고 답했으면 하는데요.”
들뜬 기분으로 부모님께 말씀을 드렸다. 몸이 불편한 데다가 아무런 사회 경험도 없는 숙맥(菽麥)이라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는 씁쓸한 말을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우리는 몰래 계속 만났다.
돌아보면 아쉬운 점은 학교에 오갈 때 늘 어머니가 승용차로 데려다 주셨기 때문에 비밀스런 연애를 못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버스도 같이 타고 그와 팔짱 끼고 군것질 거리를 입에 달고 거리를 걸어보고도 싶었다.
우리의 순수한 연애를 질투라도 했던가. 어머니께 들킨 것이다. 어머니는 거저 내가 살아있음에 감사했을 뿐이었으니,‘결혼’은 나에게는‘언감생심’이었던 게다. 일주일에 안경은 다섯 번 새로 바꿔 끼는 것은 기본이었으며(걸어가다 넘어지기 일쑤였으니까), 똥오줌도 내 스스로 못 가리는 형편이었다. 그러한데, ‘결혼’이라니, 가당키나 한 말이었던가?
‘제자’를 사랑하였지만,‘결혼’이라는 명목으로 제자에게 부담을 씌워주고 싶지 않았고, 아직은 때가 아님을 알고 거절했던 걸로 기억된다. 첫사랑이라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아니, 이루어지지 않아서 더 예쁜 추억을 간직할 수 있음에 제자는 물론이고, 점심과 차(tea)를 함께 먹을 수 있었던 식당, 어머니, 모두에게 감사하다.
어머니는 먼저 나에게 안 된다고 경고하셨고 그에게도 고맙다고 인사하셨다. 그렇게 우리의 드라마틱한 연애는 막을 내렸다. 짧은 날들이었지만 그는 내 생애에 소중한 추억을 만들어준 훌륭한‘제자’였음은 틀림없다.
벤취에 앉을 때면 엉덩이에 부스러기라도 묻을까봐 늘 손수건을 깔아주고 차를 마시며 나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었던 그가 생각난다. 지금 꿈을 펼치며 멋지게 살아갈 그에게 다시 한 번 고마웠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뒷풀이 쪼매해볼까나?♪
“제자! 애썼네. 고마워. 늘 대박, 알제?”
“이 말을 젤 듣고 싶어하지 않을는지?”
“사랑한데이, 알제?”
실데없는 착각도 잘 하시는 이지민작가:
‘제자도 “미투”라고 칼까나몰라?^^하하하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