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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들마을[1] 스크랩 모은공(茅隱公) 이오(李午) 선생과 고려동 사람들/더함안신문
바람산(이장희) 추천 0 조회 156 18.09.30 15:20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함안군이 주최하고 함안문화원이 주관하는 함안의 인물과 학문 일곱 번째 학술대회 <모은공(茅隱公) 이오(李午) 선생과 고려동 사람들>이 다가오는 12월 7일 오전 함안문화원 대강당에서 개최된다.
고려동은 고려 말기의 절사(節士) 모은 선생이 둔적은거(遯跡隱居)하면서 망복수의 (罔僕守義)의 표적으로 삼은 마을 이름인데, 곧 지금의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장내동(墻內洞)이다. 모은 선생은 고려 사재령 이일선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포은 정몽주, 묵은 이색 두선생의 문하에 종유하면서 의리의 학문에 독실하여 당세의 사람들에게 추앙을 받았었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국운이 이미 쇠진함을 보고는 벼슬하지 않았으며, 이내 고려가 망하자 여러 현인들과 송도 교외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망복수의의 결의를 표명하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산인면 모곡리에 터를 정해 은거하였디. 그는 자신이 끝까지 고려왕조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복거지(卜居地)주위 담장을 쌓아 이 담 밖은 신왕조(조선왕조)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 유민의 거주지인 ‘고려동’임을 명시하여 망복수의의 표적으로 삼았다.
한문중에서 600년 동안 조상의 정신을 계승하여 후손들이 서로 이어가면서 고적(古蹟), 유사(遺事)를 옛모습 그대로 전승되어 오고 있는 함안 출신 고려 말 불사이군의 충절 “모은공 이오 선생과 고려동 사람들”의 충절과 학문, 위대한 업적을 재조명하는 이번 학술대회에 참석하여 학문의 고장인 함안의 전통문화를 경험하는 자리가 되기를 바란다. /편집자주


모은 선생 고려동 약사(茅隱先生 高麗洞 略史)


1. 재령이문(載寧李門)의 세계(世系)


재령 이문의 시조(始祖)는 곧 경주(慶州) 이씨의 시조인 신라의 개국원훈(開國元勳) 표암공(瓢巖公) 이알평(李謁平)인데, 그가 처음에 진한(辰韓)의 표암(瓢巖)아래에 내려왔다는 전설로 인해 세상에서 표암공이라 일컫는다. 지금 경주의 남산 밑에 그의 유적이 있다.
그 후 몇 대를 지나 고려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우칭(李禹稱)이 재령군(載寧君)에 봉(封)해졌으니 곧 경주에서 분관(分貫)된 재령 이문의 시조이다. 황해도 서어산(鋤於山)에 그의 묘소가 있다.
재령군으로부터 몇 대 후에 공부상서(工部尙書) 이원영(李元英)과 영동정(令同正) 이근인(李根仁)을 지나 순성보조공신(純誠補祚功臣) 상장군(上將軍) 이소봉(李小鳳)에 와서 비로소 자손이 세계(世系)를 이루게 된다. 상장군의 장자(長子) 이일상(李日祥)은 관직이 중랑장(中郞將)에 이르고 차자(次子) 이일선(李日善)은 관직이 사재령(司載令)에 이르렀다.
사재령은 고려 공민왕의 외손으로서 조정에 출사하여 관직이 사재령에 이르렀다. 고려의 국운이 쇠진함을 보고는 가족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와서 경남 밀양부 서쪽 소음리(召音里)에 은거(隱居)하여 세상을 마치셨다.
아들 6인 이신(李申), 이술(李戌), 이축(李丑), 이오(李午), 이유(李酉), 이인(李寅)을 두었는데 장자 계은(溪隱) 이신은 공양왕(恭讓王)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으로 재직하면서 간관(諫官) 김진양(金震陽) 등과 함께 정도전(鄭道傳), 남은(南誾) 등의 죄상을 탄핵하다가 도로 박해를 당하여 곤장을 맞고 유배를 가다가 도중에 별세하였고, 넷째 아들 모은(茅隱) 이오는 성균관 진사(成均館進士)로서 신왕조(조선왕조)에 벼슬하지 않고 함안의 모곡리(茅谷里)에 가서 은거하기를 자청(自請)하였다. 그 밖의 여러 아들들도 또한 신왕조에 벼슬하지 않았다. 사재령공의 여러 아들 중에서 장자 계은 선생은 후손이 끊어졌고, 넷째 아들인 성균관진사 모은 선생의 후손이 가장 번성하여 경남의 함안, 진주지방과, 경북의 영해지방에 분포 거주하여 중심세력을 이루고 있다. 둘째 아들인 사정공 이술의 후손은 경북의 청도지방에, 셋째 아들인 생원공(生員公) 이축의 후손은 경남의 밀양지방에, 다섯째 아들인 처사공(處士公) 이유의 후손은 함안지방에 거주하고 있다.


2. 모은(茅隱) 선생의 절의(節義)상징인 고려동(高麗洞)


‘고려동’은 고려말기의 절사(節士) 모은 선생이 둔적은거(遯跡隱居) 하면서 망복수의(罔僕守義)의 표적으로 삼은 마을 이름인데, 곧 지금의 경남 함안군 산인면 모곡리 장내동(墻內洞)이다. 모은 선생은 고려 사재령 이일선의 넷째 아들이다. 그는 일찍이 포은 정몽주, 목은(牧隱) 이색(李穡) 두 선생의 문하에 종유하면서 의리의 학문에 독실하여 당세의 사림에게 추앙을 받았었다.
공양왕 때 성균관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국운이 이미 쇠진함을 보고는 벼슬하지 않았으며, 이내 고려가 망하자 여려 현인들과 송도 교외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서 망복수의의 결의를 표명하고는 남쪽으로 내려와서 함안군의 모곡리에 터를 정해 은거 하였다. 그는 자신이 끝까지 고려왕조의 유민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자기 복거지(卜居地) 주위에 담장을 쌓아 이 담 밖은 신왕조(조선왕조)의 영토이지만 담 안은 고려유민의 거주지인 ‘고려동’ 임을 명시하여 망복수의의 표적으로 삼았던 것이다.
후에 조선 태종 때 여러 번 나라에서 불렀으나 끝내 출사(出仕)하지 않았으며, 또 항상 그의 아들 개지(介智)에게 경계하기를 “너도 또한 고려왕조의 유민이니 어찌 신왕조에 벼슬할 수가 있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는 절대로 신왕조에서 내려주는 관명은 사용하지 말고, 또 내 신주도 이곳 ‘고려동’ 담 안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겨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러한 그의 유명에 따라 아들 개지는 끝내 벼슬하지 않고 한평생을 마치었다.
그러나 조선왕조의 왕권이 안정되자 장손인 근재(覲齋) 이맹현(李孟賢)은 세조 때에 출사하여 벼슬이 홍문관 부재학(弘文館副提學)에 승진되니 나라에서 서울에 제택(第宅)을 하사하게 되었다. 서울에 영주(永住)하게 된 맹현은 조부 모은 선생의 제택과 향사(享祀)를 둘째 아우 율간(栗澗) 이중현(李仲賢)에게 맡겼으며, 후에 중현의 큰아들 사직공(司直公) 이부(李玸)가 김해로 이주하게 되자 또한 선대의 종택과 향사는 아우인 덕고(德皐) 이무(李珷)에게 맡겼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모은 선생이 물려준 고려구기(高麗舊機)의 종택과 그 향사(享祀)는 덕고공의 후손이 대대로 계승 전수하게 되어 지금은 모은 선생의 20대손이고 덕고공의 17대손인 이세균(李世均)이 이를 보수하고 있다.
이 고려동 안에는 모은 선생이 복지정초(卜地定礎)한 고려구기의 종택과 또 손수 가장(稼檣)하여 자급자족을 도모했던 농지인 ‘고려전(高麗田)’과 은거소요(隱居逍遙)하던 장소인 ‘자미단(紫薇壇)’, ‘자미정(紫薇亭)’ 등 유적이 남아있는데, 이 유적을 지금까지 근600년 동안 역대의 후손들이 잘 전수하여 현재는 모은 선생의 20대손인 이세균(李世均)과 후손들이 이를 잘 수호하고 있다.
 
3. 문인(文人), 절사(節士), 유현(儒賢)의 배출


문인(文人)은 모은 선생의 손자 세분을 들 수가 있다.
장손 맹현(孟賢, 1436~1487)의 자(字)는 사성(師聖), 호(號)는 근재(覲齊)이다. 세조 2년에 생원과(生員科)에 합격하고 6년에 문과에 장원급제 하니 세조께서 그 의용(儀容)과 문화(文華)를 사랑하여 태종의 외손녀인 부정(副正) 윤오(尹塢)의 딸을 시집보내었다. 12년에 발영시(拔英試)에 발탁되어 문명(文名)이 세상에 알려졌다, 성종 8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 예문관 부제학(藝文館副提學)에 승진(陞進)되고 9년에는 외직으로 황해도 관찰사(觀察使)로 나갔다. 12년에 다시 홍문관(弘文館) 부제학에 임명되고 14년에 예조참의(禮曹參議)에 임명되었다. 공은 경학(經學)과 훌륭한 인망으로 임금의 총애를 받아 경연(經筵)에 입시(入侍) 했으며 문장과 필명(筆名)은 김수온(金守溫)?서거정(徐居正)과 한 시대에 나란히 높았다. 또 성품이 청렴결백하여 청백리(淸白吏)에 선록(選錄)되었다. 『실기(實記)』 2권이 있다.
둘째 손자 중현(仲賢, 1449~1508)의 자는 준성(遵聖), 호는 율간(栗澗)이다. 성종7년에 문과에 합격, 정언(正言)과 부수찬(副修撰)을 역임하고 21년에 통정대부에 승진되어 예조참의와 홍문관 부제학을 역임하였다. 연산군이 즉위함에 공은 권세 있는 간신이 나라를 더럽히는 죄를 논핵(論劾)했으나 말한 것이 채용되지 않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물러와서 세상을 마치려 하였다. 연산군 3년에 갑자기 영해부사(寧海府使)로 제수(除授)하니 마지못하여 부임하여 다스렸으며, 그 후에 양양부(襄陽府)에 일이 생겨 조정에서 특별히 공을 부사(府使)로 천거하니 공은 즉시 부임하여 임무를 완수하고 치적(治積)이 드러나 특별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진 시켰다. 중종 3년(1508)에 임지에서 별세 하셨다. 『실기(實記)』 3권이 있다.
넷째 손자 이계현(李季賢)의 자는 술성(述聖)이다. 품성이 온화하고 효우가 지극하였다. 일찍이 진사과에 합격 했으나 백형(근재공)과 중형(율간공)이 모두 고관(高官)이 되어 조정에 있었기 때문에 공은 돌아와서 어버이를 봉양하고 있었다. 학행(學行)으로 천거되어 장예원 사의(掌隸院司議)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절사(節士)로는 조선중기의 국난기(임진왜란시)에 의병을 일으켜 보국(報國)한 모촌(茅村) 이정(李瀞)?갈촌(葛村) 이숙(李潚)?관천(觀川) 이대형(李大亨)등 세 분을 거론할 수가 있으니, 고려 말 조선 초의 계은(溪隱)?모은(茅隱) 두 선생의 절의숭상의 기풍은 이러한 국난기에 와서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모촌 이정(1541~1613)의 자는 여함(汝涵), 호는 모촌이니, 모은 선생의 5대손이다. 어릴 때부터 명민하고 재국(才局)이 있었으며 남명(南冥) 조식(曹植)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에 임명되었는데, 선조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소모관(召募官)으로 의병을 일으켜 함안 군수 유숭인(柳崇仁)을 도와 진해, 창원등지에서 전공을 세웠으며, 정유재란 때에는 의령감사(宜寧縣監)으로서 경상우도병사(慶尙右道兵使) 김응서(金應瑞)와 함께 의령에 침입한 왜군을 격퇴시켰다. 후에 전공으로 청주(淸州)?상주목사(尙州牧使)와 창원대도호부사(昌原大都護府使)를 역임하였다. 문집 2권이 있다. 함안의 도림서원(道林書院)과 진주의 대각서원(大覺書院)에 향사(享祀) 되었다.
갈촌 이숙(1550~1615)의 자는 여징(汝澄), 호는 갈촌이니, 모은 선생의 5대손이고 모촌 이정의 아우이다.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에서 수업하였다. 어릴 때부터 자질이 뛰어나 문과 무를 겸비 했는데, 선조9년(1576)에 무과에 올랐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토벌 했는데, 때마침 의령의 의병장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가 왜적과의 싸움을 회피한 경상관찰사 김수(金睟)의 죄를 성토하다가 도리어 김수에 의해 박해를 당하게 되자 그는 곽재우의 충의(忠義)를 변호하여 구원해 주었으며, 초유사(招諭使) 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의 명으로 영산(靈山)을 수비하였다. 토왜대장(討倭大將) 정기룡(鄭起龍)과 합세하여 거창, 합천등지의 왜적을 격퇴시키고 합천군수, 군자감판관(軍資監判官)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때 정치의 문란함을 보고는 벼슬을 그만 두고 임하(林下)에서 소요자적(消遙子適)하였다. 함안의 도계서원(道溪書元)에 향사되었다.
관천 이대형(1543~1592)의 자는 태래(泰來), 호는 관천이니, 모은 선생의 5대손이고 모촌 이정의 재종제(再從第)이다. 그의 조부 사직공(司直公) 이부(李玸)가 함안의 모곡리에서 김해의 활천리(活川里)로 이주하였다. 그는 여러 번 향시(鄕試)에 응시했으나 뜻을 얻지 못했으므로 마침내 과업(科業)을 그만 두고 활천(活川)가에 재실(齋室)을 짓고 스스로 관천거사(觀川居士)라 칭호 하였다.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에 왜적이 부산진과 동래성을 연이어 함락시키고 김해성으로 몰려오자 부사 서예원(徐禮元)이 평소부터 이대형에게 강개한 대절(大節)이 있음을 알고 그를 청해 와서 적을 토벌해 나라를 구할 뜻을 말하였다. 그는 이를 수락하고는 아들에게 이르기를 ‘나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칠 것이니 너희들은 피난하여 선조의 제사를 끊지 마라.’고 부탁하였다. 마침내 장정 100여명을 모집하여 성 안으로 들어가서 수성(守城)의 책임을 맡게 되었다. 4월 17일에 적병이 성 아래로 몰려와 성을 포위하여 형세가 위급하게 되니 부사 서례원은 성을 버리고 도망가려고 하였는데, 이대형이 대의(大義)로써 그를 꾸짖어 도망가려는 것을 말리고는 군병을 단결시켜 힘껏 사수하였다. 적병이 들판의 보리를 베어 외호(外濠)를 메우고는 일제히 성을 넘어 들어오니 4월 20일 밤에 대형은 마침내 순국(殉國)하고 말았다. 그의 큰아들 이우사(李友社)도 성이 함락되었단 말을 듣고서 아버지의 시체를 찾으려 왔다가 또한 적병에게 살해되었으며 주익창(周益昌)에게 시집간 그의 질녀도 또한 적병을 만나 물에 빠져 죽었으니 한 가문에 삼강(三綱, 忠?孝?烈)이 병립했으므로 그 고을 이름을 삼방동(三芳洞)이라 부르게 된 것이다. 후에 병조참의(兵曹參議)에 증직(贈職)되었으며 같은 시기에 순국한 송빈(宋賓), 김득기(金得器), 유식(柳湜)과 함께 사충단(四忠壇)에 향사되었다.
유현(儒賢)으로는 조선 중후기 숙종(肅宗)대에 와서 경북 영해지방에서 학풍을 일으켜 퇴계(退溪) 이황(李滉)선생의 학통을 계승 발전시킨 영남 유학계의 태두(泰斗)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밀암(密庵) 이재(李栽) 두 선생을 거론할 수가 있다.
갈암 이현일(1627~1704)의 자는 익승(翼升), 호는 갈암이니, 모은 선생의 7대후손이고 근재 선생 이맹현의 5대후손이다. 그는 숙종 5년(1679)에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되어 지평(持平)에 발탁되고, 후에 예조참의(禮曹參判), 대사헌(大司憲)을 역임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승진되었다. 퇴계 선생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을 지지하고 율곡(栗谷) 이이(李珥) 선생의 기발리승설(氣發理乘說)을 반대하였다. 시호(諡號)는 문경(文敬), 저술은 문집 29권이 있다.
밀암 이재의 자는 유재(幼材), 호는 밀암이니, 갈암 선생의 셋째 아들이다. 학문에 전념하여 관직은 구하지 않았으므로 벼슬은 주부(主簿)에 이르렀다. 위로 퇴계학파의 정통인 학봉 김성일, 경당(敬堂) 장흥효(張興孝), 갈암 선생의 학통을 계승하여 아래로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에게 물려주어 영남 유학계의 중추(中樞)가 되었다. 문집 25권이 있다.
이상에서 모은 선생 이후의 문인?절사?유현의 배출에 대하여 그 대개(大槪)만 약술했는데 이러한 연원과 전통을 가진 재령이씨는 사환(仕宦)과 훈업(勳業)보다는 주로 절조와 학덕으로 경남의 함안, 진주지방, 경북의 영해지방에서 다른 성씨보다 뛰어나게 그 명성을 나타낸 분이 많았던 것이다. 또한 모은공 17세손 우산(芋山) 이훈호(李熏浩,1859~1932)의 문집 책판이 세계문화유산 유네스코에 등재되었다.
현대에 와서도 정관계에는 이규호(李奎浩, 전 문교부장관), 이정오(李正五, 전 과기처장관), 이득룡(李得龍, 전 농협중앙회장), 이재오(李在五, 전 국회의원), 이호웅(李浩雄, 전 국회의원) 등을 위시하여 많은 인사들이 정부의 각 부서에 활동 하였으며, 학계와 교육계에는 전통유학의 거유(巨儒)인 굴천(屈川) 이일해(李一海)선생과 국사학계의 중진(重鎭)인 이재호(李載浩, 전 부산대학교교수), 이병휴(李秉烋, 전 경북대학교교수)와 이수오(李壽晤, 전 창원대학교총장)외에 수십여 명의 교수와 교장들이 전국의 각 대학과 교육기관에서 후진들을 양성하였으며 또 양성하고 있다.
 
4. 고려동학(高麗洞壑)의 의의


세계역사를 살펴보더라도 한 왕조가 600년을 지속하기는 정말로 어려운 것이다. 고려왕조가 475년, 조선왕조가 519년, 미국의 건국역사도 200여년에 불과한데, 하물며 민가에 있어서는 어떠하겠는가?
600년 동안이나 조상의 정신을 계승하여 본지(本支)가 서로 이어가면서 고적(古蹟)?유사(遺事)를 최대한 옛 모습그대로 유지하였을 뿐 아니라, 중간에 끊어짐 없이 대대로 지키고 있다는 사실은 그 유례가 없다. 또한 이 고려동학을 유림에서는 ‘재령이씨 세장지(載寧李氏世庄地)’라 한다. 이 세장지를 일족이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고려 절신(節臣)이 살던 오랜 역사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또 집집마다 있는 주춧돌, 흔하게 야생하는 자미수(紫薇樹) 한 그루, 문중마다 있는 정자, 오래된 곳이면 흔하게 전설 같은 곳도 있을 수 있는 복정(鰒井)의 고사(故事)에 그치는 것도 아니며, 종가를 지켜온 이들 모두가 충효, 문장, 도덕으로 한 시대에 사표가 될 만한 인물들이었다는 데에 연유가 있다. 이를 뒷받침할 만 한 증거는 선현들의 유집(遺集)을 정독해보면 누구나 수긍할 수가 있다.
이 곳에 처음 복거한 고려 절신 모은 이오 선생의 국가민족에게 끼친 공노를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 연안(延安) 이병관(李炳觀) 선생은 모은 선생의 『실기(實記)』 「서문(序文)」에서 말하기를 ‘선생은 포은, 목은 양선생과 더불어 시대도 같고 덕망도 같아서 나라에 충성을 다하고 신왕조의 신하가 되지 않았으니, 이륜(彛倫)을 도와서 세운 그분의 공은 천지에 뛰어나고 일월처럼 빛나서 조선왕조의 충의와 도덕을 계도했으니 진실로 그 은혜를 잊을 수 없겠다.’고 했다.
대개 선현의 실기를 읽어보면 어느 문중이라도 충효의 조상이 없겠냐마는 전왕조의 국록을 먹지 않았음에도 신왕조에 와서 세 번 관직에 불러도 나아가지 않고서 ‘유황원이수총화(幽篁園裏數叢花), 윤색산촌적막가(潤色山村寂寞家)’ 또는 ‘창명야야영고월(滄溟夜夜迎孤月), 기국년년벽소휴(杞鞠年年闢小畦)’등의 시구를 음미하면서 일생을 살았으며, 후손도 역시 숭고한 정신을 이어받고 유지(遺志)?유훈(遺訓)을 계승하여 오늘날까지 선생의 뜻이 오히려 새롭게 이어지게 한데에는 남들이 쉽사리 이해하지 못하는 어떠한 철학의 간직됨이 없고서는 어떻게 유구한 세월동안 가세(家勢)에 관계없이 잘 보수할 수가 있겠는가.
조선말기까지의 고려동 세장지의 종택을 지켜온 주인(主人)들은 18세기 중반 일찍 세상을 떠난 한두 분을 제외하고는 앞서 기술한 바와 같이 충효?도덕?문장?행의에 있어 세상에 명망을 남겼고, 조선말기 이후 현재의 주인 양대(兩代)도 온고수신(溫故修身)의 군자인(君子人)이다. 고려동학내의 세장지는 약 7천 평으로 지손에게 까지도 분가대지(分家垈地)로 사용하게 하였으나 소유권은 분양하지 않았으며 새마을 사업의 마을 길 넓히는 데에 제공했으나 매각한 적은 없다.
시대는 고려, 조선, 왜정, 광복으로 바뀌었으나 이 세장지를 지켜온 정신은 일관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고려의 여향(餘香)이 물씬함을 느낄 만 하다. 이제 모은 선생의 자손 즉 본 동학과 연관된 호수(戶數)는 9천7백으로 추산된다고 하며 전체 재령 이씨의 9할이나 된다 한다. 거주지는 비록 전국의 도처에 분포되어 있으나 모두가 이곳을 고향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개인으로 단체로 방문하는 이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고려종택?고려석장(高麗石墻)?자미단?복정?자미정?율간정(栗澗亭)?효산정(曉山亭)?고옥민가(古屋民家)?고려동학이라 새겨진 표비(標碑) 등의 유적을 두루 살피고 고사(故事)를 되새기며, 이륜(彛倫)과 도덕, 충효의 유덕(遺德)을 마음껏 흠앙(欽仰)하고는 감회에 젖어 우리들로 하여금 반성하게 하며, 우리의 할 일이 무엇인가 또 자손에게는 무엇을 어떻게 전해야 할 것 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1978년 MBC의 ‘내 고향의 향기’ 방영시간에 ‘고려절신 이오 선생의 유적지를 찾아서’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후로 종친은 말할 것도 없고 일반 방문객의 걸음도 잦아지고 있다. 실향화(失鄕化)되어 가는 세태에 이런 고향을 가진 복(福) 된 후손들도 있다 하겠다. 정부가 국민에게 애향심을 환기시키려 함도 애향심이 곧 애국심과 직결됨에 연유함이요 충은 효의 정신이 바탕이 됨을 새삼 느끼게 한다.
   
                                                                                 [더함안신문(theham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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