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르면서 정들고 보내면서 아쉽고 위탁모 사랑으로 무럭무럭 크는 아이들, 입양될 때까지‘애정 듬뿍’
20여년간 100여명의 아이 길러낸 이희선씨
위탁모 경력 25년차인 이희선씨는 위탁모 부족으로 몇해전부터 두명의 아이를 돌보고 있다.
내일 모레 칠순을 바라보는 이희선(69) 씨는 한 달에 한 번, 등에는 6개월 된 세연이를 업고, 두 팔로는 4개월 된 설령이를 안고 힘겨운 외출을 감행한다. 그의 이런 외출 풍경은 20년째 한 번도 거르지 않고 이어지고 있다. 지난 1987년, 당시 아무 이유없이 뒷골이 당기는 등의 고통을 자주 느끼던 그는 위탁모를 하던 친구의 권유에 의해 처음‘위탁모’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씨는“뒷골이 너무 아파 병원에 가서 검사도 해봤지만 특별한 병명이 없었다”며“친구가 이 사실을 알고, 아이를 키우다 보면 좀 나아질지도 모른다는 권유에 시작했는데, 신기하게도 아이를 키우면서 두통이 싹 사라졌다”고 한다.
아무래도 아이에게만 매달려 있다 보니 다른 신경 쓸 일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고 전했다.
나이 50을 바라보면서, 이제는 힘든 일은 접고 취미생활을 하며 쉬어도 될 나이에 위탁모를 한다고 하니 처음에는 가족들도 걱정이 많았단다. 하지만 평소 아이를 좋아하는 이씨의 강력한 설득에 모두 동의해줬다고. 가족들의 우려와는 달리 아이를 데려온 뒤 이 씨의 건강도, 표정도 너무 밝아지고 집안 분위기 자체도 항상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는“요즘은 나보다 영감이 더 좋아한다”며“내가 지금 두 명이나 볼 수 있는 건 할아버지가 도와줘서 가능한 것이 지 아님 엄두도 못 낼 일”이라고 말했다. 특히“우리 애들 키울 땐 한번 안아주지도 않던 양반이 이렇게 달라질지 상상도 못했다”고 웃었다.
이렇게 지난 20여 년간 그의 손을 거쳐 간 아이들은 100명이 넘는다. 100여명을 일일이 다 기억할 순 없지만 유난히 기억에 남는 아이들도 있다고. 이희선 씨는“프랑스로 입양된 첫 아이랑, 심장병 수술을 받았던 민석이가 제일 기억에 남는다”고 털어놓았다. 특히 5개월 된 민석이가 수술을 받은 후 온 몸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던 기구 들을 보고는 거의 기함상태였다고 전했다.
그는“매일 병원에 할머니뻘 되는 사람이 지키고 있으니 다른 환아 부모들이‘엄마는 왜 안오냐’고 묻더라”며“사정을 얘기하고 난 후부터 같은 병실 사람들이 모두 잘해 줬던 기억이 난다”고 회상했다. 한 달이 됐든 두 달이 됐든, 아이의 입양 날짜가 정해지면 그 날부터 마음이 아려온다. 이 씨는“‘저 어린 것이 해외까지 나가서 어떻게 살아갈까’,‘ 차라리 국내 입양이라도 됐으면 좋으련만’, 뭐 이런 생각들이 들어 안타깝다”며“모쪼록 어딜 가서든 건강하고 행복하게 잘 살아주기만을 바랄 뿐”이라고 했다.
그는 또 위탁모에 대한 정부지원의 아쉬움도 드러냈다. 그는“예전에 비해 아이들을 위한 지원은 조금씩 나아지고 있지만, 위탁모에 대한 지원은 몇 년이 지나도 제자리걸음”이라고 지적했다. 현재 위탁모는 일일 1만6000원씩, 30일 꼬박해도 50만원이 채 되지 않는다. 이 또한 정부 지원금은 32만원으로, 나머지는 홀트에서 보조해주고 있는 것.
홀트아동복지회 아동양육팀 조남근 씨는“항상 위탁모들에게 미안하다”며“그나마 받은 지원금도 대부분이 아이들에게 고스란히 들어가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홀트에서는 아이들을 위해 매달 기저귀 2봉지, 분유 5통, 이유식 등을 보조해 주고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아이는 사랑으로 키운다는 김말례씨
인생의 반평생을 아이들 돌보는 일에 전념해 온 김말례씨.
그는 칠순이 넘은 나이지만 여력이 닿는데까지 아이들을 계속 보듬어 사랑으로 키우고 싶다고 한다.
한동네에서 이씨보다 먼저 위탁모를 시작한 김말례 씨(71). 그는 홀트아동복지회 이전에 동방사회복지회에서 10년간 위탁모를 해 온 베테랑이다. 지금 마흔을 갓 넘긴 막내아들이 여섯 살 되던 해부터 시작했으니 못해도 서른 해는 넘긴 듯하다. 젊은 시절 건축업에 종사하던 남편의 해외파견이 많아지는 틈을 타 시작하게 된 위탁모의 일이 그의 한평생에 자리잡을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
처음 동방사회복지회와 인연을 맺은 그는 10년간 꾸준히 아이들을 데려다 사랑으로 키워 입양 보내는 일을 반복했다. 그러던 중 10년차 되던 해, 돌보던 아이가 넘어져 팔이 부러지는 바람에 동방에서와의 인연이 정리됐다고.김 씨는“그 당시 동방에 서는 10년차 되는 위탁모를 해외에 보내주고 있었는데, 그 해가 딱 10년 되던 해라 입양 보낸 아이를 볼 생각에 기대가 컸다”며 “하지만 그 아이의 사고로 인해 동방에서 더 이상 위탁모를 할 수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10년 동안 수십 명의 아이를 돌보면서도 아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는데, 단 한 번의 사고로 그동안 자신이 해 온 일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아 가슴이 아팠다고 한다.
그 이후 잠시 아이 키우는 일을 접었다. 하지만, 10여 년 동안 아이와 함께 해 온 그에게 아이가 없는 생활은 행복하지 않았던 것. 그는 다시 홀트의 문을 두드렸고, 그러기를 올해로 25년째다. 지난 2003년에는 위탁모 15년차에 주어지는 해외방문도 다녀왔다. 지난 해외방문이 기억에 남는 것은 어릴 때 입양 보낸 아이가 군입대를 앞둔 19살의 청년이 되어, 길씨를 만나기 위해 6시간이나 되는 거리를 한달음에 달려와 준 것. 특히 이 아이와의 상봉 장면은 미국의 한 신문에 크게 실리기도 했다며 자랑했다.
35년을 이 일을 해왔지만 아이들을 보낼 때마다 눈물이 마를날이 없다. 처음이 힘들지, 나중에는 무덤덤해지지 않을까 했지만 처음이나 35년이 지난 지금이나, 아이들을 보낼 땐 가슴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다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현재 김씨는 6개월 된 아이를 키우고 있다.“ 입양날짜는 정해지지 않았지만 올해 안으로 결정될 것 같다”는 홀트 직원의 말에 그는 그새 눈시울이 불거졌다. 칠순이 넘었는데도 아이 키우는데 힘들지는 않은지, 가족들이 그만하라고 하지 않는지 궁금했다. 그는“자식들이 애를 낳아 키워주십사 했을때도‘아이는 부모가 키워야 한다’는 지론으로 거절했다”며“아이들도 처음에는 마음이 상했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손자, 손녀들도 아이들을 예뻐하고, 가족들이 조금씩 도와줘서 힘든 줄 모르겠다”고 말했다. 또한“아이를 보내고 난 뒤의 허전함은 또다른 아이로 채워야지, 다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특히 새롭게 시작하는 위탁모들에 대한 충고의 말도 빼놓지 않았다. 김 씨는“시작했으면 끝까지 해야지, 한두 명 키우다 말 것 같으면 시작도 하지 말라”며“인내심과 사랑 없이는 못하는 일이고, 아이들은 사랑을 많이 받을수록 올곧고 건강하게 자란다”고 덧붙였다.
초보 위탁모 길미숙씨… 알고보면 베테랑
베이비시터 경험이 풍부한 길미숙씨는 초보 위탁모이지만, 웬만한 베테랑 위탁모 못지 않다.
이들과 한동네 사는 길미숙(51)씨는 위탁모 입성 이틀째다. 지난 10여 년간 일반 가정집 아이들을 맡아 키우는‘베이비시터’를 해오던 그가 최근 그 일을 그만두자, 이 씨와 김 씨가 합심해서 홀트로 인도한 것. 워낙에 아이들을 예뻐하고, 아이들을 맡아 키운 경험도 많아 홀트로써는 최고의 적임자라, 다른 곳에 뺏기기 전에 선점하는 것이 중요했단다.
길씨는 동네에서 일명‘큰 엄마’로 불린다. 그동안 돌봐왔던 아이들이 모두 동네 아이들인데다‘큰엄마’라고 부르니, 자연히 주변의 아이들도 모두 큰엄마로 칭하게 됐던 것. 길씨는 가정집 아이를 키울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고 표현한다. 그는“일반 가정집 아이들은 몇 년을 키워도 항상 저녁이면 엄마가 와서 데려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선이 있다”면서“하지만 홀트 아이는 이틀밖에 안됐지만 24시간 내 품에서 먹고 자고, 씻기고, 내가 원하는 옷도 입혀주고 하다 보니 진짜 내 아기 같다”고 웃음을 지었다.
사실, 그의 살림살이도 봉사나 하며 지낼 넉넉한 형편은 아니다. 지금 당장 베이비시터를 한다해도 월 100만원은 너끈히 벌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사랑의 달란트를 불쌍한 아이들을 위해 써야겠다는 마음에서 시작한 것. 그가 위탁모를 결정하기까지는 그의 든든한 후원자인 아들, 딸이 있었다. 길씨는“직장 다니는 딸은 저녁때 들어오면 항상 같이 아기를 봐주고, 너무 예뻐한다”며“잠깐씩이라도 딸이 도와주니 힘이 된다”고 말했다. <16호 · 2009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