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대통령에 맞서온 대표적인 러시아 야권인사 알렉세이 나발니가 16일 수감중인 시베리아 야말-네네츠 제 3교도소에서 사망했다. 친(親)나발니 세력은 "크렘린이 그를 죽였다"며 러시아(교정)당국을 살인 혐의로 고발했고, 미국등 서방 측도 "크렘린이 나발니 죽음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나 크렘린은 "부검을 통해 그의 사망 원인이 분명하게 드러날 것"이라며 자제를 촉구했다.
나발니가 그동안 러시아 당국으로부터 받은 각종 박해와 위협, 압력 등을 감안하면, 러시아 당국도 그의 옥사가 극히 부담스러울 것으로 보인다. 그는 독일에서 독극물 중독 증상을 치료한 뒤 2021년 초 자진 귀국해 감옥으로 갔는데, 거기에서 사망했기 때문이다. 시기적으로도 푸틴 대통령의 5선이 유력한 대통령 선거(3월 15∼17일)를 불과 한 달 앞두고 그 일이 벌어져 더욱 그렇다. 나발니도 지난 2018년 대선 출마를 선언했지만, (수감된 이유 중의 하나인) 징역형 집행유예 선고에 의한 피선거권 자격 문제로 끝내 출마하지는 못한 바 있다.
수감중인 나발니의 최근 사진/사진출처:스트라나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 와 rbc 등 현지언론에 따르면 나발니는 16일 산책후 몸이 좋지 않다고 한 뒤 의식을 잃었다. 교도소 의료진이 즉각 달려갔고, 지역 병원의 구급차도 현장으로 급히 출동해 30분 이상 심폐소생술을 실시했지만, 그를 살려내지 못했다고 한다. 현지 병원 측은 "구급차가 도착하는데 7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의료진은 그의 갑작스런 사망 원인을 '혈전(색전)증' 문제로 보고 있다.
◇ 멀쩡하던 그가 왜 돌연사?
야말-네네츠 자치구의 공공 감시 위원회는 그가 사망하기 전에 나발니로부터 건강 관련 불만을 접수한 게 없다고 밝혔다. 나발니는 또 전날(15일) 화상으로 참석한 '코브로프' 시 법원의 공판에서 자신의 건강에 대해 어떤 불만도 제기하지 않았으며, (변호사 출신답게)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반박하고 해명한 것으로 보도됐다.(리아 노보스티 통신)
지난 수요일(14일) 면회한 그의 변호인 레오니드 솔로비요프도 "그때 모든 것이 괜찮았다"고 말했다. 그의 어머니 류드밀라 나발나야는 이날 페이스북에 "12일 교도소에서 아들을 만났다"며 "그는 건강하고, 쾌활했다"고 썼다.
그의 아내 율리아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전해진 지 몇 시간 후에 뮌헨에서 열린 국제 안보회의 연설에서 “이 끔찍한 소식을 믿어야 할지 모르겠다”며 “당국은 남편과 내 가족에게 한 일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교정당국의 거칠고 험한 처우가 나발니의 혈전색전증을 악화시켰다는 시각도 있고, 독극물로 그를 서서이 죽음으로 몰았다는 주장도 나온다.
나발니의 언론 대변인인 키라 야르미시는 14일 "그가 투옥 기간 동안 27번이나 '형벌 감방'에 들어갔다고 했고,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드리트리 무라토프 전 노바야 가제타 편집장은 "27번이나 형벌 감방에 간 것이 그를 죽음으로 몰았다"고 지적했다. 무라토프 전편집장은 "(그의 사망원인으로 꼽히는) 혈전색전증은 앉아있는 생활 방식과 저칼로리 음식, 신선한 공기 부족, 추위로 인해 악화했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나발니 지지자들은 그가 복역하는 동안 서서히 (독극물에) 중독됐다고 주장했다. 키라 야르미시 대변인은 지난해 봄 "나발니가 심한 복통을 앓고 있으며, 감옥 음식이 복통을 증가시켜 먹을 수가 없는데, 대체 음식 제공은 금지됐다"고 불만을 터뜨린 바 있다. 그녀는 "감옥에서 주는 음식은 그의 복통을 악화시킨다"며 "(독극물) 소량으로 그를 즉사시키지 않고, 서서히 고통을 받게 하고 건강을 망치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그녀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증거는 일체 제시된 바 없다.
나발니 사망 소식에 그루지야(조지아)에서 열린 반러시아 시위/영상 캡처
그간 보도된 외신에 따르면, 나발니는 수감중에 허리 통증을 약화하는 치료를 제대로 받지 못했고, 수시로 잠을 깨우는 교도관 때문에 수면 부족에 시달렸으며, '푸틴의 연설'을 계속 들어야 하는 등 힘든 수감 생활을 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달에는 팔도의 컵라면 '도시락'을 여유롭게 먹고 싶다며 식사 시간의 제한 폐지를 요구했지만, 거절당했다고 호소하기도 했다.
그같은 상황에서도 나발니는 변호사 등을 통해 텔레그램 채널에 자신의 신념과 주장을 알리는 글을 계속 올렸다. 그의 마지막 게시물은 사망 이틀 전인 14일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아내 율리아에게 보내는 (사랑) 메시지였다고 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푸틴 대통령이 나발니의 사망에 대해 보고를 받았다"며 "의사(부검 결과)가 모든 것을 알려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장은 "푸틴 (대통령)은 그 어떤 경쟁자도 가만히 두지 않으며, 그에게 러시아인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니다"며 "그와의 협상은 있을 수 없다. 그가 이해하는 유일한 언어는 힘"이라고 비판했다. 독일을 방문 중인 젤렌스키 대통령은 슐츠 독일 총리와 만나 “그는 분명히 푸틴 대통령에 의해 살해됐다”고 강조했다. 옌스 스톨텐베르크 나토(NATO) 사무총장은 "나발니의 죽음을 둘러싼 모든 의문이 규명되어야 하며, 러시아는 심각한 질문에 답해야 한다"고 말했다.
토니 블링컨 미 국무장관은 "나발니 사망 이후, 관심을 지닌 많은 국가들과 대책을 협의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바이든 미 대통령은 지난 2021년 "나발니가 감옥에서 사망하면 러시아가 재앙적인 결과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한 바 있다. 그는 "나발니의 사망은 푸틴 대통령의 책임"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미국은 이미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 맞서 쓸 수 있는 거의 모든 제재 조치를 취한 상태여서, 나발니 사망을 계기로 추가로 내놓을 카드가 마땅치 않을 것이라고 스트라나.ua는 전망했다.
◇ 나발니는 누구?
1976년 모스크바 인근 부틴에서 태어난 나발니는 모스크바의 '러시아민족우호대학'(Российский университет дружбы народов РУДН, 통상 '루데엔'이라고 부른다)에서 법학을 전공한 뒤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블로그를 통해 러시아 국영기업들의 비리를 비판하면서 소위 '인플루언스'가 됐고, 그 힘으로 2011년 '반부패재단'을 설립한 뒤 러시아 고위 관료들의 부정부패 폭로와 반정부 시위를 주도했다. 2013년 모스크바 시장 선거에서 세르게이 소뱌닌에 이어 2위를 차지하면서 정치적 영향력을 확대했다. 당시 정치권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야권의 대표주자인 보리스 넴초프 전 부총리가 2015년 크렘린 인근에서 괴한 총격으로 사망하자, 나발니는 '반 푸틴'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그리고 2018년 대선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끝내 출마하지는 못했다.
그는 그러나 친정부 지지자들로부터 '서방 정보 기관'에서 일하고 있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의 이름이 전세계 언론에 등장한 계기는 2020년 8월 독극물 중독 사건. 시베리아에서 모스크바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독극물 중독 증세를 보이며 쓰러진 그는 옴스크에서 비상착륙한 뒤 병원으로 후송됐다.
현지 병원 입원 이틀 후 나발니는 (집행유예 기간임에도) 크렘린의 특별 허가를 얻어 독일 베를린의 샤리테(Charité) 병원으로 옮겨졌다. 독일 의료진은 그의 증상을 '중독 징후'로 진단했고, 검사 결과 군사용 신경안정제(독극물)인 '노비촉' 흔적이 발견됐다. 하지만 독일 측이 구체적인 분석 결과를 러시아측에 전달하지 않아, 모스크바측으로부터 반발을 사기도 했다.
독일로 이송된 뒤(위), 극적으로 의식을 회복한 나발니/사진출처:SNS
그해 9월 7일 의식을 되찾은 나발니는 재활 치료를 받기 위해 독일에 머물렀다. 문제는 그가 독일에서 흑해 연안에 푸틴 대통령을 위한 '비밀 궁전'이 있다고 폭로하는 영상을 제작한 것. 그가 직접 출연한 폭로 영상은 '유튜브'에서 수천만 조회수를 기록했지만, 더욱 크림린의 눈밖에 나는 계기가 됐다.
그해 12월 말 러시아 교정당국은 9월 말에 퇴원한 나발니가 귀국하지도 않고, 당국에 신고도 하지 않았다며 집행유예 규정을 위반했다고 발표했다. 이에 나발니는 이듬해 1월 17일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모스크바행 비행기를 탔고, 모스크바 공항에서 체포됐다. 이후 그의 집행유예는 실형을 전환돼 수감됐다.
스트라나.ua는 "그의 귀국은 당시 모스크바에서 (우크라이나의 유로마이단)과 같은 대규모 시위를 조직하려는 계획의 일환으로 해석되기도 했다"며 "실제로 '푸틴의 비밀 궁전' 영상이 2,000만 조회수를 기록하는 등 분위기가 조성됐다"고 전했다. 나발니의 체포 소식에 러시아 전역에서는 그의 석방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지만, 당국에 의해 빠르게 진압되고 말았다.
나발니 석방 시위를 벌어던 상트페테르부르크 시민이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현지 매체 rbc 영상 캡처
당초 형량이라면, 그는 2023년 여름에 석방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러시아 검찰은 2022년 3월 기존 사기 사건에 법정 모독 혐의를 추가해 그를 기소했고, 9년 형이 선고됐다. 또 2023년 8월에는 극단주의 단체를 조직하고 활동한 혐의 등 4개 범죄에 대한 유죄 판결로, 19년이 떨어졌다.
블라디미르 지역의 교도소을 옮겨다니며 수감생활을 하던 나발니는 지난해 12월 북극권 교도소인 야말-네네츠로 이감됐다. 영구 동토층에 위치한 이 곳은 '북극 늑대'(Полярный волк)'로 불릴 만큼 험한 교도소다. 수감자 대부분이 중대 범죄를 저지르고, 20년 이상의 징역형을 선고받고 복역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 나발니의 우크라이나 사태 발언은?
나발니는 2011년 모스크바 반정부 시위에서 우크라이나 TV 채널과 가진 인터뷰에서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은 같은 민족"이라고 부르는 등 러시아 민족주의 성향을 드러냈다. 2014년에는 크림반도 합병에 반대했지만, 이후 "자신이 대통령이 된다면 크림반도를 우크라이나에 넘겨줄 생각이 없다"고 밝혔다. 당시 그는 "크림반도는 소시지가 든 샌드위치"라는 유명한 발언을 남겼다. 크림반도(소시지)와 러시아, 우크라이나는 분리될 수 없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그런 그도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 개시 후 태도를 바꿨다. 푸틴 대통령의 군사작전을 비판하고, 개전 1주년을 맞아 "러시아가 1991년 우크라이나 국경에서 군대를 철수하고, 배상금을 지불해야 한다"는 전쟁 종식및 평화안을 제안하기도 했다.
나발니와 아내, 딸, 그리고 아들/현지 매체 영상 캡처
그의 사망은 우크라이나에게도, 러시아의 야권에게도 큰 타격이라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그는 푸틴 대통령에 맞서는 다른 지도자들, 국내의 야블린스키 전야블로코당 당수나 해외에 있는 호도르코프스키 전 올리가르히(재벌)와 달리, 러시아는 물론 세계에서도 널리 알려진 반푸틴 인사라는 것이다. 가까운 시일내에 나발니와 같은 지명도와 정치력을 지닌 야권 인사가 나타나기 어렵다는 점도 그의 존재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고 했다.
3월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가 결국 불허된 야권 인사 보리스 나데즈딘이 앞으로 반푸틴 야권 세력을 결집할 수 있지만, 아직은 부족하다는 게 스트라나.ua의 평가다. 자칫하면 크렘린에 이용당할 수도 있다고 했다.
우크라이나와 서방 측은 나발니의 죽음을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을 강화하고, 러시아에 대한 추가 제재를 가하는 명분으로 활용하겠지만, 공교롭게도 그의 사망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유럽 순방에 맞춰 일어났다는 점에서, 러시아 일각에서는 소위 우크라이나측의 '음모론'도 제기됐다. 격전지 아브데예프카(아우디우카)의 함락에 따른 우크라이나의 부정적인 시각을 다른 곳으로 돌리기 위해 모종의 '작전'을 꾸몄다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나발니의 죽음도 크렘린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보내는 경고라는 분석이 설득력 있게 들린다.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러시아 민족주의 포퓰리즘 모험가이자 용병 단체 '바그너 그룹'을 이끈 예브게니 프리고진이든, 서방의 지원을 받는 민주주의 투사 나발니이든 모두 결과는 하나뿐, 죽음"이라는 게 스트라나.ua의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