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답사 5> 낙선동 4.3 유적지 - 20. 06 .06.
1948년 11월 20일 선흘리가 초토화작전으로 불타버리자 마을 주민들은 인근 선흘곶의 자연동굴이나 들판에 움막을 짓고 살았다. 그러나 은신했던 굴이 잇따라 발각되면서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미리 해변마을로 소개 내려간 주민이나 나중에 야산에 은신했다가 붙들려 온 주민들 중에도 도피자가족 등의 갖은 이유로 희생을 당한다. 그런 세월을 딛고 살아남은 주민들이 1949년 봄이 되자 낙선동에 성을 쌓고 집단 거주했다. 이러한 돌성은 당시 소개된 후 재건하는 산간마을은 물론 해변마을까지 무장대의 습격을 방비한다는 명분으로 제주도 대부분 마을에 축성을 했다. 즉 주민들과 유격대와의 연계를 차단하고 주민들을 효율적으로 감시․통제하기 위해 만들었던 전략촌의 한 유형이었다.
1949년 4월 성이 완공되자 선흘리 주민들은 겨우 들어가 잠만 잘 수 있는 함바집을 짓고 집단적으로 살았다. 일종의 수용소나 마찬가지였다. 성밖 출입도 통행증을 받아야 가능했고 밤에는 통행금지였다. 이 당시 마을 주민 중 젊은 남자들은 무장대 동조세력이나 도피자가족으로 몰려 이미 많은 희생을 치른 상태였다. 그나마 살아남은 청년들은 1950년 발발한 6․25 때 대부분 자원입대 했기 때문에 성을 지키는 보초는 16살 이상의 여성과 노약자의 몫이었다. 그들은 낮엔 밭에서 일하고 밤엔 성을 지키는 고단한 생활을 이어갔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경찰파견소 주둔 경찰의 먹을거리를 마련하느라 고초를 겪었다. 또 노인들이 보초를 잘못섰다고 파견소 경찰한테 폭행당하는 일이 빈번했다. 성을 쌓아 보초를 섰지만 1950년 가을까지 산사람들이 가끔 성 위로 나타나서 연설을 하고 새벽닭이 울 때가 되면 사라지곤 하다가 더러는 토벌대의 수류탄에 맞아 숨지기도 했다.
선동성은 4․3 당시 축조된 성 가운데 원형을 가장 잘 보존하고 있는 유적 가운데 하나이다. 일부는 허물어지고, 일부는 과수원의 경계표시를 위해 옮겨서 쌓기는 했지만 전체적으로 원형을 복원하는데는 무리가 없다고 판단, 2007년 제주도에 의해 복원되어 관리중에 있다.
<출처: 제주4.3연구소, 『4.3유적 Ⅰ』>
주민들이 낙선동 성에서 나올 수 있었던 시기는 1954년 통행제한이 풀리면서 원래 선흘1리 중심지역이었던 본동에 마을이 재건되었는데, 이 역시 주민들의 협동심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주민 모두가 동원되어 땀과 노력으로 마을이 재건되고, 현재 마을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