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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새바위 성지→ 수리치골 성모성지 →청양다락골 성지 →갈매못순교 성지→공주한옥마을(숙소)
28.4Km 40.9Km 29.1Km 80.1Km
7. 수리치골 성모성지
수리치골은 박해 시대 교우촌의 하나이다.
당시 공주 지방에는 국사봉(國師峰)을 중심으로 둠벙이, 용수골, 덤티, 진밭, 먹방이 등
여러 군데에 교우들이 은거지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수리치골이 가장 깊숙하고 넓어 많은 교우들이 모여 살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리치골이 특히 의의를 갖는 것은
김대건 신부가 새남터에서 순교한 후 안성 미리내에 안장될 무렵인
1846년 11월 2일 페레올 고 주교에 의해 이곳에서 한국에서는 처음으로
성모 성심회라는 신심 단체가 구성되어
박해받는 한국 교회와 민족을 성모님께 봉헌하였던 곳으로
공주 지방의 신앙 형성에 공헌을 했다는 점에서 한국 천주교회의 의미 깊은 사적지이다.
현재 이곳에는 성모 성심회의 뜻을 계승하는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의 총원이 자리하고 있다.
성모 성심회는 원래 1836년 프랑스 파리에서 창설된 신심 단체로
창설자는 파리의 '승리의 성모 대성당' 주임이던 데즈네트 신부이며,
본부는 '승리의 성모 대성당'에 있다.
이 회의 목적은 성모 성심을 특별히 공경하고 성모 성심의 전구를 통해
죄인들의 회개를 하느님께 간구하는 데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84년 5월 6일 명동 성당에서
"페레올 주교님이 1846년 무서운 박해하에 공주 땅 수리치골에서 이 나라와 교회를
요셉 성인과 공동 주보이신 성모께 조용히 봉헌했다."고 상기시켰고,
다른 여러 교회 내 잡지 등에서도 "한국에 있는 모든 성모 마리아의 단체들에게
수리치골은 하나의 성지가 된다."며 "한국에서 처음 공식적으로 인정된
마리아 신심 단체가 그곳에서 생겨났고 티 없으신 성모 마리아 성심에 대한 신심도
이곳에서 시작됐다."고 말한다.
이런 여러 가지 이유로 수리치골은 한국 교회의 사적지로서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페레올 고 주교는 성 김대건 신부에게 신품성사를 준 분이다.
현재 미리내 성모 성심 수녀회가 성지를 관리하고 있다.
감추어진 공소·본당의 중심지한국 천주교회는 초기부터 성모 신심이 유달리 강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신심은 1835년 말 이래 프랑스 선교사들이 입국하면서 더욱 깊어졌다.
특히 제2대 조선교구장 성 앵베르(Imbert, 范世亨) 주교는
1838년 12월 1일에 조선교구의 주보를 성모 마리아로 모시게 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하였으며, 교황 그레고리오 16세는 이를 허락하여 1841년 8월 22일에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마리아'(聖母無染始孕母胎)를 주보로 정해 주었다.
사실 프랑스 선교사들은 박해 가운데서도 조선 교회가 유지되어 나가고
자신들이 계속 이땅에서 활동할 수 있게 된 것을 성모님의 은덕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이에 감사하기 위하여 성 다블뤼 신부와 프랑스 선교사들은
1846년 11월 2일 공주 '수리치골'(신풍면 봉갑리)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립하고,
박해받는 조선 교회를 보호해 달라고 전구하게 되었다.
이 회의 설립 동기와 과정에 대하여 교회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설명되어 있다.
선교사들은 성모 마리아께 대한 감사의 표시로
파리 '승리의 성모 성당'에 본부를 둔 '성모 성심회'를 조선에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곤란한 것은 이 계획을 실천에 옮기는 데 적합한 장소를 찾아내는 일이었다.
당시 그들에게는 경당(經堂)이 없었으므로 많은 신자들이 모이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결국 그들은 외딴 곳에서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한
신입 교우 가족이 사는 조그마한 오막살이를 골라 잡았다.
여기에서 그들은 1846년 11월 2일에 성모 마리아와 새로운 결합을
튼튼히 하는 것을 기뻐하는 몇몇 신자들 앞에서 성모 성심회를 창설하였다
(샤를르 달레, [한국 천주교회사] 하, 136-137면)
8. 청양다락골 성지
청양 다락골 성지는
‘땀의 순교자’ 최양업 신부와 그의 부친인 최경환 성인이 탄생한
유서 깊은 교우촌이자 무명 순교자들의 무덤이 줄지어 자리한 곳입니다.
마을 뒷산 양지바른 산등성이에 무명 순교자들의 묘소와 묘비들이
여러 줄로 서 있는데 누구의 무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다만 1866년 병인박해 당시 홍주 감영에서 순교한 교우들의 시신을
밤을 틈타 엄중한 감시를 뚫고 빼내어 최씨 종산인 이곳에
안장했다고 구전을 통해 전해지고 있습니다.
대 성당에는 팔 없는 예수님 상이 있다.
두 팔이 잘려 나간 몸통만 남은 십자가상은 제 2차 세계대전종전 후 폐허가 된
독일 슈바르츠발트 지역의 한 성당을 재건하던 도중에 발견되었다고 한다.
증조부 때부터 최양업 신부 일가가 살아온 신앙 못자리인 청양 다락골 성지에는
최양업 신부 생가터인 새터와 병인박해 순교자 37위의 줄무덤이 있다.
칠갑산 굽잇길을 켜켜이 돌아 충남 청양군 화성면 농암리에 들어서면
다락골이라는 고즈넉한 시골 마을이 나온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일군 교우촌이다.
다락골에는 가경자 최양업(토마스, 1821~1861) 신부의 생가터인 ‘새터’와
150년 전 병인박해 때 홍주 감영이나 공주 황새바위에서 순교한
무명 순교자들이 묻힌 ‘줄무덤’이 성지로 조성돼 있다.
홍주 감영(지금의 홍성군청)에서 20여㎞ 거리에 있는 이 마을은
해발 791m의 오서산에 둘러싸여
형세가 마치 누각의 기둥 같아 ‘다락골’이라 불렀다.
박해자들의 근거지인 감영으로부터
걸어서 반나절 길에 있어 근황 파악에 쉽고,
앞은 틔어 있어 감시 또한 용이하며,
주위가 험한 산이어서 피신하기 좋아
교우촌으로서는 천혜의 입지 조건을 가진 곳이다.
최양업 신부 집안의 신앙 내력은 최 신부의 조카 최상종(원선시오)이 쓴
「최양업 신부 이력서」와 「최우정 바실리오 이력서」,
최 신부의 넷째 제수 송아가타가 구술한
「송아가타 이력서」를 통해 비교적 상세히 알 수 있다.
최양업 신부는 경주 최씨 최치원(崔致遠)의 41대손이며
조선 시대 평정공신(平定功臣)으로
이조판서(吏曹判書)를 지낸 최확(崔確)의 11대손이다.
그의 부모는 성 최경환(崔京煥, 프란치스코)과 복녀 이성례(李聖禮, 마리아)이다.
둘은 장남인 양업과 의정(義鼎, 야고보), 선정(善鼎, 안드레아), 우정(禹鼎, 바실리오),
신정(信鼎, 델레신포로), 2살 때 옥사한 막내 스테파노 등 6명의 자녀를 두었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서울에서 다락골로 이주해
‘새터’를 이룬 때는 1791년 진산사건 이후이다.
최 신부 집안에 처음으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인 이는
증조부 최한일(崔漢馹)이다.
그는 동생 최한기(崔漢驥)와 함께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
정조 재위 11년 되던 해인 1787년 서울 본가에서 세례를 받았다.
그 후 최한일은 경주 이씨와 혼인해 외아들 인주(仁柱)를 둔 채 사망했다.
최 신부의 증조모인 경주 이씨는
1791년 박해가 일자 화를 피하려 12살 된 아들 인주를 앞세워
충청도 홍주 누곡(樓谷)이라 불리던 청양 다락골로 숨어들었다.
그리고 최한기 집안은 강원도 홍천으로 피신했다가
여러 순교자를 배출한 후 지금의 풍수원에 자리했다.
이같은 최상종의 증언과 달리
최양업 신부는 조부 최인주가 1791년 박해 때 체포돼
많은 고초를 받은 후 석방된 후 다락골로 이주했다고 한다
(최양업 신부의 8번째 서한 중에서).
경주 최씨 집성촌
다락골에는 경주 최씨들이 오래전부터 대를 이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화숙공파의 족보와 묘를 참조하면
적어도 1600년대 초반부터 이곳에 최씨들이 살고 있었다.
경주 최씨 집성촌에 정착한 최인주는 다락골에서 농사 품팔이를 하고,
경주 이씨는 가을걷이 품앗이와 바느질 품을 팔아 생활했다.
이렇게 생활한지 1년도 안 돼 둘은 초가를 마련하고 그나마 안정적으로 정착하게 된다.
“가세가 날로 늘어 불과 수십 년 내에 몇백 석을 추수하므로
남들이 말하기를 천석 추수는 하리라 했다”(「최바실리오 이력서」 중에서).
그렇게 4~5년이 지난 후 최인주는 어머니 이씨 부인과 함께
다락골에서 700여m 떨어진 지금의 새터로 옮겨
주인 없는 버려진 땅을 개간하며 살림살이를 늘렸다.
차츰 이웃이 늘어 교우촌을 이루고 이름도 ‘새터’라 불렀다고 한다.
최인주는 이곳에서 이존창 집안의 딸인 경주 이씨와 혼인해
영설(榮說), 영겸(榮謙), 영눌(榮訥) 3형제와 네 딸을 낳았다.
그중 막내 영눌이 최 신부의 아버지인 최경환 성인이다.
최경환은 15살 되던 해에 새터에서 이성례와 혼인했다.
이성례는 이존창의 사촌 누이인 이 멜라니아의 조카 딸이다.
이 멜라니아는 김대건 신부의 조모다.
따라서 최양업과 김대건은 진외 6촌 간이 된다.
결혼 3일 후 최경환은 인사차 처가에 갔는데 처가 식구들이
“구교우 집안사람이니 교리를 듣자”며 청했다.
사실 최경환은 교리에 밝지 못했다.
집으로 돌아온 그는 즉시 며칠 밤을 새워
「칠극」을 다 외우는 등 교리를 익히는 데 전념했다.
“(부친) 프란치스코는 천성적으로 진정한 신앙의 실천자였고,
정직하고 순박한 성품을 타고났습니다.
그는 소년 시절부터 세속의 오락을 가벼이 여기고
오로지 천주교 교리를 듣거나 읽는 것만을 즐거워하였습니다”
(최양업 신부가 1851년 10월 15일 절골에서 르그레즈와 신부에게 보낸 서한 중에서).
최양업 신부 생가터.
커다란 감나무가
켜켜이 이어온 최양업 신부 일가의 신앙 내력을 증언하고 있다.
최양업도 이곳 다락골 새터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최경환은 나이가 들면서 가족의 신앙심이 냉담해지는 것을 보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그래서 여러 번 부모들과 형제들에게 고향과 재물을 버리고
마을을 떠나서 영혼을 구원하기 편한 곳으로 이사하자고 제안했다.
가족들이 그의 말을 듣지 않자 최경환은 긴 편지를 양업에게 주면서
자기가 떠난 후 엿새 되는 날에 어른들에게 전해 주라고 일렀다.
그리고 교리에 더 밝은 신자들을 찾아 집을 나갔다.
서울로 이사했다 강원도 등 거쳐 과천에 정착
최경환이 사라지자 집안에 난리가 났다.
가족들이 당황해 하자 양업은 아버지가 준 편지를 내보였다.
삼촌들이 그 편지를 읽고 찾아 나서 그를 데려왔다.
그러고 나서 가족 전체가 만장일치로 합의해
고향과 친척, 재산을 모두 버리고, 25명이나 되는 전 가족이
서울 낙동(지금의 회현동)으로 이사했다.
최경환 일가는 다시 이곳을 떠나 강원도를 거쳐 부평으로 이주한다.
최양업이 신학생으로 선발된 것이 이곳 부평에서 살 때였다.
이후 최경환은 다시 과천 수리산 뒤뜸이(현 경기 안양시 안양3동)로 옮겨
정착하게 된다.
다락골 새터는
17세기 초반부터 360여 년간 경주 최씨네가 산 집성촌이던 청양 다락골은
박해를 피해 서울에서 이주해온 최양업 신부 일가가 증조모, 조부모, 부모,
최 신부 형제까지 4대에 걸쳐 새터를 이루고 살던 곳이다.
최양업 신부 일가가 이룬 이 새터는 교우촌으로 성장했다.
1838년 기해박해 때는 모방ㆍ샤스탕 신부가 이곳에서 피신해 있다가
앵베르 주교의 권고로 자수했다.
또 다락골 출신의 최해성(요한)과 최대종(요셉)도 두 신부와 같은 시기에 체포돼 순교했다.
병인박해 때 관원들이 이 마을을 불사른 후 교우촌 기능이 쇠락해졌다.
하지만 다락골 새터는 최양업 신부 일가의 신앙의 못자리로 성인과 복녀, 가경자
각 1위를 배출한 성지로 순례자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9. 갈매못 순교성지
갈매못 지명의 유래
갈매못 성지는 충남 보령시 오천면 영보리에 소재해 있으며,
보령시의 북서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천면은 20여 개의 유인도와 48개의 무인도가 속해 있다.
‘오천’(鰲川)은 자라 오(鰲)에 내 천(川) 자가 어우러져 이루 어진 이름이다.
즉, ‘오천’이라는 명칭은 오천을 비롯한 천수만(淺水灣) 일대의 지형이
마치 자라와도 같다고 하여 유래되었으며,
영보리의 ‘영보 (永寶)’는 말 그대로 영원한 보물이 있다는 뜻이다.
갈매못은 예로부터 성지가 속해 있는 영보리 마을 뒷산의 산세가
‘목마른 말이 물을 먹는 모습’과도 같은 ‘갈마음수형(渴馬飮水形)의 명당이라 하여
‘갈마무시’, ‘갈마연’, ‘갈마연동(渴馬淵洞)’이라 불렸던 곳이다.
그러므로 갈매못은 갈마연(渴馬淵)에서 온 이름이다.
그 이름만으로도 영적인 곳이다.
이제 목마른 말이 아니라 지친 현대인들이 생명의 물을 마시는 생명의 땅이기 때문이다.
오천의 역사
갈매못 성지 인근에 있는 오천항은 바다 양면에 있는 산이
방파제 역할을 해주기 때문에 아무리 심한 폭풍우에도 피해가 없고, 또 수심이 깊어
간만의 차로 인해 선박의 통행이 전혀 불편하지 않은 서해안의 천혜의 항구이다.
오천항은 이미 백제 때부터 회이포라는 항구로 이용되었으며,
통일 신라 당시에는 당나라와의 교역항구로서 이름이 높았고,
고려로 접어들면서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오천항 일대를 지키는 군선이 머물렀던 곳이다.
오천에 수영(水營)이 설치된 것은 조선조 때이다.
조선조 당시 우리나라에는 바다를 지키는 3개의 수영이 있었다.
충무의 경상 수영, 여수의 전라 수영, 오천의 충청 수영이다.
각 수영에는 수군절도사를 상주시켰으며, 바다를 지키는 군영이 함께 있었다.
오천에는 조선 태조 5년(1405년)에 수군첨절제사(水軍僉節制使)가 자리하면서
처음으로 군영이 설치되었고, 중종 4년(1509년)에
서해안 방어 기지로 쌓기 시작한 오천성은 무려 16년간에 걸쳐 축성되었다.
높이 3m, 길이가 3,000m나 되는 오천성에는 4개의 성문이 있었고,
정3품관의 수도절도사가 상주하였다.
오천항은 군선 100여 척이 정박하고, 수군도 3,000명이 항상 주둔하였던 군항이었다.
현재는 성벽 일부와 충청 수군절도사가 주둔했던 장교청 건물과 진휼청만이 남아 있다.
샤를 달래 신부의 ‘한국천주교회사’에서는 갈매못 성지를
“형장(刑場)으로 택한 곳은 바닷가 모래사장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그 형장은 바로 수군들의 훈련장이었다.
갈매못이 형장(刑場)이 된 이유
첫째, 외연도(外烟島)와의 연관성 :
외연도는 보령시에 속해 있는 70여 개의 섬들 중 가장 멀리 있는 섬으로서
1846년(현종12년) 6월에 프랑스 함대 세실 사령관이 3척의 군함을 이끌고
외연도에 정박해서 기해박해 때(1839년)에 앵배르, 모방, 샤스탕 신부 등
3명의 프랑스 선교사들을 살해한 책임을 묻는 편지를
상자에 남겨 놓고 돌아간 적이 있었다.
이 사건을 조정에서는 조선 영해 침입 사건으로 간주하여
당시 옥중에 있던 김대건 신부의 처형이 앞당겨졌고,
1866년 3월 30일에는 흥성 대원군이 서양 오랑캐를 내친다는 의미에서
세실함장이 침범했던 외연도에서 가까운 오천의 수영을 택하여
다블뤼 안 안토니오 주교를 비롯하여 오메트르 오 베드로 신부,
위앵 민 마르티노 루카 신부, 황석두 루카, 장주기 요셉 등 5명을 끌고 와
외연도를 바라보고 목을 쳐서 처형하게 하였던 것이다.
둘째, 고종의 국혼 :
병인년 3월은 고종의 국혼이 한 달 밖에 남지 않았었다.
당시 궁중에서는 무당들을 불러 점을 친 결과 국혼을 앞두고
한양에서 사람의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국가의 장래에 이롭지 못하니,
사형수들을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250리 밖으로 내보내어
형을 집행케 하라는 무당의 예언에 따라,
오천의 충청수영으로 보내어 군문효수하라는 명이 내려졌던 것이다.
이곳에서는 1866년 병인박해(丙寅迫害) 때 제5대 조선교구장인
다블뤼(Daveluy, 安敦伊)주교, 오메르트(Auma tre 吳), 위앵(Huin, 閔) 신부,
다블뤼 주교의 복사이자 회장인 황석두(黃錫斗, 루가)와 회장이요
배론 신학당의 집주인인 장주기(張周基, 요셉)등 5명이
군문효수(軍門梟首)형을 받고 순교하였다.
이중 다블뤼 주교는 1845년 조선에 입국하여 활동하다가 보좌 주교로 성성되었으며,
제4대 교구장 베르뇌(Berneux, 張敬一) 주교가 순교하면서 1866년 3월 7일
교구장이 되었으나 4일 만인 11일에 충청도 내포(內浦)지방에서 체포되었다.
이때 그의 복사로 활동하던 황석두가 함께 체포되었고, 이어 인근에 피신해 있던
오메르트 신부와 위앵 신부가 더 이상 신자들의 피해를 입지 않도록 하려는 생각에서 자수하였다.
이들은 모두 서울 포도청으로 압송되어 두 세 차례 신문을 받고
3월 23(음 2월 7일)에 군문효수형을 받았는데, 이때 충청도 제천(堤川)에서 체포되어 온
장주기도 신문을 받고 이튿날 같은 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이 무력 궁중에서 고종비(高宗妃)의 간택이 예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들을 서울이나 그 부근에서 처형할 수 없었다.
이에 조정에서는 그들의 처형지를 보령 수영으로 결정하였고, 이에 따라
이들 다섯 명을 그곳으로 이송되어 성금요일인 3월 30일(음 2월 14일)에 순교하였다.
이 중 황석두의 유해는 곧 가족들에 의해 거두어졌고,
나머지 네 유해는 3일 뒤 형장의 모래사장에 묻혔다가 6월 초 신자들에 의해
홍산(洪山) 남포의 서들골로 이장되었으며, 1882년 3월 블랑(Blanc) 신부의 지시로 발굴되어
일본 나가사키(長崎)로 옮겨지게 되었다.
그리고 1894년 다시 조선으로 옮겨져 1900년 서울 명동 성당에,
1967년부터 절두산 순교자 기념관 지하 성당에 안치되었다.
한편 이들 다섯 명의 순교자들은 모두 1984년에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갈매못 순교터는 1975년 9월 대천 본당 주임으로 있던
정용택(鄭鏞澤, 요한) 신부에 의해 확인되어
그 자리에 순교비가 건립되었다.
※. 갈매못 순교지에서 순교한 5분의 성인들
1866년 병인박해 때 다블뤼 안 주교, 오메트르 신부,
위앵 민 신부, 황석두 루가, 장주기 회장
숙소: 공주한옥마을
오늘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여러 곳을 순례했다.
짐을 놓자마자 한옥마을내에 있는 한옥관식당으로 가서
공주알밤막걸리에 알밤감자전을 시키고 우두곰탕을 시켰다.
비가 오고 기온이 떨어지고 있어 한 곳이라도 더 방문하려고 하다보니
날도 어두워지고 몸이 으슬으슬하던 차에
막걸리와 국밥으로 몸이 풀리자 졸음이 쏟아졌다.
공주한옥마을 숙소에 도착해 겨우 우리가 자는 행랑채만 찍을 수 있었다.
옛날로 치면 머슴이 자던 방이라 한옥마을에서 제일 작은 방이지만
이것도 간신히 예약을 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차는 방이지만 TV를 비롯해 있을건 모두 있었다.
방은 옛날 시골 아랫목을 연상시키듯 장판이 좀 타서 거무스레하고
요밑에 등을 대니 너무 뜨거워 몸을 뒤척여야 했다.
방은 좁지만 천정이 높아 답답함은 별로 없었다.
첫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