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용무도한 세상을 살면서
잠시 자유로운 역사 기행을 통하여 마음의 평정을 찾아 보았습니다.
웃시야는 남 왕국 유다의 9대 왕이요,영조는 조선의 21대 왕으로 서로 연관성이 없지만
52년의 통치라는 공통분모로 자유로운 역사의 탐사를 시작해 보았습니다.
웃시야는 16세에 왕이 되어 52년 동안 통치하였으며 향연 68세요,
영조는 31세에 왕이 되어 재위 기간 52년이었으며 향년 83세였습니다.
웃시야의 향년 68년은 남 왕국 유다 왕들 가운데 가장 장수하였고
영조의 향년 83세는 조선의 왕들 가운데 가장 장수하였습니다.
웃시야는 부왕 아마샤의 피살을 딛고 왕이 되었으며
영조는 경종의 독살이라는 부담을 딛고 왕이 되았습니다.
여기에 경종 죽음의 의혹이 된 감과 게는 상극의 음식으로 독이 되며
오얏나무의 갓끈이 되었습니다.
웃시야는 52년의 재위 기간 동안 남 왕국 유다의 가장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였고
영조는 52년의 재위 기간 동안 사화나 환국이나 옥사가 없는 태평치세를 구가(謳歌)하였습니다.
그러나 웃시야는 교만하여 성전의 제사를 집도하여 문둥병으로 저주받아 죽었고
영조는 이인좌의 난을 비롯하여 사도 세자를 뒤주에서 가둬 죽이는 만행을 저질렀습니다.
웃시야와 영조, 그 52년의 통치 가운데 가장 큰 차이점은
웃시야는 국방력을 강화하였고 영조는 균역법을 실시하여 국방력을 약화시켰습니다.
웃시야는 북 왕국 여로보암2세 27년에 유다의 왕이 되어
북 왕국 왕 여로보암을 비롯하여 스가랴, 살룸, 므나헴, 브가히야를 거쳐 베가가 왕이 될 때까지
강성한 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북 왕국의 가장 강한 나라였던 여로보암 2세의 치세 동안
남 왕국의 웃시야 왕은 남 왕국의 가장 강한 나라를 건설하였습니다.
부왕인 아마샤 때만 하더라도 북 왕국의 요아스 왕이 쳐들어와
벧스메스 전투에서 참패하여 포로로 잡혔습니다.
☞ 유다가 이스라엘 앞에서 패하여 각기 장막으로 도망한지라
이스라엘 왕 요아스가 벧세메스에서 아하시야의 손자 요아스의 아들 유다 왕 아마샤를 사로잡고
예루살렘에 이르러 예루살렘 성벽을 에브라임 문에서부터 성 모퉁이 문까지 사백 규빗을 헐고
또 여호와의 성전과 왕궁 곳간에 있는 금 은과 모든 기명을 탈취하고
또 사람을 볼모로 잡고서 사마리아로 돌아갔더라(왕하14:12-14)
북 왕국의 요아스 왕은 남 왕국 유다를 참략할 뿐만 아니라
아람의 왕 벤하닷을 세번 쳐서 모두가 이기고 빼앗긴 성을 되찾았습니다.
또한 웃시야의 아들 요담 때에 암몬과 전쟁하여 승리하였으나 아람과 전쟁하였고
그의 아들 아하스 때에는 북 왕국 왕 베가와 아람 왕 르신의 연합군과 전쟁하여 큰 타격을 받았습니다.
☞ 그 때에 아하스 왕이 앗수르 왕에게 사람을 보내어 도와 주기를 구하였으니
이는 에돔 사람들이 다시 와서 유다를 치고 그의 백성을 사로잡았음이며
블레셋 사람들도 유다의 평지와 남방 성읍들을 침노하여 벧세메스와 아얄론과 그데롯과 소고 및
그 주변 마을들과 딤나 및 그 주변 마을들과 김소 및 그 주변 마을들을 점령하고 거기에 살았으니
이는 이스라엘 왕 아하스가 유다에서 망령되이 행하여 여호와께 크게 범죄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유다를 낮추심이라(대하28:16-19)
이렇게 아하스 때는 아람과 북 왕국 이스라엘 연합군의 침략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에돔과 블레셋의 침략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웃시야 52년 동안의 통치기간은
블레셋과 싸워 가드와 아스돗에 성읍을 건축하였으며 암몬 사람들에게 조공을 받고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습니다.
☞ 하나님의 묵시를 밝히 아는 스가랴가 사는 날에 하나님을 찾았고
그가 여호와를 찾을 동안에는 하나님이 형통하게 하셨더라
웃시야가 나가서 블레셋 사람들과 싸우고 가드 성벽과 야브네 성벽과 아스돗 성벽을 헐고
아스돗 땅과 블레셋 사람들 가운데에 성읍들을 건축하매
하나님이 그를 도우사 블레셋 사람들과 구르바알에 거주하는 아라비아 사람들과 마온 사람들을 치게 하신지라
암몬 사람들이 웃시야에게 조공을 바치매
웃시야가 매우 강성하여 이름이 애굽 변방까지 퍼졌더라(대하26:5-8)
또한 웃시야는 다윗과 솔로몬 시대 대표적인 에돔 땅의 항구 도시였던 에시온게벨과 이웃한
엘롯을 건설하여 유다의 항구 도시로 개발하였습니다.
에시온게벨은 여호사밧 시대 북 왕국 이스라엘과 평화정책으로 교류하였는데
하나님은 에세온게벨에서 축조한 배들을 파선시키면서 그들의 평화 정책이 잘못된 것을 일꺠웠습니다.
☞ 유다 왕 여호사밧이 나중에 이스라엘 왕 아하시야와 교제하였는데
아하시야는 심히 악을 행하는 자였더라
두 왕이 서로 연합하고 배를 만들어 다시스로 보내고자 하여
에시온게벨에서 배를 만들었더니
마레사 사람 도다와후의 아들 엘리에셀이 여호사밧을 향하여 예언하여 이르되
왕이 아하시야와 교제하므로 여호와께서 왕이 지은 것들을 파하시리라 하더니
이에 그 배들이 부서져서 다시스로 가지 못하였더라(대하20:35-37)
남 왕국의 여호사밧과 여호람과 아하시야는 북 왕국의 아합과 아하시야와 여호람과 평화 교류하였으나
아합과 여호사밧의 연합군은 길르앗 전투에서 패하였고 아합은 전사하였으며
여호사밧은 겨우 도망하였습니다.
결국 평화 정책은 북 왕국의 바알 숭배가 남 왕국 유다로 유입되어 여호와의 전이 바알신당으로 타락하였고
북 왕국의 바알 종교를 개혁하였던 예후에게 북 왕국의 여호람과 남 왕국의 아하시야가 모두 피살되었습니다.
평화의 명목으로 안보를 굳건히 하지 않으면
반드시 적의 침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심지어 웃시야는 사극의 전쟁에서 볼 수 있는 높은 성을 공략할 때 쓰는 무기를 고안(考案)하여
돌을 날릴 수 있는 공성장비를 망루에 갖추어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전쟁을 대비하였습니다.
☞ 또 예루살렘에서 재주 있는 사람들에게 무기를 고안하게 하여
망대와 성곽 위에 두어 화살과 큰 돌을 쏘고 던지게 하였으니
그의 이름이 멀리 퍼짐은 기이한 도우심을 얻어 강성하여짐이었더라(대하26:15)
그러나 영조는 재위 4년에 이인좌의 난을 겪으면서
탕평책이라는 미명하에 이인좌의 난을 주도하였던 소론과 남인을 추살하였으며
수 많은 사람들에게 오살의 형벌을 가하여 폭군의 면모를 보였습니다.
사도세자의 스승인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요,
그 영향으로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몰락한 남인과 소론의 인재를 등용하였으며
남인과 소론을 추살하는 탕평책을 반대하고
균역법을 실시하여 국방력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반대하였던 사도세자는
무술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북벌 정책으로 관서지방을 암행 순찰한 후
영조를 둘러싼 노론과 극심한 대립으로 폐세자되고 뒤주의 죽음으로 최후를 맞았습니다.
영조의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대부분의 사학파들은
오늘날까지 사도 세자를 미친 인간으로 취급하여 뒤주의 죽음을 정당화 하지만
사도 세자는 청나라의 만행에 항거한 북벌의 야망을 가진 최후의 정신이었습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굶어 죽인 것은
사도세자의 미친 짓이 더 이상 다른 사람에게 되살아나는 것을 막기위한 무속의 폐단이었습니다.
웃시야는 강성한 나라를 건설하였지만 그 교만으로 성전을 농단하여 문둥병의 저주를 받았고
영조는 사도 세자의 미친 북벌의 정신을 막기 위해 뒤주에 가둬 굶어 죽게 한 무속의 폐단을 낳았습니다.
혼용무도한 세상, 민주화의 옷을 입고 종북의 가면 놀이를 즐기며
그 인간 사냥으로 보수를 궤멸하는 종북의 탕평책을 쓰고
평화의 코스프레, 피날레로 안보를 무너뜨리는 시국 상황은 역사의 유령이 된 영조의 가면 놀이와 흡사합니다.
영조 시대, 그 노론의 후예들은
소론과 남인을 추살하는 탕평책으로 오늘날 보수를 궤멸시키고
위장된 평등과 평화의 옷을 입고 종북의 태평가를 부르고 있습니다.
영조시대 정권을 장악한 노론은
갑인예송으로 현종 말기를 장악한 남인에게 밀려나 숙종 초기까지 이르렀으나
숙종 6년의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집권하였고
숙종 15년 기사환국으로 남인이 집권하였으며
숙종 20년 갑술환국으로 다시금 서인이 집권하였습니다.
갑술환국으로 인한 남인에 대한 처벌 문제로
서인은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그를 반대하는 소론으로 갈라졌습니다.
경신환국으로 인현왕후가 등장하고 남인은 역모로 죽임을 당하였고
기사환국으로 훗날 경종을 원자로 옹위한 남인이 서인을 축출하고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이 때 장희빈은 중전이 되고 장희빈이 사약을 받고 죽은 후
갑술환국으로 인현황후의 북위를 반대하는 남인을 숙청하고 서인이 정권을 장악하였습니다.
그 후 원자를 왕으로 옹립하였던 소론은 경종 시대 정권을 장악하였고
연잉군 훗날 영조를 왕으로 옹립하였던 노론은 권력에서 밀려났습니다.
경종이 4년만에 죽자 노론이 연잉군을 왕으로 추대하여 정권을 장악하였으며
소론과 남인은 이인좌의 난을 일으켜 몰살당하였습니다.
공교롭게도 사도 세자의 스승이 되었던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할 때 일부 몰락한 남인과 소론을 등용하여 영조를 둘러 싼 노론과 대립하였습니다.
이인좌의 난 그 잔당으로 몰린 사도 세자의 후견인 남인과 소론은 노론의 무풍지대, 그 집요한 공격을 받았고
북벌의 야망을 가진 사도세자는 관서지방을 암행순찰한 사실이 밝혀지면서
그 마저 폐세자되고 결국 뒤주의 죽음으로 역사의 한을 남겼습니다.
영조 31년 을해옥사로 소론을 말살시켰으며
영조 35년 66세에 15세의 정순왕후를 계비로 맞이하였고
정순왕후는 사도 세자를 모함하는 일에 앞장 섰으며
영조 38년 69세에 42세에 얻은 아들 북벌의 야망을 가진 27세의 사도 세자를
북벌의 야망이 되살아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속의 죽음으로 뒤주에 굶겨 죽였습니다.
성서지대의 웃시야 왕과 조선의 왕 영조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지만
52년의 통치라는 공통 분모로 자유로운 역사기행, 그 탐사의 변이 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