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걷다 –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연명지』
보이지 않는 내 안의 나를 걷는다는 것은 내 영혼의 깊숙한 바다 위를 조심스레 딛는 일이다. 그 길은 누구도 함께 걸어줄 수 없고 오직 나만이 기억하는 풍경들로 이루어져 있다. 누군가에게 했던 말들과 하지 못한 말, 나조차 잊고 지낸 얼굴과 감정들이 불쑥불쑥 떠오르는 그 여정. 그 길을 따라가다 보면 기억의 골목과 감정의 언덕 오래된 상처의 들판과 말없이 견뎌온 하루의 강가를 천천히 되짚게 된다. 때로는 그리움조차 손에 잡히지 않아 그저 심장만 애가 타는 순간들. 어쩌면 내가 나를 걷는 일은 잊기 위한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오래된 내 안의 나를 다시 꺼내는 깊은 여행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국 그 바다 끝에서 다시 나를 만나는 여정이 된다.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연명지)는 저자에게 단순한 여행기가 아니다. 그것은 내면 깊숙이 자신에게로 들어서는 성찰의 길이다. 이 여정은 육체보다 영혼이 먼저 걷는 길이며 영적인 자아를 읽는 시간이기도 하다. 책장을 넘기며 나는 오래전 내가 썼던 "내 안의 나"와 브런치에 올렸던 “내 안에는 깊은 바다 하나가 살고 있어요...”로 시작하는 글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그 글들 역시 내면 깊은 곳, 영혼의 중심을 향해 다가가고자 했던 사유의 기록이었다. 이 책 또한 그러하다. 나로 하여금 다시 한번 내면을 응시하게 만든다.
저자는 길 위에서 자신을 만나고, 걷는 동안 지나온 날들을 되돌아본다. 말없이 흘려보낸 순간들이 발밑에서 되살아나고, 길은 발을 따라 움직이지만 감정은 기억의 저편으로 흘러간다. 그렇게 책장을 넘기다 보면 어느새 나 역시 저자와 함께 산티아고의 길을 걷고 있다는 감정에 스며든다.
볏짚 속에 숨어 울던 여섯 살의 어린 계집아이를 길 위에서 다시 만나는 장면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다.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웅크리고 있던 유년의 기억이지만, 저자는 그 아이의 작고 말랑한 손을 잡고 말한다. “괜찮아, 지금의 내가 너의 호기심 덕분에 명랑하게 잘 살고 있어.” 그 순간, 길은 외부를 향한 발걸음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으로 건너가는 다리가 된다. 「엄마의 장롱 거울을 깨고 몰려오는 두려움에 잔볕이 남아 있는 볏짚 속에 숨어 잠들었던 대여섯 살의 계집아이가 그렁한 눈으로 손을 잡는다.」(부분문장, p32)
삶은 누구에게나 자기만의 보따리를 안겨준다. 그 안에는 기쁨보다 더 많은 침묵, 말 대신 묶어둔 마음들이 차곡차곡 접혀 있다. 우리는 그 보따리를 풀기도 전에 다시 묶고, 들춰보기도 전에 짊어진 채 살아간다. 때론 그 무게가 삶이 되고 그 온기가 사랑이 되기도 한다.
저자가 마주한 엄마의 보따리(p51)는 곧 삶의 흔적이었고, 그 조용한 무게를 통해 내 엄마의 삶도 자연스레 들춰보게 되었다. 말없이 견뎌낸 날들을 입 밖으로 내지 못하고 고요히 접어 넣은 사연들이 풀어헤친 보따리 안에서 하나둘 펼쳐졌다. 그 보따리를 꺼내는 일은 단지 기억을 떠올리는 일이 아니라 오래 묻어두었던 상처를 다시 만지는 일이었다. 페이지를 넘기는 내내 가을에 떠난 엄마를 떠올리게 했다. 그러나 그 아픔 속에는 사랑이 있었고 끝내 다다르게 되는 이해 속에 미안하고 또 미안한 마음이 풀지 못한 매듭으로 남아 있었다.
“길은 누군가의 눈물을 동여 매주는 긴 팔을 가졌다.”(p97~98)
길은 단지 땅 위에 그어진 선이 아니라 아픔을 감싸 안는 팔이 되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조용히 닦아주는 손이 된다. 걷는 이의 상처를 품고 끝내 다시 일어설 수 있도록 다정한 곁을 내주며 슬픔을 품은 자의 벗이 되어 주기도 한다. 산티아고를 차곡차곡 걷는 내내 오래 닫아두었던 감정의 문 앞에 멈춰 섰다. 내 안의 또 다른 내가 나를 바라보며 가만히 손을 내미는 듯한 감각. 이 책은 단지 순례의 기록이 아니라 내 영혼 깊숙한 어딘가에 닿는 손길이었다.
삶이란 멈추지 않고 흘러가는 일이기에 길은 언제 어디서나 그리고 누구에게나 이어진다. 누군가는 눈물로 또 다른 누군가는 조용한 발걸음으로 함께 걷는다. 『차곡차곡 걸어 산티아고』는 그런 길 위의 동행자가 되어 준다.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는 그런 친구처럼. 굳이 말을 건네지 않아도, 같은 방향을 바라보며 함께 걷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는 존재. 그렇게 이 책은, 차곡차곡 걷는 동안 잊고 지낸 나 자신을 조용히 다독이며, 다시 삶의 걸음을 내딛게 해주는 다정한 손길이 되어준다. 그리고 독자는 문득 깨닫는다. 걷는다는 건 결국 살아간다는 일이라는 것을.
* 엄마와 나는 비스듬히 기대어 보이지 않는 곳에 창을 내고 있다. 미안함도 그리움도 모두 사랑이다.
「엄마의 보따리 」중에서.(p52)
* 말들이 지나가는 길에 연꽃 상사화가 낮게 히어 있다. 말들은 말발굽의 시간을 향기 나는 기도로 견뎌야 한다.
「가을피기 크로커스」중에서.(p71)
* 길은 나를 매일 불러내 물 흐르는 소리를 들려주고 나무와 풀밭 사이에서 흔들리는 꽃들의 사랑을 확인시켜 준다.
「리얼스페인 」중 에서.(p111)
그리움은 앞이 아닌 뒤에 있다. 살다가 문득 뒤돌아보면 거기 사람, 사람들이 있다. 삶의 한 지점에서 흐르기 시작한 인연은 멈추었거나 여전히 흐르고 있다. 어느 한 지점에서 헤어져 서로 다른 흐름을 이어가거나 다시 합수하기도 한다. 한데 걸어본 적 없는 ‘길’이 그리운 것은 왜일까. 질문의 끝에는 책이 있다. 직장에 다닐 때, 책 만드는 일을 오래 했다.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산티아고 순례길』 안내서다. 한 여행사의 의뢰로 제작한 안내서에 공을 많이 들였다. 원고를 다듬고, 편집하고, 코스별 지도와 사진을 넣어 알아보기 쉽게 제작했다. 순례길을 걸으며 휴대할 수 있도록 최대한 가벼운 용지로 만들었다. 그 책을 만든 지 몇 년 후, 삶의 갈림길에서 한 사람을 만났다. 모계 혈통의 인연만으로도 반가웠고, 흐름은 살가웠다. 그 완만하고도 살가운 흐름만으로도 인연을 이어가기에 충분했다. 어느 날, 시인이 시집 대신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정성스럽게 쓴 원고를 보내왔다. 길 위에서의 경험과 사유를 담은 짧은 글들은 팍팍한 내 삶을 돌아보게 했다. 그리고 길 저 뒤에 있던 그리움과 추억을 불러왔다. 마지막 글을 읽었을 때, 아직도 난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실제로 걷고 싶은, 언젠가는 걸어야 할 길. 그 길을 걷는 마음으로 축하의 마음과 한층 깊어진 영혼의 시편을 기다린다.♧
첫댓글
시골 풍경의 전원이 참정 겹습니다
목화솜
엄마생각이 납니다
어린 눈에 비 처졌던 목화솜의 얘기가요
목화솜이불을 만들어 고모님을 시집보내시던 어린 시절의 그 눈에...
엄마는 장손의 종부로서...
네 오늘은 뭐 하시면서 저물어 가는
저녁시간인데 어떻게 하루를
소일 하셨나요?.
작년까지 목화를 심어서 목화다래는
당뇨인 마누라가 혈당 낮추는 것으로
복용했는데, 올해부터는 예쁜 목화꽃을
볼수가 없어서 아쉽기만 합니다요.
부디 남은 오후시간도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행운
목화가 당뇨에 좋은가 봅니다
집 사람이 당으로 고생하나요
그런 목화가 좋다면 계속 키워서...
볼 수가 없다니요
다시 제배하면 될것이 아닌가요
@양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