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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아는 지식
성경본문: 잠언 9: 10
10.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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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 23-24
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24.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구속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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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환 목사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늘을 심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오셔서 크게 3가지 사역을 하셨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르치는 일과 복음을 전하는 일, 그리고 치유하는 일을 하셨습니다.
초대교회는 이 말씀을 받아들여 복음을 전하고 치유하며, 봉사하는 일에 힘썼고 이 가운데 성령의 충만함으로 교제가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교육과 선교, 봉사와 교제는 교회의 4대 기능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마 우리가 매일매일 살아가면서 이 하나님과 깊은 관계 속에서 이러한 것들을 골고루 해갈때만이 우리는 균형 잡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균형 잡힌 하나님의 사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세상의 어떤 유혹과 흔들림이 있어도 흔들리지 아니할 것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교회에 나왔습니다. 예배를 받으시기를 원하시는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리고, 회당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던 주님을 생각하며 말씀을 배워가야 합니다. 이것을 기초로 우리는 세상에 나가서 복음과 내가 배우고 체험한 바를 전하며, 더나아가 말씀으로 다른 사람들을 돌보고 교제해 갈때 천국을 확장해 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지난주 말씀중에 가장 중요한 핵심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여호와 하나님을 아는 것이 곧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아는 일에 언제나 힘써야 합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지난주에 굉장히 강조한 것이 한가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오직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기 때문에 대단히 중요하다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곧 영생을 얻는 것입니다. 이것은 언제 어디서나 잊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영생과 관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나의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자는 영생을 얻은 자입니다. 영생을 얻은 만큼 구원의 은혜를 체험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그 깊이와 넓이는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그래도 우리는 계속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을 알 때 우리는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더 큰 은총을 더욱더 넓혀 갈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장 12절에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또 그분께서 보내주신 예수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라" 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공부할 내용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곧 나 자신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나를 안다는 것은 곧 하나님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나를 알 수가 없습니다.
세상에서 나를 아는 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다고 생각됩니다.
하나님을 알때만이 나를 알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불행하게 살아가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저주하셔서가 아니라 우리가 우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를 알면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고 계심과 계속 은혜를 우리에게 부어주심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총을 누리며 살아갈 수가 있습니다.
파스칼은 그의 책 <팡세>를 통해서 '세상에는 두 종류의 인간이 있다.
그 한 종류는 자신을 아는 의인이며,
또 한 종류는 자신을 알지 못하는 죄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잘 들어보십시오. 자기를 아는 자는 의인입니다. 자기를 모르는 자는 죄인입니다. 그러면 자기를 어떻게 알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을 알때만이 자기 자신을 알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내 자신을 볼 때 내가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스칼이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자기가 의인인줄 아는 죄인이 있고 자기가 죄인인줄 아는 의인이 있다'고 말합니다. 이것이 세상의 단 두 종류의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내가 죄인임을 알게 하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십니다. 내가 죄인임을 아는 것은 나를 바로 아는 것입니다. 성경에 많은 사람들이 죄를 범했습니다. 이 죄는 곧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죄'라는 것입니다. 그 결과 사람이 무엇인지를 알지 못했던 것입니다.
저는 앞으로 강단을 통해서 우리 인간에 대해서 좀 더 깊이 알아갈려고 합니다. 그것은 곧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더욱더 쌓아가고자 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만큼 내 자신을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선지자 이사야는 이사야서 6장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을 만나고 그의 입술로 이렇게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가 이렇게 고백했습니까? 자기가 죄인임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선 자신의 모습을 보고 죄인임을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구나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 왕을 뵈옵나이다." 그렇게 고백을 합니다. 거룩하신 하니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신 예수그리스도를 만났던 베드로의 고백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는 죄인인줄을 알지 못합니다. 죄인인줄 알지 못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은혜라는 것은 죄인일 때만 해당되는 것입니다. 만약 우리가 죄인이 아니라면 하나님께서 예수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실 필요가 없습니다. 이사야나 베드로나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을 알고 자신을 안것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알때만이 우리 자신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비해서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거룩하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우리가 거룩한 존재가 아님을 깨달을 때 우리는 스스로 어떤 노력을 통해서 거룩해지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몰랐던 많은 종교지도자들이 스스로 어떤 행위를 통해서 거룩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예수님이 오셔서 책망하시며 가르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의 교훈을 받지 않았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주님은 '외식하는 자, 진정 회칠한 무덤과 같다고 책망하셨습니다. 겉으로는 회칠로 깨끗하게 칠해진 무덤이지만 내면에는 썩어 가는 그런 모습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거룩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선하십니다. 그러나 우리는 선한 존재가 못됩니다. 우리의 삶을 뒤돌아 보십시오. 오늘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보십시오.
우리는 악을 낳고 악을 심고 악을 노래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어느 한 부분을 찾아봐도 악한 부분이 없습니다. 우리를 지으실 때에도 선한 목적으로 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죽게까지 하시면서 우리를 구원하신 목적도 하나님은 선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비해 우리는 얼마나 어리석습니까. 참 하나님은 지혜로우십니다. 어떤 일에도 한치의 오차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많은 때에 불평합니다. 우리는 어리석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나를 알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많은 때에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서 하나님을 책망합니다. 하나님을 비판합니다.
이러한 우리에게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어리석은 자여 누가 과연 힐문하느냐"
하나님은 전능하시고 강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비해서 우리는 굉장히 약한 존재입니다. 지극히 약합니다. 우리는 삶속에서 매사에 두려움을 느끼고 살아갑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약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 약함에서 해방되려고 우리는 공부도 하고 돈도 모으고 세상에서 출세를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아무리 공부해도 우리 인생의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약함의 증거입니다.
어느 글을 읽어보니 이런 이야기가 실려져 있었습니다.
[고양이와 생쥐가 있었습니다. 생쥐가 늘 두려움에 빠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한 마법사가 '무엇에 대하여 그렇게 두려워하느냐'라고 물었더니 이 생쥐는 '고양이가 너무 두렵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법사가 생쥐를 고양이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런데 생쥐가 그 두려움에서 해방될 줄 알았는데 두려움에서 해방되기는커녕 계속 또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마법사는 또 '무엇이 그렇게 두렵냐'라고 물었습니다. 생쥐는 이제 개가 두렵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마법사가 긍휼을 베풀어서 개로 만들어 주었습니다. 두려움에서 해방되었을까요? 무엇이 두려워져요? 이제는 호랑이가 두렵답니다. 너무너무 무서워 하길래 더 긍휼을 베풀어서 호랑이가 되게 해주었는데 이제 두려움이 끝입니까? 아니지요. 이제 무엇이 두려워져요. 사냥꾼이 두렵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두려움에서 해방되게 하시려고 여러 가지 긍휼을 베풀어 주셨지만 우리는 그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가 없습니다. 그런 존재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피할 바위시며,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 있고 피할 수 있는 영원한 바위십니다. 피난처이십니다. 왜냐하면 전능하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하나님과 새로운 만남을 통하여 그분을 알고 그분을 새롭게 만날 때 우리는 두려움에서 해방될 수가 있습니다. 그분은 은혜로우신 분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랑으로 풍성하신 분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미움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기심이 가득 찬 존재들입니다. 매사에 경쟁을 합니다. 사랑하는 것 같아도 속에는 항상 이기심이 부글부글 끓습니다. 그것이 우리입니다.
여러분! 내 안에 이러한 마음이 없습니까? 이사야가 만난 하나님, 베드로가 만난 하나님, 바로 우리가 만난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요, 선하신 분입니다. 지혜로우신 분입니다. 강하신 분입니다. 사랑과 은혜가 풍성하신 분입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의 모습은 형편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하지 못합니다. 우리는 선하지도 못합니다. 우리는 어리석습니다. 약합니다. 우리는 미움과 시기로 가득찬 존재들입니다.
여러분! 이러한 우리가 어떻게 구원되어질 수가 있겠습니까? 왜 주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을까요. 우리는 이러한 연약한 우리의 모습을 알 때만이 예수가 우리에게 필요로 한 것입니다.
'주여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할 때 예수님을 구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예수는 우리를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낮은 자로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올라가서 구원의 은총을 입은 것 아닙니다. 예수님은 지극히 낮은 곳에 오셨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인임을 알고 겸손할 때 하나님의 은혜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많은 사람들이 높은 지위에 있었습니다. 지도자의 자리에 있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보고도 받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지극히 낮은 자리에 있었던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큰 은혜를 누렸습니다. 상황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죄인됨을 알아 지극히 낮은 자리에 내려갈수록 하나님의 은혜를 계속 체험해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본문인 로마서 3장 23절에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라고 했고, 로마서 3장 10절에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결국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을 떠났다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24절에 보면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가 되었느니라"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27절에는 "그런즉 자랑할데가 어디있느뇨 있을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스스로 의를 행하고 율법을 지켜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을 알 때 자신이 누구인지를 압니다. 곧 죄인임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곧 하나님을 아는 정도가 자신을 아는 정도요, 하나님을 아는 정도가 은혜를 받고 변화될 수 있는 기회입니다.
[꿈이 가득한 한 청년이 큰 야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세상을 알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것'이 그의 꿈과 야망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30대가 되었습니다. 인간의 한계점에 부딪힌 것입니다. 그러자 그의 꿈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이 나라를 알고 이 나라를 변화시키는 것이 내 꿈이다.' 40대가 되었습니다. 나라에 대해서도 다 알지 못했습니다. 아무런 변화를 줄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 난 이 지역을 알고 지역을 변화시킬 것이다' 50대가 되었습니다. 더욱더 그의 꿈이 줄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나의 가족을 알고 내 이웃을 알고 이웃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다' 60대에는 '내 가족을 알고 내 가족을 변화시키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마지막 죽음을 앞두고 그는 침대에 누워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반성했습니다. '진작 나를 알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나의 꿈이었더라면... 나를 알고 나를 변화시키는 것이 나의 꿈이었더라면 내 가족도 알고 내 가족도 변화시켰을 텐데... 내 이웃과 내 지역을 알고 변화시킬 수 있었을 텐데... 나라와 세계를 알고 거기에도 변화의 영향을 끼쳤을 텐데...']
세상을 아는 것은 나를 앎에서부터 시작되어 집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일은 나를 변화시키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우리를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모르면 사람들은 교만해 집니다. 교만한 자는 하나님께서 붙드시지 않는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알면 사람은 겸손해 집니다. 시편 147편 6절에 "여호와께서 겸손한 자는 붙드시지만 교만한 자는 땅에 엎드러 뜨리신다" 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직접 교만한 자를 땅에 엎드리심이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면 스스로 교만해져서 패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요 겸손은 존귀의 앞잡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 앞에선 우리의 모습을 알 때 우리는 낮아지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낮아질 때 우리는 하나님만을 의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하나님은 우리를 굳게 잡아주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많은 사람들이 저지른 가장 큰 과실이 바로 자신이 누구인줄을 몰랐던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뜻도, 하나님의 의도도 깨닫지 못하고 그 결과 하나님의 의도대로 살지 못했습니다. 자신의 욕심에 찬 의도대로 살아왔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주신 목적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결과로 종교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종교에는 언제나 교주가 있습니다. 그리고 종교에는 언제나 계급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구교에도 마치 교주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을 우리는 받습니다. 그리고 거기엔 실제로 대단한 계급이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기독교 신앙에는 종교가 아니라 신앙이기 때문에 여기에는 교주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이 중심입니다. 그리고 교회에서는 절대로 계급이 없습니다. 높고 낮음이 없습니다. 종교 개혁자 마르틴 루터는 수도원에서 성경을 읽다가 진리를 발견했는데, 의인은 없나니 한사람도 없다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받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어떤 의나 행위로 구원을 입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극히 죄인되어졌을 때 아무런 값없이 하나님께서 다만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은혜를 베푸셨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그러면서 뛰쳐나옵니다. 만인제사장 설을 주장했었습니다.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다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다. 계급을 가진 자만이 나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것이 우리 개혁 종교로서 오늘 우리의 교회들입니다. 하지만 이 진리의 기초에 세워진 우리 한국 교회와 개신 교회도 많은 세상의 방법들이 들어와 있습니다.
여러분! 교회 앞에는 높낮이가 없습니다. 어떤 직분이 절대로 높고 낮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직분은 하나님께 받은 은혜의 정도입니다. 더 죄인임을 깨닫고 낮아진 정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낮아지면 낮아질수록하나님께서 은혜를 물 붓듯이 부어줍니다. 그러나 교만하면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가 없습니다.
어떤 사람은 직분을 받아서 하늘이 막힘을 봅니다. 하나님이 큰 은혜를 베푸시는데도 직분 받자마자 하나님의 은혜가 끊겨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분들은 직분을 착각한 것입니다.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인생의 어려움을 겪다가도 직분을 받고 인생이 형통해 지기 시작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참 하나님 앞에 자신의 모습을 보고 이 직분 갖고 더욱더 낮아짐을 통해서 하나님이 베푸신 은혜를 체험해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절대로 교회 안에서는 차등을 두어서는 안됩니다. 봉사하는 일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다 죄인입니다. 도저히 은혜를 받을 수 없는 우리에게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서 다같이 은혜를 받은 존재들입니다.
이 은혜에 감격해서 우리는 주의 일을 하고 봉사를 하는 것이 교회일입니다. 대접받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세상적인 방법이 교회안에 들어올수록 하늘의 문은 닫힙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바로 죄인임을 깨닫고 시인한 사람에게는 언제나 은혜가 넘칩니다. 만일 우리도 참 하나님을 알고 우리가 죄인임을 깨닫고 우리가 죄인임을 시인한다면 우리는 늘 은혜의 해속에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가 올라가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 지극히 낮은 곳으로 내려오는 것입니다. 은혜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시에 지극히 낮은 자들을 찾아가셨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희망이 되셨습니다.
그들의 생명이 되셨습니다. 그들의 인생의 참된 힘과 길이 되어 주셨습니다. 상황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 이 한해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살아갈 수 있는 비결이 있습니다. 너무나 간단한 방법입니다. 하나님을 아는 일에 힘쓰는 것입니다. 하나님 창조주 하나님을 알고 거기에 지어진 피조물인 내 자신을 알고 죄인임을 깨닫고 낮아질 때 무한한 하나님의 은혜를 누려갈 수가 있을 것입니다. 나혼자 다 간직하지 못해서 이 큰 은혜를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나누고 전하면서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십시다.
그리고 우리의 모습을 깨달으십시다. 더욱 더 낮은 자리에서 하늘의 큰 은혜를 넘치도록 체험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출처:은혜목회정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