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黃喜 정승의 일화"
1화: 아들을 禮로 대한 黃喜 정승의 진정한 자식 교육
조선 세종임금 때 무려 18년간 영의정을 지냈던 명재상 황희 정승이 있었지요. 조선 광해군 때의 문인 유몽인(1559∼1623)이 엮은 <어우야담>에는 그 황희 정승과 기생을 사랑한 그의 아들 황수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황희는 아들에게 기방 출입을 끊으라고 여러 차례 엄히 꾸짖었으나 아들은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어느 날 아들이 밖에서 돌아오자 황 정승은 관복 차림으로 차려입고 문까지 나와 마치 큰 손님 맞이하듯 했지요. 아들이 놀라 엎드리며 그 까닭을 묻자 황 정승은 말합니다. “그동안 나는 너를 아들로 대했는데 도대체 내 말을 듣지 않으니 이는 네가 나를 아비로 여기지 않는 것이다. 그래서 너를 손님 맞는 예로 대하는 것이다.” 뉘우친 아들은 기방 출입을 끊기로 맹세했지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김유신이 기생집으로 데려간 말의 목을 벤 것처럼 아들 수신도 술 취한 자신을 기방으로 싣고 간 말의 목을 벴다고 합니다. 진정한 자식 교육이 무엇인지 황희는 가르쳐줍니다.
2화: 네 말이 옳다
다음은 이기의 ‘송고잡기’에 실려있는 유명한 일화이다.
황희 (黃喜) 정승은 세종의 성대(聖代)를 만나 예(禮)를 제정하고 악(樂)을 만들며 나라의 큰일을 의논하고 중요한 논의(論議)를 결정하면서 날마다 임금을 도와 덕으로 다스리는 정치를 성취시키는 데에만 전념할 뿐, 크고 작은 가사일에는 일체 관여하지 않았다.
하루는 계집종들이 서로 다투며 한동안 떠들썩하다가 한 계집종이 공이 앉은 걸상을 두들기며 하소연하였다.
"아무개 종년이 나와 서로 다투어 이러저러한 잘못을 범하였으니, 몹시 간악합니다."
공이.
"네 말이 옳다."
고 대답하고 책만 보고 있었다. 조금 뒤에 상대방 계집종이 또 와서 걸상을 두들기며 똑같은 하소연을 하였다. 공이 또,
"네 말이 옳다."
고 대답하였을 뿐 돌아보지도 않았다.
마침 공의 조카 아무개가 옆에 있다가 말하기를,
"숙부님의 분명치 못하심이 너무하군요. 아무개는 이러하고 아무개는 저러하니, 이러한 년은 옳고 저러한 년은 그른데도 둘 다 옳다고만 하니, 숙부님의 분명치 못하심이 너무하군요."
하였으나, 공은 또,
"네 말도 옳다."
고 하고는 글만 계속 읽을 뿐, 옳다 그르다는 말은 끝내 한 마디도 없었다.û
위 일화를 인용하면서, 어떤 공직자가 말하기를, ‘황희정승식으로 일을 처리하면 안 된다.’라고 했다 하고, 또 어떤 정객(政客)이 국회에서 황희정승을 우유부단한 지도자로 비유한 기사가 있었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많은 이들이 황희정승의 성품을 크게 오해하고 있는 것 같아, 위 일화의 배경과 깊은 의미를 되짚어 보고자 한다.
우선 위 일화의 배경에 주목해야 한다.
황희정승은 수상(首相)으로써 육조(六曹) 판서를 지휘 감독해야 하는 막중한 직무를 수행함과 동시에, 세자사(世子師), 영집현전사(領集賢殿事), 경연(經筵), 예문관(藝文館), 춘추관(春秋館), 승문원도제조(承文院都提調), 상정소도제조(祥定所都提調), 풍수학도제조(風水學都提調), 영서운관(領書雲觀) 등의 막중한 고정직을 겸하였다. 이들 고정직은 그 하나하나가 임금의 자문에 즉시 응해야 하는 막중한 직책들로서, 고정적인 한 재상(宰相)의 업무가 충분히 될 뿐 아니라 이들 중에 한 개의 직책만 맡아도 사림(士林)으로서는 대단히 영예롭게 여기는 중요한 자리들이다. 또한 황희정승은 과거(科擧)의 고시관을 맡아 세종조의 많은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였고,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 함길도 도체찰사(咸吉道都體察使) 등 국가적 막중대사인 숱한 임시직도 겸하였다. 이처럼 세종대왕은 황희정승에게 거의 모든 중요한 국정을 다 맡기고 의논하였다.
위 일화가 나올 무렵의 황희정승은 맡은 직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세종 14년~ 15년 어간에는 방대한 분량의 경제속육전(經濟續六典)을 직접 편찬하였고, 아악(雅樂)과 여러 제사(祭祀)의 제도(制度), 대성악(大晟樂)의 제도, 문무(文舞)와 무무(武舞)의 제도 그리고 회례악(會禮樂) 등의 예악(禮樂)과 여러 제도를 조선 500년 동안 거의 수정 없이 운영될 수 있을 정도로 완벽하게 제정하였다.
황희정승과 동시대 관료였던 고령부원군 신숙주가 작성한 황희정승의 신도비문에, ‘모든 상소와 건의문은 공(公)이 손수 만든 것으로서 그 말의 뜻이 명쾌하여 한번만 읽어 보아도 그가 정성을 다한 것을 엿볼 수 있었다.’라는 기록이 있고, 또 묘지명에, ‘연세 90이 되어도 총명이 감퇴되지 않아, 조정의 법도와 경(經) 사(史) 자서(字書)들을 촛불처럼 환히 기억하였고 더욱이 산수(算數)에 있어서는 제아무리 젊은이라도 감히 공(公)을 따를 수 없었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황희정승은 당면한 일에 대하여 모든 자료를 직접 수집하고 연구하였고, 천문(天文)에 관한 복잡한 계산 등은 젊은 사람들을 제쳐두고 직접 계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고 위 일화를 살펴 보면, 황희정승이 집에서 휴식을 취할 수 있는 휴일임에도 불구하고, 국정에 필요한 자료를 수집하기 위하여 걸상에 단정히 앉아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이는 공직자로써의 모범적 자세를 은연중에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때에 밖에서 말다툼하던 두 계집종이 각각 황희정승을 찾아와서 상대방의 잘못을 이르며 하소연하였다고 되어있다. 즉, 여기서 우리는 두 계집종이 시비의 잘잘못을 가려달라고 찾아온 것이 아니고 단지 억울함을 하소연하러 왔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된다. 이에 황희정승은 그녀의 하소연을 너그럽게 받아들여, ‘네 말이 옳다’라고 위로하였고, 다음에 찾아온 계집종에게도 똑같이 ‘네 말이 옳다’라고 공평하게 위로해 주고 계속 책을 읽었다. 그녀들이 달려와 걸상을 두들기며 소란을 피웠으므로 분명히 책 읽기에 방해가 되었을 것인데도 황희정승은 귀찮은 내색 하나 없이 그 하소연을 두 번씩이나 받아 주었다고 되어 있다. 여기서도 황희정승의 넓은 도량이 드러나고 있다.
철부지 계집종들의 사소한 말다툼이란 다반사로 있는 일이다. 만약 잘잘못을 가려야 할 다툼이었다면 응당 그녀들의 직접 상전인 집사에게 찾아갔을 것이고, 집사가 판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중대한 시비였다면 그 집사가 내당(內堂) 마님께 아뢰어 최종 판결을 받았을 것이다. 사대부가(士大夫家)의 바깥주인은 계집종을 다스리는 등의 내당 일을 관여하지 않는 것이 법도이다. 따라서 만약 황희정승이 계집종들의 말다툼에 직접 끼어들어 시비곡절을 가려주었다면, 사대부가의 바깥주인으로써의 체통을 잃을 것은 말할 나위도 없거니와, 이 일화는 아예 전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옆에서 이를 지켜보던 조카는 아직 위와 같은 전반적인 정황을 헤아리지 못할 나이이므로, 황희정승은 ‘네 말도 옳다’라고 대답하여 스스로 판별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있다. 여기서는 황희정승의 유연한 훈육 자세를 엿볼 수도 있다.
이와 같이 몇 마디 안되는 짧은 글에서 황희정승의 단정한 몸가짐과 넓은 도량 그리고 사대부가의 법도와 유연한 훈육 태도 등을 잘 나타내었고, 특히 양반과 상민의 신분을 엄격하게 구별하던 시대였음에도 불구하고 황희정승이 어린 여종의 하소연을 두 번씩이나 너그럽게 받아 준 그의 인간 평등사상(平等思想)이 크게 부각되고 있기 때문에 오늘날까지 이 일화가 유명하게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황희정승이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는 식으로 진정 우유부단한 정치가였다면, 영명하신 세종대왕께서 무슨 이유로 23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그를 수상으로 삼아 온갖 국정을 다 맡겼겠으며, 그와 더불어 정치생애를 같이 하였겠는가?
오늘날의 공직자나 정치인이 만약에 진정 황희정승식으로 일을 처리하고 나라를 이끌어 나간다면, 이 혼탁한 세상도 반드시 태평성대로 다듬어질 것이다.
고령부원군 신숙주가 지은 황희정승의 묘지명에 이런 시구(詩句)가 있다.
"논의(論議) 중에 가부(可否) 결단을 내릴 때는 깊은 계곡 달리는 급한 여울과 같고,
가장 오랜 기간 집권하며 세운 공훈과 업적이 불꽃처럼 빛나고 있네."
(論斷可否如湍赴壑 秉匂最久有赫勳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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