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언(證言) - [43] 김찬균 (金贊均) - 은혜의 길, 감사의 길 17. 교역장 생활 1 1962년 2월, 교회에서 전국적인 인사이동이 있을 때 나는 대구와 달성군 고령군을 하나로 묶은 지역을 관할하는 교역장으로 발령을 받았다.
2 나중에 그 지역은 다시 대구시, 고령군, 달성군 등 세 교역으로 나누어졌다. 그리하여 나중에 나는 고령 지역장과 경북 교구 총무부장을 잠시 지낸 뒤 63년 2월에는 전북 이리 교역장으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3 그 무렵 우리 교회에서는 반공 계몽단이 조직되었는데 나는 이리(지금의 익산시) 지역을 책임 맡고 있으면서 관할 16개 면을 순회하며 반공 계몽 강의를 하였다.
4 보통 하나의 면 단위에 한두 개의 학교가 있었는데 그곳을 다니며 강의를 했고, 학생과 교직원을 상대로 한 교육뿐만 아니라 경찰서와 면사무소 등의 초정으로 수차례 반공 계몽 강의를 하기도 했다. 당시는 아직 국제승공연합이 창설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승공 강의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5 축복받을 당시 아내는 이화여대를 갓 졸업한 상태였으며 축복 후 전국 순회사로서 강원도에서 활동하다가 참어머님께서 효진님을 낳으신 뒤에는 서울에서 효진님을 돌보는 일을 했다. 때문에 내가 이리에 와 있는 중에도 아내는 서울에서 효진님을 모시는 헌신 생활을 하고 있었다. 6 63년 어느 날 참아버님께서 군산과 전주교회를 순회하신 후 아무 전갈도 없이 밤중에 이리교회를 방문하셨다. 교회 전용 전화도 없던 때였으므로 나는 참아버님께서 오시는 줄을 모르고 있었다.
7 참아버님께서 오신 뒤에 사이다인지 차인지 마실 것을 조금 준비해 어설픈 남자의 솜씨로 내어놓았던 기억이 있다. 그날 참아버님께서는 “부인 없이 목회하려니 힘들지 않느냐?” 하시며 나의 의중을 물으셨다.
8 나는 식구들 집을 심방할 때 특히 여자 식구 집 등을 방문할 때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하면서 교회 사모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함을 느낀다고 보고드렸다.
9 서울로 올라가신 참아버님께서는 얼마 후 아내를 이리로 내려보내 주셨다. 아내는 가방 하나만을 들고 내려왔다. 그것이 신혼살림의 전부였다. 우리는 그제야 정식으로 가정 출발을 하게 되었는데 축복받고 2년 후쯤의 일이다.
10 아내가 내려온 다음날 아침 식사 상을 차려왔는데 쌀이 없어 밀가루로 수제비를 끓여 들고 들어오면서 눈물을 글썽였다. 첫 식사를 밥으로 준비하지 못하게 된 안타까운 마음에서 였던 것 같다.
11 새벽이라 쌀을 사 올 수도 없어 수제비를 만들었다며 “좋아할지 모르겠네요.”라고 했다. 나는 좋아한다고 하면서 맛있게 먹었다. 그렇게 우리는 쌀 한 톨 없는 가운데서 신혼을 시작했던 것이다. 12 아내는 공부 벌레였지만 신체적으로는 상당히 약했다. 그래서 임신이 잘 안되었다. 아내의 이모인 김영운 선생을 비롯한 여러 식구들이 걱정을 해주었다. 그러던 중에 1965년 6월 3일 장녀 김윤숙(金允淑)을 출산하게 되었다. 아내가 임신을 하고 있을 때 나는 아들이든 딸이든 건강하게만 태어나게 해 달라고 기도했다.
13 약한 아내를 옆에서 늘 보아 왔기 때문에 건강의 소중함을 생각하게 되었고, 아기도 건강하게만 태어난다면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14 아내가 아이를 무사히 출산을 하자 나는 너무 기분이 좋은 나머지 거기에만 취해 있다가 30분이나 지난 뒤에야 아들을 낳았는지 딸을 낳았는지를 물어보고 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15 나는 믿음의 부모 성함이 양윤신(梁允信)이기 때문에 ‘윤(允)’ 자를 넣어 희망하는 이름을 몇 개 만들어 협회로 올려 보냈다. 참부모님께서 결정해 주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16 그런데 그 기간에 참아버님께서는 외국 순회 중에 계셨기 때문에 유효원 협회장이 아기 이름을 결정해 주셨는데 윤숙(允淑)으로 해주셨던 것이다. 그런데 그 윤숙이가 자라서 유 협회장님이 승화하신 후 그분의 며느리가 되었으니 유 협회장님은 장차 자신의 며느리 이름을 스스로 결정해 준 셈이 되었다. 17 딸을 출산한 지 2년 뒤인 1967년 6월 17일에 아들 김진확(金珍確)이 태어났다. 아들의 이름은 나를 낳아 주신 어머님의 이름 홍확실에서 ‘확(確)’ 자를 넣어 지었다. 그리고 그 뒤로 진수(珍秀)가 태어났고, 또 진표(珍杓), 진세(珍世)가 태어나 4남 1녀의 자녀를 두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