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절을 보내면서 유관순님을 생각해 봅니다. 님은 1902년 충청남도 목천군 이동면에서 태어났습니다. 살아계신다면 122살입니다. 이화학당 다니던 중 3,1만세운동이 터져 휴교령이 내려졌습니다. 서울에서 만세운동에 역할을 하지 못한 것을 마음의 빚으로 생각하던 유관순님은 고향에 내려와 있을 때 아우네장터에서 만세운동을 주도하다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습니다.
감옥에서 심한 고문에 시달리던 유관순님은 18살 꽃다운 나이에 옥사하고 말았습니다.
유관순님이 죽자 일제는 시신을 가마니에 둘둘 말아 아현동 공동묘지에 가매장했습니다. 연고자가 나나타 찾아가라는 뜻도 있지만 쓰레기 버리듯 버렸습니다. 하지만 어머니와 아버지가 아우네장터에서 만세부르다 총맞아 죽어 그 누구도 찾아가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현동이 개발되면서 공동묘지가 망우리로 이전할 때까지 연고자가 나타나지 않아 무연고 묘는 섞어 화장하여 망우리에 이장했습니다. 때문에 유관순님의 묘는 없습니다. 가슴 아픈 일입니다.
이완용을 비롯한 매국노와 친일 부역자들은 잘 먹고 잘 살았습니다. 이등박문을 척결한 안중근은 처형당했고 그의 자식들은 테러리스트의 자식이라고 교육도 못받으며 핍박 받았습니다.
의식있는 사람들은 보호하고 보듬어 주었지만 살인자의 자식이라고 백안시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 뿐만이 아닙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했던 육당 최남선도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고 춘원 이광수 역시 변절하여 친일파가 되었습니다. 이화여대 설립자 김활란도 친일파로 나섰고, 시인 모윤숙과 시인 서정주도 글과 강연으로 조선 청년들을 선동하고 다녔습니다. “조선의 청년학도여! 전선(戰線)에 나가 천왕폐하를 위하여 죽는 것을 영광으로 생각하라”고 조선의 젊은이들을 남지나 전선과 태평양전쟁의 총알받이로 내몰았습니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이들은 또 변신했습니다. 열렬한 애국자로 변신하여 국민의 눈을 속였습니다. 삼일운동은 우리나라 헌법에도 녹아있습니다. 헌법 전문에는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생략) 구천을 떠도는 유관순님이 통곡할 것 같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어있을 때 모습
|
첫댓글 우리는 아픈 역사속에 살았지요~이제라도 비평만 할게 아니고 건전한 정신 시대가 되였으면 합니다~
성찰과 함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