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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5 |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 말씀/ 로마서 1:1-17 요절/ 로마서 1:16 | 2025. 9. 28 | |
| 가을학기 특 강 |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명작이라고 하는 영화를 보면 오프닝이 매우 인상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그래서 오프닝을 단순한 시작이 아니라 영화의 정체성과 감정선을 결정 짖는 ‘영화의 얼굴’이라고 합니다. 로마서의 서문은 복음의 핵심을 말할 뿐만 아니라, 구원 받은 신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말하고 있기에 늘 새롭게 새겨야 합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복음에 대해서 눈을 뜨고 복음을 믿고 새 은혜를 입을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1-7절은 인사말입니다. 1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종 바울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입었으니” 당신 노예는 전쟁에서 포로가 되었거나 빚을 못 갚아 종이 된 부끄러운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자랑스럽게 자신을 그리스도의 종이라고 소개합니다. 이는 죄의 종 되었던 자신을 위해 구속하시고 사명을 주신 하나님의 은혜가 너무나 커서 자발적으로 그리스도의 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또한 바울은 자신도 12사도와 같이 사도로 부르심을 받아 하나님의 복음을 위하여 택정함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지 간단하게 설명했습니다.
2-4절을 보십시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그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당시 복음 즉 ‘좋은 소식’이라는 말은 로마 황제에 관한 것으로 로마인들에게 친숙한 것이었습니다. 당시 로마인들에게는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탄생일이 복음의 시작이라고 알려졌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 복음은 황제의 복음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에 관한 것이라 힘주어 말합니다. 이 복음은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온 세상 만민에게 미치는 진짜 기쁜 소식입니다. 이 복음은 소설처럼 갑자기 누가 지어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선지자들을 통해서 그의 아들에 관하여 미리 약속하신 것입니다. 복음의 기원은 하나님이시며 복음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성취된 것입니다.
복음의 내용은 그의 아들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 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완전한 인간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습니다. 예수님은 완전한 인간이시며 완전한 하나님이십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주’는 승천하여 하나님 아버지 오른편에 앉아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주관하시는 주님이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는 역사적 인물로 구원자를 가리키고, ‘그리스도’는 기름부음을 받은 자로서 왕을 가리킵니다. 복음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로 믿을 뿐 아니라 나의 주님이요 왕으로 믿고 고백하고 그 분의 다스림 받는 것을 의미합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은혜와 사도의 직분을 받았습니다. 바울은 이 예수님의 이름 곧 예수님의 명예와 영광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는 직분을 감당했습니다. 사도 바울이 이렇게 자신을 소개하는 것은 나만 특별하다는 것을 말하고자 함이 아닙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 그는 로마에 있는 성도들도 분명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의 인사말에서 우리는 당당한 바울의 자세를 느낄 수 있습니다. 특히 복음에 대해서 바울은 확고합니다. 복음을 단 세절로 요약해서 전합니다. 왜 그럴까요? 이는 복음이 너무나 놀랍고 중요하고 시급히 전해야 할 기쁜 소식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무슨 아쉬운 부탁을 하는 사람처럼 복음을 전하지 않았습니다. 예전에 통신이 발달되지 않을 때 집 떠나온 대학생이 지방에 계신 부모님께 등록금 요청하는 편지를 보낼 때 이렇게 쓰곤 했습니다. “부모님 전상서, 날씨가 추워지는데 아버님, 어머님 건강은 괜찮으신지요. 형님, 누나, 동생들 모두 잘 지내는지요. 귀여운 우리 집 누렁이도 많이 컸겠네요. 불효자 000올림. 추신: 이번학기에도 등록금을 보내주시면 하늘같은 부모님 은혜 결코 잊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이런 식으로 편지를 쓰지 않고 인사말에서부터 압축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이는 바울 안에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에 대한 감격이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또 다소 긴 로마서를 읽기 부담스러워 하는 로마성도들에게 복음을 압축해서라도 시급히 전하고자 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이는 논리적이고 체계적으로 복음을 증거해 주기 원하지만 어떤 사람은 길고 자세한 설명을 오히려 힘들어합니다. 바울은 혹시 두툼한 편지를 들고 인사말만 읽고 덮어둘 성도들에게도 복음 분명히 전하기 원했습니다.
바쁜 사회 속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긴 내용을 보고 듣는 것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요즘 대중가요들은 전주가 거의 없습니다. 아무리 내용이 좋아도 긴 카톡은 읽지 않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런 분들에게 복음의 핵심을 짧게라도 전달할 때 효과적일 때가 있습니다. 추석 때 불신자 가족이나 친척을 만나면 성경공부가 어려울 겁니다. 이럴 때 바울과 같이 복음의 핵심을 간단히 전할 수 있습니다. “복음은 기쁜소식이라는 말인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에 관한 것이에요. 예수님은 구약 성경에 선지자들이 예언한대로 인간이 되셔서 인간과 함께 사셨어요.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셨지만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임이 증명되었어요. 이 예수님을 나의 구원자요 주님으로 믿을 때 죄와 사망의 세력에서 벗어나 영생을 얻고 하나님의 자녀의 놀라운 축복을 받게 됩니다.”
8-15절은 바울이 로마 성도들에게도 어찌하든지 가고자 한 이유가 쓰여져 있습니다. 바울은 먼저 로마 성도들의 믿음이 온 세상에 전파됨을 인하여 감사했습니다. 당시 세계 이곳저곳에서 그리스도인들이 서로 소식을 주고받으며 말했습니다. “형제님, 로마에서도 우리처럼 주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있답니다.” “그들은 바울과 바나바 같은 목자도 없는데 믿음을 지키고 예배를 드린데요.” 로마는 다신교 사회이고 도덕적으로 문란하여 극장, 댄스홀, 원형경기장이 번창 했습니다. 각종 이방 종교와 사상들이 범람하여 마치 온 천하의 종교 진열장과 같았습니다. 이런 로마에서 자생적으로 성도들이 생겨나 믿음을 지키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바울은 감사제목 뿐 아니라 로마 성도들을 위한 간절한 기도제목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찌하든지 하나님의 뜻 안에서 그들에게 나아갈 좋은 길을 얻는 것이었습니다. 10절을 보십시오. “어떻게 하든지 이제 하나님의 뜻 안에서 너희에게로 나아갈 좋은 길 얻기를 구하노라” 바울은 에베소에서 놀라운 복음의 능력을 체험하고 “내가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며 로마 선교의 비전으로 불탔습니다. 본문에 ‘내가’라는 말이 자주 나오고, ‘어찌하든지’, ‘할 수 있는 대로’라는 표현을 볼 때 바울이 얼마나 로마에 가기를 원했는지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이 어찌하든지 로마에 가고자 한 것은 첫째는 그들에게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 주어 그들을 견고하게 하기 위함입니다. ‘신령한 은사’는 곧 성령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인 복음의 깊은 세계를 말합니다. 로마 교회에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헬라 그리스도인들이 출신으로 인한 문화적 차이로 인해 갈등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차이를 극복하고 견고한 공동체를 이루는 길은 깊은 복음의 세계를 나누어 주는 것임을 확신했습니다. 둘째는 로마성도들과 교제함으로 서로 격려하고 위로를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거세지는 핍박과 역경 속에서 그들을 위로하고 위로 받고 싶었습니다. 셋째는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고자 함이었습니다. 바울은 로마에서도 얼마간의 회심자를 얻고자 하였습니다. 바울은 당시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에서도 안디옥이나 에베소에서처럼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만민구원역사를 이루고자 했습니다.
무엇보다 그가 로마행을 포기치 않았던 것은 로마 성도들에 대한 빚진 자의 심정 때문입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무슨 빚을 이렇게 많이 졌습니까? 무슨 투자회사라도 세워서 세계 각국에 채권이라도 발행한 것입니까? 그리고 빚을 지려면 좀 젠틀한 사람들에게 지지 왜 야만인이나 어리석은 자에도 집니까? 이는 바울이 예수 그리스도께 복음의 빚, 은혜의 빚을 졌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빚진 자의 심정이 있었기에 로마 성도들을 위해 가지고 쉬지 않고 기도하며 어찌하든지 로마에 가고자 했습니다. 바울은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헬라 그리스도인들 간에 갈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문제로 여겼습니다. “이 문제는 내가 복음을 깊이 있게 전해 주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빚을 어떻게 갚아야 하나? 지금은 갈수 없으니 편지로라도 복음을 잘 알려 주어야겠다” 그런 마음으로 로마서를 썼습니다.
심정이 있을 때 관심을 가지게 되고 기도하게 되고 길을 찾게 됩니다. 제가 호주 브리즈번에 있을 때 시내 쪽에 홍수가 난 적이 있습니다. 저희는 외곽쪽이어서 안전한 편이었는데도 캔버라 한 선교사님은 뉴스로 소식을 듣고 동역자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안부를 묻고 조금이라도 위험하면 빨리 대피하라고 몇 번이나 말했습니다. 허테레사 선교사님은 동역자들에게 심정이 많습니다. 출국하기 몇일 전 많이 바쁠 때인데 저희 가정이 한림대 양들을 섬기고자 하는 것을 알고 한림대 런치미팅에 와서 한림대를 지혜롭게 섬길 수 있도록 조언해 주었습니다. 주님께서 식어지기 쉬운 우리 마음에 빚진 자의 심정을 충만하게 부어 주시길 기도합니다. 그래서 복음전파를 위해 기도하고 길을 찾고 행동하는 자가 되게 해 주시길 기도합니다.
이제 바울은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과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말합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 당시 로마 성도들은 복음을 부끄러워하기 쉬웠습니다. ‘팔레스타인의 예수라는 청년이 인간의 죄를 위해 식민지 백성들에게만 행해진 십자가에 죽고 부활했다. 이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이시다.’ 이런 뉴스는 표적을 구하는 유대인들에게 그리고 합리적 이성을 구하는 헬라인들에게 좋은 소식이 아니라 부끄러운 소식 같았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복음만이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막혀 있는 죄의 담을 무너뜨리고 죄인을 하나님의 자녀가 되게 하는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사망 권세 아래 매여 평생 두려움과 염려의 종으로 살 자들에게 하늘의 평강과 소망을 주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를 체험적으로 알았습니다. 영적인 무지로 율법의 종이요 교회의 박해자였던 사울을 빛으로 사로잡아 이방인의 사도 바울로 변화시키신 것은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빌립보의 감옥 문을 열게 하고 자결하려던 간수를 살려 그와 그 집이 다 세례를 받게 한 것도 복음의 능력이었습니다. 우상과 마술의 도시 에베소가 변하여 마술 책을 불살라 버리게 한 것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이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온갖 거절과 방해와 핍박에도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더욱 담대하게 복음을 전했습니다.
17절은 복음이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인 이유를 알려 줍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다는 것은 복음 안에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는 길이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그 믿음을 보시고 죄인들을 의롭다고 칭하시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것은 구원 받는 것도 믿음으로, 성화되는 것도 믿음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도 믿음으로 된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하박국 2장 4절을 인용하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선언합니다. 복음을 믿음으로 하나님께 의롭다 칭함 받은 자, 다시 말해 의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또 살 것이다라는 것은 생명을 얻고 더 풍성한 삶을 살게 된다는 말입니다.
합리적이고 실제적인 능력을 추구하는 현대사회에서 복음은 하나님의 능력임을 믿고 믿음으로 살아가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인간적인 능력만을 추구하는 자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쉽습니다. 현대인들은 돈을 벌고 불리는 재테크의 능력, 미인으로 만들어 주는 성형과 피부미용의 능력, 빠르게 변화하는 시대에 잘 적응하고 앞서가는 능력, 팀이나 조직을 잘 이끌어가는 인간관계의 능력 등에 관심이 많습니다. 요즘 MZ들은 자기계발, 디지털 역량, 사회적 가치, 그리고 개인화된 콘텐츠 소비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단순히 ‘좋은 직장’이 목표가 아니라, 나답게 살기 위한 전략을 세우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라고 합니다. 이런 트렌드와 관심을 반영한 신조어가 “갓생”이라는 말입니다. 영어 단어 God과 한자 생(生)이 결합된 말로, “신 같은 인생”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신(God)처럼 부지런하고 계획적으로 살아가는 삶을 뜻합니다. 갓생을 사는 MZ들은 아침 일찍 일어나 러닝과 헬스, 영어공부, 지하철에서의 독서를 루틴으로 만듭니다. 이런 현대인들, ‘갓생’을 살고 추구하는 MZ들에게 복음이 필요할까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그러나 ‘갓생’을 산다고 해도 죄와 사망으로 구원 받지 못하면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는 인생입니다. 오히려 자기 능력을 의지하여 사는 자의 내면은 불안과 두려움과 사랑에 대한 목마름, 번아웃 등으로 마음의 고통이 많습니다. 제가 원조 ‘갓생러’라서 잘 압니다. 우리는 이런 외적인 능력, 인간적인 능력이 구원인 줄 알고 사는 사람들에 담대하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 능력입니다. 두려움, 불안, 목마름 등 모든 어둠은 하나님을 떠난데서 생긴 죄의 증상들입니다. 우리가 구원 받는 유일한 길은 우리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것입니다. 복음을 믿을 때 영생을 얻을 뿐만 아니라 실제적인 문제들도 해결하고 능력 있는 삶을 살게 됩니다.
이미 구원 받은 우리도 인본적인 세상 속에서 나의 노력, 나의 의지, 나의 공로에 의지하여 살아갈 때가 많습니다. 그럴 때 자기 의에 빠지거나 낙심하게 되고 메마른 삶을 살게 됩니다. 우리는 내 힘과 노력으로 예수님을 따를 수 없고 변화될 수 없고 좋은 열매 맺을 수 없음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 살아 하나님의 의를 얻고 성령의 열매와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합니다.
저는 여름수양회와 선교사님들과의 교제를 통해 많은 은혜를 받고 한림대 양을 얻고 새롭게 제자양성 역사를 섬기고자 소원하였습니다. 그런데 막상 캠퍼스에 오르며 내가 한 양을 얻고 제자의 열매를 맺을 수 있을까, 조용히 있을 걸 하는 마음이 아주 조금 들었습니다. 저의 부족함과 연약함을 제가 잘 알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오늘 요절 말씀을 통하여 제게 무슨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요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임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또 한림대 양을 얻고 제자양성 역사에 도전하는 것도 믿음으로 시작했으니 끝까지 믿음으로 하고자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날마다 저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능력인 복음을 의지하여 오직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되길 기도합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가을학기에 우리 모두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는 믿음으로 살아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