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측의 오랜 설득 끝에 1952년 12월 4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 34대 대통령 당선자가 경무대를 방문해 이승만 대통령을 만났다. 그 일행이 귀국길에 오르기 전 기념촬영을 했다. 왼쪽부터 제임스 밴플리트 미 8군 사령관,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 이승만 대통령, 아이젠하워 당선자와 아들 존 아이젠하워 소령.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내가 마크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을 설득하기 위해 꺼내든 ‘한국군 50만 명’은 실제 병력이 아니었다. 기존의 국군 사단과 지원 병력, 훈련병, 예비 병력을 모두 끌어다 맞춘 숫자였다. 비록 정확한 숫자는 아니었으나, 나는 다급한 마음에 공산군에 맞서 싸울 한반도의 역량을 보여주기 위해 그런 숫자를 동원했던 것 같다.
그러나 어쨌든 간에 공산군의 침략에 함께 맞서기 위해서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미국 대통령 당선자의 우호 표시가 있어야 한다는 내 설득은 효과를 거뒀던 것으로 보인다. 클라크 유엔군 총사령관은 거구(巨軀)였다. 몸집은 그렇게 뚱뚱하지는 않았으나, 키가 매우 컸다. 치밀하면서도 조용한 인상에 키가 다른 사람에 비해 훌쩍 커 보여 상대방에게 늘 위압감을 주는 편이었다. 그런 그가 소파에 앉아서 나를 줄곧 뚫어져라 바라보며 내 말을 듣다가 손을 내밀었다. ‘말을 잠시 멈추라’는 제스처였다.
나는 내가 하던 말을 끊고 그를 바라봤다. 클라크 대장이 소파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어 그는 “내가 한번 당선자께 말을 건네 보겠소”라고 말했다. 얼굴이 빨갛게 상기된 상태로 그가 소파에서 일어섰다. 그러고는 아무 말 없이 아이젠하워가 머물고 있던 미8군 사령관 집무실로 들어갔다.
혹시 클라크 사령관이 개인적으로 화가 치민 것은 아니냐는 걱정도 들었다. 그러나 할 수 없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체면을 살리기 위한 것보다는 대한민국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할 때 결코 벌어져서는 안 될 일을 막아야 하는 게 더 급했다. 이미 내 입 밖으로 내뱉은 말이었고, 그로 인해 상황은 이미 벌어진 뒤였다.
클라크 장군이 아이젠하워의 방에 들어간 뒤 4~5분이 흘렀던 것 같다.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앉아서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마음속으로는 클라크 대장이 아이젠하워 당선자를 설득할 수 있기를 간절하게 기대하고 있었다. 이윽고 클라크 사령관이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머물던 방을 빠져나와 다시 내게로 왔다.
그는 이런저런 설명 없이 “아이젠하워 당선자께서 곧 경무대를 방문할 것입니다. 오후 6시 경무대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때 만납시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말을 했다.
1952년 12월 서울 중앙청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 당선자가 중공군을 몰아낸다’는 영문 현수막이 걸렸다
나는 이 소식을 빨리 경무대에 알려야 했다.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을 빠져나온 뒤 내 지프에 올라탔다. 경무대에 빨리 이 소식을 통보해 아이젠하워 당선자를 맞이하도록 준비를 시켜야 했다. 내가 도착한 뒤 경무대는 부산해졌다. 아이젠하워가 오후 6시에 방문한다는 소식을 내가 알리면서 갑자기 분주해졌던 것이다.
나는 경무대 문을 들어선 뒤 우선 의장대를 챙겼다. 그들을 도열하게 한 뒤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경무대 문을 통과하는 순간 연주를 시작하도록 지시했다.
정확하게 오후 6시에 접어들 무렵이었다. 경무대 문이 열리더니 아이젠하워 당선자를 태운 자동차 행렬이 정원 안으로 쑥 들어섰다. 앞에 간단하게 마련한 공간에서 약식으로 의장대의 사열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이어 응접실 안으로 들어가 환담을 시작했다. 분위기는 좋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전날의 중앙청 앞 광장과 4일의 경무대 예방 문제를 사이에 둔 해프닝이 벌어졌지만 이승만 대통령과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함께 공산군에 맞서 싸우는 나라의 지도자로서 여러 가지 깊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던 것으로 생각한다. 환담에 이어 간단하게 과자와 차를 나눠 먹으면서 아이젠하워 일행과 한국정부 요인들이 서로 어울렸다.
나는 지금까지도 그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는 편이다. 만일 그때 아이젠하워 당선자가 끝내 경무대를 방문하지 않은 채 방한 일정을 마쳤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를 자주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성격이 매우 강한 인물이었다. 비록 그가 미국의 힘을 빌려 전쟁을 치르는 입장에 있었지만, 아이젠하워가 경무대를 예방하지 않고 떠났다면 그 무례함을 두고 마음으로는 깊은 원망을 품었을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서구형 지식인이기는 했지만, 그 속은 동양의 전형적인 지식인이었다. 한참 뒤의 이야기지만, 이승만 대통령이 말년에 품속에 지니고 다니던 책은 『당시선(唐詩選)』이었다. 다른 사람과의 대화 속에서 곧잘 영어 단어를 섞어 쓸 정도로 서구 지식계의 영향을 깊이 받은 인물이지만, 말년에 들어서는 『당시선』을 품에 지니고 다닐 정도로 동양의 정신세계에 깊이 빠져 있던 사람이다.
커다란 사안에 대해서는 늘 합리적인 판단을 하고는 했으나, 사람이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가를 두고서는 늘 까다로운 동양적인 규범을 앞세우는 분이기도 했다. 스스로 즐겨 말하지는 않았으나 동양의 전통적인 가치인 예의와 범절을 마음속으로 자주 되새기는 스타일이었다.
따라서 그런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했으면서도 끝내 경무대를 방문하지 않은 아이젠하워 당선자를 두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는 자명하다. 벌써 80을 바라보는, 자존심이 매우 강한 노 대통령으로서는 가슴속으로 결코 쉽게 사라지지 않을 노기(怒氣)를 품었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그렇다면 미국은 그 이듬해인 1953년에 접어들어 휴전협상 테이블에서 벌어지는 공산 측과의 신경전과는 별도로 대한민국의 성격 강한 이승만 대통령과 다른 차원의 심리전을 수행해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는 결국 휴전 뒤에 벌어지는 미국의 대한(對韓) 원조 문제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도 있었던 것이다.
어쨌든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생각할 때 당시 아이젠하워의 경무대 예방은 천만다행이었다. 그로써 미국을 향해 이승만 대통령이 좋지 않은 감정을 품을 가능성이 없어진 셈이었다. 아이젠하워와 그를 수행한 미 최고위 지휘관들은 약 1시간 동안 경무대에 머물렀다. 아이젠하워 당선자는 경무대 일정을 마치고 바로 여의도 비행장으로 향해 수행원들과 함께 한국을 떠났다.
정리=유광종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