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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누가복음 제25강
인자가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말씀/눅17:20-18:8
요절/눅18:8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오늘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둘로 나누어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거듭남으로 경험되어지는 이 땅에서의 현재적 하나님 나라입니다. 또 하나는 장차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지는 미래적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 나라의 실체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또 장차 주님의 재림과 함께 이루어질 하나님 나라를 맞이할 우리 성도들의 이 땅에서의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20절을 보십시오. 바리새인들은 그동안 예수님이 행하시는 많은 이적들을 목격했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천국 복음이 전해지고, 병든 사람이 치유 받고, 귀신 들린 사람이 온전하게 되는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런 일들은 예수님을 통해 이미 하나님 나라가 임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1장 20절에서 말씀합니다. “내가 만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느니라.”
그런데도 바리새인들은 “하나님 나라가 언제 임합니까?” 묻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삐딱한 마음을 가지고 있고 아직 하나님 나라가 오지 않았음을 전제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대인들은 다윗 왕과 같은 권능의 메시아가 나타나 하나님 나라, 지상 메시아 왕국을 건설하는 것을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곧잘 하나님 나라를 말씀하면서도 그들이 볼 때 예수님은 로마를 몰아낼 군사력을 키우지 않았습니다. 또 불의한 헤롯 왕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게다가 종교 지도자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사람들이 자기들을 떠나 자꾸만 예수님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예수님으로부터 자신들의 외식과 율법주의, 교만과 긍휼 없음을 책망까지 받았습니다. 이러니 예수님의 사역들을 보면서 하나님 나라가 임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조차 싫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이 어떠합니까? 20b,21절을 보십시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나님 나라는 바리새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신의 눈으로 볼 수 있게 임하는 나라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다스림이 이루어지는 나라요,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나라입니다. 자기중심적 자아가 지배하고, 세상 가치관이 지배하고, 죄가 지배하는 나의 마음, 곧 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마음에 성령과 말씀을 통한 하나님의 다스림이 임할 때 하나님 나라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서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하나님 나라는 바로 이것이며 이미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 가운데 임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특정 지역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역동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점진적으로 확장되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바리새인들은 바로 그들 코앞에 계신 예수님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영적인 속성을 가지기 때문에 인간의 힘이나 외적 조건을 통해 이루어지는 나라가 아닙니다. 단편적인 예로 니고데모를 들 수 있습니다. 깜깜한 밤에 예수님에게 나아온 니고데모는 빛과 생명이 넘치는 하나님의 나라를 갈망했습니다. 이를 위해 바리새인이 되고, 유대 지도자가 되고, 이스라엘의 선생이 되고 일생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재물과 소유도 많았습니다. 남들이 부러워하는 스펙과 웬만한 조건은 다 갖추었으나 그럼에도 그의 영혼은 오히려 밤과 같이 어둡고 캄캄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해주셨습니다.
지금도 예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그 심령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선포하셨습니다.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1:15).” 누구든지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믿으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됩니다. 어디에 있든, 어느 때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합니다. 그때 우리 마음에 진정한 평강과 기쁨과 감사가 있습니다. 사랑과 생명, 공평과 정의가 충만합니다. 심지어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면서 갖가지 삶의 위기와 여러 고난 가운데 있을지라도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은 그 심중에 하나님 나라의 풍성한 은혜가 주어집니다. 요즘 북한이 미사일 도발을 하고 있는데 그들이 아무리 그래봤자,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빼앗지는 못합니다. 세상의 나라는 변하고 불안하고 소동하지만, 우리 안에 또 예수님과 함께 하는 우리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요? 고린도후서 3장 17절은 말씀합니다.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 사도바울은 로마의 어둡고 차디찬 감옥에서도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해했습니다. 함께 찬송가 438장을 불러볼까요? 가사가 참 은혜롭습니다.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벗고 보니 슬픔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화하도다. / 주의 얼굴 뵙기 전에 멀리 뵈던 하늘나라 내 맘속에 이뤄지니 날로 날로 가깝도다. / 높은 산이 거친 들이 초막이나 궁궐이나 내 주 예수 모신 곳이 그 어디나 하늘나라. / 후렴. 할렐루야 찬양하세. 내 모든 죄 사함 받고 주 예수와 동행하니 그 어디나 하늘나라. / 정말로 내 영혼이 은총 입어 중한 죄짐 다 벗으면 고난 많은 이 세상도 천국으로 변하게 됩니다. 주 예수와 동행하면 그 어디나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 실체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언제쯤 온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까요? 22절을 보십시오. 그것은 인자의 날,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날입니다. 그날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아직은 그날을 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때가 되면 예수님은 반드시 모든 사람을 심판하십니다.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는 사람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지옥 불에 던져집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구주로 믿는 성도들을 위해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예비하십니다. 계시록 21장 4절은 이날의 하나님 나라에 대해 말씀합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장차 예수님의 재림 때 이루어질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 믿는 모든 성도들의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기도하며 재림의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야겠습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계22:20).”
예수님은 제자들이 주님 재림의 때를 어떤 자세로 기다리고 준비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22절을 다시 보십시오. “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먼저, 예수님은 재림의 때를 연연하지 않게 하십니다. 제자들은 살아생전에 하루만이라도 주의 재림의 날을 보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바람과는 달리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재림은 먼저 주님이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린바 되는 그 이후에라야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이는 주님의 십자가 고난과 부활 승천이 이루어진 이후의 어느 날에 재림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현재 제자들은 주님의 재림을 보지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 승천이 아직 안 이루어졌을지라도 예수님은 앞서 제자들이 주님의 재림을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지 말씀해주십니다. 그만큼 주님 재림의 때가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주님의 재림이 언제 이루어질지라도 주님 맞이할 자세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동시에 이단들의 말에 현혹되어서는 안 됩니다. 자기가 이단이라고 고백하는 이단은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자칭 재림예수라 주장하는 사람들이 40여 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삶이 힘들고 절박한 문제에 부딪힌 사람들은 물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하는 조급한 마음이 생겨납니다. 그런 때에 지성인이라도 거짓 메시아의 미혹에 넘어가는 일이 허다하게 발생합니다. 미혹하는 영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들이 이적 행하는 것을 보면 더욱 쉽게 빠져들어갑니다. 한번 미혹 당하면 거짓 확신에 차게 되고 나중에는 빠져나오기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가 재림예수라고 주장하며 ‘여기 있다, 저기 있다’ 미혹하는 말은 다 거짓입니다. 거기에는 가지도 말고 따르지도 말아야 합니다. 왜냐면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는 한 지역에 은밀하게 나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늘 한끝에서 다른 끝까지 확 퍼지며 동시에 환하게 비추는 번개처럼, 예수님의 재림은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공개적으로 임합니다. 계시록 1장 7절은 말씀합니다. “볼지어다!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시리라. 각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겠고 그를 찌른 자들도 볼 것이요, 땅에 있는 모든 족속이 그로 말미암아 애곡하리니 그러하리라. 아멘!” 큰 영광과 권능으로 구름 타고 오실 예수님을 모든 사람이 동시에 공개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 성도들은 주님 재림의 날까지 어떤 자세로 살아가야 합니까? 노아 시대 홍수 심판을 생각해 보십시오.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더니 홍수가 나서 그들을 다 멸망시켰으며” 노아 시대 사람들은 홍수 심판의 때까지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는 일에 바빴습니다. 일상적인 삶인 것 같습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잘못은 아닙니다. 사람이 먹고 살 식량을 준비하고 가정을 이루는 일은 필요한 삶입니다. 사실 노아도 세 아들을 결혼시켰고 방주 안에서 살아가게 될 때를 대비해 먹고 마실 것들을 준비했습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의 문제가 무엇일까요? 그들이 먹고 마시며 가정을 이루는 반복적인 일상생활에만 빠져 영적인 관심이 도무지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경고를 무시했습니다. 그들 마음에는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하나님 없는 그들의 삶은 어땠습니까? 하나님은 창세기 6장 2,3절에서 노아 당시 사람들의 죄악상을 고발합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이 좋아하는 모든 여자를 아내로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이르시되 나의 영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신이 됨이라.” 그들은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잃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심중에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경외함이 있는가를 보십니다. 그러나 노아 시대 사람들은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멀리 떠나 육신의 소욕만을 추구하며 살다가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시대는 어떠합니까? 28,29절을 보십시오. 역시 이때도 먹고 마시고 사고 팔고 심고 집을 지었습니다. 이 역시 그 자체가 잘못된 일은 아닙니다. 하지만 이들 역시 그들 가운데 하나님이 없었습니다. 세속적이고 불신앙적인 삶에 집중하다 보니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세상 종말을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영적인 관심에서 멀어질 때 그들은 더 높은 명성과 더 많은 재물, 더 감각적인 쾌락을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동물과 같이 육신적 욕구로만 가득 차고 하나님으로부터는 멀어져 있었습니다. 롯의 사위들도 장인에게서 진지한 하나님의 심판 경고를 듣고서도 농담으로 여겼습니다. 결국 심판의 날에 하늘로부터 불과 유황이 비 오듯 쏟아져 내렸고 그 시대 사람들은 심판받게 되었습니다.
30절을 보십시오. 노아 시대의 홍수 심판과 롯의 시대 불 심판은 심판이라는 측면에서 인자의 때를 예표합니다. 동일하게 주님의 재림을 준비하지 않고, 영적인 생활에 둔감하여 하나님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은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일상에 충실하면서도 하나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디모데후서 3장 2,4절에 보면, 말세에 사람들은 세 가지를 사랑한다고 했습니다. 돈과 자기와 쾌락을 하나님 사랑하기보다 더한다고 했습니다. 자기중심적이 되고 돈과 쾌락을 우상 삼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탐닉하다 보면 어느새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는 자신을 보게 됩니다. 많은 시간을 세상의 좋아 보이는 눈요깃거리에 할애하지만, 주님과 또 성도들 간의 영적인 교제에는 시간을 잘 할애하지 않습니다. 이런 삶은 결국 노아나 롯의 때처럼 우리 시대의 가치관과 죄악에 물들어 우리를 변질되게 할 것입니다. 그러다 주의 재림을 맞이하게 되면 얼마나 부끄러울까요? 누가복음 21장 34-36절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그렇지 않으면 방탕함과 술 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마음이 둔하여지고 뜻밖에 그날이 덫과 같이 너희에게 임하리라. 이날은 온 지구상에 거하는 모든 사람에게 임하리라.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있으라 하시니라.” 우리는 스스로 조심하며 언제 주님이 재림하시더라도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도록 항상 기도하고 깨어있는 삶을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학업과 직장을 그만두고 산에 올라가 햐얀 소복을 입고 기도하며 재림을 기다리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구주로 심령에 영접하고 성령의 인도하심과 주의 말씀의 다스림을 받는 삶이 중요합니다.
그런데 주님 재림의 날에도 이 세상에서의 재물과 즐기던 것들에 미련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31,32절을 보십시오. “그날에 만일 사람이 지붕 위에 있고 그의 세간이 그 집 안에 있으면 그것을 가지러 내려가지 말 것이요, 밭에 있는 자도 그와 같이 뒤로 돌이키지 말 것이니라. 롯의 처를 기억하라.” 여기, 세간은 가치 있는 소유물이나 애정의 대상물로 여기는 ‘이 세상의 것들’을 말합니다. 주의 재림의 날, 심판으로 아주 다급하고 긴박한 상황 중에서도 사람이 집 안으로 들어가는 이유는 그가 물질의 노예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롯의 처를 기억하라고 하십니다. 롯의 아내는 세상 재물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다가 심판당할 자들의 예표가 됩니다. 롯의 아내는 불 심판 전, 천사에 이끌려 소돔 성에서 나와 산으로 도망했습니다. 그때 천사의 뒤돌아보지 말라는 경고를 듣게 됩니다. 그러나 세상 미련을 버리지 못해 천사의 말에 불순종하므로 결국 소금 기둥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처럼 주의 재림을 소망하며 기다리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재물이나 쾌락에 집착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시선이 하나님을 향하지 않고 세상을 향해 있다면 그것이 가치관이 되고 굳어져 돌이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성도들은 이 세상의 것들에 시선 고정했던 눈들을 돌려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주님의 재림과 함께 심판이 이루어질 때 하나님 있는 사람들과 하나님 없는 사람들의 운명은 어떻게 갈리게 됩니까? 34,35절을 보십시오. 인자의 재림과 심판의 밤에 두 사람이 한 이불 덮고 누워 있습니다. 아마도 부부이거나 가족, 아무튼 가까운 사람임이 틀림 없습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한 명은 구원과 영생의 자리로 데려감을 받고, 다른 한 명은 영원한 지옥 심판을 받도록 버려둠을 당합니다. 또 두 여자가 함께 맷돌을 갈고 있는데 한 명은 데려감을 받고 한 명은 버려둠을 당합니다. 이 같은 일들이 주님의 재림과 심판의 때에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신실하게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과 삶을 살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생활 속에서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인생 마지막 때 쓴 편지, 디모데전서 1장 15절에서 말합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신앙, 주님 심판 때에 데려감을 받는 신앙은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를 의지하는 것입니다. 심히 자격 없는 죄인일지라도 이런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하나님의 사랑을 굳게 붙잡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이 심판에서 구원받아 데려감을 얻고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히 살아가게 됩니다.
그러면 주님 재림의 날까지 우리는 좀 더 실체적으로 어떤 삶을 살아야 할까요? 18장 1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함을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어떤 도시에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한 재판장이 있었습니다. 그 도시에 한 과부가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과부는 의지할 대상이 없어 가난했고 또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습니다. 과부는 불의한 재판장을 찾아가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재판장은 과부의 억울한 사정에 관심 두지 않았습니다. 과부는 낙심이 되기도 했지만 또 찾아가 호소했습니다. “내 원수에 대한 나의 원한을 풀어주소서(3).” 과부는 포기하지 않고 재판장을 따라다니면서 끈질기게 간청했습니다. 화장실 앞까지 따라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재판장은 이 과부 때문에 더 이상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자신을 번거롭게 하고 괴롭게 하니 과부의 원한을 풀어 주고자 합니다.
6-8a절을 보십시오. “주께서 또 이르시되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주시리라.” 비유의 재판장은 번거롭고 괴로워서 간청을 들어주었지만 우리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을 사랑하시고 각 사람의 인생에 깊은 관심을 두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무엇보다 택하신 자들을 위해 독생자까지도 십자가에 내어주시는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독생자도 아끼지 않고 내어주시는 하나님이신데 무엇을 아까워하시겠습니까? 하나님은 택하신 자들 편에 서서 도와주시고 복된 인생을 살게 하십니다. 이런 하나님이실진대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기도에 응답해주지 않으시겠냐는 반문입니다. 설령 직방은 아닐지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 가장 좋은 때에 가장 좋은 방법으로 응답해주십니다. 세상에서 당하는 모든 부조리와 억울한 일들을 신원해주십니다. 또 우리 하나님은 주와 복음을 위해 수고한 모든 일에 넘치도록 보상해 주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하나님을 믿고 항상 기도하며 나아가야 합니다.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어성경에 “not give up”입니다. 기도해도 안 된다고 포기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신실하신 주님을 믿기에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을 신뢰하므로 항상 기도하는 삶을 주님 재림의 때까지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나 8b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주님의 세상을 향한 안타까움의 말씀입니다. 세상은 갈수록 불신이 깊어만 갑니다. 도둑같이 주님이 재림하실 것이라는 경고의 말씀을 들어도 사람들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습니다. 주님의 재림을 믿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여깁니다. 세상의 삶만을 영위할 뿐 영적인 것에 관심 두지 않습니다. 이런 세상에서 주님의 재림을 믿고, 신실하게 기도에 힘쓰며 주님을 의지하는 믿음을 가진 사람을 찾아볼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와 같은 믿음을 가지고 살아갑니까? 주님이 당장이라도 다시 오실 때 우리에게서 이런 믿음을 찾으실 수 있을까요? 우리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향한 믿음을 가지고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주님이 속히 오셔서 불의한 세상에 하나님의 공의를 실현해 주시도록 기도하고 있습니까? 우리가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이와 같은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 주님과 동행하면서 하나님의 나라를 누릴 뿐만 아니라, 장차 주님의 재림을 소망하면서 항상 깨어 기도하기에 힘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