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발이 크다. 그는 충직한 종이었으나 나는 그를 부끄럽게 여겼다. 옛 사람들이 그를 향해 ‘도둑놈 발’이라 이름 지었기 때문이다. 하필 도둑인가. 부모님 건실하셨고, 나도 남의 담 넘은 적 없으니 옛 말은 웃어넘겨도 좋으련만.
구메구메 작은 발 가진 여자를 훔쳐보곤 했다. 발은 작으니 신발도 예쁘고 여성스러웠다. 멋이 우선인 젊은 날, 문수를 줄여 신발을 신었다. 줄인 문수만큼 발가락을 꼬부려야 했다. 오십이 넘어서야 ‘여포’를 선언했다. 아름다움은 포기할 수 없는 여성의 속성 아닌가. 세 살 아이도 제 엄마의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 앞에서 방싯거릴 줄 안다. 외할머니는 아흔한 살에 돌아가실 때까지 코티 분을 바르셨다. 몸이 보내는 지엄한 신호가 아니었다면 나도 포기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멋보다 실용으로 돌아서는 나이, 둥글넙적 밋밋한 구두를 신고 비로소 편안했다.
미인은 발이 작다. 어디서부터 흘러온 말일까. 유래가 궁금해서 자료를 뒤적이다 중국 전족 여인의 발 사진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엄지발가락 외에 네 발가락이 나뭇잎처럼 안쪽으로 접혀 있었다. 전체 발 길이 10여cm, 형태는 마름모였다. 전족을 만들기 위한 과정은 참혹했다. 살갗이 벗겨지고, 고름이 나고, 썩은 냄새가 진동했다고 한다. 통증 때문에 음식을 넘길 수도, 잠을 잘 수도 없는 산고 끝에 전족은 만들어졌다. 죽음을 무릅쓰면서까지 작은 발을 만들어야 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남성들의 미적 심미관 때문이었다.
불편한 발 때문에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걷다보면 엉덩이 근육이 발달하고 그것이 성적 쾌감을 높여준다는 속설이 또 여성들을 옭아맸다. 전문적인 전족 감상가가 출연하여 등급을 정하고 미인대회처럼 품평회를 갖기도 했다. 심지어 전족은 그 집의 부와 훈육 정도를 나타내는 하나의 표지가 되었다고 한다. 오죽하면 얼굴보다 전족이 잘 된 여인을 미인으로 여겨 혼인 시 여성의 발 모양과 크기를 매파에게 전달해주었을까. 오로지 남성에게 종속된 존재로서의 발, 이 관습은 무려 천 년이나 지속되었다고 한다. 굴욕의 냄새가 물씬한 대가를 치르고 여자들은 정말 행복했을까.
텔레비전을 통해 발레리나 강수진의 맨발을 본 적이 있다. 발가락 마디마디에 굳은 살이 박였다. 성한 데 없이 상처로 얼룩진 발, 아름다움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그 발끝의 춤사위는 눈부셨다. 한 인간으로서 도달할 수 있는 발레 예술의 최고 경지는 고스란히 발을 바치고 얻은 성취였다. 그녀의 남편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발이라고 칭송했다. 한점 굴욕의 기미 없이 당당하게 자기 생을 향해 돋움하는 발, 나무뿌리처럼 거칠었으나 경배하고 싶은 발이었다. 전족이 성적으로 대상화된 여성의 삶을 상징한다면 강수진의 발은 거침없이 자기의 한 세계를 열어젖힌 여성의 삶을 상징한다 해도 좋으리라.
235 사이즈가 표준이던 시절 250 나의 ‘왕발’은 콤플렉스였다. 가능하면 남의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신발을 벗어두었다. 매력 없이 발 큰 여자라는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입으로는 독립과 자유를 외치면서도 의식으로는 여전히 전족을 차고 있었던 것일까. 몸을 대상화하고 표준화하는 왜곡된 시선의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아니, 아무 반성 없이 그것을 수용한 나의 무책임이 더 문제였으리라. 사실 누구도 내 발에 관심이 없었다. 굳이 발을 감출 필요가 없었다.
내가 발을 끌어안고 전전긍긍하는 동안 수많은 발들이 나를 지나쳐가며 한마디씩 일러주었다. 어떤 발은 정의를 설파하고 어떤 발은 미심쩍은 행복의 지름길을 귀뜸해주었다. 또 어떤 발은 성취의 보람을 일러주었으나 내 마음을 서늘하게 일깨운 것은 뜻밖에도 카라바조가 그린 순례객의 맨발이었다. 순례객의 차림은 남루했고 화폭 전면에 배치된 큰 발에는 때가 끼어 있었다. 아름답고 성스럽게 이상적 신체 비율로 그림을 그리던 16세기, 카라바조는 속세의 보통 인간들을 등장시켜 있는 그대로 그렸다. 그들에게서 느껴지는 가난과 그늘을 감추지 않고 담아냄으로써 인간 본성과 삶의 본질을 표현하고자 했다. 초라한 맨발의 진실이 도리어 삶의 통찰로 인도한다는 깨달음이 나를 부끄럽게 했다.
문제는 大足 대발이 아니라 그 발이 남긴 생의 궤적 아니겠는가. 겨우 내 몸 하나 지탱해온 발, 절뚝거리며 걸어온 흔적이 아슴푸레했다. 진작, 감추지 않고 드러냄으로써 삶의 중심이 튼튼해진다는 이치를 알았더라면 이렇게 먼 길을 돌아오지 않았으리라. 맞지 않는 틀에 자신을 꿰맞추다 제 인생의 시간 도둑이 되는 짓도 하지 않았으리라. 늘 바닥에서 소심한 주인을 섬겨온 나의 발. 이제는 당당하되, 진짜 부끄러운게 무엇인지 아는 걸음이길 바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