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구름이 몰려온다. 제6호 태풍 카눈 북상 소식으로 티브이에서도 종일 재난방송 중이다. 강하고 느리게 통과해서 많은 비와 강한 바람으로 피해가 클 것이라고 하니 걱정이 된다. 연일 톱뉴스로 보도되는 태풍 소식에 중환자실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내 살붙이 남동생 모습이 겹친다. 문득, 몰려오는 태풍이 동생의 몸속을 돌고 있는 비브리오처럼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전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늘 바빠 목소리 듣기도 어려운 조카가 전화를 하니 무슨 일이 생겼나 싶어 지레 가슴이 철렁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가 아프다고 했다. 남동생이 비브리오패혈증으로 지난밤에 응급수술을 하고 병실이 없어서 아직 응급 중환자실에 있다고 했다. 조카는 아버지가 의식이 없다고 울먹거렸다.
하루에 한 번 오후 1시 30분에 한 명에게만 면회가 허락된다고 하는데 영동에서 가려니 그 시간을 맞추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동생들한테 현재 상황을 알리려고 번호를 누르는데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어머니한테는 어떻게 얘기할까. 가슴이 미어지고 눈물이 났다. 잠시 마음을 진정한 후 어머니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머니는 딸의 목소리만 들어도 좋아하신다. 어머니의 반가움에 찬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데 또 눈물이 났다. 순간, 구순을 넘기신 어머니가 슬픔을 알아채면 안 될 것 같아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식사는 하셨는지. 오늘은 어떻게 지내실 건지. 괜한 일상 얘기만 했다. 어머니는 경로당에서 점심을 드시는 날이라고 하셨다. 구십 사세인 어머니한테 경로당 친구들은 유일한 삶의 활력소이다. 어머니는 날이 더운데 딸이 힘든 밭일을 할까 봐 오히려 걱정하셨다.
다음 날 조카에게서 전화가 왔다. 동생을 중환자실로 옮겼는데 병원 측에서 오늘 특별히 추가 면회를 허용해 주겠다고 했단다. 나는 서둘러 대전역으로 가서 부산행 KTX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중환자실에서 의식도 없이 누워있는 동생을 보니 기가 막혔다. 의사는 동생의 혈압이 매우 낮아 자가 호흡이 안 된다고 했다. 살릴 수 있는 확률은 50%라고 했다. 동생의 손과 발이 얼음처럼 차가웠다. 혈이 통하지 않아서 괴사가 일어날 수도 있고. 어쩌면 다리를 절단하게 될지도 모르고 사망에 이를 수도 있다면서 병원에 너무 늦게 왔다고 했다.
나는 살려달라고,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동생을 살려달라고 의사 선생님을 붙잡고 애원했다. 그것 밖에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절망스러웠다.
직장 때문에 부산에서 혼자 지내는 남동생은 아파도 누구에게 말도 못 하고 고통이 심해져서야 조카에게 연락한 것 같았다. 조카에게 동생을 부탁하고 늦은 밤 나는 여동생 내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우리 형제들은 당분간 어머니에게 이 사실을 알리지 말자는데 의견을 모았다.
며칠이 지났다. 조카는 아버지의 의식이 돌아왔다면서 좋아했다. 삶과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던 동생의 의식이 돌아온 것이다. 삶을 놓지 않고 강한 의지로 이겨낸 동생에게 고마웠다. 의료진들의 노력과 현대의학의 도움으로 동생은 우리 곁에서 함께 내일을 꿈꾸며 살아갈 수 있게 된 것이다. 이삼일이 지나 조카는 동생을 자기가 근무하는 서울의 대형 병원으로 옮겼다.
그 시각, 태풍 카눈은 여전히 우리나라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카눈이 많은 비와 바람을 동반할 것이라는 뉴스를 보며 마음이 착잡했다. 지난 장마에 수해를 입은 사람들의 상처가 아직 그대로인데 태풍까지 오고 있다니. 수해와 산사태로 피해 입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동생의 병이 호전되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카눈을 밀어낼 방법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 앞에서 나는 그저 나약한 작은 존재일 뿐이라는 생각을 하며 애가 탔다.
나는 육 남매 중 맏딸이다. 젊은 나이에 갑자기 사고로 세상을 뜨신 아버지의 부재를 깨닫기도 전에 둘째와 넷째 남동생 두 명이 차례로 하늘나라로 갔다. 당시, 우리 가족들의 슬픔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긴 세월 동안 아버지와 두 동생에 대한 그리움으로 어머니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 모진 세월을 살아오신 어머니한테 어떻게 또 세 번째 남동생의 소식을 전해 드린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하고 머리를 쥐어짜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았다. 더 이상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그저 어머니께 자식을 먼저 앞세우는 슬픔이 더는 없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마음뿐이었다.
태풍이 우리나라를 지나면서 많은 비를 뿌리고 있던 날. 동생은 결국 두 다리를 절단했다. 비브리오균이 혈액을 타고 돌면서 몸을 괴사시키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고 했다. 울면서 동생의 다리 절단 소식을 전하는 조카의 전화를 끊고 나니 어린 시절 소아마비로 고생했던 동생 생각이 났다.
육십오 년 전쯤 어린 동생은 소아마비에 걸렸다. 동생 나이 네 살이었는데 어머니는 동생을 치료하기 위해 용하다는 병원과 한의원은 다 찾아다녔다. 아버지의 빚보증으로 가산이 기운 상황인데도 돈을 아끼지 않고 동생치료에 매달렸다고 했다. 그 덕분에 동생은 겉으로 보기엔 소아마비를 앓았다는 티가 나지 않을 정도로 호전이 되었다. 동생의 다리가 그렇게 멀쩡하게 된 것은 모두 어머니의 지극한 자식 사랑 덕택이었음을 나는 어렸을 때부터 누누이 들어서 알고 있었다.
어머니가 그토록 지켜주려고 애썼던 동생의 다리를 다시 잃게 된다니. 믿기지도 않고 믿고 싶지도 않아 나는 한동안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하늘만 멍하니 바라보았다.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다리를 잃고 좌절하며 살아갈 동생과 두 다리를 잃은 아들을 만나 망연자실하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잠이 오지 않았다. 내가 자식을 낳아 키워보니 알겠다. 어머니에게 자식은 우주이고 삶의 전부라는 것을. 앞으로 어머니가 받을 충격이 걱정되었다.
태풍 카눈은 우리나라를 빠져나갔다. 태풍이 할퀴며 지나간 자리에 피해의 흔적을 남겼듯이 비브리오균은 동생의 두 다리를 빼앗아 갔다. 비록 두 다리는 잃었지만, 세상에 살아 있음을 감사하게 여겨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나는 동생의 모습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두 다리를 잃고 낙담하고 있을 동생한테 무슨 말로 위로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았다.
두 다리를 잃은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지만, 가족들의 위로와 사랑의 힘으로 동생은 하루하루 날이 갈수록 아픔에서 벗어났다. 가을과 겨울이 지나고 생명의 계절 봄이 왔다.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살아있기에 만날 수 있고 이야기도 나눌 수 있다. 고통의 날들도 시간의 흐름 속에 지나간다.
의족을 한 다리로 걷기는 아프고 불편하다고 동생은 휠체어를 타고 있었다. 그토록 즐기던 술과 담배를 끊었다고 했다. 철봉이나 기구 운동으로 몸을 단련해서 적당히 근력이 붙고 예전보다 더 건강한 모습이었다. 절망을 딛고 일어선 동생은 잃은 다리 대신 마음의 다리로 세상 앞에 우뚝 선 것이다.
동생이 밝은 목소리로 싱긋 웃으며 나를 부른다. 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