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그룬의 분노와 아이슬란드의 발견 | 바이킹 여성 (youtube.com)
조회수 378,223회 2024. 9. 15. ISLANDE
조회수 378,223회 • 2024. 9. 15. • ISLANDE
바이킹은 유럽을 영원히 바꾸었지만, 그들 중 절반은 집단 기억에서 거의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바로 여성들입니다. 이는 매우 부당합니다. 바이킹 세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놀라운 업적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바이킹 여성들은 배를 지휘하고 식민지를 정착시켰습니다. 감독: Alexander Hogh, Kai Christiansen, Judith Voelker, Yoav Parish
52:02
조바스 유산과 하이타부의 몰락 | 바이킹 여성
제작자: Best Documentary
간략히
What Beauty was Like for Vikings
Nutty Productions
조회수 121만회 2년 전
3: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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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회수 653회 2년 전
바이킹 여성들은 '방패 처녀'라고 불리며 남성과 동등하게 전투를 수행했으며, 그중에는 고위직 군사지도자도 있었다고 합니다.실제로도 무장들과 방패들, 군마 두필과 함께 매장된 고위직 바이킹 방패 처녀 한명의 무덤이 발굴되기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이킹 여성들은 자신이 원한다면 얼마든지 남편과 이혼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습니다. 다만 이혼을 하려면 결혼 당시에 남편으로부터 받았던 지참금을 다시 돌려줘야 했습니다. 바이킹 여성들이 이처럼 권리가 강했던 까닭은, 남성들이 배를 타고 항해를 하면서 집을 비우는 기간이 길어지면서 그 기간 동안 아내가 집을 관리하고 재산과 농토를 지키는 등 실질적인 가장 역할을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합니다.
결혼한 여성은 '후스프레야(húsfreyja)'라고 불렸으며 육아, 가정일, 농장일 등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습니다.
여자는 20세가 되면 법적 성년이 되었고 스스로 거주지를 결정할 권리가 있었습니다.
다만 결혼에 대한 권리는 없어서 제 아버지가 짝지어주는 남자와 결혼해야만 했습니다.
신랑은 신부 가족에게 지참금 'mundr'를 지불했습니다. 여성은 의외로 이혼하고 재혼할 수도 있었는데, 이건 남자들이 밖에 나갔다가 죽는 일이 하도 많아서 그랬습니다.
여자들은 여사제(gydja)나 예언자(sejdkvinna)가 될 수도 있었고 시인, 룬어 해석자, 상인, 약사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위에서 언급한 '방패 처녀'의 이야기가 진실인지에 대해서는 약간의 논란거리가 있지만 일부 여자들은 병사로 활동하기도 했을 정도라고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의 유입 이후 여성의 권리는 서서히 악화되더니 13세기 후반부터는 여타 기독교 문화권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바이킹(Viking)하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쇠뿔 달린 투구, 유럽의 약탈자, 술과 여자, 화려한 수염 등을 연상케하는 바이킹은 유럽 역사 속의 스칸디나비아 해적입니다.
Viking의 ‘vik’는 ‘바다의 만에 사는 사람들’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지요. 하지만 바이킹이 처음 출현한 것은 793년 영국 캠브리아 주의 린디스판이라는 마을이었습니다.
교회의 수도사들을 죽이고 금은 집기를 약탈한 후 홀연히 사라졌던 것이 그 시작이지요.
이후 해마다 영국 해안에 나타나 살인과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바이킹의 약탈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것은
‘드라카스’라 불리는 50인승 정도의 배였는데, 당시의 어떤 배보다도 빠른 속력을 자랑한 덕분에
신출귀몰한 바이킹의 이미지를 만드는 일등공신이었습니다. 평소에는 상인, 농부, 장인 등 일상 생활에 헌신하다가 약탈하러 갈 때에만 무기를 잡는 조직력 또한 바이킹만의 특징이었지요.
이들의 가장 큰 특징은 무자비함이었는데, 약탈에 그치는 정도를 넘어 남자들을 몰살하고,
여자들은 납치해 노예로 팔았으며, 마을 전체를 불사지르는 것이 기본이었습니다.
유럽의 8세기~11세기는 바이킹으로 인해 공포 시대가 되었으며
당시 기독교인들의 기도에는 “주여, 북방 야만인의 노여움으로부터 우리를 구해주소서.”라는 기도문이 꼭 포함될 정도였다고 합니다.
현재의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가 세계에서 인정받는 국민성을 지닌 것과는 참으로 대조적이지요.
바이킹의 후손은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넘어 아일랜드, 아이슬란드, 그린란드,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까지 널리 퍼져 있습니다.
세계 제 2차대전의 노르망디 상륙 작전으로도 유명한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은 바이킹의 약탈을 견디지 못한 프랑스의 왕이 바이킹의 두목에게 노략질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하에 떼어준 지역이기도 한데,
노르망디의 어원이 ‘북쪽의 사람들이 사는 곳’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것과 일맥상통하지요.
이러던 바이킹은 해적에서 점점 국가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하여 덴마크를 건설하기에 이릅니다.
덴마크의 카누트 왕은 영국과 노르웨이까지 정복하는 위업을 쌓지요. 이 때 영국에 정착한 덴마크 바이킹은
후일 독일계와 섞여 앵글로색슨 족을 이루게 됩니다. 또한 러시아는 바이킹의 침입을 받느니
스웨덴의 바이킹 두목을 왕으로 옹립하여버리는 극단의 결정까지 내리게 됩니다.
러시아 건국이 바이킹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던 것이지요.
이러한 바이킹은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을까요? 바이킹은 국가를 만들고 정착하며 기독교 신앙을 접하게 되는데,
점차 약탈과 살인을 죄악시하는 기독교 문화에 동화됩니다.
바이킹 지도자들이 세례를 받으며 바이킹 공포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지요.
기독교가 이룩한 최대 업적 중 하나가 토속 신앙을 섬기던 바이킹을 크리스천으로 개종시킨 일이라고 하니,
당시의 바이킹이 유럽 역사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할 수 있겠습니다.
전세계 요트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스웨덴이 어쩐지 이해가 가기도 하네요.
이상 스칸딕프라자에서 전해드린 유럽 역사 속의 바이킹 이야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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