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술가의 식도락(食道樂)-
1. [MUIMUI]
때로 집중하고 싶은 그 무엇이 있다면 혼자 음미하는 시간을 가져라.
그것이 멋이든, 맛이든, 흥이든... 혼자 서점에 들러 보고 싶은 책을 찾아보거나, 영화 삼매경에 빠져 감독의 의도를 읽어내는 일, 한적한 길을 걸으며 무념에 빠져보는 것, 그리고 맛을 음미하며 즐기는 일들을 누구는 초라하고 청승맞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면의 성찰과 창조적인 구상, 그리고 온전한 휴식을 원한다면 절대 필요한 시간이다. 함께할 누군가를 찾아내고, 시간을 정해서 약속하는 번거로움이나, 상대방을 배려하기 위한 옷차림, 조금은 가식적인 말과 행동, 그리고 누군가의 간섭이나 시선에서 벗어나 자유를 만끽한다는 것 너무나 가슴 벅찬 일이 아닌가.
그곳에 가면 먼저 건축양식이 눈에 띈다. 철 구조에 콘크리트와 유리로 마감된 2층 건물의 가운데를 드러내고 비워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나무와 꽃들로 장식을 한 건물 천정에는 배관 파이프가 훤히 들어난 전형적인 포스트모던 양식이다. 모던양식에 자연과의 조화를 이끌어 내고, 좌석간 거리를 충분히 두어 마음의 여유를 즐길 수 있어 주변사람들에게 간섭받기 싫어하는 현대인들의 마음을 잘 헤아리고 있다. 2층에는 룸과 실내 테이블, 그리고 테라스로 분할된 공간이 마련되어 있어 서구건축양식에 한옥의 장점을 고려한 디자인이 눈에 들어온다. 소규모 모임부터 부담 없이 친구와 담소를 나눌 수 있고, 파티와 패션쇼 등의 행사도 가능할 것 같다.
안락한 소파와 작품 같은 다기(茶器)와 소품들은 음식의 품격을 높여준다. 이집의 음식은 안주인의 성품만큼이나 단아하고 정갈하다. 맛과 멋으로 칭찬 받아 마땅할 음식 중, 난 손이 덜 가는 단순한 메뉴를 좋아한다. 모든 재료가 신선하여 요리의 과정이 짧을수록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내가 자주 먹는 음식은 된장비빔밥이다. 한우와 풋고추를 듬뿍 넣어 개운하고 부드러운 맛이 일품이며, 무심한 듯해 보이지만 건강과 식감을 고려한 요리사의 정성이 듬뿍 담겨있다.
겨울에는 차 한 잔과 구운 가래떡을 시켜 조청에 찍어 먹으면 어린 시절과 고향의 어머님을 떠올릴 수 있고, 한 여름엔 후식으로 얼음을 갈아 우유를 살짝 곁들인 완두콩 빙수가 일품이다.
가끔 내게 주는 가장 큰 사치이며, 짧은 휴식은 바로 이곳에서 이뤄진다.
반 한 끼, 술 한 잔 [MUIMUI]
서울시 강남구 신사동 653-4. ☎02-515-3981,2
2. [청목]
세상사는 즐거움 중 식도락(食道樂)만한 것이 있을까. 생존을 위해 영양분을 섭취하는 것이 아니라 맛을 음미하기 위해 요리하는 지구상의 유일한 생명체가 인간이다. 후각을 통해 뇌를 자극하고, 시각적 즐거움과 미각을 통해 맛을 음미할 뿐만 아니라 신선한 재료를 씹을 때 나는 소리를 통한 청각적 즐거움까지 식도락만큼 사람들을 만족케 하는 행복한 자극도 없을 것이다.
나는 곳곳을 다니며 여러 음식을 두루 맛보며 즐길 수 있는 여유와 형편은 못된다. 그러나 같은 값이면 발품을 조금 더 팔더라도 맛있는 포만감 때문에 느낄 수 있는 행복한 경험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송파구 삼전동 삼전사거리에 가면 청목(靑木)이라는 한식집이 있다. 건물 2.3.4층의 넓은 식당은 평소에도 줄을 서서 한참을 기다려야 음식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일단 테이블에 앉으면 주문이 필요 없다. 기본 상차림에 추가 요리를 주문할 수 있는데 12,000원 밥상이 푸짐해서 굳이 다른 요리를 추가하지 않아도 된다. 시간을 절약하기 위해 잘 차려진 밥상을 테이블 레일 위로 쭉 밀면 상차림이 완성된다. 돌솥밥에 씨래기국과 콩비지를 비롯하여 보쌈, 잡채, 맛있는 간장게장과 생선구이, 각종 산채나물이 한 상 가득하다. ‘정말 아낌없이 대접받는 느낌이 이런 것’이구나 하는 자존감마저 느낄 수 있다.
일정이 없어서 오랜만에 늦잠을 잘 수 있는 날이면 좋은 친구와 미리 약속을 하고 이른 점심을 먹으러 정오쯤 청목을 찾는다. 실컷 게으름을 피우고, 오랜만에 정겨운 담소를 나누며, 가족과 함께 하는 느낌을 보상 받기라도 하듯,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낄 만큼 충분히 먹고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여기는 2인 상차림이 기본이라 혼자 즐길 수는 없다. 그러니 좋은 친구와 미리 약속을 하고 들러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는 밥상을 마주할 수 있다.
주말 점심이나 저녁에 온 가족 또는 중년쯤 되어 보이는 다수의 남녀가 한 자리에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맛에 취해 있는 사람들을 보면 ‘사람 사는 것이 저쯤은 되어야지’ 하는 자조 섞인 생각을 한다.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하고 맛있는 음식을 나눈다는 것,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이라는 생각을 문뜩 해본다.
[청목] 서울시 송파구 삼전동 28-2. ☎ 02-412-1122
3. [ROTOLO]
프랑스인들은 신분 상승을 위해 가난한 사람들도 가끔은 정장을 하고 고급 식당에 들러서 식사예절을 익힌다고 한다. 언제 올지 모를 기회에 대비해 갖춰야할 기본적인 소양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우리는 상대방을 배려하고 품격을 갖춰야하는 예의범절이라는 굴레 속에 살지만, 누구나 한 번쯤 격식을 벗어버리고 가끔은 해방감이나 자유를 맛보고 싶어 할 것이다. 시끄러운 음악을 들으며 특별히 맛있는 맥주와 롤피자, 파스타 등 다양한 요리를 저렴하게 먹을 수 있는 곳이 있다.
이태원 해밀턴 호텔 건너편에 소박하고 단아하게 자리 잡은 이탈리안 팝 레스토랑 ‘로또로’는 일탈하듯 격식을 던져버리고 싶을 때 제격이다. 그곳은 빨간 벽돌에 늘 흑백 영화가 상영되고 직접 만들어서 파는 팥빙수에서부터 다양한 메뉴를 선택해서 맛 볼 수 있다. 특히 매니저가 직접 개발한 스파이시 오징어 크림 파스타는 매콤함과 달콤함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는 인기 메뉴이다.
로또로는 상호명이기도 하지만 롤 피자를 뜻하기도 한다. 여덟 가지 롤 피자 중 콤보 로또로, 핫 페퍼로니 로또로, 갈릭새우 로또로 등이 손님들에게 인기가 많고, 블랙 더치피자 종류에서는 고르곤졸라피자, 페퍼로니피자, 새우가 토핑으로 올라간 핫쉬림프피자 등이 주로 많이 소비되는 메뉴라고 한다.
바쁜 일상에 허기를 채우고 싶을 때나 일과를 마치고 맛있는 맥주와 음식을 사이에 두고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싶을 때, 나는 ‘로또로’를 적극 추천한다. 세계 각국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풍습마저 다양해 이국적인 이태원의 이탈리안 팝 레스토랑 ‘로또로’는 잠시 일상에서 탈출하여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해방구이다.
지갑이 가벼운 사람이나 마음이 가난한 사람도 풍족한 식사를 할 수 있고, 다양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으며, 가격대비 만족도가 높은 ‘로또로’를 방문하면, 평소에 입에도 대지 않는 맥주잔을 들고 가게 한 귀퉁이에 즐거워하고 있을 나를 만나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ROTOLO]
서울시 용산구 이태원동 127-12번지 1층. ☎ 02-794-0095
4. [청국장밥]
어린 시절. 친구들과 달리 친할머니와 외할머니를 대면한 적도, 사랑을 받아본 적도 없다. 할머니들께서는 내가 막내에 늦둥이로 태어났을 때 이미 돌아가신 뒤여서 할머니의 관심과 사랑을 듬뿍 받는 친구들이 무척 부러웠다. 부모의 완고함에 비해 할머니는 모든 것을 포용할 수 있는 넉넉함과 부드러운 심성, 따스한 품이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3~4학년이 되도록 나는 막내라 여전히 어리광에 익숙했었고, 어머님 품에 안기면 입버릇처럼 '난 세상에서 엄마 냄새가 제일 좋다'며 속삭였다. 그러므로 어머니의 엄마이거나 아버지의 엄마이신 할머니의 손을 잡거나 업혀 다니는 아이들에 비해 나는 늘 사랑을 반쯤 손해 본다는 생각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아직도 할머니의 체취는 어떤 향인지 그립고, 윤기 없고 까칠한 손으로 아껴두신 쌈지 돈과 곶감을 주셨을 할머니의 사랑에 갈증을 느낀다.
난 그런 할머니를 청국장이라고 정의하고 싶다. 아름답고 세련된 모습은 아니지만, 푸근하고 정겨운 품과 체취로 어린 시절 고향을 느끼게 해주며, 절대 해가되지 않을 넉넉하고 여유로운 심성과 자신의 맛을 드러내지 않는 어울림이 닮아 있기 때문이다.
청국장은 콩과 볏짚에 붙어있는 바실러스(Bacillus)라는 미생물을 이용하여 만든, 비타민 B가 함유된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콩을 통째로 발효시켜 영양 손실이 적고 몇 달에 걸쳐 발효시키는 된장에 비해 2~3일에 완성할 수 있는 고분자 핵산, 항산화물질, 혈전용해, 단백질 분해 등으로 항암과 면역증강효과가 있는 식품으로 알려져 있다.
종로구 인의동에 위치한 ‘청국장밥’이라는 음식점에 가면 정감 있는 냄새와 미각을 자극하는 푸짐한 음식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서는 청국장을 이용해서 푹 삶아낸 돼지고기를 부추위에 얹어서 내 놓는 수육이 일품인데, 기름을 쫙 뺀 고기는 맛이 담백하고 씹는 맛이 부드러워 미각뿐만 아니라 소화력이 약하거나 다이어트와 피부 건강을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하다. 그리고 다양한 산채나물과 야채, 김 가루를 청국장과 함께 비벼 먹으면 속 편한 포만감이 기분 좋게 밀려든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할머니의 손맛을 느끼고 싶고, 저녁밥을 혼자 먹기 싫다면 동료나 친구들을 불러 이곳에 들러라. 마음 푸근하고 정감 있는 밤을 선물 받게 될 것이다.
[청국장밥]
서울 종로구 인의동 77번지. ☎02)3676-2136
5. [소호정(笑豪亭)]
비가 내리는 서러운 주말이다. 시덥잖은 이야기나 하며 한 잔 하자는 사람도 없다.
삶의 굴레에서 맴도느라 주변 사람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아직도 악몽은 두렵고 혼자 보내는 주말은 외롭다.
내리는 비에 제 몸을 주체 못하는 단풍잎처럼 내 감정도 위태롭다.
며칠 전 가을비가 쏟아지더니 무게를 이기지 못한 낙엽은 포도 위에 겹겹이 쌓여 차가 지날 때마다 볼품없이 이리저리 나뒹굴고 있었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아쉽고 순식간에 떨어져 볼 성 사납게 나뒹구는 낙엽이 애처로워 해물파전에 막걸리 한 잔을 기울이며 담소 나눌 친구를 부르려하니 막상 떠오르는 얼굴이 없었다. 삶의 굴레 속에 맴도느라 주변 사람을 둘러볼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던 모양이다.
비 오는 날, 우린 습관처럼 파전과 막걸리를 떠올린다. 그 막연한 생각엔 그만한 이유가 있단다. 비 오는 날에는 높은 습도로 인하여 기분이 우울하고 열이 많이 나게 되는데, 이럴 때 밀가루 음식이 열을 낮추어 몸을 식혀주는 효과가 있다고 한다. 특히 막걸리와 해물파전에 많이 들어있는 단백질과 비타민B, 아미노산이 만들어내는 세로토닌 성분이 탄수화물 대사 분비를 증대시켜 기분을 좋게 해준다. 그러니까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비 오는 날에 먹는 밀가루 음식은 몸에서 생체적으로 필요한 반응행동이라고 할 수 있다.
양재동에 가면 <<소호정(笑豪亭)>>이라는 국수와 모듬전, 묵무침을 맛있게 하는 음식점이 있다. 김영삼 前 대통령 부부께서 즐겨 드셨다는 소호정의 안동국시는 밀가루와 콩가루를 섞고 여기에 현미 식초와 계란 흰자를 함께 넣어 반죽하는 것이 특징이다. 30도에서 두 시간, 상온에서 하루정도 숙성한 후 면을 뽑고, 국물은 한우 양지 살코기를 두 시간정도 끓여 그 맛이 쫄깃하고 담백하다. 굳이 비 오는 날이 아니어도 문전성시를 이루는 이곳엔 미각을 자극하는 반찬이 따로 있다. 뜨거운 물에 살짝 데쳐 양념을 한 깻잎은 그윽한 향과 맛이 일품이다. 이외에도 육전과 어전, 파전, 송이전을 모듬으로 내놓고, 갖은 양념과 함께 김 가루에 버물린 메밀묵은 온갖 재료의 맛이 입안에 살아있는 듯하다. 속이 허하거나 해장이 필요한 사람은 소고기 국밥이 제격이다. 양지 살코기에 양파와 무를 넣어 우려낸 소고기 국에 콩나물과 밥을 넣어 끓여주는데, 소고기 국밥은 한 여름 땀을 흘리며 먹어도 좋고, 추운 날 뜨거운 국물을 식혀가며 먹으면 속이 든든하고 개운하다.
‘호걸들의 웃음이 있는 집’이라는 뜻의 <소호정(笑豪亭)>은 비 오는 날에도 좋고, 추운 날 허기가 지거나 해장이 하고 싶을 때도 좋을 뿐 아니라 사계절 내내 질리지 않을 만큼 정성스러운 손맛과 넉넉한 그릇에 담아내는 음식은 마음을 여유롭고 기분 좋게 한다. 허기가 지고, 기분이 우울한 날, 소호정에서 포식한 후 배짱 좋게 웃으며 하루를 마감하는 것도 좋을 일이다.
고향의 맛 [소호정(笑豪亭)]
서울시 서초구 논현로 27(양재동 392-11). ☎02)579-7282. www.sohojung.com
6. [마산아구찜- 통나무 2호점]
연말연시,
여기저기 모임에 불려나가 한두 잔 마시는 술에 속은 쓰리고 몸도 지친다. 이럴 때 해장과 피로회복을 위해 집에서 재배가 가능하고 손쉽게 요리할 수 있는 식재료는 무엇이 있을까? 그것은 바로 콩나물일 것이다. 콩은 우리에게 식물성 단백질을 제공하고, 발효과정을 거치면 된장, 간장, 고추장, 청국장 등 한식에서 빠질 수 없는 양념이 된다. 그 뿐만 아니다. 시루에 콩을 씻어서 적당량의 물만 하루에 몇 번씩 주면 누구나 매일 콩나물을 이용한 반찬 몇 가지를 금방 요리할 수 있다. 콩나물에는 피로회복이나 숙취에 필요한 아스파라긴을 함유하고 있어 몸의 습한 기운을 없애고, 열을 내리며, 변비해소와 수분공급, 혈액순환, 독소제거를 통해 비장과 신장을 튼튼하게 해준다. 특히 고혈압이 있는 임산부, 당뇨병, 비만환자, 위에 열이 많은 사람, 규폐증 환자에게 이롭다. 앞서 말한 규폐증이란 규산이 들어있는 먼지를 오랫동안 흡입하여 생기는 만성질환으로 광부들에게 주로 생기는 병이다. 초기에는 호흡곤란으로 시작되어 기침과 가래, 흉통을 동반하는데, 중국에서 날아오는 미세먼지 때문에 앞으로 콩나물로 만든 음식을 더 자주 먹게 되지 않길 바랄 뿐이다.
이외에도 암환자, 간질, 변비와 치질, 심상성 사마귀 등의 증상에도 효과적이라니 이보다 더 좋은 식재료가 또 어디 있을까. 진시황이 생전에 콩나물의 존재를 알았다면 세상에 없는 불로초를 찾으려고 신하들을 보내지 않고 콩나물 요리를 더 애용했을지 모를 일이다.
종로구 낙원상가 어귀에 가면 통나무 2호점 ‘마산 아구찜’이 있다. 입구가 크지도 않고 화려하지도 않아 찾기도 쉽지 않은 그저 흔히 볼 수 있는 동네 음식점이다. 과거엔 아구 또는 아귀라 불리는 못생긴 녀석이 잡히면 어부들이 쓸모없는 생선이라고 바다에 던져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저지방 생선으로 다이어트에 좋고 성장발육과 피부건강에 좋다고 알려지면서 요즘은 제법 귀한 생선으로 대접받고 있다. 콩나물에 의해서 비로소 완성되는 매콤한 아구찜, 여기에 칼칼한 맛을 내는 고추에 들어있는 캡사이신 역시 지방분해 효과가 있어 비만예방에 좋을 뿐 아니라 항암작용과 진통제 역할도 한다고 하니 아구찜이야말로 현대인들에게 꼭 필요한 음식이 아닌가싶다. 이 집에서 아구찜을 시키면 첫 번째 무우로 만든 맑은 물김치가 나오는데 매콤함을 씻어주는 청량효과와 함께 새콤달콤한 맛이 그만이다. 난 아구찜이 나오기도 전에 한 그릇을 다비우고 다음 그릇을 비우고서야 식사가 끝날 만큼 그 맛에 중독 된지 오래다. 여기에 야채볶음밥을 주문해서 아구찜 양념과 함께 비벼 먹으면 금상첨화(錦上添花)가 따로 없다.
한국의 고풍스러운 문화를 집약해서 볼 수 있는 곳이 사대문 안의 궁궐과 인사동을 비롯해서 북촌이라면, 서민들의 애환을 달래주던 곳이 종로3가 뒤편의 피맛골과 낙원상가 인근 주변 음식점이 아닌가 싶다. 그 어귀에 내가 자주 찾는 통나무 2호점 마산 아구찜이 자리 잡고 있으니 오가는 길에 생각나면 들러봐라. 아마도 땀 흘리며 먹는 아구찜 맛에 반하게 될 것이다.
통나무 2호점 [마산 아구찜]
서울시 종로구 낙원동 62-2. ☎02-765-4942
7. [강가(Ganga)]
나는 철들자마자 고아가 되어버렸다. 아버님은 오랜 투병 끝에 돌아가셨고, 어머님은 잠결에 요양원에서 숨결을 거두셨다. 부모님께서는 늦둥이 막내 자식이 효도할 기회조차 주시지 않고 성급하게 세상과 이별을 하셨다. 그래서 내가 누리는 호사는 늘 쓸쓸함이 묻어있다. 좋은 풍경을 마주하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을 때면 나도 모르게 가끔 가슴이 울컥하고 목이 메인다. 부모님을 모시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여유롭게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기회를 단 한 번이라도 가져봤더라면 이렇게 서럽지 않았을 텐데. 시간이 흐르고, 나이가 들수록 아쉬움은 퇴색되지 않고 선명해질 뿐이다.
부모님을 모시고 가고 싶은 음식점 중에 하나가 압구정에 위치한 강가(Ganga)이다. 강가는 한국에서 인도의 전통식을 맛볼 수 있는 곳으로 압구정역 3번 출구에서 나오자마자 좌측에 이국적인 분위기를 고스란히 옮겨놓은 넓고 쾌적한 인도고급요리 전문점이다. 강가(Ganga/인도 북부 평원지대를 흐르는 갠지스강의 인도어)는 인도인들의 정신적 고향으로 ‘천국에서부터 시작된 성스럽고 깨끗한 강’, 인도인들에게는 ‘신성한 자연과 사람을 살리는 어머니의 강’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음식점 강가는 하이드라바드 지방의 무굴왕조 음식과 펀자브 지방의 탄두요리와 유명한 나왑(Nawab)왕의 라와치르하나스(Bawachifhanas)라는 인도의 고급정통요리가 주 메뉴이다. 모든 요리에는 인공조미료(MSG)를 전혀 사용하지 않고, 약 20여 가지의 향신료로 맛을 내며, 신선한 식재료를 통해 건강한 음식을 제공한다. 특히 20년 이상 된 인도요리전문 세프가 주기적으로 식재료와 음식을 점검하며, 각 매장마다 10년 이상 경력의 인도인 셰프가 세 명 이상 상주하여 인도고급요리의 정통성과 품격 있는 맛을 선물하고 있다. ‘미슐랭 가이드’와 함께 세계 100개국에서 레스토랑 지침서로 꼽히는 ‘자갓(Zagat)에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인도식당으로 선정되었으며, 중독성이 강한 커리와 화덕에서 구워낸 탄두리치킨을 통해 인도음식의 대중화에 기여하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독일에서 발행하는 아시아 독립적 음식점 안내서인 밀레가이드 2009년과 2010년 에디션, Korea top 20에도 인도음식점으로는 유일하게 강가가 선정되어 대외적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컴퓨터나 책을 많이 봐야하는 사람과 쉽게 눈에 피로감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커리가 좋다. 커리의 주성분인 ‘강황’에 커큐민이라는 성분이 들어있어 눈이 좋아질 뿐 아니라 염증도 완화시켜주며, 세포활성화와 면역력까지 강화시켜 준다니 미각의 호사와 건강을 위해 자주 먹어야할 음식이다. 내가 강가에 가장 자주 먹는 음식은 ‘치킨마크니’인데, 인도의 강하고 독특한 향료의 맛을 완화시킨 부드럽고 달콤한 음식이다. 커리에 곁들여 먹는 음식으로는 얀과 난이 있는데, 얀은 하얀 쌀밥, 난은 화덕에 붙여서 구워낸 얇은 밀가루 빵으로 갈릭난과 버터난이 있는데, 따뜻한 버터난과 먹으면 부드럽고 달콤한 커리의 맛을 깊게 음미할 수 있다.
망중한(忙中閑)을 즐길 요량으로 이국적 풍경과 맛있는 음식을 찾는다면 강가를 추천한다.
[강가(Ganga/압구정 본점)]
서울 강남구 신사동 610-5 구정빌딩 2층. ☎ 02) 3444-3610
8. [목포산꽃게찜]
묵은 먼지는 훌훌 털어버리고 겸허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는다. 혼자서는 똑바로 서서 걷기조차 힘든 세상, 서로 기대고 벗하며 동행한다면 조금은 덜 지치고, 조금은 덜 지루한 삶이 될 것이다.
가끔 마음이 허허로울 때나 시간이 여유로우면, 언제든 기분 좋게 만나서 밥도 먹고 차를 마시는 친구가 있다. 그는 문화·예술·교육의 도시 청주에서 나고 자랐으며, 사람을 위하고 배려할 줄 아는 사람이다. 가끔 사회를 보거나 관객으로 청주예술의전당을 방문하면, 공연장을 가득 채운 관객들의 진지함과 좋은 작품에 아낌없는 찬사를 보내는 청주시민을 보면서 문화인으로써 품격을 제대로 갖추었다고 생각했다. 그런 청주시민의 애정과 관심이 있었기에 청주에서 자라고 활동한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무용가의 반열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나는 그를 '작은 거인'이라고 평가한다. 자그마한 체구와 차분하고 온화한 미소 뒤에 원칙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완고함과 일에 대한 추진력을 보면 '거인' 못지않은 힘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는 감성적이고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통해 서울무용제와 전국무용제, 한국무용제전에서 작품성을 인정받고 수상의 영예를 누렸으며, 재능기부를 통한 사회공헌활동으로 많은 예술가들의 귀감이 되고 있다. 그와 함께하는 시간은 언제나 유쾌하고 발전적이다. 내게 둘도 없을 만큼 좋은 친구 박시종이 유별나게 좋아하는 음식점이 있는데, 그곳은 내 십 년 단골이기도 한 마장동 소재 ‘목포산꽃게찜’이다. 무작정 가면 줄을 서서 한참 기다려야하거나 때로 지쳐서 포기하고 돌아올 만큼 유명한 맛 집이다. 특히 매일 새벽에 올라오는 꽃게의 품질이 좋지 않으면 돌려보내고 그날 장사를 접을 만큼 주재료인 꽃게에 각별히 신경을 쓰는 집이다.
꽃게는 봄과 가을이 제철인데, 봄에는 암꽃게가 알을 배고 있어 맛있고, 가을에는 수놈이 살이 쪄 맛있다. 꽃게찜, 꽃게탕, 게장 등 여러 조리법이 있지만 게살이 꽉 찬 가을 꽃게는 그대로 쪄서 먹거나 끓는 물에 삶아서 먹는 것이 최고의 요리이다. 살이 오른 싱싱한 꽃게 그 자체가 최고의 요리이기 때문이다. 사계절 내내 이집에서 먹을 수 있는 별미는 역시 꽃게찜인데, 아구찜과 조리방법이 흡사하지만 꽃게의 짭쪼롬하고 달착지근한 맛을 콩나물과 양념에 버무리면 요즘 같은 겨울에 훌륭한 보양식이 된다. 이집에서 나오는 밑반찬은 맑은 싱건지(무우로 만든 국물김치)와 홍어무침, 메추리알, 해조류와 김치가 나오는데, 밑반찬의 맛이 과하지도 덜하지도 않아 주 메뉴인 꽃게찜의 맛을 해치지 않는다. 꽃게찜을 다 먹을 즈음 돌솥에 지은 고구마·흑미밥이 나오는데, 남은 양념에 비벼 먹어도 좋고 마지막 나오는 숭늉에 말아 먹어도 좋다. 한 겨울 땀을 흘리며 매콤하고 달착지근한 꽃게찜을 먹노라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다. 허물없이 지내는 친구와 먹는 꽃게찜이라면 격식을 버리고 실컷 즐겨도 좋을만한 곳이다.
[목포산꽃게찜]
서울시 성동구 마장동 767-41 ☎ 02)2292-1270
9. [벤또랑 을지로점]
흔히 학식이 높고 행실이 어진 사람을 사군자(四君子/梅蘭菊竹)에 비유한다. 눈 속에서 제일 먼저 고운 꽃을 피워 청초한 자태와 맑은 향기를 간직한 매화(梅)는 선비의 절개를 상징하고, 색채가 화려하지는 않으나 곱고 은은한 향기를 지닌 난(蘭)은 선비의 지조와 여인의 절개를 상징하며, 늦가을 첫 추위와 서리를 이겨내며 피는 국화(菊)는 봄꽃과 다투지 않고 홀로 피어 고고하게 살아가는 은자에 비유되며, 사철 푸르고 곧게 자라는 대나무(竹)는 높은 품격과 강인한 아름다움을 지녀 난세에 절개를 굽히지 않고 지조를 지키는 고아한 군자에 비유되기도 한다. 마음이 정갈하고, 심지가 곧으며, 자신을 드러내지 않는 언행일치(言行一致)를 통해 어떤 환경에서도 외유내강(外柔內剛)의 면모를 잃지 않는 군자 같은 사람이 있다. ‘예술인들의 열정과 혼이 빗어내는 작품은 모든 이들의 삶속에서 꿈과 희망을 심어주기에 존경받아 마땅하다.’는 창원건설 유진성 이사는 문화예술인을 조명하고 후원하는 일에 헌신해오신분이다. 한 손이 하는 일을 다른 한 손이 모르도록 하는 겸손의 미덕을 실천할 뿐만 아니라 300여점의 미술작품을 소장하고 계신다니 진정한 예술 애호가가 아닐 수 없다.
품격을 잃지 않는 멋과 맛, 흥을 즐기시는 유진성 이사께서 가끔 가까운 지인들과 찾는 음식점이 있다. 소란스럽지 않아 담소 나누기에 좋고, 내부 장식이 과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이곳은 그분의 은은한 성품처럼 깨끗하고 소박하다. 프렌차이즈점인데도 주인의 후덕한 마음과 너그러운 인심 탓인지 음식이 유난히 맛있어서 대접하는 사람의 마음과 장소에 따라 체감하는 맛이 다르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다. 중부경찰서 맞은편에 있는 벤또랑은 어디서나 주문이 가능한 수제도시락 전문점이다.
따스한 봄날, 건물근처 공원이나 작은 공터 벤치에 둘러앉아 잠깐의 여유와 산뜻함을 만끽하고 싶을 때 이 곳 음식이 제격이다. 이곳의 메뉴는 크게 네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정성스럽게 구운 차슈와 장어, 도미뱃살 등 저지방 생선구이가 주로 토핑된 로스트는 피부미용이나 다이어트를 즐기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많은 메뉴이다. 이에 비해 후라이는 고소하고 담백하게 튀겨 낸 토핑으로 등심까스와 돈카츠, 타고 등으로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별식로 즐길 수 있는 메뉴이다. 이 외에 동양의학에도 사용되는 강황이 주재료인 다양한 맛의 커리는 소염작용과 항산화 작용, 항암 및 다이어트 식품으로 잘 알려져 있고, 동서양을 막론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어 비상식량이나 별미로 즐길 수 있는 누들(밀가루로 만든 면이나 수제비)도 간편하고 쉽게 먹을 수 있는 인기 메뉴이다. 가끔 여유롭고 차분하게 친구와 담소를 나누고 싶을 때는 연어회와 바비큐차슈, 타코와사비와 유기농 낫또로 요리된 포인트 메뉴로 맥주나 소주 또는 사케를 곁들이면 제격이다.
벤또랑은 직장이나 야외에서 제법 근사한 기분을 내고 싶을 때도 좋고, 퇴근 후 반주를 곁들여 먹기에도 좋은 음식점이다. 특히 주인의 후덕한 인심뿐만 아니라 일본인들의 청결의식을 그대로 담아내는 음식과 매장은 정을 나누고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다. 내가 존경하는 그분의 성품과 닮은 이곳은 언제나 정겹고 풍요로운 안식과 기분 좋은 포만감을 선물한다.
[벤또랑BentoRANG 을지로점]
서울시 중구 저동 2가 48-7(중부경찰서 맞은편) ☎ 02) 2277-4788
10. [충무로 쭈꾸미불고기]
대한민국에서 남자로 살아간다는 것은 수많은 감정의 절제와 지켜야할 덕목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남자다움에 길들여지고 훈련되어진다.
치열한 경쟁과 과도한 업무, 삶의 중량감 탓에 쳐진 어깨를 하고,
희생을 미덕으로 여기며 힘겨운 일상에 눈물어린 미소를 짓는 그들.
오늘, 이시대의 모든 아빠들에게 작은 위로를 통해 쳐진 어깨를 부추겨드리고 싶다.
제30회 서울무용제 경연대상에 참가한 [아빠의 청춘]의 안무의도이다. 한 때, 아들의 눈에 비친 아버지는 존경의 대상이며 때로는 두려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그러나 현재를 살아가는 아빠들은 권좌에서 내려와 가족부양의 의무를 다해야하는 아빠, 다정하면서 신뢰를 줄 수 있는 남편, 살벌한 생존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가련한 존재이다. [쉐프파파의 쿠킹스토리] 저자인 이길남 역시 그런 아빠다. 그는 아내와 딸을 위해 ‘누구보다 쉽고 빠르게, 하지만 맛있게 만드는 특별한 요리’를 모아서 책으로 묶었다.
저자 이길남은 방송생활 17년차의 베테랑으로 업무상 밤낮이 뒤바뀌는 일도 다반사이고, 야근을 수시로 하며, 실수를 하면 여과 없이 드러나는 방송사고 때문에 긴장을 늦출 수 없는 예민한 직업군이다. 그러니 가족들과 함께 할 수 있는 시간, 공유할 수 있는 것들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가끔 딸아이 간식을 위해 해주는 요리가 재미있고 즐겁기 시작했다고 한다. 제법 소질이 있다는 사실에 바쁜 업무를 쪼개가며 요리를 배우기 시작했고, 이제 주말이면 아내와 아이들이 먹고 싶어 하는 음식을 직접 요리해줄 수 있는 실력이 되었으며, 무엇보다 자신이 만든 요리를 맛있게 먹는 가족들의 모습을 보면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단다. 그 인자한 아빠이자 다정한 친구와 연인 같은 남편인 작가가 추천하는 맛 집을 소개하려고 한다.
충무로역 5번 출구 근처에 숯불구이 전문 ‘충무로 쭈꾸미 불고기’가 있다. 1976년부터 여기에 터를 잡고 쭈꾸미 불고기만 전문적으로 만들어 팔아온 식당으로 인근 직장인들의 애환을 엿볼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숯불에 고추장 양념을 한 쭈꾸미와 조갯살을 구워내면 바다 내음이 후각을 자극할 뿐 아니라, 달콤하고 매콤한 미각이 살아나 쭈꾸미 한 마리에 소주 한 잔이 절로 어우러진다. 저녁 시간,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몰려와 빈자리가 없는 이곳에 또 하나의 별미는 쭈꾸미 볶은 밥으로, 양념을 한 주꾸미를 잘게 썰어 밥과 함께 볶다가 마지막에 김치를 더하면, 쫄깃한 주꾸미와 양념이 잘 배인 밥, 아삭거리며 씹히는 김치 맛이 포만감을 잊어버릴 만큼 환상적이다. 이곳에는 마음이 여린 남편과 권좌에서 내려온 평범한 아빠, 업무에 시달리는 힘없는 남자들이 위로받고 충전하는 곳이기도 하다. 나는 직업 특성상 건강과 몸매에 대해 예민한 편이지만, 여기에 올 때만큼은 몸 관리도 뒤로 미룬 채, 쭈꾸미 볶음밥 2인분을 게 눈 감추듯 하고 만다.
[충무로 쭈꾸미불고기]
서울시 중구 필통 1가 3-20. ☎ 02)2279-0803
11. [국수가(菊秀家)]
간밤 꿈속에, 눈물만 남기고 멀어져간, 누이는.
시린 내 가슴에, 한 송이 꽃을 피우고, 여린 자태로 시집간 지 세 해라.
그 고운 모습에 엷은 미소 띠우고, 앞 가리운 눈물에 하늘로 추겨든, 쪽빛 들국화.
올해는 예쁜 꽃신신고, 치맛자락 돌 쓸며 달려와, 가냘픈 목소리로, 내 이름 불러주련만,
댕기 풀고 수줍어하던 모습이, 지금은 가고 없는, 들국화 한 송이.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시절 교내 백일장에서 장원을 수상한 시(詩) ‘누나’이다. 서정주님의 ‘국화옆에서’처럼 소담스러운 국화, 원숙미 넘치는 여인 아니라, 나의 누이는 쪽빛 들국화 같은 어린신부에 비유되었다. 국화는 사군자(四君子)의 하나로 관상식물로 사랑받는 꽃이다. 잎은 어긋나고 날개깃처럼 갈라져 조각의 가장자리에는 작은 톱니들이 있고, 암·수술이 모두 있는 통상화(筒狀花)와 가장자리가 암술로만 된 설상화(舌狀花)가 있다. 들이나 산기슭에 피는 들국화나 감국화는 꽃잎과 뿌리, 싹 모두를 약재로 사용할 수 있다. <동의보감>에서는 ‘국화수는 성질이 온순하고 맛이 달며 독이 없는 물이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국화의 효능을 알아보면,
1. 해독작용과 소염작용이 뛰어나 체내(體內) 정화작용에 효과적이다.
2. 열감기나 기관지염, 폐렴 등에도 효과가 있다.
3. 감국화는 공간의 인지능력과 학습능력 향상 및 인지능력 감퇴 증상을 방지하고,
치매치료에도 효과가 있다고 한다.
4. 국화수를 사용하면 아토피와 비듬을 완화시킨다.
5. 시력이 약하거나 눈의 피로감을 자주 느끼는 사람에게 효과적이다.
뿐만 아니라 <본초강목>에서는 ‘꾸준히 복용하면 혈기에 좋고, 몸을 가볍게 하여 쉬 늙지 않으며, 위장을 편안케 하고, 오장을 돕고, 사지를 고르게 하며, 감기와 두통, 현기증에도 유효하다.’고 국화의 효능을 서술하고 있다.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을 지나 두 번째 사거리 우측 맞은편에 소재한 국수가(菊秀家)는 국화수를 사용하는 국수전문점이다. 담백하고 시원한 바지락 칼국수에서 얼큰한 김치 칼국수, 동지에만 맛볼 수 있는 팥 칼국수, 여름에 콩국에 얼음을 띄워 먹는 시원한 콩 칼국수, 잘 익은 열무에 쫄깃한 국수를 말아 먹는 새콤달콤한 열무 국수와 야채가 듬뿍 들어간 비빔국수까지 다양하고 맛있는 국수뿐만 아니라 고기·김치왕만두 등을 맛볼 수 있는 곳이다. 공연장을 찾아 대학로에 가면 먹는 즐거움을 위해 으레 들르는 곳이다. 이 집의 별미는 역시 쑥과 자색고구마와 호박으로 빚은 삼색들깨수제비이다. 큰 가마솥에 국화수를 붓고 들깨가루를 풀어 듬성듬성 손으로 떼어낸 밀가루 반죽을 넣고 끓이면 흔히 맛볼 수 없는 투박하고 정갈하며 단백한 어머니의 제대로 된 손맛을 맛볼 수 있다. 여기에 온갖 양념과 고소한 참기름을 섞어 만든 주먹밥은 주린 배를 달래고 잊어버린 미각을 일깨워준다. 나른한 봄이다. 기분전환도 할 겸 대학로에 가서 재미난 공연도 보고, 국화수에 끓여낸 삼색들깨수제비와 주먹밥을 먹으며 무심한듯하지만 단백하고 깊이 있는 어머니의 손맛을 느껴보는 것도 좋을성싶다.
[국수가(菊秀家)]
서울시 종로구 동승동 130-33번지. ☎02-3673-5798
12. [채선당(菜鮮堂) 성동구청점]
차갑고 건조한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면, 급격한 환경적 변화로 인하여 신체리듬이 깨지고 식욕부진과 졸음, 두통, 소화불량, 피로감, 어지러움, 권태감 등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한 과정과 현상이 곧 춘곤증(春困症,證)이다. 봄철에는 겨울에 비해 상대적으로 신진대사가 왕성해지면서 비타민의 요구량이 증가하게 되므로 신선한 채소와 과일을 많이 섭취하여 피로 회복과 면역력 향상에 힘써야한다. 바나나는 과일 중에서도 뇌가 활동하는데 필수적인 에너지원인 당을 공급하고 칼로리가 적으면서 체내에 빠르게 흡수되고, 영양소가 풍부하여 봄철 춘곤증을 이기는데 좋다고 한다. 바나나 외에도 춘곤증을 이기는 비타민 공급원이 봄나물이다.
1)두릅은 사포닌의 함유로 혈액순환과 피로회복, 혈당강화 등 당뇨환자에게 좋다. 특히 다른 채소에 비해 단백질이 풍부하고 비타민 A와 C, 칼슘과 섬유질이 풍부하여 다이어트에도 효과적이며, 머리를 맑게 해주고 활력을 주므로 정신적 스트레스가 많은 사람에게 좋다. 4월에 채취한 두릅이 혈당강화에 효과적이어서 '봄 두릅은 금, 가을 두릅은 은'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두릅은 봄에 제격인 나물이다. 2)미나리는 성질이 차서 몸속의 열을 없애고, 가래 제거와 이뇨작용을 활성화 시키며,
식물성 섬유가 풍부해서 변비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 특히 몸속의 독소 배출과 해독능력이 뛰어나다고 알려져 있다. 3)쑥은 따뜻한 성질을 지녀 몸이 찬 사람들이 양기를 보충하는데 효과적인 나물로 추위를 심하게 타는 사람과 여성들에게 특히 좋으며, 비타민 A와 C가 풍부하여 감기예방과 피부미용에도 좋을 뿐 아니라 설사와 복통에도 효과적이다. 4)달래는 비타민 C와 칼슘이 풍부해 감기와 빈혈 예방에 뛰어나며 동맥경화에도 탁월한 효능을 지녔으며, 비장과 신장의 기능을 도와 성욕을 왕성하게 해준다고 한다. 5)냉이는 성질이 온화하여 간을 튼튼하게 하고, 오장육부를 조화롭게 해주며, 지방간을 치료하고 눈을 맑게 하는데 효과적인 봄나물이다. 이처럼 춘곤증을 이기기 위해서는 과일과 채소를 섭취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알려져 있으나, 우리 음식 대부분이 개별 양념을 해야 해서 혼자 사는 사람과 바쁜 업무에 시달리는 직장인들은 비용과 시간에 쫓기어 쉽게 엄두를 내기 힘들다.
일주일에 한 번씩 단백질과 비타민, 섬유질의 섭취뿐만 아니라 다양한 맛을 즐기기 위해 찾는 곳이 있다. 성동구청근처 ‘채선당’이라는 샤브샤브 전문점이 그곳이다. 채선당(菜鮮堂)을 우리말로 풀어보면, '야채가 신선한 집'이며, 샤브샤브는 '찰랑찰랑' 또는 '살짝'이라는 의태어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샤브샤브는 일본 요리의 하나로 끓는 육수에 얇게 저민 쇠고기나 해물을 갖가지 채소와 함께 즉석에서 살짝 데쳐 양념에 찍어먹는 요리인데 사람의 손맛이 다른 것처럼 같은 재료와 요리법인데도 맛이 다를 수밖에 없나보다. 샤브샤브를 좋아하게 되면서부터 여러 곳에 들러 맛을 보았음에도 유독 이집으로 발길이 향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채선당에서 내가 자주 먹는 메뉴는 '스페셜쇠고기샤브'로 1인 가격이 13,000원이고 2인 이상 주문이 가능하다. 우선 끓는 육수에 다진 쇠고기와 어묵, 유부, 얼린 호박과 녹말로 만든 누들과 가래떡, 치즈떡을 넣고 얇게 저민 소고기와 해물, 각종 채소를 데쳐서 소스에 찍어먹는다. 고기와 야채의 향연이 끝나면 만두와 고운 빛깔의 국수를 넣고 끓여 먹으면 신선하고 다채로운 재료의 색과 맛이 어우러져 기분 좋은 포만감을 느낄 수 있다. 이때쯤이면 국물은 말로 형언할 수 없을 만큼 깊은 향과 맛이 우러나는데, 이 육수를 약간 남겨 야채밥과 계란을 넣어 죽을 끓여먹으면 비로소 만찬은 끝이 난다. 나른한 봄날 춘곤증과 맞서 싸우려면 피로 회복과 면역력 향상에 힘써야한다. 각종 비타민과 단백질뿐만 아니라 맛과 향이 어우러진 채선당을 통해 건강한 봄을 만끽해보자.
[채선당 성동구청점] 서울시 성동구 행당동 192-29번지. ☎ 02-2298-1917
13. [국수명가]
나의 첫 데뷔무대는 1997년 3월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였다. ‘시와 무대미술과 남성춤의 만남’이라는 기획전에서 김성옥의 詩 [면죄부]를 바탕으로 연극 ‘에쿠우스’를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묘사한 작품이었다. 이때 김성옥 시인의 초청으로 당시 문화부에서 재직하시다 국립극장장과 의정부예술의전당 사장을 역임하신 최진용 사장님을 처음 대면하게 되었다. 벌써 17년이란 세월을 ‘문화마당21’이라는 모임과 극장 운영자와 예술 감독으로 아름다운 인연을 맺고 있다. 전남 광양에서 출생하여 순천에서 고등학교를 마친 뒤, 부산에서 대학교와 대학원을 졸업하고 변변한 인맥이나 유무형의 자산도 없이 홀로 상경하여 무용수와 작가로써 활동이 보장된 서울시립무용단을 운 좋게 입단하게 되었다. 이후 창작활동과 학문에 뜻이 있어서 무용단을 그만두고 고군분투해야 하는 홀로서기를 선택했다. 사장님께서는 외롭고 고달픈 서울 생활에 보이지 않게 혹은 소리 없이 기댈 곳을 허락해주신 분, 좋은 자리에 초대를 해주시고 아름다운 인연을 맺게 해주셨으며, 필자의 모든 공연에 관객으로 오셔서 자리를 빛내주시고 응원해 주신 분, 늘 걱정과 보살핌으로 힘이 되어주신, 내게는 아버님 같은 분이시다.
광화문에서 삼청동 방향으로 진입하다가 폴란드 대사관을 끼고 쭉 들어가면 국립현대미술관 서울분관 뒤편에 ‘국수명가’가 자리하고 있다. 한옥의 벽을 허물고 통유리로 마감한 이집은 실내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채광이 잘되어 좋다. 전시회에 들렀다가 작가와 찾아간 밥집은 소박하지만 정직하고 인심 또한 후한 곳으로 최진용 사장님의 인품과 참으로 많이 닮아 있었다. 필자가 꼽는 국수명가 최고의 음식은 곤드레 나물과 각종 채소를 들기름에 비벼 먹는 곤드레 비빔밥이다. 잘 데친 곤드레와 신선한 야채가 어우러져 다른 양념은 굳이 필요 없다. 그 맛과 향은 무심한 듯 미각을 자극하고, 먹은 후에도 맛깔스러운 향이 입 안에 가득 남아 있어 여운이 꽤 오래가는 듯하다. 두 번째 음식은 수육 보쌈으로 수육과 부추무침, 잘 익은 갓김치를 깻잎에 함께 싸서 먹으면 신선한 부추와 시큼하고 쌉쌀한 갓김치 그리고 깻잎의 향이 부드럽고 단백한 수육과 함께 입안에서 앙상블을 이룬다. 이외에도 파전과 김치전, 멸치국수 등 다섯 가지의 음식을 맛보며 감탄할 즈음에 주인이 맛보라며 덤으로 권하는 야채비빔국수까지 각기 다른 맛에 도취되어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시간을 만끽했다. 비빔국수에는 멸치육수가 나오는데 멸치 이외에 다른 어떤 맛도 첨가되지 않아 음식 맛을 씻어내고 새로운 미각을 일깨워주는 역할을 제대로 하는 듯했다.
필자가 최상위 맛 집 목록에 국수명가를 두기로 한 이유를 굳이 말하라고 하면,
1. 참기름과 들기름뿐만 아니라 모든 식재료는 거짓이 없다.
2. 집에서 먹는 음식처럼 어머니의 손맛이 그리운 사람에게 제격이다.
3. 인심 좋은 주인의 넉넉한 마음과 정성스러운 상차림이 사람을 감동시킨다.
4. 가격대비 만족도가 최고이다.
5. 어느 한 가지 맛없는 음식이 없다.
6. 음식 궁합에 잘 맞는 밑반찬과 양념장이 마련되어 있고, 식재료의 고유한 맛을 느낄 수 있어서 좋다. 이처럼 음식을 만드는 사람과 대접하는 사람의 정성과 인품에 따라 동일한 재료라도 맛은 달라질 수밖에 없나보다. ‘신체는 영혼을 담는 그릇’이라는 말처럼 평소 언행과 마음가짐에 따라 사람의 외모도 변화된다고 한다. 계절의 여왕 5월에는 자상하고 꾸밈없이 소박한 최진용 사장님의 존안을 뵙고, 수줍어서 평소에 품고만 있었던 감사의 마음을 국수명가에서 꼭 전하고 싶다.
[국수명가] 서울시 종로구 사간동 9번지. ☎02-732-9921
14. [떡갈나무세상 강마을 다람쥐]
가끔 일정이 취소되거나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비는 시간을 어떻게 활용해야할지 난감하다. 딱히 누군가를 만나기도 어중간하고 집에 들러 쉬어 가기도 부족한 시간, 풍경이 좋은 찻집에서 신문을 읽거나 가방에 넣고 다니는 책을 읽어도 좋고, 근처 영화관으로 발길을 돌려 보고 싶었던 영화를 감상하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집중하고 싶은 공연이나 전시, 영화를 혼자 관람하는 것에 익숙한 상태라 그런 것이 내게는 낯설거나 어색한 일도 아니다. 오늘 감상해야할 영화의 필요충분조건은 가장 근접한 시간에 시작하여 약속 시간 30분 전에 끝나야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어야한다. 즉, 예술성이나 관람객의 평점을 고려하고 따질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다행이 5분 후에 시작하여 약속시간 30분 전쯤 끝나는 [어거스트 - 가족의 초상]을 관람하기로 했다.
-지나온 길은 돌이킬 수 없고, 가야할 길은 끝이 보이지 않으니 인생 참 얄궂다.-
이 영화의 시작은 오랫동안 병든 아내 곁을 지키고 있던 교수이자 시인인 남편이 아내를 위해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고 외출한 뒤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데, 사인(死因)은 자살로 밝혀진다. 장례식을 치른 가족들은 오랫동안 떨어져 살아온 탓인지 어색하고 낯설다. 저녁 식사를 하는 내내 갈등은 표면으로 드러나고 충돌하면서 가족이 해체되는 과정을 낱낱이 보여준다. 불행은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남편의 외도 대상이 동생이라는 사실을 알고 배신감과 암 투병의 고통을 견뎌내기 위해 약물 중독이 되어버린 어머니를 누가 모실 것인가를 두고 갈등하는 세 자매, 불행이 유전 된다면 아마도 이 영화와 같을 것이다. 첫째 딸은 아버지의 기대를 뒤로한 채 사랑을 선택하지만 남편의 외도로 상처받고 이혼을 준비 중이며, 둘째 딸은 사랑하는 사촌 동생이 아버지와 이모의 외도로 태어난 남매지간이라는 사실을 알고 분노하며, 셋째 딸은 사랑하는 남자와 약혼을 한 후에 아버지의 장례식에 참석한다. 그러나 약혼자는 어린 조카와 대마초를 피우며 성적 유희를 즐기다 들켜서 도망치듯 집을 떠나며 울부짖는다. 한 가정에서 일어날 수 있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따로 없다. 영화 ‘어거스트-가족의 초상’은 소통하는 법을 잊어버린 채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다. 장례식을 치른 후 경건해야할 식사 시간에 대화는 단절되고 고함을 치거나 물건을 집어던지는 등, 언제 한꺼번에 터져버릴지 모를 시한폭탄처럼 위태롭기만 하다. 시대적 배경은 현재가 아니라 과거이지만 감정표현이 서툴고, 분노조절기능이 작동하지 않는 현대인들의 초상을 보고 있는 것 같아 마음이 불편하고, 한 편으로는 안타깝고 슬펐다.
강남에서 자동차로 20~30분 정도의 거리인 팔당댐 상류에 자리 잡은 ‘떡갈나무세상 강마을 다람쥐’는 도토리음식 전문점이다. 산을 등지고 잘 가꾸어진 넓은 정원을 걷다보면 끝자락에 팔당호가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은 예약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오자마자 자리 잡고 앉아서 바로 식사할 수 있는 곳도 아니다. 번호표를 받고 두어 시간 기다리는 것이 예사이지만 온 가족이 담소를 나누며 여유롭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좋은 곳이기도 하다. 음식점 상호에서도 눈치를 챘겠지만 이곳 음식은 모두 도토리 분말가루가 주재료이다. 내가 좋아하는 도토리 전병은 담백하고 속이 편안한 음식으로 도토리 전을 얇게 붙여내어 그 안에 두부와 고기, 야채를 다지고 말아서 따뜻하게 내어 놓는데, 강렬한 맛으로 미각을 자극하지 않으나 재료에서 볼 수 있듯이 건강에 좋은 음식이라는 생각이 저절로 든다. 쫀득해서 젓가락으로 집어도 부서지지 않는 도토리묵과 된장에 비벼먹는 도토리야채 비빔밥, 도토리 파전에 오징어를 얹어서 구운 도토리 파전, 묵사발과 도토리 비빔국수, 수육 등 어른들 뿐만 아니라 아이들의 미각까지 사로잡은 맛있는 요리 천국이다. 마음이 지치거나 외로울 때, 온 가족이 모여 두어 시간 기다릴 준비를 하고 ‘떡갈나무세상 강마을 다람쥐’에서 가족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혼자 가는 길이라고 생각했던 힘들고 무료했던 삶의 여정에 내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동행이 가족들이 함께였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될 것이다.
[떡갈나무세상 강마을 다람쥐]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삼성리 299-2. ☎031-762-5574
15. [낙안 수제 한과 몽실이]
보리는 겨울에 자라 해충이 없기 때문에 농약을 사용하지 않은 친환경 농작물이다.
어린 시절, 겨울이 지나고 봄이 오는 길목이면 동네 사람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들판에 나와 삼삼오오 발뒤꿈치로 일정한 리듬에 맞춰 마치 춤을 추듯 보리를 꾹꾹 밟곤 했다. 땅속에 뿌리를 내렸던 보리 싹을 서릿발이 밀어 올려 영양공급이 부족한 보리가 누렇게 뜨기 때문에 뿌리가 영양을 공급받을 수 있도록 꾹꾹 밟아줘야 다시 건강한 모습으로 잘 자랄 수 있다. 가끔 노래도 한 자락 부르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보리가 영양분을 빨아들일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 보리밟기이다. 그러니 보리밟기는 일종의 성장촉매제 역할인 셈이다.
낙안전통영농조합법인 송진영 대표는 보리개떡을 재현해서 만든 몽실이 찰보리떡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호평을 받고 있다. 전통음식을 잘 만들기로 정평이 나 있는 송진영 대표가 보리떡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년 전부터라고 한다. 보리는 영양적인 측면에서는 섬유질이 많아 다이어트 식품으로도 좋고, 칼로리가 낮아 성인병 예방에도 좋은 식재료이다. 뿐만 아니라 쌀에 비해 지방과 탄수화물은 적고 단백질, 칼슘, 철분 등이 많아 균형적인 식사를 하지 못하는 현대인들에게 우유 한 잔과 찰보리떡이면 한 끼 식사로 손색없을 것 같다. 또한 당뇨나 비만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의 식이요법에도 좋다고 하니 배고픔으로 고통 받던 시절에 허기를 달래던 식품이 아니라 건강한 삶을 추구하는 현대인의 웰빙 식품으로 제격이다. 몽실이 찰보리떡은 보리의 비율이 90%로 어린이에게 입맛에 맞는 카스테라처럼 부드러운 빵과 떡의 중간 맛이고, 현미보리영양떡은 현미 30%와 보리 70%의 비율로 만들어져 거칠고 까만 보리개떡에 비해 먹음직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일품이다.
예로부터 우리는 하늘을 의지해 농사를 지었기 때문에 가뭄이나 홍수 등 자연재해로 인하여 흉년이 드는 다음해 음력 4월과 5월경은 곡식이 떨어지고 보리가 아직 여물지 않아 풀뿌리나 나무껍질로 끼니를 때우거나 식량을 꾸어 연명하였다고 한다. 그나마 가족들과 힘겨운 시절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었는지도 모른다. 굶주린 가족들이 뿔뿔이 흩어져 유랑민이 되거나 걸식을 하다가 아사(餓死)하는 이가 많았다고 하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렸을지 짐작이 된다. 대부분의 농민들은 추수 때 걷은 농작물 가운데 소작료와 빚, 이자, 세금을 내고 남은 식량을 가지고 보리수확 때까지 연명해야 했는데, 봄부터 초여름에 이르는 기간이 농민들에게 가장 힘든 시기로 춘궁기(春窮期) 또는 맥령기(麥嶺期)라고도 했다. 특히 일제 강점기 때와 8.15해방 뒤부터 1950년대까지만 해도 연례행사처럼 찾아오는 보릿고개 때문에 농민들은 큰 어려움을 겪었다고 한다.
간식이 귀하던 어린 시절, 보리가 익기도 전에 서리를 해서 구워먹거나 어머니께서 가마솥에 물을 살짝 붓고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그 위에 삼베로 만든 천을 깔고 불을 지피고 쪄서 만들어 주셨던 보리개떡을 먹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내가 기억하는 보리개떡의 식감은 입안이 까칠까칠하고 특별한 맛은 없지만 허기를 달랠 수 있었고, 먹을수록 정감 있는 식품이었다. 가끔 부드러운 밀가루로 만든 빛깔 좋은 술떡을 보노라면 검고 거친 보리개떡이 그리워진다. 너무 인위적인 맛에 길들여진 나에게 거칠고 순수한 식감으로 향수를 일으키게 하는 보리개떡은 어머님의 손맛 그대로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음식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보리를 빻아 막걸리로 반죽을 하고, 숙성되기를 기다렸다가 가마솥에 쪄내야하는 수고를 하지 않고도 보리떡을 즐길 수 있다니 참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낙안전통영농조합법인] ☎061-754-2555
16 [서래불고기]
피나 바우쉬(philippina Baush)의 [카네이션], 샤샤 발츠(Sascha Waltz)의 [육체], 빔 반키부스(Wim Vandeskeybus)의 [블러쉬], 필립 드쿠플레(Philippe Decoufle)의 [파노라마], 아크람 칸(Akram Khan)의 [버티컬 로드], [데쉬] 등은 내가 최근 몇 해 동안 LG 아트센터에서 본 공연들이다. 나는 이 작품들을 감상한 후에 ‘LG 아트센터가 초청하는 공연은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는다.’라는 강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어떤 사람들은 LG 아트센터에 대해 국내 예술가들을 발굴하는데 너무 인색하다고 비난을 하지만 우리를 자각하게 하는 세계적인 공연을 국내에서 감상할 수 있게 기회를 제공하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이인가. 저렴한 가격으로 국내 예술가들에게 대관을 해주거나 기획공연을 통하여 젊은 예술가들의 발굴과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공립극장에서 해도 될 일이다. 관객은 똑같은 서비스와 비슷한 공연이 아니라 다양성과 질 높은 공연을 요구한다. 기업이 이미지 개선이나 이윤을 목적으로 하는 문화사업에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는 것은 부당하다고 할 수 밖에 없다. 나처럼 가난한 예술가는 현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힘든데, 해외로 가지 않고도 국내에서 명품 공연들을 관람할 수 있게 되니 감각을 일깨우고, 시간과 돈을 절약할 수 있어서 좋다.
10년 넘게 내 품을 떠나서 생활하다가 춤 맛을 못 잊고 돌아온 제자들이 셋 있다.
20대 초에 나와 동고동락했던 강선화, 심수정, 장향인은 이제 어엿한 30대 중후반이 되었다. 각자 삶을 지탱하느라 열심히 일하면서도 춤에 대한 열정은 식지 않았다보다. 최근 그들과 일주일에 두세 번 연습을 마치고 밥도 먹고, 공연 보는 기쁨으로 내 삶은 더욱 윤택해진듯하다. 6월 어느 날 연습을 마치고 아크람칸의 [데쉬]를 보기로 하고 1시간 전에 도착하여 밥을 먹은 곳이 LG 아트센터 뒤편 골목 ‘서래불고기’집이다. 깨끗하게 꾸며진 실내와 단정한 옷차림의 직원들, 고기뿐만 아니라 된장찌개, 묵사발까지 우리에게 맛의 향연을 만끽하게 해준 곳이다. 이집 음식이 좋은 이유는,
첫째, 인공조미료를 가미하지 않아 첫 맛보다 끝 맛이 더 좋다.
둘째, 국내산 쇠고기와 진상품인 이천에서 생산된 쌀만 사용한다고 한다.
이천은 깨끗한 물과 비옥한 토질, 천혜의 기후에서 재배하여 다른 지역의 쌀보다 칼로리, 지방, 단백질의 함량이 적고, 티아닌, 니아신, 비타민, 필수아미노산이 상대적으로 많아 밥맛이 좋고 오래 보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나는 대개 고기를 먹을 때 밥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직업 특성상 탄수화물의 섭취가 많으면 몸매 관리를 위해 그만큼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집에서는 고기는 고기대로, 묵사발에 맛있는 밑반찬과 된장찌개에 찰지고 윤기 나는 쌀밥까지 포식을 하게 되니 내겐 가혹한 시간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요즘도 제자들은 연습 후에 ‘선생님 언제 그곳에 밥 먹으러 갈까요?’ 하고 묻는다. 내가 꽤나 많은 맛 집을 소개했는데도 그만한 곳이 없었나보다. 이번 주 일요일엔 연습을 마치고 제자들과 ‘서래불고집’에 들러 정담을 나누며 맛의 향연을 즐겨보리라.
[서래불고기]
서울특별시 강남구 역삼동 671-19호 ☎02-557-2450
17. [재첩요리전문점 청룡식당]
실로 오랜만의 여행이다. 생활의 언저리에서 나를 구제라도 하듯 친구를 이끌고 남도 100리(약 40km/섬진강~선암사~순천만) 길을 나섰다. 첫 번째 도착지는 섬진강 하구의 조그마한 식당이다. 몇 해 전에 먹었던 재첩회와 재첩국이 그리워 무려 4시간을 달려왔다. 강물과 바다물이 교차되는 깨끗한 모래에서만 자란다는 재첩은 섬진강이 우리에게 주는 최고의 선물이다. 30년 동안 재첩요리만 전문으로 했다는 섬진강 하구 ‘청룡식당’의 백미는 애호박을 살짝 데쳐서 작은 재첩과 인정스럽게 초창에 버무려서 내어주는 재첩회이다. 큰 양푼에 재첩회와 밥을 참기름에 비벼서 뽀얗게 우러난 재첩국과 먹고 있으면 세상 근심걱정이 다 사라지는 듯하다. 재첩은 예로부터 열기를 다스리고 해독에 좋은 식재료로 알려져 심한 질병으로 몸이 쇠약한 사람에게 좋다고 한다. 재첩의 타우린과 아미노산은 담즙산과 결합해서 간 기능을 활성화하고 염증반응을 억제함으로써 간질환에 도움을 주며, 인체에 필요한 필수 아미노산이 어떤 비율로 들어있는가를 나타내는 단백질 스코어라는 것이 있는데 재첩은 거의 완벽에 가깝다고 한다. 특히 재첩속의 비타민 B12는 철분을 섭취해도 치료가 어려운 악성빈혈에 효과가 있으며, 각종 무기질이 풍부하여 숙취해소에도 좋다. 재첩은 영양학적으로 매우 우수하지만 성질이 차서 몸에 열이 많은 소양인 체질이나 태양인 체질에 좋은 음식이다. 그러므로 태음인이 재첩을 즐겨먹는 것은 삼가해야한다. 다만 재첩에는 비타민A의 함량이 부족한데 비해 부추는 비타민A의 모체인 베타카로틴이 매우 많고 열에 견디는 성질이 강하고 국을 끊여도 손실이 거의 없어 재첩국에 부추를 넣고 끊이면 영양의 균형이 유지된다고 하니 소음인 체질인 경우에는 부추를 넣고 끓여서 먹으면 부작용을 예방할 수 있을 것이다. 여유롭게 출발한지라 늦으면 풍경을 눈에 다 담지 못할까봐 서둘러 선암사로 길을 재촉하였다. 감성이 풍부했던 고등학교 시절 혼자 와 보았던 선암사는 아직도 사람들 손을 타지 않은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세월을 비껴가지 못한 나는 많이 변하였는데 선암사는 예전 그대로 나를 반겨주어 눈물겹도록 반갑고 고마웠다. 앞으로 20년 후에도 거기 자연 그대로 있어주길 소망하며 냇가를 따라 자연스럽게 굽어 있는 길사이로 언뜻 보이는 전각이 참 아름답다고 감탄하며 이 모습 이대로 기억하기 위해 연신 사진으로 기록하였다. 선암사가 좋은 이유는 손대지 않고 그대로 두어 참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는 것, 가뭄에도 나무들이 머금은 물들이 작은 아우성을 치며 흐르는데, 그 소리만으로 정신이 맑고 투명해지기 때문이다. 개울을 따라 흐르는 물은 시리도록 깨끗한 탓에 돌과 바위에 이끼가 없어 마치 새로 옮겨다 놓은듯하다. 선암사에는 4대 천왕도 없고, 역사와 규모에 비해 장엄하거나 화려하지도 않다. 단청이 없는 선암사의 처마는 무심해 보이지만 흠잡을 수 없이 완벽한 미적 감각을 발휘한 작품이며, 크고 작은 선암사의 사찰 지붕은 겹겹이 쌓여있어 중첩된 구조물이 하나의 표상처럼 느껴진다. 또 대놓고 드러내지 않았지만 건물마다 다른 색감의 조화가 은은하며, 전체 구조물들은 공간을 계산이라도 한 듯, 서로를 해치지 않아 어느 각도에서 보아도 짜임새가 있다. 한 참을 손 때 묻지 않은 아름다움에 빠져 있다 보니 뉘엿뉘엿 해가 넘어 갈 즈음 저녁 예불을 위한 법고 소리를 들은 후에야 발길을 돌렸다.
친구와 함께한 이번 여행은 심성 고운 사람들의 정갈하고 욕심 없는 삶에서 숭고한 아름다움을 가슴에 담고 돌아왔을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다’는 것은 고도로 정밀하고 조화로운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당분간 남도 100리 길을 추억하며 각박한 속세의 생활을 버텨봐야겠다.
[청룡식당]
전남 광양시 진월면 신아리 아동마을 1191-28번지 ☎061-772-2400
18. [사과나무]
하늘은 청명하고 코스모스와 들국화가 지천으로 피어나는 계절이다. 가을은 산책하며 사색을 즐기기 좋은 계절이며,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은 계절이기도 하다. 항상 내가 머물던 그곳에 잠시 자리를 비운다고해서 큰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며, 자신을 생활의 굴레에 가둬두고서 세상을 등지거나 눈감아버린다면 누구랑 벗하며 또 누구랑 소통하며 의지할까. 이맘때가 되면 남산도 가을 맞을 채비로 분주하다. 도심 한 가운데 있지만 잘 가꾸어진 야생 식물원과 산책로는 제법 운치가 있을 뿐 아니라 국립극장이 자리 잡고 있어 자주 발길을 하는 곳이기도 하다.
인간 세계와 신들의 세계가 뚜렷한 경계로 나뉘어 있었던 고대, 두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통로인 파블라포레스를 두고 천상을 오르고자 하는 대라천국 가유왕의 전사들과 통로를 지키는 수호자인 실마릴리온의 물러설 수 없는 토너먼트가 시작된다. 대라천국 가유왕의 전사를 지휘하는 국립무용단 예술감독 윤성주와 실마릴리온을 지휘하는 안성수의 지략을 엿볼 수 있으며, 남성과 여성의 대결, 한국무용과 현대무용의 어법을 비교해볼 수 있는 흥미로운 무대를 기대하고 갔었다. 그러나 단(壇)에 이어 춤보다 연출, 춤보다 의상만 돋보이는 무대였다는 주관적인 평을 내리면 지나친 비약일까. 윤성주 예술감독이 부임한지 3년 동안 단 한편의 신작만을 올리고, 안성수 안무와 정구호의 연출과 의상으로 제작된 ‘단(壇)’을 비롯하여 핀란드 테로 사리덴의 ‘회오리’ 등 3편의 현대무용가 작품이 연이어 정기공연을 대신하였다. 컨템포러리로써 지향성을 가진다는 측면에서 나는 이 같은 현상에 대하여 무조건적인 반대는 하지 않는다. 다만 작품의 완성도나 한국적인 정서를 바탕으로 한 작품을 세계화하기 위해서는 장기간의 협력 작업과 체계적인 연습이 필요한데, 3개월이라는 제작기간으로 수작을 바라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것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 국립극장 레퍼토리시즌 개막작인 ‘토너먼트’는 철학의 부재, 설익은 몸짓, 구성과 음악의 일관성도 전혀 없는 ‘요란한 패션쇼’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예술감독이 행정과 안무, 리퍼토리 구성, 단원들의 역량강화 등 모든 것을 감당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짧은 시간에 쫓기어 어쩔 수 없이 올리는 공연이 아니라 2-3년 전에 계획된 작품들을 체계적으로 제작하고, 미진한 부분은 협력과 분담을 통해 국립무용단 위상에 맞는 역할과 기능을 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공연을 마치고 가까운 후배들과 모처럼 인사동으로 향했다. 인사동은 골목마다 운치 있는 가게들이 곳곳에 숨어있어서 마치 시간여행을 다니는 듯하다. 한옥에서부터 근대 건축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건축물과 다채로운 음식점들이 즐비하니 눈의 호사뿐만 아니라 다양한 맛과 멋을 즐길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가끔 내가 오랜 친구와 흑맥주 한 잔 하고 싶을 때 가는 카페가 있다. 옛 분위기를 그대로 유지한 듯 보이나 주변의 환경을 배려한 소품의 배치가 정감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서 손님을 반기는 한 그루의 사과나무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싹틔우고 꽃피우며 열매를 맺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를 뽐내지만, 겨울엔 꼬마전구를 촘촘히 몸에 두르고 온화한 불빛으로 삭막한 밤길을 은은하게 밝혀준다. ‘사과나무’에서 가장 인기 있는 메뉴는 18년 전통의 ‘치킨달밥’이다. 치킨달밥은 애플 소스에 닭고기와 표고버섯, 감자, 피망, 당근 등의 야채를 큼직하게 썰어 향신료와 함께 볶아낸 덮밥의 일종인데, 달콤하고 매콤한 맛이 적당히 어우러져 이국적이면서도 입에 잘 맞는다. 그 외에도 오징어와 홍합, 새우에 매콤한 크림소스로 요리된 해물크림소스 스파게티, 감자와 치즈가 적절하게 배합된 오믈렛, 육즙이 살아있는 스테이크에 야채와 쌀밥, 볶음면이 곁들여진 함박스테이크도 인기 있는 메뉴들이다. 사과나무 아래서 실컷 먹고 담소를 나누었더니 조금은 여유롭고 너그러워진 나. 억눌리거나 답답한 감정들을 해소하는 것이 곧 감정의 정화가 아닌가싶다. 좋은 친구들과 담소를 나무며 마음을 비워내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채우니 배포도 두둑해지는 것이 답답한 마음의 흔적마저 지워진 듯하다.
[사과나무]
서울시 종로구 관훈동 84-5. 02-722-5051
19. [시골손두부]
오늘은 2014년 7월 26일 토요일, 내가 천안시립무용단 안무자로 부임한지 한 달 하고도 사흘이 되는 주말이다. 서울에서 이미 계획된 공연을 소화하느라 마음을 다지고 준비할 겨를도 없이 광복절 행사와 천안흥타령춤축제, 시민들을 위해 수시로 해야 하는 공연 연습으로 쉴 겨를이 없었다.
오랜만에 망중한을 즐기고 싶었는데 마음은 이미 12월 4일과 5일 첫 정기공연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번 작품은 천안 목천 태생으로 신흥무관학교와 임시정부 수립에 헌신한 석오 이동녕 선생의 독립의지와 민족애를 바탕으로 한 [백년의 꿈]으로 정했다. 김구 선생이 가장 존경했던 인물이며, 윤봉길 열사의 마지막 일기장에서 나온 사진의 주인이 바로 석오 이동녕 선생이었다. 작품구상을 위해 여유롭게 운전을 하고 간 곳은 선생의 생가와 기념관으로 ‘과거의 터널을 지나 1919년 대한민국(大韓民國)이란 국호를 선포하셨고, 우리나라 독립운동사에서 으뜸으로 꼽을 수 있는 구국의 선각자’라는 글귀가 내 시각에 들어왔으며, 대동단결(大同團結: 많은 사람과 집단이 공동 목표를 위하여 크게 하나로 뭉침)과 산류천석(山溜穿石: 산에서 흐르는 물이 바위를 뚫는다는 뜻)을 외치며 좌절하는 백성들을 독려했을 선생의 외침이 귓가를 스치는듯하다. 내친김에 독립기념관으로 발길을 돌렸다. 일제 강점기부터 해방까지의 역사를 전시하는 곳 인줄 알았던 기념관은 상고시대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역사와 문화가 숨 쉬는 곳으로 내 발길을 가장 오랫동안 묶어 두었던 피 묻은 태극기는 독립운동 당시 사용했던 것으로 후손들에게 더 이상 치욕의 역사를 물려주지 말아야겠다는 다짐을 하고나서야 발걸음을 뗄 수 있었다.
우리 음식의 자주독립을 이루게 한 일등 공신은 어떤 것일까. 된장과 간장, 고추장, 청국장 등 발효음식에 꼭 필요한 식재료이며, 콩나물을 비롯하여 미숫가루와 두부, 콩비지, 콩자반 등 우리가 하루에 한 번 이상 마주하는 음식들의 식재료 역시 콩으로 만들어진 음식이다. 식물성 단백질을 공급하는 필수 식재료로 철분과 비타민 B1과 B2가 들어 있으며, 특히 밥에 콩만 섞어 먹어도 콜레스톨을 감소시킨다고 하니 이보다 더 이로운 식품이 또 어디에 있을까싶다.
독립기념관에서 나와 병천으로 가는 길목에 ‘시골손두부’ 집이 있다. 새벽부터 콩을 직접 갈아 만드는 이곳은 30년 넘게 이어온 맛 집이란다. 정성 가득한 찬거리에 칼칼한 두부찌개뿐만 아니라 이집 최고 음식으로 꼽는 ‘콩비지 쌈’은 소량의 소금으로 간을 한 콩비지와 소금에 살짝 절인 깻잎에 싸서 먹으면 본래의 깔끔하고 향긋한 맛을 느낄 수 있다. 비우면 인심 좋게 가져다주는 콩비지를 두부찌개에 풀어서 먹으면 찌개의 칼칼한 맛을 잡아주고 담백하게 해주는 역할도 한다. 푸짐한 밥상을 다 비우고 나오면서 계산대에 앉아 계시는 원조 시골손두부 할머니께 ‘음식이 참 정갈하고 맛있다.’고 하니 ‘맛있게 먹어줘서 고맙다.’고 답을 하신다. 이어서 우스갯말로 ‘손님이 많아서 돈 많이 벌었겠네요.’라고 하니 음식을 만드는 모든 과정이 기계가 아닌 수공이라 손이 많이 필요로 한데, 요즘은 인건비가 너무 많이 올라 남는 것이 별로 없다고 한다. 천안에 온지 한 달 만에 만나는 나를 위한 온전한 주말, 눈으로 보고 가슴에 새긴 우리의 역사와 입으로 맛보고 머리에 각인된 우리의 참맛을 깨우친 보람되고 소중한 시간이었다.
[시골손두부]
충남 천안시 동남구 북면 연춘리 107번지 041-556-9946
20. [치어스(cheers)]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도구는 사랑과 공포라고 했다. 이러한 이중적인 감정을 이용해 자신과 독일 국민을 결속 시켰으며 절대 권력을 통한 민족적 애국주의를 고취시켰던 정치가가 히틀러였다. 만약 그가 민족주의를 앞세워 정치적 야망의 노예가 되지 않았다면 역사는 그를 어떻게 기록했을까?
히틀러는 위대한 연설가이며, 탁월한 연출가로 예술가적인 정치가였으며, 예리한 지성과 심미적 탐구, 죽음의 예찬, 밤에 이뤄진 대규모 의식과 예술에 대한 숭배, 자신의 등장시기와 걸음걸이, 표정, 의복 등 세세한 부분까지 계산되어진 연출로 독일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히틀러의 매력은 카리스마로 설명되는데, 막스 베버에 의하면 카리스마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행사하는 초자연적인 능력‘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히틀러는 연설을 아무 때나, 아무 장소에서나 하지 않았다. 청중들의 심리적 저항감이 가장 낮은 늦은 저녁에 연설 시간을 잡았다. 해가 붉게 물드는 나른한 저녁시간, 하늘을 배경으로 히틀러가 연단에 서면 집단 최면 효과는 극대화 되었다. 히틀러는 금방 연단에 오르지도 않았다.
장중한 북 소리가 둥둥 울리며, 그의 등장에 대한 기대를 고조시키고, 붉은색과 흰색, 검은색으로 이루어진 강렬한 나치 깃발이 하늘을 메우고, 그렇게 기대감에 부푼 채 오랜 시간 기다린 군중들의 앞에 붉게 물든 배경으로 히틀러가 나타나면 그곳은 당장 열광의 도가니가 되었다. 그들은 이미 최면에 걸릴 준비가 기꺼이 되어 있었다.
"삶을 선물 받은 사람은 언제나 함께 더불어 삶을 형성한 사람들을 그리워한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여러분이 없다면 내 인생은 무엇일까요.“
히틀러에 의해서 연출된 정치적 행사는 인간의 심리에 대한 정확한 인식을 표출하고 있다. 휴고 보스가 디자인 한 군복을 입고 도열한 모델 같은 친위부대와 깃발들, 횃불의 유희, 행진하는 군중과 바그너의 음악 등으로 군중을 사로잡았다. 히틀러는 이러한 효과들을 얼마나 중요하게 여겼는지 거대한 축제에서 가장 사소한 세부사항에 이르기까지 검사하고, 동작 하나와 걸음걸이까지도 정밀하게 감정하며, 깃발이나 꽃 등 장식적인 세부사항과 귀빈들의 좌석배치도를 손수 점검하였다는 데서 드러나고 있다.
이처럼 치밀한 대중선동가 히틀러가 좋아하는 음식은 어떤 것이었을까? 맑은 국물과 삶아서 으깬 감자 그리고 케익이라고 한다. 독재자치고는 소박하다 못해 초라하다. 가난한 환경으로 유년시절 다양한 음식을 맛보지 못해 미각이 발달하지 못해서인지, 아니면 지나친 결벽증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철저한 채식주의자로 음식을 음미하기 보다는 생존을 위한 영양공급 정도로 생각했던 것 같다.
뇌의 모든 정보와 지식은 신경세포 간의 연결성(synapse)을 통해서 완성되는데, 시냅스의 유연성이 높은 결정적 시기(10~12세)에는 경험을 기반으로 자주 쓰는 신경세포는 살아남고, 쓰지 않는 세포는 도태된다고 한다. 히틀러는 세계 최고 예술가적인 정치인이며, 불필요한 말과 서신이나 어떠한 기록을 남기지 않을 정도로 철저했지만 인간이 느끼는 가장 원초적인 쾌(快)와는 거리가 먼 삶이이었을 것이다.
히틀러처럼 맛을 음미하지 못한다는 것이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불행한 삶일지...
오늘은 부암동 ‘치어스’에 들르련다. 독일 맥주에 소시지 대신 언제부터 치킨이 친구가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치맥(치킨과 맥주)라는 신조어가 생길정도로 한국인은 치킨 사랑이 각별하다. 서울에서 3대 치킨집으로 꼽히는 ‘치어스’는 4인용 테이블이 단 5개뿐인 맥주 전문점이다. 큼직하게 튀긴 감자와 치킨이 어우러진 안주에 생맥주 한 잔이면 세상 부러울 것도 없고, 하루의 피로는 말끔히 씻길 것이다.
[부암동 치어스]
서울시 종로구 부암동 258-3 ☎02-391-356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