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통신 123/200331]‘배려’의 국·반찬 물결
일요일 오전, 늙으신 아버지와 집 앞 너른 공터에 꽃밭을 만들고 있었다. 남원으로 수년 전 귀향한 낯익은 친구가 ‘형수’와 함께 보자기에 뭔가를 싸들고 찾아왔다. 무슨 일인가? 반가움에 손을 털고 맞이하니, 냄비에 ‘선지실가리국’이 하나 가득이다. 세상에나, 만상에나? 럴수, 럴수, 이럴 수가? 이 아침, 20분도 더 걸리는 남원에서 막 끓인 것을 가져오다니? 숫제 감격이다. 감동이다. “이게 먼 일이래? 이런 벱이 어딧대잉?” 나의 ‘즐거운 비명’을 뒤로 한 채 커피 부부는 한잔 마시지 않고 금세 가버렸다. 서운하고 고맙웠다.
잉꼬부부인 그 친구는 몇 년 전 남원 주천에 ‘그림같은 전원주택’을 다섯 달에 걸쳐 자신의 뜻대로 짓고, 집 앞 200여평 텃밭에 고추를 심어 지난해 80근을 수확했다던가. 올해는 내처 고추건조기도 샀다고 한다. 말이 태양초이지. 가을볕에 고추 말리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그 친구의 붓글씨 내공이 20년 가까이 되는데, 주인을 닮아 무척 정갈하고 힘이 있어 좋다. 지난 2월 생각지도 않았는데, 격식을 갖춘 입춘방立春榜을 써보내줬을 뿐만 아니라, 우리집 상량上梁도 써주었다. 거실 소파에 누우면 친구가 써준 노출상량의 글씨가 맨먼저 보이니, 어찌 대춧빛 친구의 얼굴이 잊혀지겠는가. ㅎㅎ.
추어탕에 넣는 무청실가리는 제법 뻣뻣하지만, 배춧잎실가리는 무척 부드럽다. 그 선지국에 밥을 덥석 말아잡수시는 아버지가 “제 부모한테도 이리 하기 어려운 일”이라며 “맛있다”를 연발한다. 아마도 ‘세상을 잘 산’ 막내아들을 또 한번 기특하게 생각하지 않으셨을까? ㅋㅋ. 친구 덕분에 내가 사는 셈은 그제의 일말고도 석 달 동안 여러 차례였으니, 내가 잘 쓰는 관용구 “무릇 기하인가”가 절로 나온다. 이제 그 이야기를 하자. 그래서 오늘의 생활글 제목은 ‘사랑과 배려의 국·반찬 물결’이다.
남원 친구도 내가 ‘이뻐서’ 가져왔겠는가? 아버지를 혼자 모시고 있다니, 아침을 먹다가 불현듯 ‘가져다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을 터. 솔직히 나라도 그럴 수는 있다 생각하지만, 문제는 ‘곧바로 실행’이 아닐까. 그래서 더욱 고마운 것이다. 또다른 사례는 우리집에서 3km 상거相距인 국평마을에 사는 ‘주말이장’ 친구가 토종닭백숙을 ‘벌써’ 두 차례나 가져온 것이다. 이것 참, 과분하고 황송한 일이다. 얘기인즉슨 ‘6학년 홀애비’가 식사를 해드린다고 해야 얼마나 변변하겠느냐는 것이다. ‘벌써’라는 단어는 ‘석 달도 안됐는데 앞으로도 더 배려가 있지 않을까’하는 얄팍한 마음으로 쓴 것은 아닐까, 혼자 고소苦笑를 짓는다. ㅎㅎ.
그런가하면, 경기도 별내에 별난 별장을 짓고 사는 별나고 멋진 친구는 문어잡이철이 오면 남해 고성으로 원정낚시를 가는데, 그 애써 잡은 문어를 꽁꽁 얼려 아버지께 삶아 드리라고 가져온 것이 아닌가. 승용차로 세 시간도 넘게 걸리는 그 길이 멀다하지 않고 달려온 그 마음은 또 어떤 마음인가? 프랑스어로 ‘알쑝달쑝’이다. 이게 어찌 말처럼 쉬운 일일까? 이럴 때 하는 말이 “내 참 못산다! 못살겠다!”이다.
어디 그뿐인가? 속리산 속에서 암 투병 중인 ‘47년 친구’는 제 몸 추스르기도 신경쓰일 터인데, 아버지 끓여드리라며 라면 한 박스와 노인들이 좋아할 ‘꽈자’ 몇 봉지 그리고 일하다 목 추기라며 막걸리를 몇 병 사가지고 왔다. 부안 상가 문상오는 길에 들렸다며 그 비싼 쇠고기 등심을 한 소쿠리 사온 친구도, 천혜향 한 박스를 들고 온 친구도 왜 고맙지 않으랴. ‘속깊은’ 또 한 친구는 황토방을 지어 어르신 잘 모시라며 ‘금일봉’을 보내왔다. 금일봉은 보통 '한 장'을 말하는지? 그보다 훨씬 더 많으니 이 ‘노릇’을 어이 할꼬?
사람마다 ‘부모복父母福’ ‘처복妻福’ ‘학연복學緣福’ ‘식복食福’ 등을 복을 타고날 것이나, 나는 ‘친구복親舊福’과 ‘인복人福’을 타고 난 것일까? 내가 생각해도 참 대단한 것같고, 여기저기 자랑치고 싶어 몸살이 날 ‘복 중의 복’이다. 그럴 때마다 ‘내가 무어라고? 나는 그들에게 해준 게 ’1도(항개도)‘도 없는데’라고 중얼거리며 자책만 할 따름이다. 최근에 사귄 ‘속세 자연인’ 친구는 그런 내가 무척 부러운 모양이다. 자기는 정말로 ‘일복’만 타고 났다면서. 내가 보기에도 그 친구는 확실히 일복만큼은 타고 난 것같다. 무슨 일을 할 때마다 나타나 몇 시간이고 땀을 뻘뻘 흘려주는, 그래야 직성이 풀리는 복 중의 가장 안좋을 복일 ‘일복’의 소유자가 때론 안쓰럽기조차 하니 말이다.
6년 전에 귀농한 한동네 56년생 동무는 파김치를, 어묵을, 식혜를 해오고, 동네 이장님은 20kg 쌀 부대를 돈은 절대 받지 않겠다며 툇마루에 올려놓고 갔다. 일가인 아주미는 꽃게탕 등 국과 반찬을 해나르고 있다. 이렇게 애정과 배려의 국·반찬이 쇄도殺到를 하니, 명색이 주부主婦를 자처한 내가 요리를 할 이유가 없다. 거기에다 서울의 아내가 밑반찬들과 간편식을 택배로, 한 달이 멀다하고 와 살림살이 전반을 간섭하는 여동생이 셋이나 있으니, 이런 복이 어디 있을까? ‘냉파’(냉장고 파먹기)만 해도 암 걱정이 없으니, 내가 어디에 가서 ‘살림’한다 말할 수 있으랴.
그런데, 여기서 짚어봐야 할 부분은 이 복이 과연 ‘나의 복’일까? 하는 것이다. 동양 전래의 미덕이 ‘효孝’이고, ‘효는 백행지원百行之源’일 것이므로, (아버지를 모시고 있는 친구가 있으니까) 당신들의 부모 생각으로 주변에서 이래저래 챙겨주는 것일 터. 말하자면 나는 ‘아버지를 잘 둔 덕분’일 것이므로, 결국은 ‘부모복’을 잘 타고 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좌우지간, 엄청 고마운 일임은 새삼 말해서 무엇하리. 고맙다. 친구들아! 지인들아! 3월도 벌써 가네. 전염병이 제발 하루속히 사라져야 할 터인데. 선량選良인지 국세國稅 도둑놈들인지를 뽑는 사월, 총선거도 제대로 참 잘해야 할 터인데. 역병과 선거가 걱정이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