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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조선감리회 혁신조항
Ⅰ. 사상선도
1.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원리를 철저하게 인식시킨다.
2. 기독의 일가주의가 팔굉일우(八紘一宇)에 의하여 구현되어야 할 것을 철저하게 인식시킨다(주의.팔굉일우 혹은 보편 가족의 사상, 이것은 2,600년 전에 제국을 건설한 신무 천황(Jimmu Tenno, 神武天皇)의 이야기라고 한다)
3.충군애국의 정신은 기독의 희생주의와 일치하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시킨다.
4. 우리 제국 국체에 반(反)하는 민주주의를 금단(禁斷)한다.
5. 이기주의화된 개인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6. 약육강식화된 자유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7. 폭악무도한 공산주의 사상을 근절한다.
Ⅱ. 교학쇄신
1. 국학(國學) 보급 진흥을 도모한다.
(a) 신학교에서
(b) 대학교와 전문학교에서
(c) 수신과목을 통해서 중등학교와 초등학교에서
2. 군사 훈련
(a) 신학교에서 군사 훈련을 할 것이다.
(b) 이미 대학교와 중등학교에서 가르쳐 왔지만 새롭게 강조할 것이다.
3. 신학교육
신학교육은 복음(그리스도의 훈시와 시범)을 본질로 하고 유태의 역사와 서양문화의 진화과정에서 몰래 들어온 이교사상 및 관습을 분리시켜 동양성현의 유훈과 철학으로 이를 천명한다.
Ⅲ. 사회교육
1. 황도선양에 노력한다. 이것은 다음의 과정을 통해 행해질 것이다.
(a) 신사 참배에 참여함으로써
(b) 교회기구 안에서
(c) 인쇄 매체를 통해서
(d) 강의를 행함으로(강연회)
(e) 집단 토론 회의에 의해서(좌담회)
(f) 성서공부 교실에서(성서강의회)
(g) 특별전도회에서
(h) 개인전도 및 기타 기회에서
2. 공산주의에 대한 방어(반공), 국방 :
(a) 국민정신총동원연맹(the Union of National Spiritual Mobilization Movement)을 통해서
(b) 각 개교회 애국반에서
Ⅳ. 군사 후원
1. 신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될 수 있는 한 다수 응모하게 한다.
2. 신도들로 하여금 병역의무를 존중할 것을 철저히 인식시킨다.
3. 신도들로 하여금 첩보행위의 멸절을 기하게 한다.
Ⅴ. 기관통제
1. 신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될 수 있는 한 다수 응모하게 한다.
2. 신도들로 하여금 병역의무를 존중할 것을 철저히 인식시킨다.
3. 신도들로 하여금 첩보행위의 멸절을 기하게 한다.
제5 기관통제
1. 기독교조선감리회와 일본메소디스트교회의 합동을 실현할 것(단, 합동위원의 보고는 별지와 같다).
2. 조선감리교회 남녀전도사업 및 미국감리교회와 연락을 가지는 여러 기관은 재정의 독립을 도모할것.
3. 교회 및 교회내 기관에서 외국인 선교사는 모든 지도적 대표적 지위를 피할 것.
4. 감리교회 신학교의 혁신을 단행할 것.
5. 선교부와 공동연락을 위해 조직된 중앙협의회는 해산할 것(단, 선교사회에 대한 교섭위원 5인을 두고 감독은 그 일원으로 할 것).
6. 이상의 혁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상무위원 약간 명을 두고 감독은 이를 선임한다.
6) 조선예수교장로회 혁신요강
1940년 11월 10일 조선의 일간 신문으로부터 비공식적인 번역 12−33
총회의 상치위원회에 의해서 채택됨-11월
1. 지도원리
국제의 본의에 기초하여 국책에 순응하고, 과거 구미의존의 사념(邪念)을 금절(禁絶)하고 일본적 기독교의 순화 갱정에 노력하는 동시에 교도로 하여금 각각 그 직역에서 멸사봉공의 성의를 받들어 협심육력(協心戮力), 동아 신질서의 건설에 용왕매진하기를 기한다.
2. 강령
1) 우리는 과거의 구미의존주의로부터 벗어나 순정 일본기독교의 확립을 기한다.
2) 우리는 외국 선교사가 경영하는 교육, 성경 기타 모든 기관을 점차 접수하고 이의 재정적 자립을 도모함과 동시에 지도적인 입장에 있는 외국인 선교사의 후퇴를 기한다.
3) 우리는 과거 민주주의적 교단의 헌장·의식·포교 기타 모든 기구의 일대 혁신을 기한다.
3. 실천방책
1) 국체명징의 철저
A. 교도는 일반 민중과 마찬가지로 이유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신사참배를 실행할 것.
B. 기독교계 여러 학교 직원 및 생도는 일반학교와 마찬가지로 신사참배를 실행할 것.
C. 교회당마다 국기(일장기)게양탑을 설치하고 또 교도는 각각 집에 국기를 갖추어두며, 축제일 기타 이유 있는 경우에는 반드시 국기를 게양할 것.
2) 국가적 행사의 실시
A. 궁성요배의 여행(勵行)
B. 4대절 기타 이유 있는 식을 거행할 때, 반드시 국가를 봉창할 것.
C. 황국신민서사의 제창
4. 기구 개혁
1) 재단법인인 중앙기구를 설립하고 각종 사업의 통일 강화를 도모할 것.
2) 총회장 이하 각 수뇌부의 직제를 개정할 것.
3) 중앙 기관의 구성원 자격은 제국신민으로 할 것.
4) 포교자 자격은 총회에서 면허할 것.
5. 헌법·교리·교법 등 개정위원회의 설치
1) 제29회 장로회 총회의 결의에 기초하여 설치된 헌법개정위원회의 강화를 도모하고 개정 헌법의 초안 작성을 촉진할 것.
2) 교리·교법·의식 기타 전반에 걸쳐서 재검토하여 민주주의적 색채를 배제하고 순정 일본적 기독교가 되도록 할 것.
3) 찬미가기타모든기독교관계서적출판물의검토를하여국체에배반되는자구를개정할것.
6. 시설사항
1) 교역자의 재교육 기관 설립
목사·장로 기타 교역자를 때때로 소집하여 국체명징, 신사참배, 시국인식, 국민총력운동 참가, 방공방첩, 기타 일본정신 함양에 노력할 것.
2) 기관지 기타 출판물의 발행
현행 기관지 내용을 정비하는 외에 모든 출판물을 통하여 국체관념의 파악과 시국인식을 철저하게 하도록 적극적 활동을 개시할 것.
7. 기관 회수 운동
1) 교육·의료·사회, 기타 제반 사업을 회수하고 이들 기관으로부터 외국인 선교사를 철퇴하게할 것.
2) 외국인 선교사에 의하여 발행되는 성서·찬미가, 기타 각종 종교서적 출판물의 저작 발행권을 일체 회수할 것.
8. 재정 자립
종래 전도본부 또는 개인으로부터 받았던 일체의 재정적 원조를 사절하고, 자주 독자적으로 운영되는 회수 기관의 경영을 하기 위하여 공고한 재단을 확립하기에 노력할 것.
9. 일본기독교와 연계
내지(일본기독교)와 연계를 한층 긴밀하게 하기 위하여 교역자 양성기관, 교수의 인사 교류, 기타
위원을 교환하고 양자가 제휴하여 신동아 건설에 즉응하는 일본적 기독교의 확립에 매진할 것.
12월 23일 월요일 조간
버지니아, 리치몬드-남부 침례교의 해외 선교 정기 간행물인 '임무(the Commission)'의 1월호에 의하면, 그것은 독자들에게 오늘 전달되었는데, 일본 정부는 그들의 통제권을 한국에 있는 교회 전반에까지 확대하기 시작한 것처럼 보입니다.
'임무(the Commission)'에 실린 글은 조선의 감리교 교회에서 10월 2일 발행된 “혁신 선언(RenovationManifesto)”의 발췌문인데, 우리는 그것 사본 하나를 한국에서 몰래 빼내어서 미국으로 가지고 왔습니다.
그 선언은 민주주의, 자유 그리고 유대이즘을 비난하고, 신사 참배를 고양시키고 기독교인들이 이교적인 동양 철학에 통합될 것을 촉구하고 그리고 신학교와 다른 학교들에서 군사 훈련할 것을 규정하고있습니다.
전체주의적인 일본 정부는 이미 10월 17일 일본에서 교회 연합을 억지로 강요하여, 1941년 3월 31부터는 실질적으로 시행되도록 했었으며, 그리고 한국에서의 개신교를 손아귀 안에 쥐기 시작했습니다.
관찰자들은 다음에는 그들이 점령한 중국 일부에서 자유로운 기독교를 없애 버릴 것이라는 것이라고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문서의 완역판은 아래와 같습니다.
7) 감리교 이사회에 의해 1940년 10월 2일에 발표된 혁신성명
A. 사상선도
1. 우리는 신동아 건설과 내선일체의 원리를 철저하게 인식시킨다.
2. 우리는 기독의 일가주의가 팔굉일우에 의하여 구현되어야 할 것을 철저하게 인식시킨다.
3. 우리는 충군애국의 정신은 기독의 희생주의와 일치하는 것을 철저하게 인식시킨다.
4. 우리는 우리 제국 국체에 반(反)하는 민주주의를 금단(禁斷)한다.
5. 우리는 이기주의화된 개인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6. 우리는 약육강식화된 자유주의를 철저히 배격한다.
7. 우리는 폭악무도한 공산주의 사상을 근절한다.
B. 기관통제
1. 우리는 교회 및 교회내 기관에서 외국인 선교사는 모든 지도적 대표적 지위에서 물러나게 할것이다.
2. 우리는 남녀전도사업에 교회와 관련을 가진 모든 기관의 완전한 재정적 독립을 준비할 것이다.
3. 우리는 선교부와 공동연락을 위해 조직된 중앙협의회는 해산할 것이다(단, 선교사회에 대한 교섭위원 5인을 두고 감독은 그 일원으로 한 것은 유지한다).
4. 우리는 감리교회 신학교의 혁신을 단행할 것이다.
5. 우리는 기독교조선감리회와 일본메소디스트교회의 합동을 실현할 것이다.
6. 이상의 혁신을 실현하기 위하여 감독은 상무위원 약간 명을 임명할 것이다.
C. 교학쇄신
1. 국가 교육-우리는 초등교육, 중등교육, 고등교육, 신학교육 전 교육 과정에서 일본 정신을 함양할 것이다.
2. 군사교련- (a) 신학교에서도 군사 훈련(교련)을 계속 가르쳐야 할 것이다. (b) 모든 중등교육기관과 고등교육기관에서 기존의 군사 훈련을 한층 강화해야 할 것이다.
3. 신학교육-우리는 신학교육은 복음(기독의 훈시와 시범)을 본질로 하고 유태의 역사와 서양문화의 진화과정에서 몰래 들어온 이교사상 및 관습을 분리시켜 동양성현의 유훈과 철학으로 이를 천명할 것이다.
D. 사회교육
1. 황도선양 (a) 신사참배 장려 (b) 교회기관지 발간 (c) 인쇄물 출판과 반포 (d) 강연회, 좌담회,성경공부, 특별전도회, 개인전도
2. 반공 국방. 조선기독교연합회, 국민정신총동원연맹을 통한 활동, 위에서 언급한 모든 방법을
통해서 각 개교회 애국반의 활동에 의해, 우리는 모든 교인들이 제국 신민으로서 그들의 임무
를 충분히 자각하도록 할 것이다.
E. 군사후원
1. 우리는 신도로 하여금 지원병에 될 수 있는 한 다수 응모하게 할 것이다.
2. 우리는 신도들로 하여금 병역의무를 존중할 것을 철저히 인식시킬 것이다.
3. 우리는 신도들로 하여금 첩보행위의 멸절을 기하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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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취볼트 맥밀란(ARCHIBALD M McMILLIAN)
'임무(THE COMMISSION)' 편집장
8) 해외선교부와 조선 문제
존 메케이 목사(Rev. John A. Mackay, D. D.)
조선에 있는 모든 교육 기관의 교사와 학생들이 신도 신사에 참배해야 한다는 1936년 일본 정부의 결정은 장로회 해외선교부가 최근 몇 년 동안 다루어야 했던 가장 어렵고 복잡한 문제를 만들어냈다.
1936년 가을에 선교부는, 새로운 그 포고와 (그것이 내포하고 있는) 의미를 연구한 후에, 선교부가 관할하고 있는 모든 학교들을 폐쇄하고, 그리하여 조선에서 일반 교육으로부터 철수할 조치를 취하였다.
이 조치가 취해진 것은 일본 정부가 요구하는 참배 행위는 기독교의 정신과 성서에 위배되는 명백한 종교적인 요소를 포함하고 있다는 선교본부의 확고한 확신 때문이었다.
조선 선교부와 전국 교회에서 일어난 신사 문제에 대한 이후 대립적인 논쟁들 때문에, 그리고 조선에서 교회의 선교 사역과 관련된 다른 문제들과 더불어, 이 문제를 현명하고 결정적으로 취급하기 위하여 선교부는 1940년 9월에 조선문제에 관한 특별 회의를 소집하였다.
조선선교부, 선교본부, 실행요원의대표들과다른성원들이참석한이회의에서발전하여, 많은그룹과 위원회 회합들에서 조선에서의 사역에 대한 문제들을 검토하고, 9월과 10월 동안에 선교본부의 세번의 전체 회의에서와 마찬가지로, 10월 21일 선교본부의 월례 회의에서 마침내 한 문서를 승인하였다.
나는 선교본부의 해외 부서 위원회 의장으로서, 그리고 문제의 문서를 기초하기 위해서 임명된 특별위원회의 의장으로서 교계와 일반에게 알리기 위해서 몇 가지 선교본부의 선언의 현저한 특징들을 요약하게 된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한다.
문제의 문서는 선교본부와 조선 선교부 이외에는 흥미나 관심이 없는 사적이고 행정적인 것들이 많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전체로서 인쇄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다른 문제들은 일반적인 흥미와 관심이 있는 것들이고, 나는 이것들을 여기서 할 수 있는 한 간단명료하게 취급할 것이다.
나는 먼저 현저한 언급들을 인용하고 나서 그것들에 대한 논평을 할 것이다.
관련된 문제들은 네 가지 문제 주위에 중심을 두고 있다.
Ⅰ. 신학적 문제(Theological Issue)
그 문서에서 세 개의 구분된 문단들이 신사 문제에서 선교본부의 입장을 설명해 준다.
이들 가운데 첫 번째는 다음과 같다. :
“기독교가 조선에서 직면하고 있는 문제는 오늘날 세계에서 기독교가 직면하고 있는 중요한 문제의 특별한 국면이다. 민족주의적인 열정의 영향 하에 있고, 메시아적 운명감에 고무된 어떤 나라들은 그들의 국경 안에서 활동하는 기관들에게 그들의 존립을 조건으로, 해외선교부의 판단으로는 하나님께만 바쳐야 하는 충성과 대립되는 충성의 상징적 표현을 강요한다.”
이것은 단순히 오늘의 세계에 기독교의 주된 경쟁자들이 되고 있는 우리 시대에 새로운 종교의 출현을 선교본부가 인식한 진술이다.
같은 문제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은 다음과 같다. :
“이 문제의 취급에 선교본부는 주요 문제에 대한 일관적인 태도를 유지해왔다. 선교본부가 설립하거나 선교본부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고 있는 기관들이나 그 대표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살아계신 하나님보다 더 높은 영적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내포된 어떠한 의식에도 참가하는 것을 허락하는 것에 양심적으로 반대해 왔다.
이 이유 때문에 선교본부는 조선에서의 교육사업에 모든 공식적 협동적참여에서 철수하는 정책을 채택하고 실행해왔다.”
이것은 선교본부 정책의 포괄적인 표현을 구성하고 있으며, 신사 문제에 선교본부의 태도의 논리적인 결과이다.
그들의 존립의 조건으로 신사참배가 요구되는 모든 학교들로부터 철수하라는 지시가 (조선) 선교부에 내려졌다.
어떤 경우에 학교들로부터 즉시 철수하는 방식에 지역적인 어려움들이 발생하였다.
정부 법규들과, 지방적 조건들과 정서, 노회들과의 특별한 관계들이 어떤 경우에 철수 과정을 어렵게 했다.
그러나 이제 선교본부가 관련을 맺고 있고 지원하는 남아있는 학교들과 대학들에서 최종적인 철수를 할 결정적인 조치가 취해지고 있다.
그 세 번째 언급은 다음과 같다. :
“해외 선교본부는, 계속적으로 세속 정부들에 충성하고 정치적인 일에 본부의 일부나 그 요원들이 간섭하지 않는 정책을 취하고 있고, 다른 기독교 기관들, 특히 조선 교회를 위한 표준에 결코 양심에 거리낌이 없지만, 조선에 있는 기관들에게 공식적인 신사에 참배하도록 강요하는 조치에 대해서 오랫동안기도 중에 고려한 후에 그 같은 참배는 다른 신들과 영혼들을 상징적으로 인정하는 것을 내포하고 있다는 선교본부의 확신을 다시 한번 확고히 한다.
선교본부는 기독교 신앙 이해에 충실하여, 1938년 9월19일에 취한 조치를* 다시 확인하면서, 거기에 참여한 대표들을 인정할 수 없다.”(* 1938년 9월에 취한조치와 관련된 부분은 다음과 같다 : “선교본부는 선교사는 어떠한 환경에서라도 신사 의식들에 참여할권한이 없다고 이해한다.”)
이 문단들 가운데 첫 두 문단은 선교본부가 현재까지의 상황을 정리한 문서 부분에서 가져온 것이다.
그 세 번째 문단은 선교본부의 입장에 대한 새로운 진술이다.
선교본부는 신도 신사에 참배하는 것은 잘못임을 분명히 하고, 선교부의 선교사들이나 선교부의 직접적인 지휘를 받는 어떤 사람이나 언제 어떠한 환경에서도 거기에 참배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있다.
그러나 그 자체의 입장을 분명히 하는 데서, 선교본부가 같은 양심과 관심으로 신사참배의 중요성에 관해서 도달한 결론과 다른결론에 이를지도 모르는 조선이나 세계 다른 지역에 있는 다른 기독교 기구들을 지도하려는 것은 결코아니다.
선교본부는 특별히 강제로든 신념에서든 신사 의식에 참석한 사람들에게 “배교자”라는 용어를 적용하는 것에 반대한다. 그들 자신들의 주님에게 그들이 서거나 넘어질 것이다. 심판의 말씀을 선포할 권한은 하나님 자신뿐이다.
Ⅱ. 행정적인 문제
1. 선교본부는 다음과 같은 말로 그 동정과 지지를 확고히 하면서 조선 선교부에 감사한다.
“선교본부는 그 역사상 조선 선교부가 이룩한 현저한 봉사 기록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한다.
선교본부는 조선 선교부가 하려던 계획들의 대부분이 일시적으로 파괴되고 최근에 그 사업에 방해를 받고 있는 상황에 처한 (조선) 선교부를 깊이 동정한다. 선교본부는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지도하에 그 프로그램을 재조정하려는 조선 선교부에 충실한 지원을 약속한다.”
조선 선교부는 현대 선교 노력의 연대기에 부러운 봉사 기록을 가지고 있다.
조선 선교부는 반세기 조금 넘는 기간에 가장 신도수가 많고 생명력 있는 민족 교회 중의 하나를 탄생시키는 데 하나님의 쓰임을 받아왔다.
조선 선교부는 그 구성원들이 어둠의 골짜기를 통과해야 하는 이 시기에 선교 본부와 교회의 마음속에 아주 특별한 자리를 차지해야 한다.
2. 선교본부는 미국에 있는 선교본부와 조선에 있는 그 대표들 사이의 회담들이 비정상적인 조건 아래서 수행되어 왔다는 것을 인정한다. 한 가지 이유는 의견을 자유롭게 표현하기 어려웠다.
따라서 그 문서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현안 문제에 관련된 조선에 “ 있는 분파들은 그룹들이 의견을 공식화하고 결정에 이르는 데서 그 나라에서 이전에 가졌던 자유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자유는 모든 시대 모든 상황에서 개인적인 의견들과 태도들을 존중하며 진리를 진술하기 위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그 문서는 또한 몇몇 유능한 총무들의 거의 동시적인 퇴임 때문에 선교본부 자체가 그 역사에서 가장 큰 변천기의 하나를 지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3. 어떤 제안들은 또한 선교본부의 규정과 다른 선교부들의 경험에 비추어 그 내부적 조직에 관하여 조선 선교부에 선교 본부에서 제안한다. 우리 장로교 제도 하에서 각 선교부는 자체 조직과 그 자체의일을 지도하는 일에서 매우 완전한 자치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선교본부는 지금 조선 선교부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처럼 자체 결정권을 공정하게 행사하기 위한 수단과 방법에 관해 선교부의 주의를 환기시킬 책임을 가지고 있다.
Ⅲ. 한국 교회 문제
오늘날 한국 장로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은 극히 어렵고 비극적이다. 오늘날 기독교인의 결속과 인내의 필요성에 관하여 선교본부는 다음과 같이 자신을 표현한다. :
“선교본부와 (조선) 선교부는 모든 상황 아래서 조선 장로교회의 전적인 권한과 자치를 인정하는 데 유의해야 하며, 특별히 지금 그 교회가 처해있는 상황을 고려하여 그 교회에 대하여 가장 깊은 기독교적 공감과 이해를 표현하려는 모든 노력을 해야 한다는 것이 선교본부의 판단이다. 이와 관련하여 선교본부는 (조선) 선교부가, 요청에 따라 권고하고 격려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는 봉사를 하며,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증가하고 있는 직접 전도에 의한 봉사를 하고자 하여 그(한국) 교회와 유익하고 협동적인 관계를 계속하기를 원하는 조치를 승인할 필요가 있다.”
Ⅳ 영적문제
그 문서는 선교본부 자체의 성원들, 그 선교사들, 예수 그리스도의 전 세계적인 왕국에 관심을 가진 모든 이들은 엄격하게 예수 그리스도 자신에게 그들 자신을 복종시켜야 할 필요성에 대한 선교본부의 표현으로 결론을 맺는다.
그 본문은 다음 고백과 호소로 끝을 맺는다.
“그것은 분명히 선교본부와 (조선) 선교부에게 중대한 자신을 시험하는 시간이다, 이런 때에 함께 우리는 뒤에 있는 것을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들에 이르도록 해야 한다.”
“오늘날 세계 전역에 걸쳐서 기독교 운동이 처해있는 상황을 고려하고 죄악이 우리의 가장 의식적인 태도와 노력에 존재할 수도 있어, 영적 시각을 흐리게 하고 동료 기독교인들 사이의 인간적 관계를 파괴시킨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며, 선교본부는 사회적 영적 수련회를 계획하여 본부의 성원들과 직원들과 예수 그리스도의 세계적 왕국에 관심을 가진 사람들을 참여하게 하려고 한다.
또한 모든 소속 선교부들과 마찬가지로 조선 선교부에 비슷한 수련회가 그들에 의해서 준비되어 하나님의 현존 속에서 그의 음성을 듣는 가운데 오해가 극복되며, 숨겨진 죄악이 하나님의 얼굴의 광채 속에서 다루어지며 새로운 계획이 성령에 의해서 고취되어지기를 권고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어둠이 뒤덮인 중대한 시기에 전세계에 걸친 선교 사업의 관리는 그만큼 기회를 주기 때문이다.”
나는 진심으로 이 인용들과 논평들이 매우 곤란한 한 문제에 대한 해외선교부의 입장을 명백하게 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믿는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모든 관계자들이 우리 교회에 수행하도록 부과하신 위대한 일을 조선에서뿐만 아니라 세상의 모든 다른 부분들에서 현재 시간에 알맞게 전적인 상호신뢰로 지금 분발하도록 허락하시기를 바란다.
뉴저지, 프린스톤.
<출전 : '미국 북장로회 해외선교부 한국선교문서(신사참배문제 영문 자료집 2)' 미국 필라델피아장로회사료관 소장 :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04, p.301~556
8. 기타 기독교 관계 친일논설
1) 갈홍기(葛弘基)
(1) 문화, 기독교의 일본화를 논한다(1~4)
(1) 국민총력연맹에서는 만주건국 10주년 축하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만주로 가는 도중에 잠시 들른 일본기독교 총리 토미다 스스무(富田萬)씨를 맞이하여 지난 7일 조선호텔에서 내선 기독교 각 파의 대표 수십 명을 초대해 조선에서의 기독교의 일본화에 대한 간담회를 개최하였다. 하다(波田)□장의 인사에 이어 토미다 총리가,
“내지에 비해 조선의 기독교에는 미·영적 색채가 농후합니다. 현재의 국가정세 상, 우리에게는 단호하게 일본적 기독교로 다시 태어나게 해야 할 책무가 있습니다. 각 파가 오래된 전통을 파괴하고 대동단결하려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 따르겠지만, 내지의 기독교는 우리의 손으로 이것을 이루어냈습니다.
모쪼록 반도의 기독교 각 파도 열렬한 국민적 지원 아래 하루라도 빨리 좋은 결과를 얻기 바랍니다.”라는 의미의 말을 했다고 보고되었는데, 실제로 반도에 있어서 기독교의 일본화는 우리가 해결해야 할 시급한 문제 중 하나이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기독교의 일본화가 특히 최근 격렬하게 논의되는 까닭은, 대동아전쟁에 이르기까지의 국제적 정세가 우리 국민에게 ‘일본화’에 대한 자각과 세계에 대한적극적인□□를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우리는 ‘일본적인 것’을 자신의 것으로써 주체적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나아가 그것을 세계에 적극적으로 앙양하기 위해 □□하고 있다. 요즘 일본 내의 모든 존재혹은세력−그것이정치적경제적인것이든혹은문화적인것이든−은이하나에집중해행동하도록 규정되어있다.
때문에기독교의일본화는첫째, 기독교의일본적자각을의미하며둘째, 이러한본질적자각을 □한 기독교가 거꾸로 국가를 통해 세계로 역□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1942년 9월 15일)
(2) 외래종교인 기독교가 일본적으로 되려면 기독교에 일본화를 가능하게(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하며, 또 외래적 문화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면 일본문화가 그만큼 포용적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일본문화는 우리 민족고유의 신도(神道)를 기초로, 중국 인도로부터 유교와 불교를 받아들여 왔고 메이지유신 이후에는 주로 서양문물을 많이 수용해 자신의 것을 □□하고 있다. (바로)여기에 일본문화의 포용적 전체성과 창(?)조적 □□이 있다. 역사적으로도, 일본문화는 그 독특한 특수성, 부동(不動)의 중심□을 견지하면서도 불필요한 맹목적 배타성은 소유하지 않은 채, 다른 것을 자신의 내용으로 포용할 수 있었던 □□를 보여주고 있다.
즉, 일본문화는 다른 문화와 배타적 대립관계에 있는 하나의 특수문화로서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오히려 세계문화를 자신의 내부에 포용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든다는 점에서 가장 고귀한 일면을 갖고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러한 문화의 중심에는 우리 황실(皇室)이 있다. 현대와 같은 세계적 대 동란(動亂)기에 우리 일본인에게 맡겨진 가장 큰 사명은, 황실을 중심으로 현현되고 있는 팔굉위우(八紘爲宇)의 대 구축(構軸)을 토대로, 혼돈스런 세계문화에 어떤 통일과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다.다시 기독교를 보건대, 기독교의□□는 하나의 보편적 진리이면서, 그것이 역사적 현실에서 구체적
으로 발현되기 위해 반드시 그 지역 혹은 민족의 전통적 피복(被服)으로 행해지고 있다.
여기에 기독교의 적응성이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처음에 그 발상지인 유태적 전통의 외피를, 희랍에 건너
가서는 그 로고스적 사상형(思想型)을, 로마에서는 그 법률적 특징을 나타내고 있으며, 또 근대에 들어와서는 미·영에서 볼 수 있는 □□로, 각각 그 특색을 보여주고 있다. (9월 16일)
(3) 물론 기독교의 □□가 왜곡 되었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히려 여기에 생명적□□□로서의 기독교적 가치가 발휘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기독교는 자각적으로 그 의복을□□한다. 일본에서의 기독교는 일본적이어야만 한다.
기독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천문(天文) 18년으로 지금부터 약 401년 전(조선에는 약 백여 년전)의 일이다.
지금까지 유교가 약 1661년 불교가 1391년을 경과하고 있는 것에 비하면 아주 얼마 안된 외래문화라고 할 밖에 없다. 구미(歐美)-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전래 후 날이 갈수록 천박해지는 사실로도 기독교가 일본화가 되어야만 하는 이유가 수도 없이 많다. 이것은 토미다 총리의 □□가 없어도 우리 일반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는 바이다. 이렇게 기독교는 일본화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기독교의 어떠한 부분이 일본적으로 변화해야만 하는 것인가. 개개의 상세한 내용은 차치하고, 무엇보다 먼저 다음의 두 가지를 신속하고 철저하게 개혁해야만 한다고 생각한다. 첫째, 전시 하의 일본의 기독교는 교파를 초월해 하나가 되어 부여된 직역(職域)에서 봉공을 다해야 한다.
기독교에는 백 수십에 달하는 다수의 분파와 교파가 □립하고 있는데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만도 삼십 여개가 넘는다.
이들 교파의 기원을 보면 우리와 전혀 관계없는 구미의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 것이 많다.
이처럼 비기독적이고 구미적인 교파, 분파를 편애해서 소위 교파주의의 노예가 되는 것은 분명히 기독교의 소아병자인 바리사이주의자임이 틀림없다. 교회의 기초는 교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있다.
그러니 소위 교파합동은 교파적 바리사이주의를 초월해 그리스도 아래 일체가 되는 것이며, 그것이 곧 국가에 봉공하는 일이다. (9월 17일)
(4) 둘째, 서양적 특히 미·영적 사고방식을 기독교 신학에서 배제해야만 한다. 최근 기독교의 근본적 사상이 마치 개인주의적 민주주의적 자유주의적인 것처럼 인식되는 경우가 있는데, 이것은 논자(論者)의 영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보다도 우리나라의 기독교가 아직 미·영적 사고방식에서 탈피하지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신속히 개혁해야만 하는 부분이다.
마지막으로 언급해야만 하는 것은, 기독교를 의식적으로 일본화 하는 것이 기독교가 일본에서 살아남는 유일한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기독교가 살아있는 동력이 되려면 기독교의 일본화가 절대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유교와 불교가 일본의 문화적 내용이 되기 위해서 유교는 그 근본이념의 하나인□□□대의 사상을 폐기하였고, 불교는 ‘정법(正法)을 바로 세워서 국가를 평안케 한다.’를 외치며 “……판독불가……”
돌아보면 종래의 세계는 문자대로 서양적 세계였다. 지금 우리는 점차 서양적 무명(無明)에서 완전히 탈피해야만 하는 시대로 접어들고 있다. 이렇게 이 시대는 괴벨스의 선전용 말을 빌어본다면, ‘가혹한 세기’이며 ‘힘으로 제도해야 하는 때’이다. 이렇게 □한 시대에 기독교가 국가총력의 일익이 되려면 일본화를 달성하는 것 외에는 길이 없다.
토미다 총리의 내선을 계기로 제기(?)된 조선기독교의 일본화 문제가 그저 일시적인 현상으로 그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9월 18일)
<출전 : 葛弘基, 「文化, 基督敎の日本化を論ず」(1~4), '京城日報', 1942년 9월 15~18일>
2) 신흥우(申興雨)
(1) 조선기독교의 국가적 사명
− 1 −
종교는 개인적인 것이다. 국가는 종교에 간섭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을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곧잘 자기 편리대로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과연 종교라는 것이 국가를 초월한 혹은 국가에 대립한 무엇일 수 있을까.
그러한 일은 결코 있을 수 없다.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가 국가로부터의 종교독립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 그것으로 국가와 일반 종교도를 이간질하여 그들의 반국가적인 운동에 종교(를 믿는) 대중을 끌어들이려는 간교한 책략에 불과하다.
종교에 대한 이러한 표어를 가장 열렬하게 주장해 온 것은 명백히 혁명전인 제정시대의 러시아공산당이었다.
그들은 제정시대의 러시아 정부가 국가의 권력을 사용해 여러 가지로 종교에 간섭하는 것에 크게 반대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런 활동을 통해 일반 종교신도를 반국가적 운동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일단 혁명을 달성하여 그들 자신이 국가권력을 휘두르게 되자 그런 표어를 아주 간단히 망각해버렸다.
이번에는 ‘종교는 아편이다’라는 표어를 내세우며 그들 자신의 새로운 국가권력을 동원해 모든 종교를 철저하게 탄압하기 시작했다. 아직도 어떤 소비에트 종교가가 종교는 사적인 것이라는 표어를 주장한다면 아마 현대의 소비에트 권력이 가장 증오하는 트로츠키적인 반역행위로(찍혀) 반드시 엄벌에 처해질 것이다.
결국 이와 같은 종교정책으로 인해 가장 곤란을 겪는 것은 일반 민중과 종교인이다.
우리가 믿는 종교가 어떠한 것이든, 즉 그것이 불교이든 기독교이든 혹은 회교이든 뭐든 간에, 우리가 경제나 정치에 좌우되는 현실세계 속에서 생활을 하고 있는 이상, 우리는 무엇보다 일정한 국가적의무를 지고 있는 국민일 뿐이다.
환언하면 우리는 관념세계의 종교인이기 이전에 현실세계의 한 국가의 국민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부여된 일정한 국가적 의무를 충실하게 이행하는 것이 우리의 모든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근본조건이 되어야 한다.
현실생활에서 국가적 혹은 국민적 의무를 방기하고 대체 어떤 종교생활이 가능하겠는가. 그것은 마치 인간이 빵만으로 사는 것은 아니지만 빵이 없이는 생존이 불가능한 것과 같은 이유이다.
− 2 −
또한 종교생활과 국가적 생활은 자유주의자나 사회주의자 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서로 대립하고 모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위대하신 교주 예수도 무엇보다 먼저 ‘나라를 사랑하라’고 가르치셨다.
나라를 사랑하는 것은 가족을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며 동포를 사랑하는 것과 같고, 인간생활에 있어서 가장 숭고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감정이다. 이 감정을 버리고 어떻게 우리가 종교적인 영의 세계로 들어 갈 수 있겠는가.
말할 필요도 없이 우리의 국가는 대일본제국이다.
그리고 우리 조선기독교인도 대일본제국의 신민(臣民)이다.
물론 우리가 조선어로 말을 하고 조선옷을 입고 또 수많은 조선적 문화와 전통과 풍습 속에서 성장한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조선을 사랑하고 조선민중의 행복을 기원하는 향토적 감정을 잠시도 잊을 수는 없다.
하지만 조선을 사랑한다는 것은 일본제국을 사랑하는 것이며 또 일본제국의 충실한 신민이어야만 가능한 일이다.
지금의 우리는 종교인이고 조선인이기 이전에 무엇보다 일본인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이렇게 지금의 일본은 단순히 일본인을 위한 일본일 뿐만 아니라, 전 동아를 위한 일본이며 나아가 전 세계를 위한 일본이다. 일본을 맹주로 한 동아신질서 건설과정은 무엇보다도 명백히 우리의 이러한 진리를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동아 모든 민족의 공존공영을 기조로 한 신동아의 건설이야말로 우리 일본 및 일본국민이 짊어진 영광스러운 임무가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특히 이 신동아건설의 사명은 어디까지나 민족간의 평등과 전 동아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 영원한 평화를 (구축하는 데 있으며), 이것을 이상으로 삼고 있는 것인데 이러한 이상이야말로 신의 이상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러므로 지금의 우리가 일본을 위해 산다는 것은 동아를 위해 산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아를 위해 살아간다는 것은 전 세계를 위해, 그리고 전 세계를 위해 산다는 것은 결국 신을 위한 삶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우리 기독교도가 일본국민으로서의 사명을 충분히 충실하게 이행해가며 현실세계를 활보하는 것은 우리가 점점 더 신과 가까워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천황폐하의 충실한 적자(赤子)로서 일본을 사랑하자! 그리고 일본을 사랑하기 위해 제국의 국책에 충실하게 순응, 협력, 매진하자. 이것이 우리 조선기독교도에게 부여된 신의 사명이다. 나는 감히 이렇게 확신하고 있다.
<출전 : 申興雨, 「朝鮮基督敎の國家的使命」, '東洋之光', 1939년 2월, 73~75쪽>
3) 양주삼(梁柱三)
(1) 내지 기독교계의 동향 -내지를 시찰하고 돌아와서
조선기독교서회 총무 전 감리교회총리사 양주삼
1. 내지 기독교 출판계
지난 6월 5일에 장로회총회 종교교육부 총무 정인과(鄭仁果) 씨와 본서회 편집총무 백낙준(白樂濬)씨와 동 영업총무 오문환(吳文煥) 씨와 필자 네 사람은 내지 시찰의 길(途)에 올라서 동월 24일에 귀성했었다.
금번 시찰의 목적은 주로 내지 기독교 출판사업 시찰이었으나, 삼천리사의 주문에 의하여 내지 기독교계의 동향과, 조선 기독교계와의 금후 제휴 및 조선 기독교의 장래에 언급하려 한다.
그런데 이번에 내지를 시찰하면서도 절실히 느껴지는 것은 조선 기독교가 내지 기독교에 비해서 양으로는 단연 우세를 점하고 있으나 문화적 수준에 있어서는 뒤떨어지는 점이 너무도 큰 것이다.
내지기독교는 80년이라는 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현재 30만 교도를 포용하고 있으며, 조선은 20년이나 뒤떨어져서 60년 역사를 가졌는데도 불구하고 50만이라는 교도를 포용하고 있다.
이렇게 양으로는 압도적 우세에 있다 하겠으나 조선의 기독교 출판물이란 실로 그 양으로나 질로는 엄청나게 뒤떨어지며 독서열이 전혀 콤마 이하라는 것은 한심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내지는 조선보다 20만이라는 수의 교도가 적음에도 불구하고, 수백, 수천종의 설교집, 성서주석, 신학서류, 전기, 번역물, 명상록, 종교소설, 종교시집, 아동독물, 기타 제종류의 서적이 막대한 수에 달하것만 조선의 기독교 출판계는 빈약하기가 짝이 없다. 이에 있어 우리는 문서 전도의 중대함을 더욱절감하는 바이다.
2. 내지 기독교계의 동향
내지에서는 지난 6월 24, 25일 양일간 전 일본 푸로테스탠트 제 교파가 합동하여 ‘일본기독교단’을 창립하는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 이 합동운동이야말로 세계기독교사상에 미증유<106>의 획기적 일대변혁으로서 이 광휘있는 기독교의 신체제의 수립은 바야흐로 세계 기독계에 공헌하는 바가 클 것이라 믿으며, 및 이 위대한 신발족에 경의와 경축을 금치못하는 바이다.
구교(舊敎) 가톨릭파(天主敎), 성공회, 안식교, 3종파는 신교파와 교리 및 의식문제에 있어서 상위(相違)되는 바가 너무 커서 부득이 합동을 못 본 것은 유감된 일이나, 신교파에 속하는 제 교회는 전부 합동되었으며 이제 합동된 교회명과 정교인(洗禮敎人) 수를 열거하면 다음과 같다.(준교인 즉 미세례교인은 약함)
일본기독교회(장로파) 62,708
성원교회(聖園敎會, 감리파) 46, 199
미보교회(美普敎會) 3, 161
조합기독교회 34, 172
동포교회 3,402
복음교회 2,994
기독교회 2,663
빠푸테스트교회(침례교) 7,200
루-터-교회 7, 111
성교회(聖敎會) 16,350
전도교회 9,532
성화교회(聖化敎會) 7,519
키요메교회(きよめ敎會) 7,361
독립교회와 보급교회 7,998
구세단 16,425
성결교회 619
동경기독교회 2,240
일본일치기독교단 875
일본성서교회 584
기독우회(基督友會) 757
일본일요학교협회(단, 교회가 아님).
이상과 같이 신종파소속 제 교회의 합동은 실로 역사적 거보(巨步)라 않을 수 없다.
이제 신합동교단의 성격과 그 기구를 초록하면 다음과 같다.
1) 신교단의 성격
신교단은 그 신앙상으로 말하면 복음주의적 푸로테스탠티즘을 표방한다. 그리고 조직에 있어서는 「뿔럭식」의교단으로하였다. 종래30유여에분파되어있던교파가11부로통합되어각각자치적으로교무를행한다.
신교단은 또 회의주의를 표방하고 있다. 종교단체법의 건전상(建前上) 교단 통리자를 두고, 그 統率하에 교무를 집행하도록 되어있으나 그 통리자는 결코 독재자는 아니다. 교무의 운용은 총히 회의의 결의에 의하기로 되었다.
신교단의 성격으로서 또 하나 들 것은 소위 ‘일본적 성격’이라는 것이다.
신 교단은 금회의 합동을계기로 하여 우리 일본 국토에 발생한 일본국민의 교회로서 출발하려는 것이다.
2) 신교단의 기구
신교단의기구는대체로종교단체법의요구에응한것으로서, 본부교구, 교회의3부로나누어져있다.
전 교단의 통할자인 교단 통리자의 임기는 2년이며, 총회에서 선거하도록 되었다. 그리고 교단 통리자 밑에 총무, 국내전도, 국외전도, 교육재무, 부인사업, 후생, 출판의 8국이 있다. 각 국의 국장은 총회에서 선출한다.
뿔럭제에 있어서는 각부로부터 대표로써 참여가 선출되며, 참여는 본부기관과 각부와의 연락의 절충에 당하는 자로 필요상 국장과 함께 교무회를 조직한다.
그타 법제, 교사검정, 인사, 기획, 교학, 심판의 6상설위원회가 있다. 각 위원은 상의원회에서 선거하며, 위원장은 위원의 호선에 의한다.
교구는 국내에 9교구, 외지에 2교구로 하였으며, 만주와 중화민국과 남양에는 포교구를 두고 전도를하기로 되었다.
교구회는 교단 규칙상으로 말하면 극히 중대한 역할을 점하고 있다. 교사시험, 안수례와 같은 것도교구회의 처리사항 중에 포함되어 있다.
그러면서도 뿔럭제에 있어서, 교구회의 권한의 대부분은 사실상 각부의 기관에서 집행되는 것이며,개개의 교회는 대체로 종래의 조직관례를 그대로 집행할 수 있도록 되어있다. 단지 교회주관자의 임명수속은 통일할 필요가 있으므로 초빙제도 참작하여 주관자 후보자를 교회에서 뽑아 교단통리자의 임명을 받도록 되었다.
그리고 교사는 정교사와 교사보의 2종으로 놓여 있는데, 정교사는 안수례를 받은 자,
교사보는 안수례 미료의 자다.
이제 신 교단의 구조를 간단하게 도해하면 다음과 같다.<108>
참여는 당분간 각부를 총리하며 이를 대표로 함.
각부는 당분간 각기 종래의 규정에 쫒아 부총회, 부교구회 등을 개최함.
3. 조선기독교의 장래
조선기독교의 장래라 제목은 부쳤으나 별반 특기할 무엇이 없다. 내지 기독교와 조선기독교가 장차 악수하여서 한 교단으로 일하리라는 것이 일반이 가지는 관측이나 아직 거기에 대한 구체안이 양편에 없다.
그러나 기독교를 통한 내선 결합은 쌍방이 요구하여 마지않는 바이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위선 조선 기독교도 내지의 신 교단 합동실현과 같은 역사적인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을 요망하는 바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오인은 조선기독교의 장래를 낙관하는 바이며 영미 등 외국의존을 청산하는 금일에 있어서 자주적인 가장 활발한 신발족이 있을 것을 기대하는 바이다.<110>
<106-110>
<출전 : 梁柱三, 「內地基督敎界의 動向−內地를 視察하고 돌아와서」,'三千里' 제13권 제9호, 1941년 9월>
(2) 전열, 제4년의 각오 -총후는 총무장, 임전무퇴의 결사대로
대동아전쟁(大東亞戰爭)30)과 반도의 성장(成長)은 말로나 기록으로 이루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역사적인 발전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싸우는 반도가 총궐기한 역사였다고 하겠다.
대동아전쟁 4년의 감격을 어찌 나 한 개인의 필설로 헤아릴 수 있을 것인가! 2천 6백만은 이 성전으로 하여금 새로운 생을 찾았고 황국에 태어난 신민으로서의 참다운 길을 걸어 나가게 된 것이다.
이 싸움은 곧 전투인 동시에 건설의 성전인 것이다.
다시 한 걸음 나아가서는 반도 민중이 황민(皇民)으로서 책임과 임무를 다하고 조국에 충렬을 다한 새생명을 받게 된 것이니 이 얼마나 대동아전쟁의 의의가 큰 것인가.
첫째로 나는 반도의 지대한 광영이고 환희이며 의무인 징병제의 감격을 든다. 벌써 반도 청장년은 황군으로서 이 역사의 결전에 용사로 나섰다.
지난날 육군특별지원병의 길이 열리고 학도병으로서의역사적인 출진이 있었으며 이에 연달아 징병제가 실시된 것이다. 이 같은 거대하고 웅장한 대하(大河)의 흐름을 중심으로 총후에 있어서는 증산전(增産戰)에 응징사(應徵士)들이 출진하고 온갖 증산에 심혼을 바치어 싸우는 반도의 참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22억 원이라는 저축목표액을 돌파하기에분전하는가 하면 농촌은 식량전에 농병(農兵)으로서 나선 것이다.
이 같은 모든 감격의 사실을 들어 볼 때 대동아전쟁 4년을 마친 반도의 적개심과 전의(戰意)는 2천6백만의 총력으로 뒤끓고 있는 것을 나는 확실히 믿고 있다.
더욱이 이번 특별공격대에 참가한 우리 반도가 나은 종정(松井) 오장 가네하라(金原) 군조, 그리고하야시 군조……이렇게 만고불멸의 충령이 계속되어 나온 것을 생각할 때 우리의 감격이 새로운 것은말할 것도 없거니와 이들의 무훈이 헛되지 않도록 그 뒤를 받치지 않아서는 안 될 것이다.
용맹 과감한우리 황군은 생사를 초월하여 특별공격대원으로 공정대(空挺隊)원으로 나설 그 순간의 결의를 우리는다 같이 헤아려야 할 것이다. 이 결의 이 감투정신 적을 마실 듯한 그 투혼을 체득하고 실천하여야 할것이다.
이 결전은 바야흐로 가열 처창한 속에 성전 제4년을 마친 것이라 1억 총무장을 갖추고 전투배치에서에서 필승으로 돌진하는 것만이 우리의 사명이고 황국에 바치는 국민된 바 책무의 전부이라 하겠다.
이 4년째의 결전 상을 우리는 눈앞에 그리고 전장에 나선 결의를 새롭게 하여야 할 것이다.
이때 우리는 온전히 이 싸움에 한 몸 덩어리를 바치는 총후의 특별공격대원이 되고 ‘공성대’원이 되
30) 태평양전쟁을 일컬음.
어야 할 것이다.
황군장병의수고는살을찢기고피를뿌리는가열한것과마찬가지로총후의우리는반드시 싸워 이기기 위한 한 국민의 연마와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숭고한 신념을 가지고 전시 생활에 참고나가지아니해서는안될것이다.
‘필승의신념을기르자’(培養必勝之信念)는것을전시생활의지표로하고 신조로 하는데서 우리는 이번 전쟁을 이룩할 수 있는 것이다. (사진은 야나하라 씨와 그의 휘호)
<출전 : 梁柱三, 「戰列, 第4年의 覺悟−銃後는 總武裝, 臨戰無退의 決死隊로」,'매일신보', 1944년 12월 14일>
(3) 조선의 징병제 실시 발표를 어떻게 느꼈는가
1944년도 조선에서도 징병제가 실시되어 반도민중도 국민의 최고의무를 부여받게 되었다고 전하는소식을 듣고 황송한 가운데에서도 천황폐하의 일시동인의 무한한 은덕을 깊이 감사히 받들며, 광영무상한 감격이 가슴속에서 벅차올랐다.
과거 30여 년간 반도민중은 국민의 의무를 충분히 수행할 목적으로 이날이 도래하기를 애타게 기다려왔으나 정말로 이날이 왔다. 반도청년은 깊이 감격하여 이 時局을 기뻐하며 자신의 양어깨에 짊어지고 왔던 중대한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서, 충분히 준비한 가운데 대화심(大和心)으로써 일사보국(一死報國)하기를 간절히 바랄 따름이다.
<출전 : 梁柱三, 「朝鮮に徵兵制實施發表を如何に感じたか」, '內鮮一體' 1942년 6월호, 32쪽>
4) 오긍선(吳兢善)
(1) 시국과 기독교 교육
황기(皇紀) 2600년(1940년)동안 계속해서 황운(皇運)이 융성했던 것은 국사(國史)에도 나타나 있는 명백한 사실이다. 우리는 국가를 발전시킨 중심 추진력이 팔굉일우(八紘一宇)의 황도정신이라고 믿고 있다.
때문에 황민 각자의 활동분야가 어디이든 모두 이 숭고한 정신으로 귀일해야 한다.
여기에 우리 국민성의 특수성이 있으며 우리 국사의 특수성이 있다. 특히 근대에 이르러 점점 이 정신이 내외로 발양
되어 그 은택이 이제 세계로 확대되려 하고 있는데, 요 수년래의 성전(聖戰), 나아가 신동아건설이라는대성업(大聖業)도 이 정신이 발로된 일단에 불과한 것이다.
차제에 우리는 모든 생활분야에서 현 시국이 점점 진척되면서 발로될 근본정신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통해 국민적 특수성을 자각하고 각오를 한층 공고히 다질 필요가 있다.
우리 국민교육의 기본으로서 이미 오래전에 교육칙어(敎育勅語)가 반포되었는데, 이 칙어의 성지(聖를 배찰 旨) (拜察)해보면 여기에는 동양도덕의 정수, 우리의 고유한 도덕관념이 전부 그리고 정연(整然)하게 담겨 있으며 우리 국민교육의 진로가 명시되어 있다. 이것은 만고불마(萬古不磨)의 성훈(聖訓)이자 우리 모두 성지를 받들어 힘써 노력해야 하는 것으로써 이보다 더 훌륭한 것은 없다.
본디 교육과 종교는 별개의 것이다. 하지만 상호간에 교섭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만약 여지가 없다면 무슨무슨 종교교육이라는 것은 의미도 없는 것이고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다.
기독교교육 문제를 언급하기 전에 사회 아니, 기독교교육 조차도 왕왕 그 본질을 오해하는 경향이 있으니 그요점을 재고해 볼 필요가 있다. 기독교는 어떤 종교보다도 대담하게 학문과 종교의 구별을 인정하고,현실을 수용하여 어디까지나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였으며, 종래의 물질편중을 교정하고 정신진작을 주장하며 소위 물질세계를 정신세계로 견인하려고 했다.
이렇게 기독교는 종교와 도덕을 적절히 융합해 현실에서 순수한 선행을 수행하고, 전체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것을 자기존재의 의의로 삼았다.
하지만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본질이 망각되고 불순한 가공물이 활개를 치기도 했다.
본질에 대한 통찰없이 서구인이 아전인수식으로 해석한 관념을 아무런 비판 없이 수용하려 했기 때문에 폐해가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무리부정(無理不正)은 신속히 개혁해야 할 것으로 기독교의 본질을 재인식해야만 하는시기에 도달했다고 생각한다.
동양에는 동양 고유의 도덕이 있으며, 특히 우리나라에는 세계무비(世界無比)의 황도정신이 엄연히존재한다.
여기에 교육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명시되어 있으니 그에 순응하는 교육이어야만 비로소 의의가 있고 또 존재할 수 있다.
현 시국에 즈음하여 기독교 교육에서도 이 정신을 토대로 마땅히 시국인식에 노력을 경주해야만 하고, 그 방법론에 대해서는 특히 요 몇 년간 정신과 물질 두 방면에 관련된 논의가 많았으니 잘못될 일은 없겠지만 일의 중요성에 비추어 보아 (논의를) 반복해도 폐단은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황국신민으로서의 본분을 확고히 자각하고 현 시국의 특수성을 올바로 이해해서생활전체를 그것에 순응하도록 교육하고 교육을 받아야만 한다. 즉 황국신민의 서사를 실천하기 위해 노력해야만 하는 것이다.
이것이 현 시국하의 교육지침이다.
<출전 : 吳兢善, 「時局と基督敎敎育」, '朝鮮' 제303호, 1940년 8월, 71~72쪽>
5) 오문환(吳文煥)
(1) 반도 기독교의 일본적 회전
1) 장산리(長山理)사건
1937년 10월 중일전쟁이 발발한 직후였다. 부산에서 신의주까지의 철도연선(沿線)에는 양손에 국기31)를 흔들며 용약(勇躍)출정하는 황군을 영송(迎送)하는 남녀노소로 하루 온 종일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제복을 입은 단체는 국기를 선두에 앞세우고 천지가 울릴 정도로 만세를 외치며 용사의사기를 북돋아주었고, 애국부인 전원은 진심어린 봉사를 하며 총후의 열성을 보여주었다.
상류계급인 양반도 길가의 노동자도 검은 조선 갓을 쓴 시골노인도 젊은 청년학도도 또한 불교신도는 물론 시천교
(侍天敎) 천도교(天道敎)같은 유사종교단체까지 모두 참여해 실로 반도는 인파와 히노마루 일색이었다.
그런데 반도인 기독교도만이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것은 무슨 이유에서일까?
평남 중화군 중화면 장산리는 조금 산촌이다. 마을에는 상당히 많은 수의 기도교도가 살고 있어서 그다지 크지 않은 시골풍의 교회당에서는 매주 일요일과 수요일 밤에 정례 참배가 있었다.
같은 달 17일 중화군 동부일대 각 교회임원이 결성한 ‘중화군 제직회(中和郡諸職會)’를 그 교회에서 개최하기로 하자 경찰서에서도 이를 기회로 그곳에서 시국좌담회를 열어 시국에 관한 인식을 강화시키기로 했다.
좌담회 처음에 국기경례, 궁성요배(宮城遙拜), 황국신민서사(皇國臣民誓詞) 제창이 있었다. 과거 50년간 서구 선교사에게 지도를 받아 여태껏 이러한 국가적 행사를 경험한 적이 없는 각 교회의 임원들은 이런 의식이 교의(敎義)에 반하는 것인지 아닌지를(고민하며) 주저했는데, 끝내 무리 중 30여 명은이를 거절하였다.
국기에 경례를 한다든가 궁성요배 같은 것은 기독교도가 예배(禮拜)하는 신 이외의 대상에 예를 올리는 것이어서 교의에 어긋난다는 것이 그들의 해석이었다.
이것은 그 자리에 있던 그30여 명만의 해석이 아니라 아마 당시 반도 내에 있는 전 기독교도의 해석이었을 것이다.
아무리 한종교의 교의문제라 해도 또 아무리 과거에 그러한 경험이 없었다고 해도 시국이 중대한 때인지라 당국의 입장에서는 당연히 이러한 행동을 묵과할 수 없었다. 결국 문제를 일으킨 30여 명이 전부 중화경찰서에 구속되면서 반도기독교도에게 유명한 장산리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이것이 반도기독교의 일본화에의 첫 걸음이라는 것은 오직 신만이 알고 계실 것이다.
2) 내선 양쪽 교회의 친선방문
장산리사건은 반도에 있는 전 기독교도에게 상당한 충격을 주었다. 국민으로서 국기에 경례를 하는것이 과연 교의에 반하는 것이냐, 또는 궁성을 향해 최상의 예를 올리는 것은 반도인 뿐만이 아니라 모든 지방 사람들에게도 응당 실시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냐 하며 각계의 여론이 들끓었던 것이다.
특히당시 평남경찰부장 세토 미치카즈(瀨戶道一)와 고등과장 기타무라 류키치(北村留吉)같은 사람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반도기독교의 일본적 회전(일본화)을 도모하고자 도내 기독교 각 계 인사와 접촉하며 거듭 이를 설명한 결과 드디어 기독교 혁신운동의 봉화가 평양에서 타올랐다.
관계당국의 친절한 지도와 혁신운동가들의 힘찬 활동으로 이 운동은 착착 좋은 결과를 거두어 과거50년간 견지해 온 구미의존의 미몽으로부터 벗어났다.
파죽지세로 다음 해 4월 1일에는 내선교역자(內鮮敎役者) 친목회가 결성되고, 같은 달 17일 부활절에는 이 모임의 주최로 내선교회직원 부활절예배가 집행되었으며, 4월 29일 천장절(天長節)32)에는 평양에서 각 교파의 모든 신도 4천여 명이 부내(府內)에 있는 광성중학교 운동장에 모여 장산리 사건 당시 거부했던 국기경례, 궁성요배를 실시하고 그 외에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고창(高唱)하는 등 예전에 볼 수 없던 성황을 이루었다.
31)日の丸旗(히노마루하타).
32) 일본왕의 생일.
월 일 반도기독교의 5 24 일본화는 우선 내지의 교회를 살펴보는 데 있다는 표어 아래, 같은 그리스도를 믿고 같은 신앙을 갖고 있는 내선의 형제가 지금까지 그다지 교섭이 없었다는 것이 유감스럽게 생각되어 필자는 평남·황해도의 교직원 세 명과 함께 내지교회를 방문하기로 했다.
당시 일반에서는 이 장도(壯途)를 찬성하며 축하해주기보다는 오히려 이를 비난하고 공격했으며 심하게는 반도의 교회를 내지교회에 팔러 간다는 악평을 해대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일행은 예정대로 도쿄의 각 교회본부를비롯해 지방의 교회까지 방문하여 인사를 올렸는데 어느 곳에서든 열성적으로 맞아 주어서 내선교회의교환(交驩)을 충분히 달성하였다.
이 방문에서 친선도모의 사명을 완수한 이외에 국기경례, 궁성요배는물론 신사참배까지도 기독교 교의에 반하는 것이 아니라는 내지교회의 의견을 선물로 갖고 온 것은 특기(特記)할만한 일이다.
이에 대한 답례라고 해야 할지 내지의 일본기독교회 대회의장 도미타 미치루(富田) 목사가 복음신보주필(主筆) 히다카 젠이치(日高善一), 일본신학교 교수 고지(鄕司慥爾) 두 목사와 함께 반도내의 관하(管下)교회시찰과 반도장로교회에 인사를 하기 위해 6월 하순 조선에 건너왔다. 부산, 대구, 경성에서도 각종 집회가 있었지만 같은 달 29일부터 7월 2일까지의 평양방문은 더욱 성황을 이루었다.
신막(新幕)역에서 평양에 도착하기까지 각 역에서는 부근에 있는 교회의 교역자(敎役者) 및 임원들이 운집해 환영을 해주었고, 사리원(沙里院)같은 데에서는 300여 명의 남녀회원이 환영기를 선두에 앞세우고 홈으로 들어와 뜨겁게 환영을 해주었으며, 평양역에서는 조선의 서쪽 삼도(三道)에서 올라 온 250여 명의 교역자가 역귀빈실에서 세 명의 사절(使節)과 뜨겁게 악수를 교환하였고, 역 앞 광장에서는 400여 명의 남녀회원이 환영을 해주었다.
평양, 평서, 안주, 황해 사로회(四老會)연합주최, 평양연합제직회주최, 평양감리교회주최의 각 환영회도 충분히 뜻 깊은 자리였지만, 30일 밤 신사참배문제를 중심으로 산정현(山亭峴)교회당에서 열린 사로회 교역자간담회에서는 더 큰 성과가 있었다. 그 전날 밤 숭실학교 대강당에서 있었던 내선교회 각 파(派) 합동대강연회에는 7천여 명의 대청중이 몰려들어 강당 안은 물론 운동장 구석까지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이보다 앞서 경성에서 결성된 조선기독교연합회나 같은 해 8월 6일 평양에 생긴 평양기독교친목회도이 운동의 프로펠러가 되어 반도기독교의 일본화운동을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게 했다.
3) 신사참배를 결의하는 극적광경
같은 해 9월 9일에는 반도 및 만주에 36만의 신도를 보유한 반도 내 최대교파라고 할 수 있는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제27회 총회가 평양부서문 밖에 위치한 교회당에서 총회 회장 이문규(李文圭) 목사의사회로 개회되었다. 지금까지 관하(管下) 각 노회(老會)에서 신사참배는 기독교의 교의에 반하는 일이아닌 기독교도도 국민으로서 당연히 참배해야만 하는 것이라는 결의를 한 곳이 꽤 되는데, 이번의 총회에서는 총회의 입장에서도 이 같은 결의를 해야만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10일 오전 개회처음에 평양로회장 박응률(朴應律) 목사가 긴급동의로써 이 결의안을 제출하자 회원이 만장일치로 찬성하여 회장이 이 역사적인 결의를 발표하고 이어서 신사참배실행에 대한 긴급동의가 상정되어 총회관내의 각 노회장이 즉시 평양신사에 참배하기로 했다. 지난 장산리사건의 관계자는 아니지만 중화읍내 교회의 목사이자 그 교회가 소속되어 있는 평양로 회장으로서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을 처리했던 박응율 씨가 신사참배 긴급동의를 제출한 것은 기이한 인연이라 할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뒤에서 반도의 기독교를조종하고 있던 서양 선교사들만이 그 자리에서 이 충격적인 결의를 듣고 낭패스러운 나머지 항의를 뜻을 표했는데 그것이 고별사 같은 느낌이 들어 어쩐지 허전하기도 했다. 이렇게 반도의 기독교도 구미의존에서 일본적으로 회전하여 신행(信行)을 완전히 일신해 일본적기독교로서 큰 걸음을 내딛게 되었다.
이 기회에 1937년부터 1939년까지 각 교회의 국가행사표를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이를 근거로 과거3년 동안 반도의 기독교도가 얼마나 변화되었는지 살펴볼 수 있다.
특히 1938년 12월 26일 평양기독교친목회 주최로 필자가 조선 서쪽의 세 남도에서 세력이나 재산이 있는 12명의 목사, 장로를 인솔해 북중국에 있는 황군을 위문한 일은 상당히 주목을 받은 일 중의 하나이다.
조선예수교장로회는 작년 총회에서 국민정신총동원 총회연맹을 결성하고 다른 교파에서도 각자의 연맹을 결성하여 정동운동(精動運動)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4) 평양신학교(설립)인가를 받다
폭풍우와 같은 기세로 진척되어가는 반도기독교의 일본화운동이 전 교파로 확산되어 작년 9월 신의주에서 개최된 조선예수교장로회 제 28회 총회에서는 총회직영 신학교를 새로 평양에 설립하는 일을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종래 평양에는 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던 신학교가 있지만 신사참배문제로 일년이상 휴교 중인데도 곧 개교하게 될 것이라는 역선전(逆宣傳) 때문에 이 일을 실현하는 데 많은 난관이있었다.
설립위원의 헌신적 노력과 관계당국의 적극적 성원으로 지난 2월 9일 드디어 순조롭게 인가가 나왔다.
설립자대표자로는 기독교혁신운동의 총대장인 이승길(李承吉) 목사, 교장으로는 일찍이 조선전국에서 명망이 높았던 도쿄대학출신 문학박사 채필근(蔡弼近) 목사, 교원으로는 내지인 전임교수 한명과 강사 두 명을 필두로 각 계의 권위자를 망라하는 진용이 갖춰졌는데 그 위풍이 실로 대단하다.
이곳이야말로 반도기독교 일본화운동의 최고봉이며, 조선예수교장로회의 총본영(總本營)이다. 지난 4월 11일에 평양서문 밖에 있는 교회당에서 천여 명이 참석해 개교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평안남도지사각하의 고사(告辭)를 비롯해 학무국장각하, 평양부윤, 일본기독교회 대회의장대리의 축사가 있었으며, 국내외 각지에서 천여 통의 축전과 축문을 보내 이 경사스러운 날을 축복했다.
5) 실로 감개무량하다
3년 전 장산리사건이 있었던 당시를 회고하며 지금의 변천을 돌아보니 정말로 감개무량하다.
제 일반세기를 과거로 하고 제 이 반세기를 맞는 반도의 기독교가 이렇게 훌륭하게 전향하여 재출발하게 된것은 오로지 신의 뜻이며 신의 섭리라고 할 수 밖에 없다. 내지의 교회는 반도의 교회와 비교가 되지않을 정도로 많다. 내지의 교회도 처음에는 서양 선교사의 제안으로 조선전도를 계획하고 청국(淸國)에 전도를 착수한 일이 있지만, 외부 보다는 내용에 충실을 기하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여 모든 것을 일본적으로 소화하고 일본적 신학을 설립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메이지 30년대(1900년대)의 유명한 신(神)과 불(佛) 두 종교와의 문제, 종교와 교육의 충돌 같은 고비를 넘어 일본적 신학사상을 부흥시키고,민족적 정신을 발휘해 독립자치를 기초로 헌법규칙을 개정하여 외국선교사와의 관계를 조정했던 것이다.
국가적으로도 1894년 청일전쟁이 시작되자 도쿄의 기독교 각 파(派)는 기독교도 동지회를 만들어 황군위문사파견 , 선언서 발표, 시국강연회 개최 등을 결의하였고, 러일전쟁 때에는 종교가대회가 활약하였으며, 이번 중일전쟁 때도 전쟁발발 2주일 후 일본기독교연맹은 비상시국에 관한 선언을 발표함과 동시에 황군위문 사업을 개시하였다.
반도의 기독교도는 결코 신도의 수를 자랑할 요량이 아니라면 산동선교, 만주전도를 자만(自慢)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장산리 사건을 계기로 우리가 나아가야 할 새로운 길을 찾을 수 있게 된 것에 대해 신에게 감사해야만 한다.
우리는 내지의 기독교와 완전히 일체가 되어 모든 것을 일본적으로 연구, 소화하여 국가에 대해서도 신에 대해서도 내지의 기독교에 대해서도 일말의 손색이 없는 재생 반도기독교의 새로운 모습을 이 땅에 구현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출전 : 吳文煥, 「半島基督敎の日本的回轉」, '總動員'(종교와 精動특집) 제2권 6호, 26~29쪽>
6) 윤치호(尹致昊)
(1) 시국과 반도 기독교도의 사명
참사(參事) 윤치호(尹致昊)
조선의 기독교도는 조선민중의 일부분이며 조선민중은 일본국민의 일부로 모두 천황폐하의 적자(赤子)이니 일신동인(一視同仁)의 성지(聖旨) 아래 일본국민으로서의 의무를 다해야만 한다.
폐하의 적자인 한 어떤 종교적 신념을 갖고 있든 종교를 믿는 이상 그 만큼 더 폐하를 받들어 모시고 충의를 다해야만 한다. 이것은 새삼스레 말할 필요도 없는 자명(自明)한 진리일 것이다.
‘국민은 통치자에게 충성을 다해야만 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있듯이 기독교도의 관념 속에는 전혀 국가에 대한 이견(異見)이 없다. 그래서 사변 이래 우리 반도의 기독교도는 총후보국(銃後報國), 종교보국(宗敎報國)의 구호 아래 국민으로서 응분의 의무를 다해왔다. 그저 말만이 아닌 실행을 해왔다는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일 것이다.
사변의 처리, 장기(長期)건설, 신동아재건설을 위해 국민은 앞으로도 더욱 노력해야만 한다.
금후 기독교도가 나아가야 할 길은 지금까지의 충성을 한층 강화하고 철저히 해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으로서만이 아니라 기독교도로서 국가에 더 충성을 바치고 있다는 찬사를 받을 수 있도록 해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기독교도가 일반 국민에게 뒤지지 않겠다는 각오로 시국에 대처할 수 있게 더 분발해야만 할 것이다. 간단하기는 하나 반도의 기독교도에게 바라는 바는 이와 같다.
<출전 : 尹致昊, 「時局と半島基督敎徒の使命」, '總動員'(종교와 精動특집) 제2권 6호, 21쪽>
7) 정춘수(禾谷春洙)
(1) 기독교와 신체제운동
화곡춘수(禾谷春洙)33)
우리가 어렸을 때에 한문 글방에서 ‘胡馬는 北風□’ ‘越鳥는 巢南枝’라는 글구를 들은 것이 아직도 기억이 새롭다.
호(胡)나라 말이 다른 지방에 가 있을 때에 북편에서 불어오는 바람에 자기 고향이 생각나서 저절로 울게 되고, 월나라 새가 다른 지방에 가 있으되 자기 고향인 남쪽 가지에 깃 드리는 것이다.
생물 전체에 있어서 기후풍토와 생활습관이 얼마나 큰 관계가 있는 것은 다시 말할 필요도 없는것이다.
종교, □□, 문학 등이 다 그러하다.
우리가 신봉하고 있는 기독교는 그의 도리에 있어서는 어느 민족이나 어느 국민이던지 다 배워야 하고 따라가야 할 것인바 수입하기를 구미에서 가져오기 때문에 기철(基哲)이우리에게서나타나기어렵고우리의정조(情操)와의지에조화되지아니하였다.
그러나그의 핵심에는 생명이 있고 진리가 있기 때문에 그의 제도에는 불합리하나마 붙잡고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하여 □者間에는 동양적 기독교를 운운함이 벌써 수년 전부터였다.
과거세기 동안 외국 선교□의 보조로 교회 □□을 창설하고 지금까지 □□하여 우리 사회에 신문화를 소개한 □□은 자못 적지 않다는 것이다. 감사하는 동시에 수시로 부끄럼을 마지않는 바이다.
남을 의뢰하고 쳐다만 보고 있었던 것이다. 50여 성상(星霜)을 지내온 우리 교회는 본래 동양의 미풍양속을 잊어버리고 조화되지 않는 구미류의 외식(外飾)만 취하기를 일삼고 진정한 기독(基督)만을 찾기에는 어두웠던 것이다.
이것은 동양의 교화전통을 도외시하고 기독교를 전하려든 선교사들이 주장한 까닭이었다.
그러나 난미(暖味)하다고 하는 것보다 우리가 차라리 영리(怜悧)치 못하였다는 것을 자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의 기독교회는 자립하지 못하고 심□고락(沈□苦樂)을 면치 못하게 된 것이었다.
이것이 마치 16세기 때에□馬에서 수많은 교도들의 고문당하는 것을 보고 의연히 일어선 마틴 루터를 잇지 동정(同情)하지 아니하랴. 이때가 흡사 그때와 방불하여 마땅히 어떠한 운동이 있어야 할 것이라고 각자의 머리를 섞이던 것이었다.
성전 4주년의 긴 세월을 지내면서 영미인들에게 유린을 당하는 동아 모든 민족들을 구원할 뿐만 아니라 동아의 공영권을 확립하고 일보 나아가 세계의 신질서가 차차로 건설되어가는 이때를 제회(際會)하여 기독교각파에서는 신체제에 순응하여 종래의 고루하던 인습을 타파하고 졸선(卒先)하여 역할을다하려 한다.
기독교조선감리회, 조선예수교장로회, 동양선교회, 교세단(敎世團), 그 외에 기독교회, 오순절교회, 성공회 등등 각 종파에서 국민총력조선연맹에 가맹하여 세포단체로서의 충성을 다하고 내선일체와 종교보국을 다하려 하거니와 나의 관계하는 기독교 조선 감리교회에서는 재작년 10월 혁신□을발표하고 작년 3월 총회의 결의로 기독교 조선 감리교회의 구각(舊殼)을 탈각하고 기독교 조선 감리교
33) 정춘수의 창씨명.
단으로 개신을 단행하여 10만의 교도와 천에 가까운 교회는 신 발족(發足)을 시작하였다.
과거의 구미 의존주의를 청산하고 자립적으로 □연히 걸어 나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우선 기독교 조선 감리교회 혁신조항을 다음과 같이 제정 발표하는 동시에 이를 실행하는 중에 있거니와 그의 대강을 소개하면(세목 생략),
제1. 사상선도
제2. 교학쇄신
제3. 사회교육
제4. 군사후원
제5. 오□□통제
등으로 종래의 낭만적인 자유주의를 일소하고 신체제로 가장 기민(機敏)하고 규율적이면서 정연한 교단규칙을 새로 제정하여 교회와 신도들은 교단본부를 중심으로□絡이 관통하여 임전태세에 적응하게된 機□는 유사지추(有事之秋)에 유감없이 발휘하도록 정비되었다. 종래 구미에서 오던 약간의 보조를거절하는 동시에 신도들이 자발적으로 조직한 신도단에서는 심혈을 경주하여 모든 사업을 확장유신(擴張維新)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순수한 동양적 기독교 즉 일본의 기독교를 재건하여 전 기능을 발휘하기로 하였다.
태평양 위의 파도는 높을 대로 높아졌고 전고 미증유의 비상시를 당하였으니 우리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의 희생정신으로 충군애국과 멸사봉공을 다하여 방향을 찾아 국민훈련의 일익(一翼)이 되어 복잡다단한 시국을 돌파하고 동방의 광휘를 세계에 빛냄이 기독자(基督者)의 책임이다.
<출전 : 禾谷春洙, 「基督敎와 新體制運動」, '國民文學', 1942년 3월호, 73~75쪽>
8) 채필근(蔡弼近)
(1) 종교와 동양
1. 동양의 종교성
우리가 얼른하면 동양이니 서양이니 구별하여 말하지마는 그 구별이 그다지 단순한 것은 아니다.
대륙지형에 의하여 구별하기도 하고 인종의 차이에 의하여 구별하기도 하고 언어의 계통에 의하여 구별하기도 한다.
그러나 가장 쉽고 또 본원적으로 구별한다면 대서양에 주입되는 하천의 유역은 서양이라하고 대동양 즉 태평양에 주입되는 하천의 유역은 동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게 보아도 아직 명료하지 못한 점이 없지 않으므로 대륙적으로 구별하여 아시아 이동(以東)을 동양이라 하고 유럽과 아프리카 양대주(兩大洲)의 이서(以西)를 서양이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역사를 고구(考究)할 때에 동양사와 서양사를 구별하는 것은 또 이것과 일치하지 못하는 점이 없지 아니하다.
고대사에 있어서는 바빌론과 파사(波斯)34)까지 서양사에 넣는 것이 보통이라 하겠고 근세사에 있어서는 인도와 남양(南洋)군도까지 서양사에 붙이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전혀 문화의 관계로 말미암아 그리되는 것뿐인즉 정당한 구별이라고 하기가 어렵다고 생각한다.
이제 종교사를 일별(一瞥)하면서 종교가 동양에서 많이 일어났는지 서양에서 많이 일어났는지 즉시 알게 될 것이다.
유교·도교는 중국에서, 브라만교(婆羅門敎)·불교·자나교(者那敎)는 인도에서, 조로아스터교·마니교는 페르시아에서, 유대교·기독교는 팔레스타인에서, 이슬람교(回敎)는 아라비아에서일어났다.
그밖에 라마(喇嘛)교·시크교·바하이교·샤머니즘 등 다 아시아에서 생긴 종교들이다.
종교란 종교의 전부는 다 아시아 대륙에서 발상(發祥)한 것만은 확실한 사실이다. 그것도 그럴 것이 종교뿐만 아니라 모든 문화의 기원이 고대의 동방국가에서 있지 아니한 것이 그 무엇인가?
‘빛은 동방에서’라고 말하거니와 물질세계의 태양이 동방에서 떠오르고 정신세계의 태양인 종교도 동방에서 빛을 발한
것이다.
과거에는 우리가 서양문화를 구가(謳歌)하고 서양인 못된 것을 유감으로 여긴 일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동양문화를 찬미하고 동양인 된 것을 광영으로 여기게 된다.
정치방면으로 볼지라도 동양에서는 고대에 있어서 발정일치제(發政一致制)이었으므로 종교미(宗敎味)가 풍부하였다. 인도인의 마누법전이나 바빌론인의 함무라비 법전이나 유대인의 모세법전이 모두 이 발정일치의 산물임을 잘 알 수 있다.
또 사상방면으로 볼 것이면 더욱 그런 경향을 찾아볼 수가 있다.
인도철학이나 중국윤리는 종교를 떠나서 성립할 수 없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정치 법률 등의 생활방면이나 철학윤리 등의 사상방면이나 기타 각 방면에 걸쳐 동양인은 종교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것을 나는 동양인의 종교성은 서양인의 그것보다 우월한 바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2. 종교의 동양성(東洋性)
동양에 종교성이 풍부한 반면에 종교에는 동양성이 풍부하다고 할만하다. 지리적으로 보나 사상적으로 보나 가장 서양에 가까운 종교는 유대교와 기독교이다. 유대교도 현재의 유대교는 서양문화에 젖은 유대교이오.
기독교도 현재의 기독교는 서양문화의 중심사상이 된 기독교이니만큼 현재의 유대교나 기독교를 가지고서는 아시아에서 일어난 종적(踪跡)을 찾기가 곤란한 일까지 없지 아니하다.
그러나 원시(原始)유대교와 원시(原始)기독교를 연구하여 보면 동양적 특성이 얼마든지 있었던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류의 조선(祖先)을 창조하시어 동방 에덴에 한 동산을 만드시고 생활하게 하셨으며(창세기 208) 그 동산 동편에 거룹들을 두어 동산을 지키게 하셨다.(창세기 3024)
그 후에 유대인이 성막(聖幕)을 지으며 성전을 세울 때에 모두 동방을 향하여 설비한 것은 동방을 고귀하게 본 표징(表徵)이다.
남북(南北) 미주(米洲)를 제하고 서양이라고 칭하는 구주(歐洲)에서는 극서(極西)에 위재(位在)한 대영제국이 그 패권을 가지고 있거니와 동양이라고 칭하는 동주(東洲)에는 극동에 위재한 대 일본제국이 그 패권을 잡은 것은 참말 우연한 유사점이 아니라고 생각된다.
과거에 있어서 물질문명은 서양이 우수하였거니와 미래에 있어서는 정신문명이 물질문명보다 우위를 점하여야할 것인 동시에 동양의 정신문명이 전세계를 지배하여야 할 것이라고 나는 신앙(信仰)한다.
34) 波斯: 페르시아.
기독교에서는 천지만물을 지배하시고 인간 화복(禍福)을 주재(主宰)하시는 유일의 신이 존재하신 것을 신앙한다.
그리고 그 아래에 천사장과 천군이 있어 모든 천사와 천군을 영솔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천사도 아래로는 개인을 맡은 천사까지 있고 그 위에는 군현과 국가를 맡은 천사가 있는 것으로 여기었다.
천계의 지배적 법칙이 제국주의적으로 운행되는 것이다.
이것이 헬라의 개인주의나 게르마니아의 평등제도보다는 딴판이다.
고대의 동방국가와 유사한 것이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악마의 휘하에도사귀(邪鬼)와 귀졸(鬼卒)들이 있어 마치 행정의 조직이 있는 것처럼 생각하였다.
그리고 악마는 최고의 천사장이 모방한 것으로 여긴 것이다.
이것도 확실히 동양국가의 정치기관의 구성방법이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에서 낙천관(樂天觀)을 가지는 일이 많거니와 염세관(厭世觀)을 가지는 일도 결코 적지 아니하다.
인생관 중에 염세주의가 동양에서만 생겨나고 서양에서는 생겨날 수가 없다는 것은 아니지마는 발생적으로 고구하면 암만하여도 염세사상의 기원은 인도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더욱이 승니(僧尼)제도와 명상(冥想)·고행(苦行)과 단식(斷食)·염주(念珠)등은 대부분 인도에서 생긴 것과 같다.
불교의식과 기독교의식 가운데에 유사한 것이 이 밖에도 많은데 그중에는 우연히 유사한 것이 있지마는 피차에영향(影響)된 것도 적지 않다. 기독교 측에서 서교(西敎)의 영향이 있다고 하면 사도 도마가 인도에 선교한 관계로 기독교의 영향이 불교에 미친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없지 아니하나 이것은 암만하여도 대부분 역설이 되기 쉬울 것이다. 불교만 하여도 기독교보다 5세기 전에 성립된 것이지마는 불교의의식이나 그 교의(敎義)의 대부분은 불교이전의 인도교에 이미 있던 것인데 그 영향이 서방에 미치기용이한 방면으로 보아서도 기독교에는 동양적인 형식과 내용이 없지 아니하다.
3. 현대 기독교의 지나친 서양성(西洋性)
현하(現下)에 우리 동양인은 과거 몇 십년간을 너머 지나치게 서양문명에 도취하여 동양문화를 등한(等閑)히 한 것을 뉘우치지 않으면 아니 될 때를 맞이하였다. 서양각국이 정치로 경제로 학문으로 종교로 세계에 향하여 활보(闊步)를 개시한지 수백 년에 세계가 거의 그들의 식민지가 된 것이 아닌가.
우리 아시아로 보더라도 토지의 반 이상이 그들의 영토가 되며 금은보석이 그들을 부요(富饒)하게 하며 물산의 대부분이 그들의 상품이 된 것이 아닌가.
그중에 가장 신성한 교육과 종교도 오늘에 와서는 자기네 명예와 이익을 안중에 두는 것이 얼마까지는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이런 직접간접, 유형무형의 압박과 모만(侮慢)35)이 우리에게 쏟아져도 우리는 여전히 그들을 숭배할 수가 있을 것인가. 우리는 분연히 일어나서 동양은 동양인의 동양이라는 것을 절규(絶叫)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우리는 아직 윤리의 범위가 얼마나 하고 종교의 범위가 얼마나 하고 정치 법률이 어떻게 응용 되는지 학적(學的)으로 연구하기 전에 우리보다 학적으로 우월한 선교사들이 만사를 우리에게 가르쳤다.
그네가 우리에게 가르치는 것이면 산타클로스가 북극에서부터 복을 가지고 와서 아이들에게 나눠 준다는 북구 미신의 말이라도 기독 교리와 같이 알고 받았다. 부모를 존경하며 조선(祖先)을 기념하는 것과 같은 것은 성서원리에 적당한 것이지마는 그네들의 풍속습관에 없는 것인 한 금지까지 하였다. 그밖에도
35) 남을 업신여기고 잘난 체함.
여러 가지 방면에 있어서 우리의 기독교는 너무 동양인화 한 것이었기 때문에 진정한 동양미(東洋味)에 풍부한 기독교는 수건(手巾)에 가리우고 만 것이다.
벌써 옛날 일이지마는 불교가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일본에 들어올 때에 외국종교를 받자거니 말자거니 전란(戰亂)까지 났던 것을 우리가 국사에서 잘 알고 있다. 그때에 불교는 일본 국민정신에 합치(合致)하게 일본화한 후에야 위대한 발전을 본 것이다. 지금에 서양인이 불교를 연구하려면 인도에 가지 아니하고 중국에도 덜 가고 일본에 많이 오는 것은 누구나 다 잘 아는 일이지마는 일본 불교는 이러한 과거의 역사를 가진 줄도 알아야 한다.
이제 기독교도 동양에 와서 진정한 성공을 하려하면 동양정신에 합치하도록 국민화한 연후에야 위대한 발전을 볼 것이다.
마지막으로 국민정신과 종교 신앙에 관하여 한마디 부가하고자 한다. 교도(敎徒)들이 흔히 국가와 종교를 대립시켜서 서로 모순도 되고 피차 항쟁도 할 것으로 안다. 그러나 그것은 고대국가와 고대종교에서는 그럴 수 있거니와 현대국가와 현대종교에서는 그런 일이 없을 줄로 안다. 종교는 결코 국민 일반의 것이 아니다.
한 국가 안에 기독교인도 있고 이슬람교인도 있고 불교교인도 있고 기타 무슨 종교신자든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민이란 것은 그런 자유의 것이 아니다.
특별히 현대국가에서는 국민이 국가에 절대복종하지 아니치 못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민의 의무인 동시에 또 권리이다.
그 이유는 절대 복종한다 하더라도 타율의 의미라는 것보다 자율의 것이기 때문이다. 오늘날과 같이 우리에게 국민정신총동원이 필요한 시절에도 어떤 종교의 신자이든지 이례(異例)가 얽혀 국가에 충성을 다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래 동양에서 이러한 기독교를 동양적으로 환원(還元)하는 것이 우리 기독교도들의 당연한 임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하노니 조선 안에 있는 우리 기독교도들은 처음에는 서양인의 전래한 복음을 받았지마는 이제부터는 본래 동양에서 발생한 기독교를 동양에 적합하게 이해하고 실천하여야 한다.
이런 말이 재래(在來)에 생각하던 것보다 다르다는 견지(見地)에서 이단(異端)시 될지 모르거니와 먼저 자기네가 과거에 생각하고 행하여 온 것이 벌써 이단적이었던 것을 반성하지 아니하면 아니 된다.
<출전 : 蔡弼近, 「宗敎와 東洋」, '靑年' 제4호, 1938년 8월 1일, 3~6쪽>
(2) 개인과 사회의 관계에 대하여
인생의 목적이 개인에게 있느냐 사회에 있느냐. 이 문제는 벌써 옛날부터 상당히 논의된 바이다.
희랍(希臘)의 대철인(大哲人) 플라톤의 윤리학을 읽어 보든지 아리스토텔레스의 인생관을 살펴보던지 이 문제에 대하여 상당히 고려한 바가 있었던 것이다. 어떻게 보면 개인에게 중점을 둔 것과 같고 또 다시 보면 사회에 귀결점을 둔 것과 같다. 플라톤의 이상적 국가는 민본주의의 국가가 아니었고 소수의 현인(賢人)이 치자(治者)가 되어야 하겠다는 귀족적 국가였다.
그 의미는 현인에게만 권리가 있다는 것도아니었고 현인이 보통 인민보다 권리를 더 많이 가져야 하겠다는 것도 아니었고 다만 현인은 국민 전체의 선복(善福)을 얻게 하기 위하여 국가를 치리(治理)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설 에서도 그 (學說) 국가의 선복은 어떤 개인의 선복보다도 더 존중하고 더 완전한 것이라고 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바 여러 가지의 도덕에는 개인적 가치뿐만 아니오 사회적 가치가 있었나니, 곧 도덕이란 것은 사회의 전체적 선복 때문에 이성의 통제하는 형식이었던 것이다. 플라톤의 주장하는 바에 의하더라도 개인이 사회적 책무에 능력을 부여하기는 완전한 하나의 전체 중에 존재한 각 부분의 정제(整齊)적 동등관계의 관념을 합리적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이 동등의 관계는 그 자체가 선(善)이됨으로써 국가나 개인은 그것을 희망하였으니 그것은 곧 실현되는 공정(公正)이란 덕(德)에 불과한다고보았다.
그러면 플라톤이나 아리스토텔레스나 다 개인과 사회의 관계를 대단히 중시하였던 것이라고아니 할 수 없다.
전체와 개체와의 관계를 정당하게 인식하지 못하고서는 공공생활에 합격자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전체와 개체와의 정당한 관계를 인식하는 곳에 현대의 불안과 번민(煩悶)을 극복할 기초가 확고하여 질것이다.
개인주의적 경향에 타락하여 사회를 염두에 두지 아니하는 것이 불합리한 것인 동시에 단순한 전체주의로써 개인의 인격을 무시하는 것도 착오인 것을 깨달아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개체에 잡혀서전체를망각하지말것이오, 또전체에얽매여서개체를전체의수단으로만생각하여도안될것이다.
개체를 무시하고 전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명료한 반면에 전체를 기초로 삼지 아니하고서는 개체가 존재할 수 없는 것도 확실하다. 필경 전체는 개체로 말미암아 성립되거니와 그 각 개체는 또 전체를 내용으로 하여서만 존재한 것을 재인식하자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인은 자기의 천직(天職)을 충실히 발휘하기에 노력하는 동시에 사회의 목적과 혼연한 조화를 보전하여야 할 것이다. 개인의 노력에 의하지아니하고서는 사회는 진보할 수 없거니와 또 사회라는 기초와 배경이 없이는 개인이 문화적 내지 인격적 의의를 보유할 수가 없다. 한번 더 바꾸어 말하면 사회는 개인의 인격을 존중히 여김으로 말미암아 개인의 천직을 최고한도까지 사회를 위하여 발휘할 수가 있고 개인은 최고 한도까지 사회에 공헌함으로 말미암아 전체의 표현자(表現者)된 자기를 최고 한도까지 완성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이제는 사회에 대하여 몇 마디 요점을 말하고자 한다. 사회는 작게 말하면 내 가정도 한 사회요, 씨족도 한 사회일 것이며 크게 말하면 인종도 한 사회요, 전 세계 인류도 한 사회이다. 그러나 현대를 직관(直觀)하고 말한다면, 가정이나 씨족과 같은 것은 너무 편협하고 인종이나 인류와 같은 것은 너무 우활(迂闊)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가장 사회의 대표가 될 만한 것은 무엇일까.
여기는 두말 할것 없이 국가가 대표적 사회가 된다고 할 것이다.
어떤 사람은 생각하기를 국가 위에도 국제연맹과 같은 사회가 있지 아니한가 라고 할지 모른다. 그러나 국제연맹은 완전히 조직된 사회도 아니거니와 지금과 같이 인종평등을 인정하지 아니하고 백인(白人)의 절대 우월권을 지키고 있는 기관과 같은 것은 족히 말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이것을 간파한 우리 제국은 벌써 탈퇴한 것이오, 독일도 뒤따라 탈퇴한것이다.
좌우간 사회의 대표는 국가라는 것보다도 국가 외에는 인민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고 구신동서(舊新東西)의 여러 가지 문화를 발전시킬 만한 완전한 사회가 없는 것이다. 혹 생각하기를 인민 없이는 국가가 성립될 수 없으나 국가가 없어도 인민은 생존할 수 있다고 할런지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의 본질과 인간의 생활이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다.
위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전체가 없이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이론이 서지 아니하는 것이다.
더욱이 현대와 같이 열국이 대립하여 서로 경쟁하는 판에는 국가가 없이 하루라도 생활할 수가 없는 것이다. 맹호(猛虎)가 왔다 갔다 하고 악귀가 들락날락하는 무서운 곳에 어린 아이가 있는 것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이 이유로 말미암아서도 우리는 국가를 사랑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하지 아니하면 안 된다.
가장 마지막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오늘날과 같은 비상시국에 대한 우리 신민(臣民)된 자들이 가질 태도이다.
동양에 우리 일본제국이 오늘날과 같이 발전되어 오지 못했다고 가정하면 동양은 얼마나 가련하고 비참한 지역이 되었을 것인가. 중국은 열국에 분할이 되었을 것이오, 우리 반도는 소련의 독니(毒牙)에 씹혔을 것이 명약관화(明若觀火)의 일이다. 그리 되었다면 동양은 저 시베리아(西伯利亞)나 인도(印度)와 같이 되어 아시아 전주(全州)가 아프리카나 호주와 같이 백인의 식민지가 되었을 것이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집스럽기 만한 중국은 서양에만 추파를 보내고 선진자(先進者)인 제국과 협력하지 아니하는 것은 오늘의 응징(膺懲)을 면할 수 없는 바이다. 이제부터 중국은 제국으로 말미암아 갱생하고 동양은 제국으로 말미암아 부흥하여 전 세계 인류는 진정한 평화를 얻고 공존공영(共存共榮의 보조를 맞추어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이 큰 포부와 큰 이상을 가지고 상하가 협력하고 견인지구(堅引持久)하여 목적을 완성하기까지 최선의 노력을 다하여보자.
(무한삼진(武漢三鎭)36)의 완전공략(完全攻略)을 축하하는 날에)
<출전 : 蔡弼近, 「個人과 社會의 關係에 對하여」, '靑年' 제7호, 1938년 11월 1일, 3~5쪽>
(3) 기독교회의 장래
1. 국가와 종교
과거의 역사를 회고하건대 지금부터 1400년 전에 불교가 백제를 경유하여 내지에 전포(傳布)되기 시작하였다.
불교는 인도에서 발흥(勃興)한 종교이니만큼 외국종교를 신봉하는 것이 옳으나 옳지 않으나 큰 논의의 문제가 되고 좀 더 나아가서 쟁란(爭亂)의 이유까지 되라 일이 있었다.
그러나 불교가 종교로서 가치가 있었고 일본인은 종교를 신봉하는데 우합(遇合)한 색질(索質)이 있어, 불교를 일본화하고 일본인이 불교화하여 현금(現今)의 상태에 도달한 것이다.
불교가 인도에서 발상(發祥)하고 지나(支那)에서 발달하여 반도를 경유하여 가지고 내지에 수입되었으나 현금 세계에서 불교를 고구(考究)하라는 학자는 인도나 지나에 가지 아니하고 일본으로 오는 것이 사실이다.
이와 같이 불교는 인도에서 시작하였으나 일본에 와서 결실을 맺었고 일본인은 처음에 불교를 응아(應訝)하고 혹은 배척하였으나 깊이 고구하고 굳게 신봉한 나마에 피차에 긴밀한 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다.
기독교가 동양에 전파된 시기는 지나로 보든지 내지로 보든지 반도로 보든지 서양인이 절대의 우세를 가지고 임하는 때였다.
정신적 문명으로나 물질적 기계(機械)로나 권위를 가지고 공세적으로 오는때이니만큼 처음에는 거의 비판하며 고구할 여지도 없이 주는 대로 받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황국의 급속한 발전은 영구히 서양에 추수(追隨)하며 외국에 의존하지 아니하게 되었다.
따라서 교육이
36) 허베이성(湖北省) 동부의 도시인 우창(武昌)·한구(漢口)·한양(漢陽)의 세 도시를 무한삼진(武漢三鎭)이라 함.
든지 종교이든지 무엇이든지 일본에 있어서는 일본화하지 아니한 것은 존재할 권리를 상실하게 된 것이다.
여기서 기독교도 황국의 한 종교로 존속할 것인가 아닌가. 또는 발달할 것인가 아닌가. 고구하며 연토(硏討)할 대상이 되지 아니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작년에 종교 법안이 성립되면서 기독교도 황국신민의 신봉하는 한 종파로 확인함을 받았고 따라서 신체제하에 어떻게 지도할까가 문제화 한 것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무한의 생명과 진리를 가진 절대의 종교요. 황국신민은 진정한 종교의 진리를 용납하고 신봉하는 색질(索質)을 가진 것으로 확신하는 우리는 기독교의 장래를 낙관하고 또 노력하지 아니할 수 없다.
동양에서는 우리 일본제국을 맹주로 하여 신질서를 건설하게 되는 금일(今日)에 있어서 이 신체제하에 기독교도 재확인을 받고 재출발을 하여 금후(今後)의 재 활약을 하게 된다.
우리 황국(皇國)은 태양을 국기로 하여 '光은 東方에서'라는 표어(標語)를 표현한다. 여기서 팔굉일우(八宏一宇)의 이상은 착착(着着) 현실이 되는 중이다. 아시아는 본래 희랍어(希臘語)대로 동방(東方)이라는 뜻에서 생긴 말이다.
참말로 아시아를 떠나서는 인생의 생명이 되며 빛이 되는 종교가 발생한 일이 없다.
유교(儒敎), 도교(道敎), 바라문교(婆羅門敎), 불교(佛敎). 기나교(耆那敎), 조로아스터교, 마니교, 회회교(回回敎), 시크
교, 바하이교가 모두 아시아에서 났다. 기독교도 역시 아시아에서 났다.
기독교가 발상한 유대는 아시아의 서부(西部)에 있어 서양에 가장 가까운 지방이다.
이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서 동양과 서양을 초월한 세계적 종교인 기독교가 일어났다.
기독교는 이와 같이 서부 아시아에서 발상하여 거기서 삼백년 동안 기초를 닦아가지고 서방으로 전파되어 로마제국에 들어갔다.
빛은 동방에서 오는 것이니 만큼 기독교는 동방으로 가지 아니하고 서방으로 갔다.
로마에서 수백 년 동안 실력을 길러 가지고 또 서방으로 갔다.
갈리아(佛:프랑스) 게르마니아(獨:독일), 앵글로 색슨(英:영국)등의 서방민족에게 확보(擴布)되었다.
다음에는 영불(英佛)등 국가를 기지(基地)로 삼아 대서양을 건너 신대륙인 미국(米國)으로 들어갔다.
미주(米洲)로 들어갔다. 미주에서 다시 미국을 중심으로 하여 삼백년 동안 준비하여 가지고 다시 서방으로 태평양을 건너 동양으로왔다.
지나로 인도로 일본내지로 전도(傳道)하였다. 그리하여 아시아 서부에서 일어난 기독교는 지구를 거의 일주하여 아시아의 동부까지 왔다.
그러면 이제는 기독교가 동양에서 다시 얼마 동안 새로운 발전(發展), 새로운 준비(準備)를 해가지고 또 서방으로 광포하여 지나로 인도로 파사(派斯)로 유대까지 가야 한다.
이 지구 일주가 다 되는 날은 기독교의 이상인 기독재림(基督再臨)이 될 줄로 나는 신앙(信仰)한다.
그러면 우리에게 부과된 큰 임무는 기독교의 본령을 동양적으로 완전히 발휘하여 다시 서방으로 전파할 일이다. 황국은 본시 신국(神國)으로 또 일출처(日出處)의 나라로 영혼의 태양이 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교를 정당(正當)히 해석하고 서방으로 광포시킬 임무를 가진 것이다.
2. 선교사와의 이연(離緣)
과거 수백 년 사이에 서양인이 동양에 와서 광대한 영토를 점유하고 풍부한 물산(物産)을 획득하여 정치적으로 고문(顧問)이 되고 교육적으로 사표(師表)가 되며 경제적으로 주인공이 되며, 종교적으로 지도자가 되어 특수한 치외법권(治外法權) 아래서 일종의 우월감을 가지고 각 방면에서 자유롭게 활보를 하면서 지나왔다.
그중에 전도자나 교육가나 자선사업가가 동양에 와서 많은 공헌을 한 바가 있는것은 우리가 망각 할 수가 없는 일이다.
더욱이 우리 반도와 같이 오랫동안 양이쇄국(攘夷鎖國)의 보수 정책을 잡고 잇던 뒤 끝에 들어와서 끼친바 사혜(思惠)가 결코 적지 아니하였다.
그이들의 운동(運動)은 물질적으로 정신적으로 막대한 효과를 거두었다고 아니 할 수 없었다.
소극적으로 과거의 미신과 악습을 타파한 점으로 보든지, 적극적으로 새로운 사상과 문화를 수입시킨 점으로 보든지. 그 실속에 있어서 훌륭한 것이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가는 것이오. 시대는 바뀌는 것이다. 모친이 자녀에게 젖을 먹여도 1~2년에 한하는 것이오.
선생이 도제(徒弟)에게 학예(學藝)를 가르쳐도 십 수 년에 한하는 것이다.
언제까지든지 젖을먹이며 학예를 가르칠 것이 아니다.
성서(聖書)의 말씀과 같이 ‘저는 興하여야 하겠고 나는 衰하여야하겠다’고 하여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선교사들이 반도에서는 이런 심리와 태도를 가지지 아니하고 기득권을 언제까지든지 붙잡고 있고자 하였다.
가령 처음에 와서 학교를 설립하고 설립자가 되며 교장이 되며 교사가 된 것은 거의 의례히 그러할 일이어니와 반도인 중에 자기네보다 지식이 앞선 이가 생기고 사정(事情)에 적합한 이가 있은 다음에까지 자기네가 그냥 그 지위를 움켜잡고 있는 것만은 큰 유감이었다.
근년에 와서 어떤 교파(敎派)에서는 관대한 처분을 하여 학교든지 다른 기관이든지 모두 반도인에게 넘기었다.
그러나 어떤 교하의 선교사들은 끝까지 고집하여 가지고 그만 학교를 거의 다 폐지하고 말았다.
심지어 금전을 내면서 사자고 하여도 팔기까지 아니하며 명의(名義)만 넘겨달라고 애걸하여도 거절까지 한 일이었다.
그들의 말과 같이 그들에게 교리(敎理)의 위반이나 양심의 비난이 얼마까지 잇는지는 모르거니와 거의 감정적으로 변화하여 과거의 은애가 현금의 반목으로 전일(前日)의 공헌이 금일의 방해로 옮기어 참말로 전공(前功)이 가석(可惜)하게 되고 심지어 전일의 은애가 도리어 의아스럽게 생각되는 일까지 없지 아니하였다.
그러나 일(日)·독(獨)·이(伊), 삼국동맹(三國同盟)과 제국의 남진정책에 대항하여 적성(敵性)을 표시하는 영국과 미국에서 자국인을 동양에서 초환(招還)하게 되는 현금에와서는 전일의 불행이 도리어 다행으로 생각된다.
만일 서로 저어(齟齬)하게 된 사정(事情)이 없이 애별리고(愛別離苦)를 만난 것 보다는 낫다고 할 수도 있다.
3. 기독교의 동양성(東洋性)
최근에 기독교를 선전하러 동양에 온 선교사들이 거의 다 영국과 미국 프랑스, 독일의 서양인이었기 때문에 속단(速斷)적으로 기독교를 서양종교로 아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술(上述)한 바도 있거니와 기독교는 결코 서양종교가 아니오. 차라리 동양종교이다.
우리가 성서를 읽어보면 자녀더러 부모에게 효경(孝敬)하라고 가르치나 것은 서양적이 아니요. 동양적이었다.
장례(葬禮)를 후하게 한 것이나 조선(祖先)의 분묘(墳墓)를 존중이 여기는 것이나 조선의 유촉(遺囑)과 교훈을 기억한 것이 모두 동양적이다.
연소(年少)한 자가 장상(長上)에서 머리를 땅에 대이기까지 궤배(跪拜)한 것도 서양적이 아니요. 동양적이었다.
남존여비(男尊女卑)의 사상이나 종교의 의식이 대부분 동양적이었다.
이스라엘 민족의 신전이 동방을 향한 것이나, 신전의 막리(幕裡)에는 등대(燈臺)가 있고 그 등대에는 항상 성화(聖火)를 켠것은 순전한 동양적의 것이었다.
이와 같이 동양성이 풍부한 종교가 왜 동양에도 먼저 오지 아니하고 서양에도 먼저 갔는가는 한 가지 큰 문제였다.
물론, 기독교가 발생할 때에 그 동편(東便)에 파사(派斯)제국과 흉노(匈奴), 만족(蠻族)이 가로막혀 기독교가 동방을 뒤로 미루고 서방으로 갔었지만 그 근본적 이유는 상술한 바와 같이 빛은 동방에서 서방으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신의 섭리에 의하여 서진(西進)하게 된 것이다.
도 당시에는동방국가들은 서방(西方)의 만족(蠻族)에 비하여 진리에 풍부한 종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지나의 한조(漢朝)에는 유교가 있었고, 인도에는 불교가 있어 도덕과 종교가 찬연(燦然)한 시대였다.
구주(歐洲)의서북(西北)의 만족(蠻族)은 참말로 도덕적으로 종교적으로 가련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기독교가 동진(東進)하지 아니하고 서점(西漸)한 것은 천리(天理) 우합(遇合)한 일이었다.
기독교가 서방으로, 서방으로 전포(傳布)되는 동시에 점차로 서양화하게 된 것은 거의 피할 수 없는일이었다.
물론 구주(歐洲)에서 로마제국이나 서북 만족이나 기독교화한 것도 사실이지만은 혹은 의식적으로 혹은 부지불식지간에 기독교가 그들의 풍속습관을 혼용(混用)하게 된 것도 또한 사실이다.
가령로마인들이 동지(冬至)가 가까운 12월 25일로 태양신의 탄일(誕日)이라 하여 전국적으로 경축하던 명절이 영계(靈界)의 태양이 되시는 기독교의 탄강일(誕降日)로 변한 것이든지 일주간의 7일을 과거에 봉사(奉祠)하던 일월화수목금토의 7신의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라든지 북구주(北歐州) 민족의 산타클로스 신화라든지 크리스마스 수목(樹木)이나 크리스마스 상자의 풍습이든지 기타 여러 가지가 그들에게 기독교에 전래되었다.
그 반면에 기독교의 동양성은 그만 일소(一掃)되고만 것이다.
그리하여 구주 10여세기간의 과거 기독교는 지나치게 동양성을 떠나 서양성만을 발휘하게 되었다.
4. 서양화(西洋化) −기독교의 동래(東來)
기독교가 서양에 있어서 서양화한 것은 거의 필연의 일이오. 또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러나 기독교가 서편(西便)으로 전진하여 지구를 일주하여 다시 동양의 동부에 도달하게 된즉 문제는 여기서 일어
나는 것이다.
서양인의 과거 미신이나 재래습관이 기독교에 허용되어 온 것 전부를 기독교자체와 같이여기게 된 것이다.
산타클로스는 우상같이 꾸며가지고 성극(聖劇)에 나와도 아무 문제가 없고, 금요일이나 13 수의 금기와 같은 것도 서양 사람의 하는 그대로 따라갔다.
교회의 의식이나 송가(頌歌)같은것이나 심지어 악수 인사를 하는 것까지 거의 무비판, 무사고로 사용한 것이다.
그러나 부모께 효도하며 조선을 기념하며 장상(長上)에게 배례(拜禮)하며 제왕(帝王)에게 복종하는 것은 성서에 배치(背馳)되지 아니할 뿐 아니라 도리어 적합한 일인 줄을 알지 못하고 서양인의 풍습과 감정에 맞지 아니하는 까닭으로써 기독교에 모순되는 것인 줄로까지 알았다.
좀 더 자세히 말하면 우리 반도에 기독교가 처음 들어왔을 때에는 우리들이 정치와 도덕과 종교의 한계와 분야를 알지 못하는 시대였다.
마치 구약시대에는 모세의 율법이 국가의 정치율법이 되고 사회의 윤리도덕이 되고 종교의 교리의식이 되어 아무 분야가 없이 그저 혼화(混和)되어 있었던 것과 같았던 것이다.
가령 실 예를 든다면 구약시대의 십성명(十誠命: 십계명)에는 현대적으로 본다면 국가의 율법도 있고 사회의 도덕도 있고 종교의 신조(信條)도 있다.
그러나 예수의 재세(在世)시대에 와서는 벌써 법률, 도덕, 종교는 분사(分事)적으로 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돌리고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돌리라’하시며 부모께 드릴 것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드리고 만다고 하면서 ‘고르반’ 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성명(誠命)과 율법의 대강령(大綱領)은 사랑이라 하시고 상애(相愛)를 새로운 성명으로 주신 것이다.
그 후에 바울이나 베드로나 요한이 모두 다 사랑은 성명을완성하는 것이라고 명언(明言)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약복음을 믿노라 하는 신자라도 구약율법 아래에 매와 영자(影子) 때문에 본체를 파착(把捉)하지 못하고 예표(豫表) 때문에 응험(應驗)한 것을 인정하지 아니한 유대인과 같이 얼굴에 수건(首巾)을 가리고 있었다. 다시 말하면 선교사들이 반도에 와서 진정한 행복을 가르치면서 거기다가 너머 상고(上古)의 율례(律例)사상을 첨가하였다는 말이다.
5. 기독교의 동양적 환원(還元)
기독교는 위에서도 말한바와 같이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서 발상하여 동양과 서양을 초월한 세계적종교이다.
그러나 실제에 있어서는 10여세기를 서양에서 신봉된 기독교가 동양적인 교리와 의례를 엄폐(掩蔽)하고 지나치게 서양화하였던 것은 이미 여러 번 명언(明言)한바 이다.
그렇게 된 그대로 동양에 전래되어 우리 반도에서는 5~60여년 이래로 그것을 추수(追隨)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도 정법(政法)과 도덕과 종교의 분야를 구별하고 더욱이 동양은 동양인의 동양으로 신질서를 수립하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외적 자전(刺战)과 내적 각성(覺醒)이 반도의 신자들로 하여금 종교적, 신체제를 건설하게 하는 것이다.
현금의 기독교, 각 파가 합동한 준비를 하며 새로운 헌장(憲章)을 제정하며 신학교와 성서학원을 자력으로 설립하는 등 새로운 활약을 개시하였다.
신자가 아닌 외부에서 이것을 제 3자적으로 본다 하면 기독교도의 현재 동향은 외부의 압력으로 말미암아 되는 것같이 볼지 모르거니와 기독교, 내부에서 이것을 볼 때에는 벌써 오래전부터 선진자(先進者)로 말미암아 이미 맹(萠)□되고 발육(發育)되고 있던 사실이 이 좋은 기회에 실현되는 데서 지나지 않는 것이다.
나 역시 선견자(先見者)나 예언자가 아닌 한 10년, 20년 후의 장래를 역도(逆覩)할 수도 없고 단언할수도 없기는 하다. 그러나 이제 10년만 지나면 반도의 기독교회는 내지의 교회와 연락을 취하여 황국에 적합한 완전한 종교로 발전될 것이다.
반도에 있어서 혹 양적으로 현금보다 몇 배나 되리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나 질적으로 보아서 퍽 진화(進化), 선화(善化), 미화(美化), 성화(聖化)할 것을 나는 기뻐한다.
성서의 원리에 의하여 사상으로든지 습속(習俗)으로든지 기독교에 풍부한 동양적 색채를 잘 발휘하고 도 성서의 원리에 위반되지 아니하는 한 동양재래의 순정(純正)한 사상과 미풍양속을 잘 준수(遵守)하게 할 것이다.
현재에 반도의 기독교회는 혼상례(婚喪禮)를 보든지 심지어 친우를 만날 때에 인사를 하는 것을 보든지 우스운 서양식이 많다. 진정한 서양식도 못되고 종래의 고전 식은 다 없어지고 참으로 우스운 서양식뿐이다.
그렇던 나마에 급하게 시국에 맞는 기독교의 신질서를 건설하여 보려고 하는 현상에 있어서는 얼마만치 혼란한 감이 없지 아니하다.
이 과도기, 전향기(轉向期)에 있어서 얼마 동안 곤란한 방면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러나 얼마만 지나면 기독교는 내적 풍부한 생명과 진리로 말미암아 황국에 맞고 시대에 맞는 도정(道程)을 차차 건보(健步)를 내어드릴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확신이오.
우리의 진로요. 우리의 목표요. 우리의 노력이다.
<출전 : 蔡弼近, 「基督敎會의 將來」, '朝光' 제7권 제1호, 1941년 1월, 134~143쪽>
Ⅱ. 천주교
1. 경성교구연맹의 설립과 활동
1) 국민정신총동원경성교구연맹 결성
천주교회 경성교구에서는 이미 작년에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에 가맹한 이래 각 방면으로 많은 활동을 하여 오던 바 이번에는 그 사명을 더욱 철저히 시행하기 위하여 금 5월 14일 조신신부피정이 끝나는 날 오후 4시에 시내유지남녀교우가 신부일동과 함께 종현 계성소학교 강당에 모인 중 국민정신총동원 천주교경성교구 연맹의 결성식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는데 조선연맹총재대리 전전(前田)소장, 경성부윤, 김석원 소좌 기타 내빈이 참석하였고 결성식이 끝난 후 북지에서 분투하던 김석원 소좌의 시국강연이 있어서 일반에게 시국에 대한 깊은 인식을 주었다고 한다.
천주교경성교구연맹역원
이사장 : 원주교 각하
이 사 : 감목대리 김 신부, 약현 요셉 김 신부, 바오로 신 신부, 바오로 노신부1), 흑천(黑川)신부
간 사 : 장면, 암곡이랑(岩谷二郞), 박병래, 조종국, 김산후, 정남규, 박대영
<출전 : 「국민정신총동원경성교구연맹 결성」, '京鄕雜誌' 제33권 제902호,1939년 5월 28일, 235~236쪽>
2)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새 역원과 제1회 역원회
천주교경성교구에서는 지난 11월 10일 종현 대강당에서 황기 2600년 봉축식과 아울러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을 결성하였음은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당시 새로 선정된 역원은 이사장 바오로 노 신부·이사 감목 대리 김 신부·요셉 김 신부·바오로 신 신부·베드루 구로가와신부·요셉 오 신부·금구장신부와 간사, 내선인 유지교우 10인으로서 지난 11월 23일 역원회를 개최하여 아래와 같은 결의를하여 각 지방 교회에 통첩 하였다.
1. 성탄 첨례 안으로 각 지방 교회에 연맹을 조직할 것, 성탄 때는 시국에 의하여 외부적 축하행사를 중지하고 시국에 관한 강연회나 영화회를 주최함이 좋음. 매월 제1주일을 교회 애국일로정하여 애국일 예식을 행하고 신사참배를 행할 것, 국민서사를 일반에게 보급 인식시킬 것, 본 연맹 신규약 중 매월행사록을 신도에게 인식시킬 것, 매월 각 지방 교회연맹의 행사를 본 연맹에 보고케 할 것−
<출전 :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새역원과 제1회 역원회」,'京鄕雜誌' 제35권 제929호, 1940년 12월 12일, 304~305쪽>
1) 노기남.
3)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총회 개최에 관한 건
1940년 11월 14일, 경기도 경찰부장
관하 경성부 명치정(明治町) 이정목(二丁目)에 위치한 수□연맹에서는 이번 달 10일 오전 11시부터 명치정 천주교당에서 총회를 개최하였는데, 출석자 400명이 □각□ 착석하고, 미야마 □이치(三山□一)신부가 총회를 선언한 후, 본 연맹은 신체제에 의거하여 명칭을 변경하고 연맹의 기구를 개혁하니 신도 여러분은 더욱 더 새로운 각오로써 국책수행에 매진해주길 바란다는 식사(式辭)를 했다.
이어서1939년 6월 연맹에 가입한 이래의 모든 업무에 대한 보고가 있었고, 오카모토□지(岡本□治)신부가 별지(別紙)선언을 낭독했는데 일동이 박수로써 찬성의 뜻을 표했다. 오후 6시 5분 해산했다.
<별지>
선언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고 팔굉일우의 황(□)를 크게 넓히는 것은 우리 제국의 부동의 국시(國是)이다.
바야흐로 성전(聖戰)이 4년이 다 되어가고 시국은 세계적 일대전환기에 직면하고 있다. □일·독·이 세 나라가 연맹을 맺고 제국은 특별히 결심하여 대동아공영권 확보와 세계신질서 건설에 매진하려는 참이다.
이에 우리 천주교신도 일동은 더욱더 단결을 공고히 하여 국민으로서 총력을 앙양하고 집결해 신체제를 형성하고, 오랫동안 인고할 각오를 굳게 다져서 난국을 극복하고, 각자의 직역(職域)에서 봉공하여 소기의 목적을 완수해 성려(聖慮)를 편안히 모실 것을 맹세한다.
1940년 11월 10일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출전 : 「國民總力天主敎京城敎區聯盟總會開催仁關する件」(京高秘제2980호),1940년 11월, 14일, '思想二關スル情報(14)'>
4) 경성에 시국강습회
국민총력경성교구연맹에서는 관내 모든 신자들로 하여금 시국을 더욱 잘 깨닫고 국민의 의무를 더욱 충실히 실행케 하기 위하서는 먼저 지도적 입장에 있는 인물들을 충실히 총망라하여 시국강습을 시킴이 필요하다고 인정하여 지난 달 28일부터 이번 달 5일까지 8일 동안 포교지 시국강습회를 개최하였는데 강사와 연제는 다음과 같거니와 경성교구 평양교구 춘천교구 모든 방□ 신부와 각 지방대표 신자도합 140명이 참가하였는데 개강식에는 천안(川岸) 조선연맹총장 각하의 훈사가 있었고 폐강식 겸 경성교구연맹총회에는 금천(金川) 매일신보사장의 축사가 있었으며 개강식 당일 후에는 일동이 교외에 있는 지원병 훈련소를 견학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한다.
<출전 : 「경성에 시국강습회」, '京鄕雜誌' 제36권 제946호, 1942년 5월 15일, 38쪽>
5) 경성교구연맹 역원연성회
경성교구에서는 현금 시국이 더욱 긴박하여짐에 따라 일반의 각성을 더욱 촉진시킬 목적으로 동교구연맹역원 전부를 망라하여 지난 6월 19일부터 이틀 동안 연맹역원연성회를 개최하고 ‘국민총력조선연맹 사무국 총장 한상룡(韓相龍)·본부 교학연수 부장 조사생구(鳥飼生駒)·경성제대 교수 송목중언(松木重彦)·군사령부 보도부장 장거상작(長屋上作)·본부 사회과장 영정염종(永井炎鐘) 제씨를 초빙하여 적절한 연성을 받아 더욱 현금 시국에 일심협력하기로 되었다 한다.
<출전 : 「경성교구연맹역원연성회」, '京鄕雜誌' 제38권 제971호, 1944년 7월 15일, 59쪽>
2. 경성교구연맹의 전시총동원 협력
1) 국민총력
세계의 정세가 시각으로 긴박하여가는 지금은 과거의 어느 때보다도 일억 국민이 한 마음이 되어국가에 대한 충성을 갈진히 할 시기이므로 본 잡지에도 이제부터 「국민총력」난을 두어 모든 교형자매에게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를 철저히 깨우쳐 알리는 동시 국책에 응하여 우리의 힘써 행할 바를 두루 알리기로 되었습니다.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본부에서 본 「국민총력」난을 통하여 종종 우리에게 유익한 말씀을들려주고 필요한 사항을 지시하기로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경우를 따라 일반적으로 말할 것도 있고 직접 동 연맹원에게 말할 것도 있을 것이라 합니다.
매월 제1주일은 교회 애국일로‘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서 매월 제1주일을 교회 애국일로 제정하였습니다.
교회에서 이와같은 특별한 애국일을 정한 취지는 우리가 평소에 있어서 오늘과 같은 비상시국을 당하여 국가를 위하
여 기구하고 거국일치 국난을 돌파하여 나가는데 합심 진력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하루를 정하고 그날 특별히 국가를 위해 기구하고 국가에 봉사하려는 신념을 새롭게 하는 것은 비상시국에 처한 우리 천주교신자로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입니다 벌써 수년전부터 정부당국에서도 같은 취지로 매월 일을 애국일로 정하고 전 국민으로 1 하여금 이날 특별한 애국행사를 하도록 지시하고 있습니다.
우리 천주교 신자로서 정부당국에서 제정한 애국일을 아니 지킬 바가 만무하고 오히려 다른 국민보다 솔선하여 애국일 모든 행사를 실행할 것은 물론이지마는 우리는 다른 국민보다도 특별한 신분으로 즉 천주교신자라는 신분으로 제국의 국민이 되어 다만 일개국민으로서만 천황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도 또한 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들입니다. 만일 오늘이라도 폐하와 제국의 엄연 현명한 통치가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천주교회 신자로서 교회의 모든 본분을 안온하게 지켜가고 있었을 지가 의문입니다.
우리가 흔히 다른 나라의 역사와 사실을 보더라도 정권이 확실치 못하고 정치가 문란한 나라일수록 그러한 나라에서 종교는 특히 우리 천주교회는 많은 파란과 처참한 타격을 당하고 있는 사실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런 사실로 보더라도 한 국가 안에 있어 종교는 종교로서도 국가의 혜택을 직접 간접으로 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 하겠습니다. 따라서 국가 유사지시에는 종교로서도 자기의 신앙과 교리를 따라 국가에 충성을 더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날 우리 제국에 있어 지나사변(支那事變)2)을 완전히 처리하고 한걸음 더 나가 대동아건설의 대이상을 실현하기 위하여 일억 일심으로 만민익찬의 신체제를 강조하는 이때 우리 천주교신자로서 우리는 국가정책에 관여할 바가 없다하고 무돈착주의3)로 있다면 이는 잠시라도 용허할 수없는 일이오, 우리의 교리와 신앙상으로 보아도 온당치 못한 일입니다.
이러한 취지에서 우리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은 매월 제1주일을 교회애국일로 정한 것입니다.
애국주일을 위하여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하는 바는 현금 국책수행을 위하여 정부당국에서 명하는 일체 행사는 물론이오, 교회당국으로부터서도 교회행정을 위해서나 시국극복을 위하여 명하는 행사가있을 때에 사적 개인적 무슨 불편이 다소 있을지라도 봉사봉공의 정신을 가지고 솔선하여 모든 행사에 협력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교회 애국주일에 행사로 말하면 특히 이날에 ‘무운장구 기원 미사제’를 거행할 것과 미사전후하여 애국식[연맹상회 : 常會(상회)]을 거행할 것과 미사 중 시국에 대한 강론과 미사 후 신궁 혹은 신사참배를단체로 할 것과 교회 저축조합 저금을 수합 할 것 등 이런 행사들입니다.
여기서 교회 저축조합에 대하여 간단이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저축조합이라는 것은 저축보국을 원하여 한 단체 한 회사에 속한사람들이 조합원이 되어 매월 일정한 금액을 개인 명의로 저금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로 말하면 조합원을 모집하고 매월 각 사람의 저축액을 정하기도 곤란할 뿐만 아니라 매월 개인별로 수집하고 처리하기가 곤란하므로 우리가저축보국의 정신으로 평소에 근검절약하였다가 매월 애국주일에 이것을 수집하여 교회 명의로 자기 교회 유지 기본을 위하여 저금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하므로 교회로서 저축보국을 실행하는 일편 각교우들에게 자기 교회 유지를 자기가 힘쓰는 아름다운 일이 될까 하여 이런 교회 저축조합을 시작한것입니다.
2) 중일전쟁을 뜻함.
3) 無頓着: 전혀 무관심함을 뜻함.
1941년 2월 애국주일
국민총력천주교 경성교구연맹이사장
<출전 : 「국민총력」, '京鄕雜誌' 제35권 제931호, 1941년 2월 15일, 39~41쪽>
2) 군기 헌납운동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는 각 방면으로 총력운동에 힘써오던 중 일지사변 제4주년을 머지않아 맞이하게 된 이때 국가에 대한 충성을 더 한층 드러내고 저 군기4)를 헌납하기로 하고 그 방법으로는 금년에 매월 매인 1전씩 헌금할 것 외에 유지의 기부를 접수하기로 각 지방 교회연맹에 통첩하였던바 각 지방연맹에서는 흔쾌히 이에 찬성하여 이미 헌금접수를 시작하였다는데 장차 어떤 군기를 헌납하게 될지는 헌금의 총액이 이를 결정하게 되리라는 바 금년 12월분까지를 6월안으로 미리 헌금하기로되었다한다.
<출전 : 「군기헌납운동」, '京鄕雜誌' 제35권 제931호, 1941년 2월 15일, 42쪽>
3) 오늘의 시국
지나사변(支那事變)이 시작된 지 이미 3년 10개월이 되었으나 아직도 어느 때 종식될지 예상키 어려운 이때 구주전쟁이 다시 일어나 이미 2년이 지났고 점점 그 전국은 확대되고 격렬하여 가고 있습니다.
동일한 목적을 가진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이 서로 동맹을 체결하고 중국(支那)에는 새로이 중앙정부가 성립되어 제국과 더불어 동아건설에 보조를 같이하고 있는 중 특히 이번 송강외상의 구주방문을 기회로 일본·독일·이탈리아 3국 동맹은 한층 더 강화되고 일소중립조약이 체결되어 제국의 큰 이상과 방침의 전도는 더욱 명확하고 심각하여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형세에 반응하여 국제간 정세는 더욱 복잡하여 집니다. 구체제의 민주국과 신체제의 전체주의국 간에는 더욱 심각한 마찰과 상극이 생기게 되어 현재 아메리카 같은 나라에서는 그 선봉이되어 모든 대항수단을 강구하고 있으며 극동정책에 있어서도 제국에 대하여 외교적으로 경제적으로 압박을 가하고 있습니다.
지나사변(支那事變)이 이렇게 오래 계속되고 있는 것도 여기에 그 원인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세계는 일대전환기에 봉착했다고 하겠습니다. 국가의 내외정세가 이렇게 다사다난한 시국을 당하여 우리 총후 국민으로서 반드시 가져야할 각오는 전일에 우리정신과 실천방법을버리고 새로운 정신과 실청방법을 가지지 않으면 오늘의 시국을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을 깊이 각오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4) 군용 비행기를 뜻함.
일본에 있어서 대정익찬 신도실천이라던가 조선에 있어서 국민총력연맹이라는 일대 국민운동이 새로이 기치를 들고 일어난 것은 결국 시국이 점점 중대하게 되어가는 데 따라 일억 국민이 일심일력으로 총력을 발휘하여 국난에 대처하자는 심각한 의사 외에 다른 것 아니겠습니다. 오늘까지 우리는 여러가지 수단으로 활약하여 왔습니다.
그러나 국제정세가 시각으로 변화 되어가는 데 대응하여 우리는 다시 방침을 새로이 하고 기구 조직을 더욱 완비 강화하여 유감없이 사업달성에 최대의 노력으로 매진하지 않으면 아니 되겠습니다.
1억이라는 다대수의 국민이 동일의 국체의 정신을 가지고 일사 문란이 없도록 훈련을 가하는 동시에 종래의 자유사상과 명리욕망을 찾는 자기본의적 행동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대정익찬 신도실천이라는 국가본의의 정신을 가지고 황국신민의 본분을 발휘하는 것이 우리 모든 연맹원의 당연한 급무라고 생각하나이다.
1941년 5월 1일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장
<출전 : 「국민총력-오늘의 시국」, '京鄕雜誌' 제35권 제934호, 1941년 5월 15일, 112~113쪽>
4) 병기헌납기금 응모상항을 보고
금년 시초에 본 교구연맹에서 금년도 사업으로 병기헌납을 목적하고 전교구연맹원에게 1인 매월 1전씩을 헌금시키기로 결의하고 방금 전 교구적으로 그 실행 중에 있는 터입니다.
지난 5월 18일 각지방교회연맹이사장들이(각지방본당신부들) 본부에 모이는 기회를 이용하여 교연맹총회를 개최하고 사업보고와 장래계획과 기타사항의 결의가 있은 후 병기헌납기금모금 응모상황(5
월 18일 현재로) 보고가 있었습니다.
총회에 발표된 보고를 보면 어떤 지방에서는 많이 노력하여 교우 총수에 대한 표준액이 완납된 지방도 있지만은 어떤 지방에서는 아직 그 표준액에 반액도 수합되지 못한 지방이 또한 많았습니다.
전교구적으로 5월 18일까지 수합된 비례를 보면 총 표준액에 반도 채 수합 되지 못한 현상이었습니다.
본시 병기헌납금 수합완료기한이 6월 말일까지로 한 것이 5월 18일 현재에 있어 반이 채 수합되지 않았다는것은 수합성적이 좋다고 불 수 없는 현실이라 아니 할 수 없습니다.
전에도 누차 말씀드린 것과 같이 1인 매월 1전 헌금이었던 지방에 한하여 과도한 부담이라 할 수도있으나 대체로 말하면 극히 적은 헌금이라 하겠습니다. 또는 물론 지방마다 극빈한 교우도 있고 성사를잘 받지 않는 교우도 있을 터인즉 어떻게 전 교우 총수에 대한 표준액을 완납할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있으나 일편 또 생각하면 지방마다 다소 여유가 있는 교우도 있고 열심히 한 교우도 많을 터인즉 일치단결이 되고 열성만 있다면 어떠한 수단과 방법으로든지 지방마다 그 지방교우총수에 대한 표준액을 수합할 수가 있지 않을까 생각되나이다.
병기헌납을 위한 우리의 이번 이 계획은 우리 경성교구연맹으로서 처음 착수한 계획이고 또한 최소정도의 계획인 만큼 이 계획이 처음 계획대로 성사되지 못한다면 이는 우리 교우연맹이 너무도 빈약하다는 것과 일치단결에 결함이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것뿐인즉 전교구연맹원은 우리의 미약한 힘이나마 총동원하여 우리의 적은 계획일지라도 실현시키는 동시에 우리 경성교구 6만 3천여 연맹원의 일치단결을 더욱 굳세게 하여 현하 중대한 시국이 요구하는 교화단체가 되고 제국의 국민이 되기로 자각과 결의를 가지시기를 간곡히 바라나이다.
잡지 표지에 5월 10일 까지 병기헌납기금응모 상황을 소개하오니 참고로 보아 주시기 바라나이다.
사변 4주년인 7월 7일은 이제 임박하였나이다. 그동안에 제국의 안태와 우리 국민의 행복을 위하여 탄환이 비 오듯 하는 가운데 혹은 자기 생명을 희생하고 혹은 아직까지 악전고투하는 우리 장병들을생각하면 어찌 이만한 정성을 아끼려는가!
1941년 5월 27일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이사장
<출전 : 「국민총력-병기헌납기금응모상항을보고」, '京鄕雜誌' 제35권 제935호,1941년 6월 15일, 132~133쪽>
5) 경성교구연맹총회
국민총력경성교구연맹에서는 현하 시국이 점점 더욱 중대하여짐에 따라 모든 연맹원의 분발을 촉진코자 금년 봄 조선 신부 피정을 기회로 지난 5월 17, 18일 양일간 각 지방교회연맹이사장 47인과 각 지방교회 대표 60여 명이 회집하여 협의회와 총화를 열기로 되어 17일 오후 3시에는 일동이 조선신궁에 참배한 다음 주교관 강당에 모여 협의회를 개최하여 이미 시작한 군기헌납운동을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실행할 것과 사변 4주년인 7월 7일을 가장 의미 있게 지내는 중 각 지방교회가 일치하여 황군 위문품을 보낼 것 등을 협의하였으며 18일 주일 오후 3시에는 종현 대강당에서 총회를 개최하여 경성교구연맹 본부역원 각위, 각 지방교회연맹이사장과 대표 각위, 기타 시내 남녀교우연맹원이 만당한 중개회
사, 일동경례, 궁성요배국가봉창, 묵도, 경과보고, 식사, 선언문 낭독결의문낭독, 천안(川岸) 조선연맹사무국총장 각하(대리) 훈사, 황국시민서사, 우미유까바 봉창 등 순서로 진행한 후 조선연맹 문화부장 시와(矢鍋) 각하의 「시국의 심득(心得)」5)이란 연제로 한 시간이 넘는 열렬한 강연이 있어서 일반에게 깊은 감명을 주었다 한다.
<출전 : 「경성교구연맹총회」, '京鄕雜誌' 제35권 제935호, 1941년 6월 15일, 138~139쪽>
5) 마음 깊이 깨달아서 간직하고 주의함. 또는 그런 주의사항.
6) 대동아전쟁의 경위
지난 12월 8일 제국은 동양의 영원한 평화를 확립하기 위하여 숙적국가인 영미에 대하여 선전포고를하고 제국 황군은 도처에서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미루어 생각컨대 이번 전쟁의 책임은 영미양국에 있다고 단언 할 수 있습니다. 본시 제국이 지나사변(支那事變)에 착수한 것은 동양에 영원 평화를 확립하려는 데 있던 것입니다.
즉 우리 동양에서 영미의 지배 압박을 배격하고 동양인의 손으로 동양을 지배 건설해가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장개석 정권은 제국의 진의를 몰라해하고 영미와 부동하여 제국의 이상을 타파하려고 갖은 수단을 써왔습니다.
지나사변(支那事變)이 시작된 지 이미 5년, 이렇게 장기전이 계속되는 것으로 오로지 영미 역성국가들의 배후책 등이 그 원인이 되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특히 최근에 있어서는 영·미 양국이 그 적성행위를 폭로하여 군비확대 경제 교통단절 등 정책으로 제국을 위협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제국은 언제까지나 평화적으로 해결을 지키기 위하여 모든 수단을 써왔습니다. 최근에 이르러 제국은 미국으로 전권특사를 파견하여 여러 가지로 교섭을 하였으나 완악한 미국은 끝까지 제국의 도의를 무시하고 도무지 해도 고치지 않았습니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러 제국으로서도 더 참는다는 것은 동양영원평화를 위해서만 아니라 제국의 존재와 위신을 보하기 위해서도 용허할 수 없는 일이므로 부득이하여 12월 8일에 황공하게도 대원수 폐하로부터 선전포고의 대조서가 환발되게 되었습니다.
선전포고의 조서가 환발된 지 불과 1개월이 지난 오늘에 있어서 제국환란은 이미 적군의 주요세력을 격파하고 파죽지세로 적진을 협박하여 이미 지난 12월 25일에 영군의 중요 근거지인 향항(홍콩)을 함락시켰습니다.
이번 전쟁이야말로 우리 제국으로서 아니할 수 없는 전쟁이고 반드시 이겨야 할 전쟁입니다.
또는 개선 후 전과를 보아 이미 최후 승리는 결정된 사실입니다. 이때에 있어서 우리는 정부당국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고 각자 자기 본분을 완전히 함으로 직역봉공 일치단결의 정신을 일층 더 굳게 새겨가지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특히 우리 천주교신자는 모든 총후국민 의무에 있어서 솔선하여 나가고 타인의 모범이 되기로 노력하기 경요하는 바입니다.
<출전 : 「국민총력-대동아전쟁의 경위」, '京鄕雜誌' 제36권 제942호, 1942년 1월 15일, 1쪽>
7) 경성에 천주교 결전대회
지난 12월 8일 동양 만년의 앞길을 결정하는 대동아전쟁이 돌발하자 부내 4본당 만 여 명의 교우들도 분연히 일어나 교우결전대회를 열고 정전(征戰) 목적 관철에 일심협력하기로 되었는데 동 대회는 국민총력경성교구연맹의 주최로 18일 주일에 개최되었던 바 오전에는 각 본당에서 전승기원 미사성체를 엄숙히 거행하고 오후 3시에는 4본당 교우들이 종현 대성당으로 모여 전승을 기원하는 장엄한 성체강복식에 참여한 후 연이어 대강당으로 자리를 옮겨 장면선생의 대동아전쟁에 대한 의미심장한 강연을들어 필승의 결심을 더욱 굳게 한 후 연맹기를 선두로 모두 국기를 손에 들고 장사진의 행렬을 지어 남대문통을 지나 조선신궁에 참배함으로써 애국의 충성을 크게 발휘하였다 한다.
<출전 : 「경성에 천주교 결전대회」, '京鄕雜誌' 제36권 제942호, 1942년 1월 15일, 6쪽>
8) 대동아전쟁 기구
만민의 구원자이신 천주여. 이제 대동아건설을 목표로 하고 매진하는 우리나라에 강복(降福)하시며 우리나라에서 나신 성인성녀들은 우리 기구를 전달하사 하여금 제 1선에 나선 장병들에게는 무운(武運)이날로 날로 혁혁하게 하여주시고 총후를 지키는 우리에게는 억조 일심으로 각기 직역봉공에 전력을 다하게 하시고 일사보국(一死報國)하려는 결심과 용기를 우리에게 더욱 치성케 하시어서 하루라도속히 대동아 영원한 평화를 확립케 하시고 따라서 세계가 평화한 중에 주의 성명을 찬미하게 하소서아멘
천주경성모경각3번
(매일 각 성당에서는 미사 끝에 신부 교우들과 다 같이 염하고 각 가정에서는 모든 교우 조과나 만과끝에 염할 것)
국민총력 천주교경성교구연맹에서는 대동아전쟁이 개시된 이래 각 연맹원의 애국적 충성을 더욱 분발시키고 천주의 풍부한 강복을 일심으로 빌고자 우기 「대동아전쟁기구」문을 반포하는 동시 동 기구문을 공과에 세우기 좋도록 인쇄하여 각 교회에 배부하였으므로 이제부터는 모든 성당과 모든 공소에서도 우기 경문의 합송을 듣게 된 것은 실로 당연한 바로서 일반은 열심히 우기 경문을 염할 것이다.
<출전 : 「국민총력-대동아전쟁 기구」, '京鄕雜誌' 제36권 제944호, 1942년, 3월 15일, 17쪽>
9) 반도민중의 각성
지나사변(支那事變)이 시작됨으로부터 대동아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반도 민중이 표시한 애국정성의 결과를 보면 4개년동안 국방현금이 1천 2백만 원이오 비행기 헌납이 77기이러니 한 번 대동아전쟁이 일어나매 그 애국정성은 아연 폭발하듯 하여 대동아전쟁이 일어난 작년 12월 8일부터 금년 3월 8일까지 불과 석 달 동안에 현금은 2천백만 원에 달하고 비행기 헌납은 230기를 돌파하고 그 후도 계속하여 증가하고 있다.
이것은 반도 민중이 시국에서 의도하는 바가 무엇이며 우리들이 반드시 밟아야할 바른 길은 어떤 것인지 점차 잘 깨달아 간다는 증거로서 실로 다행하고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국민 된 자는 누구든지 자기 국가에 대한 의무에서 벗어날 수 없음은 명백한 진리이오.
국가에서 당하거나 행하는 일이 클수록 국가에 대한 국민의 의무도 그만큼 커지는 것도 변할 수 없는 도리이다.
이런 의무를 실행하여 나감은 국민이 반드시 밟아야 할 길이오. 국가와 국민을 행복에로 인도하는 길이다.
이런 도리를 반도 민중이 잘 깨달아 실행하여 나감은 국가의 번영을 꾀하고 그에 따라 반도 민중의행복을 한 걸음 한 걸음 증진시켜 나감이니 누구를 막론하고 자기의 갈 길을 버리거나 등한히 하고 나서 행복에 도달 할 수는 없다.
자기의 반드시 할 바를 아니하면서 풍부한 결과를 바라는 것은 바르지 못한 욕심이오, 질서도 없는혼돈 상태 가운데 헤매면서 행복을 찾는 것은 정신없는 어리석은 행동이다.
우리는 우리의 갈 길, 즉 국가에 대한 의무를 똑똑히 깨닫고 그 깨달은 의무를 철저히 실행함으로써우리의 갈 길을 굳세게 행진하여야 한다. 그런데 특히 우리 교우들은 일반적으로 의무 관념이 더 낫다할 수 있은즉 이 애국행진에 있어서 남의 발자취나 따르기나 함으로써 만족하려 들지 말고 다른 민중앞에 나서서 모든 이의 모범이 되기로 힘쓸 필요가 있다.
<출전 : 「국민총력-반도민중의 각성」, '京鄕雜誌' 제36권 제945호, 1942년 4월 15일, 25쪽>
10) 사변5주년을 맞이하여
지나사변(支那事變)이 시작된 지도 어언간 5주년이나 되었다. 노교구사건이 돌발하였을 때 황군 측에서는 극력 불확대방침을 주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은 뜻대로 아니 되어 결국 일·중 전면적 충돌로 확대되어 해를 거듭하여오다가 드디어 작년 12월에는 대동아전쟁으로 발전하였다.
그때까지 세상은황국 일본의 진의를 몰라주었고 제국의 경제적 군사적 위력을 몰라보았다.
이에 때는 왔던 것이다. 그리하여 오늘에 이르러 온 세상은 황국의 진의를 인식해야만 되고 황국의 위력 앞에는 놀란 가슴으로라도 모든 적성 국가는 굴복하게만 되었다. 과연 일지사변이래 북지, 중지,남지 등 그 광대한 전역에서 4주년이나 넘도록 그만큼 혁혁한 전과를 거두고 나서도 대동아전쟁이 시작되자 불과 반년에 필리핀, 말레이시아 반도, 미얀마 지에서 적군의 그림자까지 없애는 동시 태평양,인도양을 제압하고 있는 것은 일찍이 인류전쟁의 역사에 볼 수 없는 위대한 사실이다.
이는 위로는 천황폐하의 어능위 하에 황군장병들의 끓는 충성과 총후 국민의 일심협력함의 당연한 결과로서 우리는 사변 5주년을 당하여 실로 감사함을 마지않는 바이다.
그러나 큰일은 이것으로서 끝난 것은 아니니 우리는 지나간 결과만 보고서 만족할 것이 아니라 앞으로 할 일에 온힘을 기울여야 한다. 「이기고 나서도 투구 끈을 졸라매라」는 예전 격언은 지금 모든 총후국민들의 가슴속에 새겨둘 바이니 이미 시작된 큰일의 성패는 과거에 보다도 장래에 있음을 생각하여비록 제국의 불패 태세가 확립되었을 지라도 이로서 만족하여 방심하지 말고 오로지 성전목적달성에 정신과 힘을 통째로 바칠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당국에서 지휘하는 바에 무언복종 할 것이오, 복종할지라도 마지못하여하거나 겉으로 하는 체만 하거나 하지 말고 진심으로 하여 나갈지니 특히 이점에 있어서 모든 교우들은 다른 이의 모범이 되어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7월 7일 경성 오카모토 교구장
<출전 : 「국민총력-사변5주년을 맞이하여」, '京鄕雜誌' 제36권 제948호, 1942년 7월 15일, 49쪽>
11) 징병제 실시 1주년
오는 8월 1일은 반도청년들로 영예로운 군문에 들어갈 수 있는 길이 열린 징병제도가 실시된 제 1주년이다.
이날의 감격을 더 한층 새롭게 하고 징병제의 취지를 더욱 깊이 인식시키는 동시 금일과 같은난국에 처하여 일사순국의 결의를 더욱 굳세게 가지게 하려 국민총력조선연맹·경기도연맹·경성부연맹, 3연맹의 공동주최로 여러 가지 기념행사를 하여 이날을 의미심장하게 지내기로 되었다.
이날의 행사로는 우선 한 집도 빠지지 말고 국기를 달아 축하와 감사의 뜻을 표하는 동시 오전 10시에 각종 연맹대표자들이 조선신궁에 모여 참배하고 오후 7시 반부터는 부민관에서 군국의 저력의□□□□과 그 가족을 초대하고 강연·음악·무용을 약 3시간 동안 군국일색의 찬란한 희망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서는 여러 가지 □□□□ □□를 화려하게 꾸미는 동시에 길거리에서는 이동전람회가 개최될 것이라 한다.
우리는 이번 징병제실시 1주년을 맞이할 때 이를 무심히 지내지 말고 그 징병제의 뜻을 더 깊이 인식하여야 한다.
남자는 누구나 다 한 번 받아야 할 군사훈련을 내지6)청년만 받고 있었다는 것은 반도에 대하여 여간섭섭한 일이 아니었다. 우선 지원병훈련소 출신들을 보면 알 것이다. 그들이 얼마나 그 기개가 씩씩하여지고 몸이 튼튼하여 졌던가.
입소 전에 비해 아주 딴사람이 되어가지고 나오지 않았던가.
이렇게 좋은 것을 아직까지의 반도 남자들은 받아보지 못하고 그대로 방구석에 묻혀서 늙어가지 않았던가.
이제 대망하여 오던 군문은 반도 인에게도 열려져서 그 1주년을 맞이하게 되었다.
반도전체가 경하할 바이며 우선 제 1기로 군문에 들어갈 청년들을 격려할 것이다.
이들은 반도남아의 명예를 위해서도 진충보국의 모범을 보여야 할 것이다.
<출전 : 「국민총력-징병제실시1주년」, '京鄕雜誌' 제38권 제971호, 1944년 7월 15일, 49쪽>
6) 일본을 뜻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