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초년병 시절, 한 선배 시인에게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말했었다 ‘니가 뭘 몰라’ 묘하게 웃던 선배는 그 후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름이 주렁주렁해졌다
그 말이 씨가 되어 나는 지금도 ‘중견’이라는 수식어가 어색하게 붙여지는 은둔과 칩거의 무명시인이다 그러나 나는 이제 무명으로 남는 일이 훨씬 더 힘들다는 것을 안다 '무명’은 이루었지만 아직 유명을 이루지는 못했다
내가 한, 내 말의 약속을 지키기 위하여 이제 유명해질 일만 남았는데 어떻게 해야 유명해지는지를 몰라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다, 하지만
주렁주렁한 이름 대신 시가 주렁주렁해 지는 일 더 어려운 그 일에 매달려 여전히 고집 부리듯, 변명하듯 세상의 변두리에서 쌉쌀하게 살며 아직도 덜 뜬 시의 눈을 뜨게 하려고 아직도 덜 뜬 나의 눈을 닦아내곤 한다
#군더더기 시와 시인이 엄청난 숫자로 늘어나면서 오히려 시가 읽히지 않습니다. 사물이 다르고 사람이 달라 세상이 다르게 보이니 시가 내 마음도 네 마음도 모르는 활자가 돼버린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유명한 무명시인’은 달랐습니다. 내 생각을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은 시가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유명해지고 싶고 세상 속으로 들어가 이름이 주렁주렁해지고 싶은 욕망을 누르는 것은 출세지향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불가능할지 모름니다. 유명한 무명시인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쓰인 것으로 보입니다. 한 마디로 시는 자기 모색이지, 출세를 위한 수단이 돼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정태춘박은옥/시인의 마을 https://www.youtube.com/watch?v=j8Ei6dDszbw