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의 대한민국
2000년을 바라보며
1975년 여름 朴대통령은 진해 휴양지에서 「서울 인구 증가를 막자면 수도를 옮기는 길밖에 없다」는 얘기를 하셨고 상경 후 金正濂 비서실장은 나에게 이에 대한 계획안을 작성하라는 하명을 전달했다. 즉 「행정수도 건설안」과 이에 따른 「국토개발 수도 건설안」과 이에 따른 「국토개발안」이었다.
나는 이 중대한 일을 맡은 후 그 방법을 곰곰히 생각한 끝에 7가지 원칙을 정했다. 1. 우선 행정수도는 국토의 일부이기 때문에 국토 문제부터 풀어간다. 2. 국토 문제를 다루는 방법은 「공학(공학)적 접근방법」을 취한다. 3. 국토란 무엇이냐? 국토란 국가의 기본요소이며 국가란 국토와 국민으로 구성된다. 국민 의 질은 문화와 경제이며 이 국가를 보전하는 힘은 「안보」이다. 따라서 다루는 분야는 「국토, 국민, 문화, 경제, 안보」의 5개항으로 정한다. 4.목표는 2000년대를 바라보며 중간 목표는 수치로 표시한다. 우리나라의 1인당 GNP는 1976년 약1천달라였는데 2000년대초 즉 2001년 경제에는 10배인 1만 달러 (계획 당시 불변 가격)가 되며 인구는 약 5천만명으로 늘어난다. 「즉 2000년대를 바라보며 1인당 GNP 1만 달러 우리나라 인구 5천만명 연대 2001년을 목표로 하는 국토구상을 한다. 5. 국내의 여러 석학들의 의견을 폭넓고 심도있게 수렴한다. 6. 사무요원의 구성은 중화학 기획단 기구 밑에 별도로 기획기구를 둔다. 명칭은 행정수도란 용어가 너무 민감하기 때문에 중화학 기획단이라고만 칭한다. 요원은 건설부, 문교부, 상공 부, 상공부 등 각 부처에서 우수한 사람을 차출해서 보직한다. 7. 자료 조사 및 정리를 위해 국내 용역회사를 활용한다(산업개발연구소 金엔지니어링 등). 그리고 전문 기술적 지원을 할 수 있는 기구를 KIST(한국과학기술연구원)에 부설한다(KIST 산하 지역개발연구소). 그리고 외국에서 이 분야에서 활약하고 있는 학자를 영입한다. 이상과 같이 방침을 세우고 작업을 시작하였다. 때마침 폭넓은 여러 분야 석학들의 고견을 들을 기회가 준비되어 있었다. 나는 1973년경부터 각계의 원로 저명인사들이 모여 만든 「밝은 내일을 위한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었다. 이 모임은 朴忠勳 한국무역협회 회장이 만든 것으로 여기에는 명문 사립여대 총장 ㄱ씨, 스위스대사를 지내고 뒤에 부총리가 된 ㅇ 씨, 朴대통령 특별보자관 ㅂ씨, 산업개발연구소 ㅂ소장, 언론인 출신인 沈鍊森씨등이 주로 참여했다. 우리 역사와 현실을 냉철하게 분석. 종합하여 우리 민족의 잠재역량을 소생시키 고 「밝은 내일」앞당기자는 취지의 비공식 모임이었다. 자연스럽게 이 모임에서 2000년대 의 국토개발안에 대한 토의가 진행되었다. 여러 저명인사 중 특히 기억에 남는 분은 국토 과밀과 서민들의 주택 소유욕구 문제를 자주 말씀하신 ㅇ 전 스위스대사, 가치관 정립의 중 요성을 일깨워주신 사회학 교수 ㅇ씨, 국방 전문가 ㄱ 교수 등이다.
도시국가일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의 가주지(可主地)에 대한 인구밀도는 1km2당 1천21명(1969년)으로 세계에서 제일 조밀하다. 스위스(인구 6백만)는 산악국가라지만 국토의 약 2분의 1이 가주지이다. 네델란 드는 작은 나라이지만(인구 1천4백만) 가주면적은 우리보다 넓고 이탈리아(5천6백만)의 가주 지는 우리의 7,8배나 된다. 앞으로 우리 인구가 5천만명이 되면 1km2 당 인구는 1천5백52명 이 되며 이것은 인구 1인당 1백93평의 가주지밖에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가주지란 평지로 쓸 수 있는 것으로 여기에 농사를 짓고 도시 공장 주택을 건설하며 도로를 내고 운동 장을 만들어야 하는 땅이다. 인구 1인당 1백93평밖에 없다면 이것은 도시에 불과하다. 따라 서 우리나라는 일반 개념의 국가라기보다는 「도시국가」이다. 곧 홍콩이나 싱가포르와 같 은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 이 좁은 땅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1만 달러 시대의 농업
우선 1만 달러 시대, 더 나아가 2만 달러 시대의 농업을 생각하면 비관적이다. 농업이란 노 력을 해도 생산성 향상이 극히 서서히 나타난다. 그러면 그 해결 방법은 미국과 같이 1인 당 농지면적을 확대하고 기계화해서 1인다 소득을 올리든가 특용작물을 재배한다던가 값이 비싸도 한국에서 꼭 생산해야 할 작물을 생산한다던가(저장성이 나쁜 야채등) 하는 방법밖 에 없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쌀이 주 농업이기 때문에 1인당 경작 면적 확대와 기계화를 하는 길밖에 남지 않으며 그 결과는 농민 수의 급격한 감소와 천수답의 소멸 그리고 황량해 진 농촌이다. 그렇지만 식량안보상 농업을 폐기할 수도 없다. 여기서 두 가지 예를 들자. 스위스와 일본이다. 스위스는 농업을 거의 포기했다. 때문에 식량은 수입한다. 스위스의 빵이 세계에서 가장 맛이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스위스 사람들은 비상시를 위해 3년분의 밀을 항시 보존하고 있으며 빵을 만드는데 3년 전의 밀부터 사용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은 우리나라보다는 양호한 편이지만 인구가 조밀한 나라이다. 그런데 지금 일본의 농 촌에 사는 사람들은 이미 농민이 아니다. 농업외 소득이 70%나 된다. 농사는 농경대행 회 사가 농사기계로 중무장하여 파종부터 수확까지 도맡아 농사를 지어주며 수확 후 농가에 이 익만 분배한다. 그리고 자기 땅에 자기가 농사(주로 미작)를 짓지 않는다. 농촌 사람들은 별도의 직업을 갖고 있다. 요식업 관광 등 3차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많고 주변의 공장 회사 등에 출근한다. 「츠바메」라는 마을은 전주민이 살길을 찾아 양식기(洋食器)를 만들 기 시작했었다. 지금 「츠바메」 마을은 세계에서 유수한 양식기 제조마을이 되었다.
이밖에도 「 도자기 마을 」「 유리 마을 」「 직물마을 」「 식품가공 마을 」「 공예품마 을 」등 예를 들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정부는 이를 적극 지원하며 특히 도시를 피해 주말 을 시골서 보내기 위해 도시민들이 주말주택(호화별장이 아님)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그 래서 쌀농사 짓는 것보다 테니스 코트를 만드는 것이 수입이 더 많다고 한다. 대만이나 동 남아는 1년에 3-4번씩 수확을 하니 부럽기 짝이 없다.
그러면 우리의 농촌 문제는 일본을 모델로 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당시(1976-1979년) 쌀값 은 국제 가격의 약4배였다. 1만 달러 시대의 쌀값은 국제가격의 10배가 될 것인데 양쪽 적 자를 세금으로 메워 가면서 전통적 농사방법을 고집할 수는 없을 것이다. 1차산업인 농업이 비관적이라면 우리나라의 살길은 2차산업인 제조업을 발전시킬 수밖에 없 다는 결론이 나온다. 5천만 인구가 열심히 공산품을 만들어서 수출을 많이 하고 그 돈으로 원자재를 수입해서 살아가는 것이 유일한 길이라는 뜻이 된다. 결론적으로 우리나라는 공 업을 주종으로 하는 산업국가 건설을 뒷받침 할 수 있는 「국토개편」을 하여야 한다는 대 전제가 바로 과밀한 국토문제에서 쉽게 도출된다.
우리를 둘러싼 주변국가와의 관계
우리나라가 공업을 주종으로 하는 산업국가가 되어 수출을 하게 되면 무역 경쟁국과의 치열 한 싸움이 전개된다. 수출에는 크게 두 가지 유형이 있다. 첫 번째는 다른 나라가 못 만드 는 신제품 고급제품 등을 만드는 것이고 두 번째는 같은 물건이지만 가격을 상대적으로 싸 게 하는 방법이다. 고품질 제품은 과학기술이 발달한 나라 즉 선진국형이고 부가가치도 높 다. 저가제품은 가격경쟁이 심하고 노임이 싼 쪽이 유리한 후진국형 상품이며 부가가치도 낮다. 이런 면에서 우리나라는 중진국형이며 1만 달러 시대까지만 해도 큰 변화는 거의 없 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후진국이 싼 노임으로 기술을 향상시키고 생산성을 높인다면 우리 나라 제품의 일부를 이러한 나라에 뺏기게 되는 것이 당연한 이치이다.
2000년대의 중국
이런 점에서 가장 무서운 경쟁국은 2000년대에는 중국이 될 것이다. 10억 인구라는 거의 무한정한 인력 공급원을 갖고 있다. 그리고 아마도 그때까지 중국은 1인당 GNP가 우리나라 보다 훨씬 낮으며 따라서 극히 싼 노임이 계속 유지될 것이다. 이 GNP가 높아지고 인건비 가 올라 갈수록 우리 수출상품은 잠식당할 것이며 중국의 기술과 생산성이 조금만 높아져도 우리나라의 수출시장이 그만큼 줄어들 것이다.
중국은 우리나라를 뒤에서 바짝바짝 죄어오고 있는 것이다. 훗날 중국의 기술이 우리나라와 같아진다고 가정하면 우리나라 상품은 시 장을 완전히 잃어버리던가 거꾸로 살아남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임금이 중국과 같아져서 중 국사람과 같은 생활 수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우리의 1인당 GNP 1만 달러 시대는 한 낱 꿈일 뿐 중국이 1만 달러 시대가 된 후에야 우리도 이를 바라볼 수 있다는 이야기이기도 하 다. 중국은 자원이나마 풍부하고 농사라도 지으면서 자급자족이 될 수 있어 문제가 없지만 우리나라 국민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까?
일본 등 선진국과의 관계
그러면 고품질 제품 수출 쪽은 어떤가? 이것은 일본과의 기술경쟁 생산성 경쟁인데 상당히 긴 기간 가망이 없어 보인다. 기술개발 능력 과학기반 자본 생산성(생산시설과 노동력의 질) 상술 등 어느 면에서나 비관적이다. 일본의 노임이 올라가서 국제경쟁력을 잃은 상품이나 얻어 차지해야 될 판이다. 물론 한두 품목은 고품질 수출제품이 나올 수도 있겠으나 이것은 드문 예일 것이다. 일본과 경쟁하려면 기술혁신을 필사적으로 장기간 하여야 조금 서광이 보일 것으로 판단이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일본과 중국 사이에서 최대한 열심히 뛰며 기술혁신을 하고 생산성을 높여 준선진국 위치를 계속해서 유지하고 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결론이다.
즉, 「뛰지 않으면 죽는다는 것이다는 것이다 」 그래서 당시 우리나 라에서는 「자전거 경제」즉 페달을 계속 밟아야 넘어지지 않는다는 비유가 나올 정도였다.
한국보다 10년 앞섰던 대만
대만은 한국과 자주 비교대상이 된다는 점에서 한국이 왜 대만에게 뒤 떨어지는가라는 비판 과 의문이 제기되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중화학 공업화를 추진하면서 대만을 경쟁상대로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다. 어떻게 하면 대만을 따라잡을 수 있을까에만 몰두했을 따름 이다. 1907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대만은 거의 모든 면에서 한국보다 앞서 있었다. 1957년 미국 원조물자가 끊어졌고 우리가 원조물자로 국가경제를 지탱하면 1964년 벌써 첫 무역흑 자를 기록했던 나라다. 이런 기초 위에 기계 석유화학 등 중화학 공업에서도 한국보다 10 년은 더 앞서 있었던 것이다.
1976년 당시 대만의 석유화학은 연산 약 1백만t(에틸렌 기준)이 었는데 우리나라는 울산에 15만t짜리가 가동 중이었고 여수에 35만t짜리를 건설중이었다. 여수 석유화학이 완공되었다 해도 합계 45만t으로 대만의 약 2분의 1이고 대만 인구가 우리나라 인구의 반이라는 것을 생각하면 인구 비율로 보면 우리나라의 4배이다. 이 공장에서 나오는 제품으로 플라스틱 제품 섬유제품 섬유제품을 만들어 대부분 수출했을 정도이다.
중화학공업 계획에서는 여수에 35만 t짜리 두 개를 순차적으로 지을 계획이었고 두 번째 공 장은 「럭키화학」에 인가까지 했으나 10.26 후 과잉투자라고 비판받고 취소되었다. 그 후 국내에서 석유화학제품 부족으로 파동이나 나니 최근 부랴부랴 한꺼번에 공장을 마구 지어 총 국내생산량이 3백15만 t이나 됐기 때문에 당장은 과잉 상태가 됐는데 이는 정부가 중요 원자재의 생산량을 미리 예측하여 수요. 공급량을 조절해주지 않고 방치한 결과다.
빚 안지는 대만 기업들
대만의 성공 요인으로 국민성을 드는 사람이 많다. 나 역시 대만을 몇 차례 방문했었는데 그때마다 국민성에 감탄하곤 한다. 대만에는 대물림을 하는 가족 단위의 중소기업이 많은 데 온 가족(부인, 자식)이 함께 일하고 있다. 대만인들은 공장을 짓든가 확장하든가 새로운 시설을 할 때에도 은행 빚을 안 지려는 경향이 있다. 가능하면 자기 자본으로 사업을 하며 은행 빚을 졌더라도 다 갚기 전에는 신규 투자를 하지 않으려 한다. 그러므로 자기자본 비 율이 50%가 넘어 건실한 기업구조를 가진 장점이 있다.
따라서 예금이 남아돌아 오히려 대출에 진땀을 뺀다. 제품을 납품하며 받은 어음은 은행에 서 즉시 현금화해 준다. 은행측의 고맙다는 인사도 받으며 은행 할인금리도 아주 싸다. 반면 제철, 조선, 자동차, 반도체 산업 등과 같은 대규모 사업에는 좀처럼 용기를 내지 않는 다. 안전성 위주이므로 빚까지 얻어 사업하기 싫다는 것이다. 대만을 이겨보기 위한 전략의 하나로 중화학공업을 추진하면서 제철, 조선, 자동차를 중점 육성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였 다. 끈기, 근면, 신용도 큰 장점이다.
한 예를 들자. 모 그룹의 ㅇ 회장을 작고하고 몇 달 전에 만나 그가 이룩한 반도체사업 노력에 경의를 표한 일이 있다. 어떻게 연구를 진행하 느냐고 물었더니 ㅇ 회장은 「미국에서 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며 미국 현지 연구소에서 생겼던 일을 들려주었다. 「미국 현지 연구소는 원래 한국인 연구원을 돈을 많이 주고 고 용했었는데 처음에는 곧잘 하는 것 같더니 일은 완수하지 않고 요구조건만 자꾸 많아져서 더 이상 고용할 수가 없었다. 이 사람을 해고하고 대만 사람과 계약했다. 그 대만인은 우수 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미국에선 인종 장벽에 본국에 반도체 산업이 없어 대학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어 대학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이 사람에게 주제별로 연구자금 을 줬더니 밤잠도 자지 않고 열심히 일해 일을 성공적으로 끝마치더라. 그래서 그후부터는 대만 연구원을 많이 쓰게 되었다.」
장관의 반이 이공대 출신
내가 대만에 갔을 때도 우리나라와는 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헌 쇠가죽가방을 든 허름한 차림의 한 할아버지가 버스를 타자 좌석에 앉아 있단 학생들이 경의를 표하며 자리를 양보했다. 왜 평범한 할아버지에게 그럴까 하고 의아하게 생각하여 안내인에게 물어 봤더니 대학교의 이공학 교수라는 것이다. 과학교수들이 이렇게 존경을 받 으니 연구에 종사하는 사람의 열의도 높을 수밖에 없을 듯했다.
대만정부 각료의 절반 가량이 이공 대학 출신이다. 공업국가를 건설하려면서 과학상식 없 이 될 수 있겠는가하는 의지에서다. 그리고 공무원은 존경받으며 장기간 한자리에 근속한 다. 각종 법률제도도 좀처럼 변경하려고 하지 않는다. 한 대만 고급관리가 나에게 한국에서 는 정부에서 필요하다면 법률까지도 쉽게 바꾸어 일할 수 있으니 부럽다고 이야기한 적이 있다. 그땐 그런가하고 좀 우쭐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식은땀이 절로 난다. 소기업들은 창설도 간단하고 그만 두는 것도 간단하다. 정부에 무엇을 해달라고 요구하는 것도 없고 시끄러운 간섭도 없다. 수지 맞으면 하고 싫으면 그만둔다. 농부들은 일 년에 3모작을 하 면서 여름옷 한가지로 난방도 필요없는 집에서 유유히 풍족한 생활을 해 나가고 있다. 이 시점에서 세 가지 무서운 의문이 생긴다. 대만 국민은 중국 국민과 같은 민족이다. ▲중국과 대만이 통일이 된다면? (대만의 기술+중국의 노임)=?! ▲우리나라가 대만을 따라잡고 일본과 대만의 중간에 위치하려면 얼마만한 각오와 노력이 필요한가? ▲이제 우리에게 시간은 얼마나 남아 있나?
경쟁관계가 아닌 소련
소련에 대해서는 특별한 고려가 없었으나 일본 사람들이 공장건설 무역 등으로 자주 소련에 가서 관리자들과 이야기하고 소련에 가서 관리자들과 이야기하고 와서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해 줘 흥미를 가지게 됐다. 일본의 큰 모 무역회사 간부가 와서「이번 소련에 가니 시베 리아 개발 제안이 있었다. 소련의 천연가스 쓸데가 소련에는 없는데 달리 용도가 없겠느냐 하는 제안이었다 」는 것이다 파이프라인을 일본이 투자해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건설하면 일부는 자기 나라가 쓰고 나머지는 일본으로 가져가라는 제안이었다는 것이다. 그 일본회사 간부가 소련측에 「일본은 현해탄이 있어 불가능하니 한국에 천연가스를 팔아도 되느냐?」 하니「OK」라고 답했다면서 우리에게 일차 검토해 보라는 제의를 해왔다 . 이때까지만 해도 소련은 완전 적대국이었고 북한문제가 있어 좀 당돌한 제안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단 체크는 해보아야겠다고 생각이 되어 한 방법을 생각했다. 마침 온산에 펄프공장 건설안이 있어 입찰을 했는데 핀란드의 한 회사로 거의 낙찰이 되어 갈 때였다. 그래서 핀란드 회사 의 간부를 불러 조건을 붙였다.
공장 시설의 대부분을 시베리아 철도로 수송하고 블라디보 스토크에서 온산까지는 배로 수송하라고 해봤다. 그랬더니 의외로 핀란드회사 간부는 소련 은 그런데 옹색하지 않으며 돈을 번다는데 하등 문제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 결과 온 산 펄프공장 시설은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서 수송되었다. 값도 쌀 뿐 아니라 수송기간도 반달밖에 소요되지 않았다. 선박수송이 몇달씩 걸리는 데 비하면 엄청난 경제적 이익이었 다. 그 결과 남북한이 통일되거나 합의한다면 서유럽 제품을 시베리아 철도와 우리나라 철 도를 이용하여 부산까지 운반하고 여기서 일본 등 극동지구 제품을 서유럽으로 수송하는 수 송 사업이 2000년대에는 가능하겠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런 시대면 시베리아 천연가스도 파 이프라인으로 수입이 가능하게 되어 무공해 에너지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도 있고 가스나 유 전지대에 발전소를 지어 송전선으로 전기를 공급받는 날도 있을 것 같다고 예상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그 대가로 상품과 구상무역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지금 소련이 자유경 제 체제로 전환했기 때문에 구상무역 개념을 없어졌지만) 소련은 경쟁상대라기 보다는 경제 면에서 우리와 상호 보완할 수 있을 것으로 인식됐다. 시베리아는 소련에게는 단점이 많은 지역으로 이를 개발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군사부문을 제외하고는 경쟁상대가 아닌 협조상대로 인식된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