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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2일 화요일(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
제1독서 : 판관 6,11-24ㄱ
복 음 : 마태 19,23-30
그때에 23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24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25 제자들이 이 말씀을 듣고 몹시 놀라서,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하고 말하였다.
26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여겨보며 이르셨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27 그때에 베드로가 그 말씀을 받아 예수님께 물었다.
“보시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
28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사람의 아들이 영광스러운 자기 옥좌에 앉게 되는 새 세상이 오면,
나를 따른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
29 그리고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30 그런데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병자성사를 달라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환자 교우의 상태에 대해 여쭤보니,
병원에서 이제 해야 할 치료가 없다면서 마지막을 잘 준비하라고 했답니다.
낮에 두 군데에서 특강이 있어서 곧바로 가지 못하고, 저녁 늦게 그 집에 방문했습니다.
다행히 형제님께서는 아주 밝으셨고, 또 기운도 넘쳐 보였습니다.
병원에서는 얼마 안 남았다고 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더군요.
정성껏 병자성사를 드리고 성당에 돌아왔습니다.
그 가족에게는 매달 봉성체가 있으니 꼭 신청하라고 말씀드렸지요.
그리고 열흘쯤 지났을까요? 병자성사를 받은 형제님께서 선종하셨다는 말을 듣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빨리?’라는 생각과 함께, 병자성사를 드리기 전에 나눴던 대화가 마지막 대화였음을 깨닫습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떠올려 봅니다. 우리는 과연 몇 번이나 더 만날 수 있을까요?
지금의 만남 뒤에도 계속 만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 만남이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의 만남이 마지막 만남인 것처럼 최선을 다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뒤로 미룹니다. ‘다음에 잘하면 되지….’라는 말과 함께 말이지요.
주님과의 만남에서도 정성을 다해야 합니다.
우리의 정성이 곧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열쇠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직 아니’라고 말합니다.
주님을 만나기보다 세상을 만나야 하고, 주님의 일보다는 세상의 일이 먼저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우리이기에 오늘 복음을 통해 하신 예수님의 말씀이 크게 와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기가 더 쉽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자가 이 세상에서 말하는 억만장자를 비롯한 갑부를 의미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주님의 뜻보다 세상의 뜻을 더 중요해서 재물에 대한 집착을 끊지 못하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권력과 재물만 있으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서, 주님과의 만남을 소홀히 여깁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게 됩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이 말씀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일에 매여 있으면 주님을 찾거나 청하지 않으며 또 의지하지도 않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과의 만남에 온 정성을 쏟는 사람은 무엇보다 주님이 먼저가 됩니다.
그리고 그 보상을 백 배로 받게 되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에 정성을 쏟는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정성을 쏟을 수밖에 없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우연히 ‘KBS 영상 실록’을 보았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이 있어서 우리는 조선의 역사를 알 수 있습니다.
'영상 실록‘은 매년 있었던 사건과 사고를 영상으로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저는 영상 실록을 보면서 제가 태어났던 1963년의 사건과 사고를 보았습니다.
그해 1월은 인천항이 얼 정도로 매서운 추위가 있었습니다.
영상 실록을 보니 1963년은 군인들의 세상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사람은 5.16의 주역인 박정희 의장이었습니다.
정치활동이 금지된 가운데 군인들은 ‘민주공화당’을 창당하였고,
군인이었던 박정희 의장은 전역하여 민주공화당의 총재가 되었고,
곧 대통령 후보가 되었습니다.
박정희 의장은 15만 표 차이로 윤보선 후보와 경쟁하여 대통령에 당선되었습니다.
제가 태어났던 1963년은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되는 격변의 시대였습니다.
1963년에 ‘라면’이 처음으로 출시되었고, ‘장충체육관’이 신축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하였고, 제가 태어났습니다.
유튜브를 검색하면 'KBS 영상 실록‘을 검색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태어났던 해의 영상을 보는 것은 어떠신지요? 문득 생각합니다.
하느님 나라에 우리들 각자의 삶이 ’영상 실록‘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교회는 오늘을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모후’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성서는 2000년 전에 마리아는 어떤 삶을 살았는지 담담하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나자렛의 처녀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서
‘마리아는 아이를 가질 것이다.’ 라고 전하였습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아직 처녀인데 어찌 그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묻습니다.
그러자 천사 가브리엘은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은 불가능한 것이 없다.’라고 말합니다.
마리아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였습니다.
하와의 불순명으로 죄가 생겨났고 죄의 결과로 죽음이 찾아왔지만,
마리아의 순명으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시고
우리는 죽음을 넘어 영원한 생명에로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체험했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는 ‘인성과 신성’이 함께한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이 되셨으니 성모님에게도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라는 호칭을 드리고 공경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어렵다고 하십니다.
문득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지 생각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에 대해서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돈의 중요성과 저축의 필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인이 은전 열 닢을 가지고 있었는데 한 닢을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안을 쓸며 그것을 찾을 때까지 샅샅이 뒤지지 않느냐?”(루가 15,8-10)
예수님께서는 되찾은 은전 한 닢을 되찾은 양 한 마리처럼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다음은 적극적인 재테크입니다.
달란트의 비유(마태 25, 14-30)는 목표 수익률 100%의 공격적인 재테크입니다.
예화 속의 주인은 종에게 금융기관의 수익률보다 높은 수익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소중하게 여기라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능을 잘 키워야 합니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이니 잘 키워나가라고 하십니다.
그렇다면 그것이 전부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맹목적인 저축에 대한 경고입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루가 12,16-21)는
돈 자체에 탐닉하는 수전노가 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곳간이 미어터지게 재물을 모아도 소용없다고 하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언제든지 주인의 목숨을 가져가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음은 나눔의 미덕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눔이 참 행복임을 가르치십니다.
부자와 라자로의 비유(루가 16, 19-31)는
나눔을 모르는 부자의 비참한 말로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돈을 싫어하신 것이 아니라 돈에 대한 탐닉을 싫어하셨습니다.
부자를 미워하신 게 아니라 나눔을 모르는 부자를 책망하셨습니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된 것이 죄가 아니라 모은 돈을 나누지 않은 것이 죄가 된다고 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누었던, 자캐오(루가 19, 1-10)를 축복하셨습니다.
자캐오와 가정이 구원받았다고 하셨습니다.
가진 것을 기쁘게 나눌 수 있다면 부자도 얼마든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이
재물 때문에 당신을 따르지 못하고 물러간 다음,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3-24)
여기에서 '부자'란 단지 재물을 많이 가진 자를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재물에 의지하는 사람, 재물에 집착하여 하느님을 멀리하는 사람을 말한다 할 수 있습니다.
또한 '재물'이란 단지 물질적인 재화 뿐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몸과 가정, 재능과 지식, 이념과 신념 등
자신이 애착하는 것이라면 모두가 재물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경우에 따라서는 하느님마저도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상에 대한 집착이라면,
버려야 하는 재물이요 우상이 될 수도 있다는 말씀입니다.
결국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렵다'는 것은
곧 재물 때문이라기보다 재물에 대한 집착 때문에 하느님을 멀리한 까닭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실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부와 재물은 하느님의 축복을,
가난과 빈곤은 하느님의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깜짝 놀라서 말합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마태 19,25)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마태 19,26)
이는 구원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구원은 인간이 자력으로 스스로 획득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러니 가진 재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이 다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씀이 됩니다.
부자든 가난한 이든 죄인이든 자신(우상)에 대한 애착을 끊고
하느님을 믿고 따르면 모두가 구원받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입니다.”(마태 19,30)
그러니 오늘 우리는 자신을 들여다볼 일입니다.
과연 나는 어떤 것에 애착하고 있는가?
혹 나 자신의 몸이나 소유물이나 재능, 지식이나 신념이나 이상,
자기 방식의 사랑이나 자기가 만들어 놓은 공동체 상이나 하느님 상에 애착하고 있지는 아닌지?
오늘 우리는 내가 바라는 가정이나 공동체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가정과 공동체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바라고 믿는 하느님이 아니라 하느님이신 하느님이 되셔야 하고,
내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 19,24)
주님!
재물이 없어도 고집과 완고함으로 자신을 채우고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힘과 능력이 없어도 자신의 뜻으로 가득 차 있는 저는 부자입니다.
제 주장과 의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기 때문입니다.
나 자신을 가늘게 부수고 부수어 당신 바늘귀에 꿰소서!
아멘.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제자들에게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24절)
예수께서는 재물 자체를 나쁘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재물의 노예가 된 사람들을 비판하신 것이다.
바늘귀라고 하는 것은 이런 의미가 있다.
도시는 성곽으로 둘려 있고 성문이 있는데,
성문에는 짐을 실은 낙타라든가 사람들이 쉽게 드나들 수 있는 큰 문이 있고
그 옆에는 작고 낮은 좁은 문이 있어서 밤에 큰문을 잠그고
수위 병이 지키면서 이 문으로 사람들을 통과시켰다.
이 작은 문을 흔히 바늘귀 문이라고 했다.
이러한 배경에서 예수님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낙타가 사람도 겨우 지나가는
이 작은 문을 들어가기만큼 어렵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 말씀을 하신 것은 제자들이 가난을 부끄러워하지 않도록 하신 말씀이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아예 불가능하다고 하신 것이다.
낙타와 바늘귀의 예가 그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은 놀랐다고 한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25절) 한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모든 이에게 하느님의 은총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즉 하느님께서 해 주셔야만 가능하다고 하신다.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26절)
“보다시피 저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스승님을 따랐습니다. 그러니 저희는 무엇을 받겠습니까?”(27절)
베드로가 그렇게 물은 것은 우리가 모두 사도들보다 못하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을 따르는 모든 사람을 대신해서 물었다.
모든 것을 버렸다는 것은 어떤 양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완전히 버리는 것이 중요하다.
베드로와 제자들은 이렇게 큰 사랑으로 완전히 버린 분들이다.
“너희도 열두 옥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할 것이다.”(28절)
하느님의 아들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분의 말씀을 받아들이지 않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는 뜻이다.
그분을 따르는 것에 방해가 될 수 있는 모든 것을 완전히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백 배는 하늘나라에서 누릴 상급을 의미한다. 현재의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이 훌륭한 것이다.
즉 주님을 위해 육적인 것을 포기하는 사람은 영적인 것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30절) 하신다.
재물이나, 생각이나 이념에 대한 집착을 버릴 때, 우리는 참으로 자유로울 것이다.
버려도 버릴 것이 생깁니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 나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19,23).는 말씀을 들은 한 부자가
“하느님, 낙타를 아주아주 작게 만들어 주시든지, 바늘 귀를 아주아주 크게 만들어 주십시오.
그리하면 저의 재산을 당신께 아낌없이 바치겠습니다.” 하고 간절히 기도하였답니다.
그렇다면 그가 재산을 바친다고 해서 하느님 나라를 차지할 수가 있을까요?
재물이 아니라 인간적인 욕심을 버리지 않는 한 하느님의 나라를 차지할 수 없습니다.
각자는 자기가 소유한 것을 포기하되 무엇을 버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엇을 위해서 버렸느냐가 중요합니다.
자기의 인간적인 유익이 아니라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 버렸을 때 가치가 있습니다.
상을 백배로 받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라는 이유로 버린다면
결코 진정한 열매는 맺을 수 없고 가치도 없습니다.
상은 “하느님 나라를 위하여, 그분의 이름 때문에”(루카18,29. 마태19,29) 바쳤을 때
자연스레 따라오는 것입니다. 기억하실 것입니다.
언젠가 올림픽대회 때 상을 위해 고의적인 져주기 게임을 한
베드민턴 경기는, 결국 실격을 당하였습니다. 그 근본정신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때문에 전체를 얻을 수도 있지만 한 가지 때문에 모두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를 얻을 수 있는 하나를 택해야 합니다.
사실 부자가 가진 재물이 나쁜 것이 아니라
재물에 눈이 가려 보아야 할 참가치를 보지 못하는 것이 문제입니다.
재물은 인간을 노예화하는 유혹의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더 갖고 싶은 마음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돈만 있으면 귀신도 부릴 수 있다고 말합니다.
사실 ‘상’만을 생각하면 부정한 방법으로도 일등을 하면 됩니다.
그러나 정신, 의미, 가치를 생각하면 그 생각을 한 순간 이미 경기에서 진 것입니다.
사실 재물은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래서 잘 써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 보다, 많은 재물을 소유할 수 있다면 그것은 분명 축복입니다.
그렇다면 그 축복을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에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재물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무쪼록 많이 벌되 하느님의 영광을 들어 높이는 일들을 하나하나 늘려가길 바랍니다.
버릴 것은 과감하게 버리십시오. 버려도, 버려도 또 버릴 것이 생기게 마련입니다.
“첫째가 꼴찌 되고 꼴찌가 첫째 되는 이들”은 누구이겠습니까?
“돈이 많다고 우쭐대다가는 쓰러지지만 착하게 살면 나뭇잎처럼 피어난다”(잠언11,28).고 했습니다.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잘 나가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느님을 피신처로 삼지 않으면 결국은 하느님 나라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린 사람은 모든 것을 얻게 되고, 모든 것을 누리려 한 사람은 그것을 잃게 됩니다.
부디 모든 것을 얻는 기쁨을 차지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사랑은 그 자체로 만족을 줍니다.
사랑은 다른 것 때문이 아닌 그 자체로 마음에 드는 것입니다.
사랑은 그 자체로 공로도 되고 상급도 됩니다.
사랑은 그 자체 말고는 다른 이유나 열매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사랑의 열매는 사랑하는 것 바로 그것입니다.
나는 사랑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위해서 사랑합니다. 사랑은 보배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사랑이 참된 사랑이라면 자신의 시초로 되돌아가고
자신의 기원으로 돌아서며 자신의 원천으로 되 흘러가야 합니다.
거기에서 항상 자신의 물줄기를 받아야 합니다.”(성 베르나르도).
진정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주님의 영광을 위하여
나의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내려놓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그분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선택하지 못하고
세상의 물질에 매여 있다면 사랑한다는 말은 그야말로 헛소리입니다.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저의 모두는 주님의 것입니다.
저의 모두를 당신의 뜻대로 써주십시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받을 자격과 능력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어제 부자 청년이 당신을 따르라는 주님의 초대를 거절하고 떠난 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시자 제자들은 놀라 이런 반응을 보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오늘 저는 이 말씀이 특별히 눈에 들어오며 이어 이런 묵상을 하게 되었습니다.
받을 수 있는가? 라는 말은 본래 가능성을 얘기하는 것이지만
받을 수 있는 능력을 얘기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묵상 말입니다.
예를 들어 투수가 던지는 공을 받을 수 있냐고 얘기하는 것은
받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를 얘기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받는 것도 하나의 능력입니다.
구원을 받는 것.
도움을 받는 것.
사랑을 받는 것.
위로를 받는 것.
이런 것이 다 능력이라는 말입니다.
또 하나의 예로 만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를,
구원과 도움과 사랑과 위로라고 받아들이지 못하고
오히려 그 반대의 것으로 오해하면 받을 수 없겠지요.
하느님의 구원과 도움과 사랑의 손길을
우리는 오늘 판관기의 기드온처럼 얼마든지 오해할 수 있지요.
오늘 기드온은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자
이스라엘이 겪고 있는 고통과 불행을 들먹이며
“지금은 주님께서 저희를 버리셨습니다.”라고 답함으로써
구원을 버림이라고 오해하지 않습니까?
그렇습니다.
구원도 사랑도 도움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
받을 능력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인데,
자격과 능력이 있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다면 누가 구원받을 수 있는가?”
첫째로 믿음의 소유자입니다.
사람을 믿건 하느님을 믿건 믿는 자가 받을 자격과 능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사람을 믿지 못하다가 하느님도 믿지 못합니다.
이 사람도 믿지 못하고 저 사람도 믿지 못하고,
하다 보니, 믿지 않는 것이 그의 천성처럼 되어버렸고,
사람을 믿지 못하는 것처럼 하느님도 믿지 못하게 된 것입니다.
둘째로 원하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지,
원치 않거나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면 받지 않을 것입니다.
셋째로 버리는 사람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이 아닌 다른 사랑과 구원과 도움은 버리는,
그래서 하느님 사랑과 구원과 도움을 원하는 사람이 받을 수 있습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버리는 사람이 받는다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내 이름 때문에 집이나 형제나 자매, 아버지나 어머니, 자녀나 토지를 버린 사람은
모두 백 배로 받을 것이고, 영원한 생명도 받을 것이다.”
낙타가 바늘귀 통과하는 유일한 방법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라고 하십니다.
가진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사람에게 주고 당신을 따르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우울해진 부자를 보며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은 사람을 그 ‘크기’로 보신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자는 낙타의 크기이고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사람은 바늘귀보다 작아야 합니다.
사람마다 정말 크기가 다양합니다. 본래 우리의 크기는 태어날 때 우리의 본모습입니다.
우리는 숨만 쉬고 있어도 행복한, 그러나 낳아주지 않고 만들어 주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존재였습니다. 이것이 우리 본래 크기입니다.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되지 않으면 하늘나라를 볼 수 없다고 하셨는데,
그 뜻은 이렇게 작아져야 한다는 뜻이었습니다. 작아짐이 겸손입니다.
그러나 사람은 성장하면서 세상의 영향으로 자기의 몸집도 키웁니다.
누군가의 자녀로, 누군가의 형제로, 누군가의 친구로, 무엇을 가진 사람으로,
어떤 스팩을 지닌 사람으로, 예쁜 사람으로 자신을 덮어씌워 갑니다.
이 껍데기들이 마치 양파처럼 자기 몸집을 키웁니다.
그것들이 마치 나의 살과 피가 되어 그것을 떼어내면 살이 떨어져 나가는 아픔을 느낍니다.
그리고 그 껍데기가 벗겨질까 봐 두려워서 쉽게 화를 냅니다.
창세기 6장에 나필족이라는 거인이 나오는데
그 거인은 하늘의 사람, 곧 바늘귀보다 작아서 하늘을 날 수 있는 크기였다가
땅의 여인들과, 곧 재물이나 애정, 명예 등과 혼인하여 자신의 몸집을 키운 존재를 의미합니다.
나필족은 노아의 배에 들어올 수 없었습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려면 이 세상에 태어날 때처럼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바늘귀보다 작은 존재가 돼야 합니다.
막시밀리아노 콜베 신부님은 탈출을 시도하다가 잡힌 사람 때문에 열 명이 처형을 당해야 하는데
죽기 싫어하는 사람을 위해 가차 없이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었습니다.
어차피 세상에서 잃을 게 없는 존재로 자신을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 몸집을 줄일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사람에게는 그것이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어떻게 껍데기를 벗고 바늘귀보다 작게 되도록 하신다는 것일까요?
그리스에 알렉산더대왕이, 몽골에 징기스칸이 있다면, 인도엔 아소카 대왕이 있습니다.
아소카 대왕은 정복 군주이면서도 알렉산더나 칭기즈칸과는 다른 덕목이 있었습니다.
가장 잔혹한 살육자에서 평화주의자로 극적인 전환을 이뤘기 때문입니다.
아소카 대왕은 인도를 침략한 알렉산더의 군대를 몰아내고
인도 최초의 통일왕국을 연 마우리아왕조 창건자 찬드라굽타의 손자입니다.
찬드라굽타의 아들 빈두사라왕은 중앙인도와 데칸고원까지
넓힌 영토를 분할통치하기 위해 무려 16명의 부인을 맞아들여 101명의 왕자를 두었습니다.
아소카 대왕은 친동생 한 명만 빼고 이복형제 99명을 죽이고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렇게 즉위한 8년 뒤 치른 칼링가 전투는 피의 전쟁이었습니다.
칼링가국은 코끼리부대까지 갖춰 찬드라굽타마저도 정복하지 못한 강소국이었는데
마우리아국이 벵골만으로 진출해 동남아와 스리랑카까지
교역로를 넓히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 칼링가 전투에서 이기기는 했지만,
수십만 명의 사상자를 본 아소카대왕은 다야강에 칼을 버리고,
‘이제 (전쟁의) 북소리의 정복자가 아닌 담마(진리)의 정복자가 되자’라고 다짐했습니다.
자신의 정복으로 인한 파괴와 인명 손실에 겁을 먹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경험도 합니다.
“왕궁 베란다에서 어느 날 길거리를 내려다보던 아소카 대왕은
어린 사문(승려)이 위풍당당하게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 데려오라고 합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그는 왕위 계승 1순위였다가 독살당한 이복형 수시마의 아들 니그로다였습니다.
그로부터 짧은 ‘법구경’을 듣고 아소카 대왕의 마음이 움직였다고 하나,
이복형에 대한 미안함으로 니그로다의 종교를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아소카 대왕이 없었다면 불교는 세계적인 종교가 되지 못한 채 인도에서 소멸했을지 모릅니다.
아소카대왕이 담마 사절단 혹은 전법사를 스리랑카는 물론
지중해 연안인 이집트, 그리스, 시리아까지도 파견했기에
한·중·일 삼국은 물론 동남아 전체에 불교가 전통 종교로 자리매김했다는 것입니다.
그는 제국 전역의 바위와 기둥에 새긴 일련의 칙령으로 ‘다르마’를 공포했습니다.
이 칙령은 비폭력, 모든 생명체에 대한 존중, 다양한 종교적 관행에 대한 관용,
인간과 동물 모두를 위한 병원 설립을 설교했습니다.
아소카 대왕이 인도의 가장 강력한 폭군에서 인도의 가장 덕망 있는 왕이 된 데는
바로 그 자신이 찌르고 죽은 이들을 자기 눈으로 직접 보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아니었다면 그를 작게 만들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이 작아지는 방법은 나의 욕심 때문에 피해를 본 사람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는 양심이 있어서 그 모습을 바라보면 내가 작아집니다.
어머니의 죽음이 나의 잘못 때문이었음을 안다면 어떨까요?
작아집니다. 껍데기를 벗어버리게 됩니다.
아이가 작아질 수 있는 이유는 부모가 자신 때문에 받은 상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어느 소매치기가 자신의 범죄 때문에 어머니가 수술하지 못해 죽었다면
그가 이젠 소매치기로 커지는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양심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어머니의 죽음 앞에서 겸손해질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우리 죄로 인해 당하신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그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러면 작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십자가가 유일한 구원의 힘이 되는 이유는 그분이 바로 나 때문에 피를 흘리셨기 때문입니다.
저 또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라는 말씀으로 작아짐을 느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습니까?
그분이 나의 죄 때문에 흘린 피를 묵상하면 됩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주님 수난 7기도’를 바치기를 강력히 권고합니다.
내가 작아져 결국엔 연옥도 거치지 않고
바늘귀보다 작은 문으로 천국으로 바로 들어가게 만드는 기도입니다.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윤 마리 소화 수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때로는 그저 견디면서,,,
나를 나도 잘 모르겠고,
남들은 나를 더 모르고,,
나도 남들을 갈수록 더 모르겠고,,
그럴 때,,
곰곰이 생각했다.
마음속에 간직했다.
성경에는 이런 말들로만 표현되어있는 분.
‘어떤 소리도 낸 적이 없구나’ 싶어
내 모습을 다시 돌아보게끔 만드는 분.
당신 아들이 씌워주신 모후의 관을 쓰고
이 지상 여정 걸어가는 우릴 위해 빌어주시는 분.
그 어머니 계시기에 오늘도 힘을 내어 걸어가 봅니다.
[출처] 마태 19,23-30 복되신 동정 마리아 모후 기념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