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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3일 연중 제20주간 수요일
제1독서 : 판관 9,6-15
복 음 : 마태 20,1-16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이런 비유를 들어 말씀하셨다.
1 “하늘 나라는 자기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사려고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선 밭 임자와 같다.
2 그는 일꾼들과 하루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고 그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냈다.
3 그가 또 아홉 시쯤에 나가 보니 다른 이들이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었다.
4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하고 말하자,
5 그들이 갔다.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6 그리고 오후 다섯 시쯤에도 나가 보니 또 다른 이들이 서 있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당신들은 왜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여기 서 있소?’ 하고 물으니,
7 그들이 ‘아무도 우리를 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하고 말하였다.
8 저녁때가 되자 포도밭 주인은 자기 관리인에게 말하였다.
‘일꾼들을 불러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맨 먼저 온 이들에게까지 품삯을 내주시오.’
9 그리하여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이들이 와서 한 데나리온씩 받았다.
10 그래서 맨 먼저 온 이들은 차례가 되자
자기들은 더 받으려니 생각하였는데, 그들도 한 데나리온씩만 받았다.
11 그것을 받아 들고 그들은 밭 임자에게 투덜거리면서,
12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 하고 말하였다.
13 그러자 그는 그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말하였다.
‘친구여, 내가 당신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것이 아니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14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15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16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교통사고 영상을 10명의 실험 참가자에게 보여준 후,
“추돌사고에서 자동차의 속도는 얼마였던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사람들은 대략 50km/h 정도였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이번에는 같은 영상을 또 다른 실험 참가자 10명에게 보여주고는
“운전자가 사망한 이 추돌사고에서 자동차의 속도는 얼마였던 것 같습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대략 60km/h 정도였던 것 같다고 대답했습니다.
즉, 운전자가 사망했다는 정보를 들은 사람들은
자신이 본 영상 속의 차량 속도를 더 높은 것으로 관찰한 것입니다.
자신이 가진 지식, 정보를 통해 관찰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를 다르게 표현하면 우리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본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렇게 우리의 판단은 객관적이지 않습니다.
실제로 가족에게 더 긍정적인 마음으로 다가가고 있으며,
부정적인 선입견이 있으면 아무리 올바른 행동을 해도 믿으려 들지 않습니다.
자기의 판단이 무조건 맞다고 말하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경우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나는 맞고 상대방이 틀렸다고 믿고 있는데,
다른 모든 이는 내가 틀렸고 상대방이 맞았다고 말합니다.
이때 자신이 틀렸음을 인정하는 사람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억울하고 저렇게 모를 수 있냐면서 화를 내지요.
그러나 우리는 틀릴 수 있으며, 그래야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나만 맞다는 이기심 가득한 고집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게 하였음을 묵상했으면 합니다.
포도밭 일꾼의 품삯에 대한 비유 말씀을 전해주십니다.
얼핏 보면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불합리해 보입니다.
이른 아침부터 일한 사람이나 아홉 시, 열두 시, 오후 세 시
심지어 오후 다섯 시쯤부터 일한 사람 모두 같은 품삯을 주기 때문입니다.
이 모습을 보고서 포도밭 주인의 처사가 틀렸다고 말하는 사람이 대부분일 것입니다.
하지만 모두가 틀렸다고 말할까요? 아닙니다.
오후에 나와 잠깐 일을 하고서 똑같은 품삯을 받은 사람은 어떨까요?
주인이 틀렸다면서 자신이 받은 품삯을 돌려줄까요? 아닙니다.
그는 틀렸다는 생각보다는 감사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의 관점으로는 틀렸다고 말하기가 쉽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을 받아들이고 함께하는 이는 틀렸다고 하지 않습니다.
대신 “감사합니다”라고 말합니다.
주님의 처사에 대해 이렇게 우리는 세상의 관점으로 맞고 틀렸다고 판단해서는 안 됩니다.
주님은 우리가 판단할 수 없는 너무나 크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대신 감사할 수 있는 이유를 찾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이 감사 속에 있어야 늘 기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노사연의 노래 중에 ‘만남’이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게 시작됩니다.
“우리 만남은 우연이 아니야 그것은 우리의 바람이었어.
잊기엔 너무한 나의 운명이었기에, 바랄 수는 없어도 영원을 태우리.
돌아보지 마라. 후회하지 마라. 바보 같은 눈물 보이지 마라.
사랑해 사랑해 너를 사랑해”
만남에도 몇 가지 차원이 있습니다.
아무런 느낌이나 영향이 없는 스쳐지나가는 만남이 있습니다.
차라리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애증의 만남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삶을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운명적인 만남이 있습니다.
노사연의 노래는 그런 만남 모두가 우연이 아니라 우리의 바람이었다고 말합니다.
저에게도 삶의 방향을 바꿔버린 운명적인 만남이 있었습니다.
저는 교사나 군인이 되고 싶었습니다.
조직에 속해 있는 것이 편했고, 가르친다는 것이 매력적이었습니다.
고등학생 때 성당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신학교에 가서 사제가 되겠다는 친구가 있었습니다. 구교우 집안에서 자란 영향도 있었고,
친구들의 영향도 있어서 저는 신학교에 지원했습니다.
그리고 운명처럼 사제가 되었습니다.
교사나 군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세상 어느 조직보다 견고한 조직에 속해있고,
복음을 선포하는 직무를 수행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보면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습니다.
예수님의 첫 제자들인 베드로와 안드레아 그리고 요한과 야고보는
갈릴래아의 어부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었습니다.
일곱 마귀가 들렸던 막달레나는 예수님을 만나서 치유되었고
부활하신 주님을 처음으로 만나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사도들에게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사도들의 사도’가 되었습니다.
세리 자캐오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서 나무 위로 올라갔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자캐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제가 빚진 것이 있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가정은 구원받았다.”
하혈하던 여인은 감히 말은 못 하고 예수님이 옷자락을 만졌습니다.
그러자 하혈이 멈추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간절한 갈망을 칭찬하셨습니다.
예수님과 운명처럼 만난 사람이 또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던 사람들을 박해하였던 ‘사울’입니다.
그는 로마의 시민이었고, 바리사이였습니다.
유대교의 율법과 계명의 수호자를 자처하였습니다.
사울은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신비한 음성을 들었습니다.
사울이 묻습니다. “주님은 누구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다.”
교회를 박해하던 사울은 이제 복음을 전하는 사도 ‘바오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데 시간이 중요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과 처음부터 함께 했던 제자들 중에는 예수님을 은전 서른 닢에 팔아넘긴 제자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세 번이나 모른다고 했던 제자도 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예수님과 마지막을 함께 했던 죄인도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생의 마지막 순간에 만났던 그 죄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는 오늘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이다.”
이방인의 사도였던 바오로는 초대교회의 교리와 신학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바오로 사도는 예수님을 만난 적도 없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언제 세례를 받았느냐가 중요한 것은 아닙니다.
세례받은 신앙인으로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서열과 나이가 기준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단 하루를 살았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있다면 하느님께서는 기뻐하십니다.
높은 직책과 연륜을 지녔어도 구원에 대한 갈망과 확신이 없다면 하느님께 가까이 가기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은 바로 그런 이야기를 전해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능력, 업적, 직책을 기준으로 하느님과 셈을 하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사랑, 연민, 자비를 기준으로 셈을 하십니다.
그러기에 신앙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쉼표를 찍어놓은 곳에 우리가 마음대로 마침표를 찍어서도 안 됩니다.
늦었다고 후회할 것도 없고, 먼저 왔다고 교만 할 것도 없습니다.
“내 것을 가지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다는 말이오?
아니면,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찌 될 것이다.”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선한 포도밭 주인의 비유’를 통해서 하늘나라를 말씀해주십니다.
이 비유 속에는 ‘하느님의 보화’인 ‘자비의 신비’가 있습니다.
이 신비는 첫째로, 포도원 주인은 대체 ‘때’를 가리지 않고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는 이른 아침부터 하루일과가 다 끝나갈 저녁 무렵까지,
다섯 차례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손수 장터로 나가 품꾼을 불러들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들의 일의 능력이나 실적에 대해서는 전혀 신경 쓰지도 않고,
오히려 병들고 노쇠해서 팔려가지 못하고 남은 사람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입니다.
도대체가 계산이라고는 모르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주인입니다.
사실 주인은 애시당초부터 일을 부리기 위해 품꾼들을 불러들인다기보다,
그들을 살게하기 위해 불러들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렇게 우리를 불러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부르심 그 자체가 이미 은총입니다.
이는 하늘나라가 당신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불쌍한 우리를 위하여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자비임을 말해줍니다.
둘째로는, 품삯을 줄 때에 맨 나중에 불려 온 자부터 줍니다.
오후 늦게서야 일터로 부름받게 된 이들에 대한 깊은 배려라 할 수 있습니다.
처음에 온 일꾼들의 몸 고생과 나중에 온 사람들의 마음고생도 함께 돌보십니다.
사실 그들은 자신들의 능력이 없는 까닭에,
하느님의 자비에 내맡길 수밖에 없는 '꼴찌'들입니다.
가난하고 필요한 자에게 우선적으로 흘러들 수밖에 없는
하느님 사랑의 우선적 선택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능력과 성과가 아니라, 필요한 만큼 주시고 함께 살도록 하십니다.
하느님의 공정은 ‘나’를 위한 것만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고,
창조된 모든 피조물을 위한 것이며,
당신의 호의와 자비는 부족함이 없이 우리 모두에게 주어집니다.
셋째로는, 모두에게 똑같이 고루 품삯이 주어집니다.
포도원 주인은 일한 만큼의 공평에 맞게 정당하게 노동의 대가를 셈 쳐주지 않았습니다.
일한 시간이나 일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고, 무조건 똑같은 품삯을 고르게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먼저 온 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가 아니라,
계약으로 맺은 정당한 대가가 지불되었으며,
단지 뒤에 온 이들에게는 자비가 베풀어졌을 뿐이었습니다.
정당함에 자비를 더하여 쳐주는 이러한 포도원 주인의 권한 행사와 너그러운 처사는
하느님의 절대적인 주권과 자비를 말해줍니다.
그러니 이는 하늘나라가 인간이 일한 대가로 획득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불쌍히 여기시는 하느님의 주권적인 사랑이요, 자비임을 밝혀줍니다.
결국 ‘꼴찌가 첫째가 되는 이 비유’는 이 지상에서의 꼴찌들에게 대한 보상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를 드러냅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마치 포도원 주인이 애초부터 은혜를 베풀기 위해
품꾼들을 포도원으로 불러들였듯이, 은혜를 주시기 위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아 교회로 불러들이셨습니다.
여기에는 먼저 온 자와 나중 온 자가 따로 없으며, 모두가 큰 자비를 입었을 뿐입니다.
그러니 우리를 자비로 돌보시는 무한하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기뻐하며, 영광과 찬미를 드려야 할 일입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을 앞세우는 데는 '첫째'가 되고, 자기를 내세우는 데는 '꼴찌'가 되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당신들도 포도밭으로 가시오. 정당한 삯을 주겠소.”(마태 20,4)
주님!
당신은 먼저 온 이들에게나 나중 온 이들에게나 똑같이 품삯을 주십니다.
일한 시간이나 실적 따위는 전혀 고려하지도 않으십니다.
애초부터 당신께서는 은혜를 베풀기 위해 저를 당신 포도밭에 불러들이신 까닭입니다.
하오니, 당신 부르심이 제게는 영광이옵니다.
나의 주, 나의 임이시여, 영원무궁토록 찬미 영광 받으소서.
아멘.
포도밭의 일꾼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의 밭 임자는 포도밭에서 일할 일꾼들을 구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집을 나섰다.
주인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고 사람들을 자기 포도밭으로 보낸다.
이른 아침 여섯 시에, 아홉 시에, 열두 시에, 세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자기가 만난 사람들을 포도밭으로 보냈다.
교부들은 이 하루를 구원의 역사로 해석하고
이른 아침에 아담과 에녹의 시대에 살던 이들을 부르셨고,
아홉 시에는 노아와 그와 함께 있던 이들을 부르셨고,
열두 시에는 아브라함을 부르셨고, 오후 세 시에는 모세와 다윗을 부르셨으며,
오후 다섯 시에는 다른 민족들을 부르신 것이라고 한다.
저녁에, 시대의 끝자락에 밭 임자는 맨 나중에 온 이들부터 시작하여 품삯을 준다.
맨 나중에 온 사람들은 고생은 하지 않고 주인의 후한 덕으로 가장 먼저 보수를 받는다.
다른 사람들보다 영광을 받은 것이다.
맨 먼저 온 사람들은 나중에 온 사람들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다.
나중에 온 사람들이 받는 품삯을 보고 자기들은 더 받을 것으로 기대한다.
그러나 주인은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고 있다.
그들은 불평한다.
“맨 나중에 온 저자들은 한 시간만 일했는데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와 똑같이 대우하시는군요.”(12절)
그들은 다른 이들이 받은 축복을 기분 나빠했다. 그것은 시기와 질투였다.
이제 밭 임자는 그 사람의 시샘을 꾸짖는다.
“당신은 나와 한 데나리온으로 합의하지 않았소?
당신 품삯이나 받아서 돌아가시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내가 후하다고 해서 시기하는 것이오?”(15절) 하였다.
“이처럼 꼴찌가 첫째 되고 첫째가 꼴지 될 것이다.”(16절)
언제 부르심을 받았든지 자기에게 주어진 삶을 잘 사는 것이 중요하다.
마지막 한 시간을 열심히 일하여 하루의 품삯을 받은 이들처럼
우리의 삶도 지금 최선을 다하는 삶이어야 한다.
그리하여 하느님께서 우리를 위해 마련해 주신 품삯을 모두 받을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
지금, 이 순간 최선을 다한다는 것은 항상 깨어있는 자세를 말한다.
이것은 품값이라기보다 은총이다.
하느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우리가 일한 대가가 아니라,
그분의 선하심과 은총으로 우리에게 베풀어주시는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불림을 받은 후의 삶을 충실히 하여 그 선물을 받도록 하자.
주님께서는 좋은 것으로 우리를 채워주실 것이다.
그저 감사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려서는 삼촌이나 누나에게 용돈을 얻을 기회가 있었습니다.
특히 명절이 되면 서울의 일터로 떠난 누나를, 삼촌을 동네 어귀에서 기다렸습니다.
누나를, 삼촌을 기다렸다기보다 용돈을 기다렸습니다.
그 액수가 얼마가 되든지 상관없이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학년이 높아질수록 더 많은 용돈을 기대하게 되었고
기대에 미치지 못할 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습니다.
용돈을 받는 것만으로도 행복했는데 어느 날 그 기쁨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사실 삼촌께서, 누님이 용돈을 줄 의무가 있는 것도 아닌데……
겉으로는 아닌 척했지만, 용돈을 달라고 떼를 쓰고 있었습니다.
주면 주는 대로 감사해야 할 것인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죄송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오늘 복음은 하느님 나라를 포도원 일꾼의 품삯에 관한 비유로 들려주고 있습니다.
포도원 주인은 이른 아침, 아홉 시에 일을 시작한 사람이나 열두 시, 오후 3시에
그리고 다섯 시에 시작한 사람과 똑같은 조건으로 계약을 맺었습니다.
일꾼들은 계약을 맺을 때는 그저 일을 할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그러나 품삯을 받게 되는 시간이 되자 일찍 일을 시작한 사람은
뒤늦게 시작한 사람보다는 더 많이 받으려니 했지만,
그 기대를 채울 수 없었고 그래서 투덜대며 급기야 따지기까지 하였습니다.
상대와 비교하는 순간 자기의 첫 마음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분명 그는 계약한 만큼 받았습니다. 그런데도 받지 못한 것처럼 느꼈습니다.
누가 용돈을 주면 주는 대로 감사히 받을 것이지 투덜댈 자격이 어디 있단 말입니까?
계약대로 받았으면 족해야지, 왜 따집니까?
주인은 분명 정의를 지켰습니다. 부당한 대우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개인적인 시기심 때문에 반발하고 있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악인에게나 선인에게나 당신의 해가 떠오르게 하시고,
의로운 이에게나 불의한 이에게나 비를 내려 주신다”(마태5,45).고 하셨습니다.
이렇듯 하느님께서는 모두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푸십니다(로마11,32).
주님께서는 언제나 후하십니다. 어떤 사람에게나 선을 베풀고자 하실 뿐입니다.
그리고 그 선은 주님께서 자유로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인간의 공로가 아니라 그분의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그 자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중요합니다.
품삯을 받기 위해 일을 한 사람과 일 자체를 고마워하며
일을 한 사람과는 분명 구별이 되는 것입니다.
얼마나 많은 일을 했느냐가 중요하지만 어떻게 했느냐가 더 중요한 것입니다.
이렇듯 하느님 나라에서는 결과보다는 동기가 중요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상급은 인간이 노력해서 이룬 업적에 따라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물로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선물은 감사히 기쁘게 받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항상 일하시나 조용히 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들은 얼마나 말이 많은가?”(성 아우구스띠노).
포도원에서 일을 할 수 있음만으로도 감사하고 행복한 마음을 간직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많은 일을 해도 해야될 일을 안 한 사람은 적게 일한 것이고,
적게 일해도 해야 할 것을 한 사람은 많이 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만 앞서거나 부산함만 피우지 마십시오”(성 요한보스코).
꼴찌가 첫째가 되고 첫째가 꼴찌가 되는 비결이 여기 있습니다(마태20,16).
하느님 아버지는 너그러우시고, 나는 쩨쩨하고 시기 질투하며 불평불만이 가득한 사람임을 뉘우칩니다.
인력시장에 가보신 적 있으시나요?
많은 사람이 이른 새벽부터 일을 하기 위해서 기다립니다.
그러나 그야말로 매일 팔려나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날은 누구도 자기를 택하지 않습니다.
종일 기다리다 허한 마음으로 쓰디쓴 하루를 마감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재수가 좋아서 일찍 팔려나갑니다.
그들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만 해도 기쁨이고 감사입니다.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 고역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일찍 일을 나간 사람이 뒤늦게 일을 한 사람과
똑같은 임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찍부터 일을 한 것이 재수가 좋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마음이 한순간에 사라졌습니다.
주인에게 실망해서 불평불만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렇다면 정말 주인이 잘못한 것인가요?
실망과 좌절로 기다림에 지쳐있다 뒤늦게 일을 한 사람은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주인의 자비가 얼마나 크고 사랑이 많은지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그것이 기쁜 소식이고 복음입니다.
만일 우리의 업적에 따라 보상이 결정된다면 우리는 더 이상 희망할 것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부족함에도 후하게 주시기에 최선을 다할 뿐입니다.
초심을 잃지 않아야 하겠습니다.
거저 주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은 하늘 나라에서 어떤 사람들이
더 사랑을 받고 어떤 사람들이 덜 사랑 받는지에 관한 내용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사람들은 주님의 포도밭에서 일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의 품삯은 한 데나리온, 곧 구원이라는 같은 은총입니다.
그런데 같은 은총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높고 낮음이 결정됩니다.
어떤 이들은 자신들은 더 받아야 한다고 여기고 어떤 이들은 그것에 감사할 따름입니다.
결국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은 겸손한 사람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차피 들어가는 하늘나라라면 첫째를 노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구원의 값인 한 데나리온에 어떻게 만족하고 감사할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합니다.
한 데나리온은 그리스도의 피 값입니다.
그것에 충분한 감사를 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른 것을 바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다른 것을 바랄 때 이것에 대한 감사가 적어집니다.
우리의 바람이 오로지 구원, 하나로 모아질 때 하늘에서 그만큼 앞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것입니다.
가정 먼저 하루 종일 일한 종들의 문제점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은 아주 오랜 시간 자신들이 구원을 당연히 받을 만하다고 여긴 이들입니다.
일찌감치 구원의 길로 들어선 이들입니다.
그런 이들의 문제점은 더는 목표가 없어졌다는 데 있습니다.
저는 십일조를 내고 한 가지 죄로라도 끊임없이 고해성사를 할 수 있다면
구원을 확신해도 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열심한 신자들 대부분은 그런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들에게 더는 목표가 없습니다.
이유는 한 데나리온을 받을 것이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늦게서야 부름을 받고 일하러 온 종들은
‘이렇게 적게 일했는데도 과연 한 데나리온을 다 주실까?’라며 불안해합니다.
그래서 한 시간을 일해도 하루 종일 일한 사람보다 열심히 합니다.
결국 그들이 하루 종일 일한 사람들보다 더 인정받게 됩니다.
결국 오늘 복음의 핵심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더라도
끝까지 정진을 멈추지 않는 사람이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지금 축구계에서는 호날두, 네이마르, 벤제마 등
유명 선수들이 사우디 리그로 발을 옮기고 있습니다.
그곳에서 제공하는 엄청난 연봉 때문입니다.
메시도 호날두 연봉의 두 배에 달하는 연봉 6,000억에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연봉 700억에 미국을 택했습니다.
그에게 축구를 잘하는 능력이 곧 돈과 직결되지는 않습니다.
어떤 이들은 자기 능력을 돈으로 바꾸려고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의미를 추구합니다.
그리고 메시는 현재 매우 행복해 보입니다.
메시 덕분으로 미국 리그가 세계적 조명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메시는 미국으로 건너가 꼴찌팀 인터 마이애미를
일곱 경기만에 전승으로 창단 이래 최초 우승으로 이끌었습니다.
그는 몇 번의 은퇴를 번복하며 자신을 끝까지 믿어주고 축구의 길로 들어서게 한 할머니께,
그리고 성호경을 그으며 하느님께 쉬지 않고 가고 있습니다.
그가 돈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이 행복할까요,
아니면 돈을 바라고 안주하는 삶이 행복할까요? .
만약 어떤 아이가 ‘나는 이미 자녀인데 뭐!’라며 더 좋은 자녀가 되기를 노력하지 않는다면
그 아이는 이제 집에서 하게 되는 것이 무엇일까요? ‘불평’입니다.
자녀인데 왜 부모로서 의무를 다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인간의 마음이 그렇습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자녀가 되어가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수님도 아버지의 마음에 드시기 위해 영원으로부터 노력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물며 우리가 정진을 멈추어야 하겠습니까? .
제가 신학교 때 들은 말 중에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마라!”였습니다.
사제가 되고 나면 더는 할 게 없어서 이제 누리려고만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술이나, 여자, 돈이나 비싼 차, 돈 많이 드는 운동이나 여행 등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내심 ‘내가 사제인데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나?’라는 마음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했는데 생각보다 보상이 적다고 생각하여
스스로 그 보상을 채우려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교수 신부님은 사제가 되려고 하지 말고 ‘성인 사제가 돼라!’라고 가르치셨습니다.
부부도 마찬가지입니다.
결혼이 목적이라면 결혼하기까지 고생한 것을 누리려고만 합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즐겁지 않습니다.
그러니 불만이 생기고 그 탓을 상대에게 하거나 아니면 밖에서 그 보상을 찾으려 합니다.
혹은 배우자보다는 자녀에게서 만족을 얻으려 합니다.
그것이 자녀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 되기도 합니다.
목적이 없는 삶은 편한 것 같지만 여러모로 우리 삶을 피폐하게 합니다.
겉으로 보기는 편해 보여도 사실 더 고통스러운 것이 정진하지 않는 삶입니다.
요한복음에서 요한은 성자께서 아버지와 함께 계신다거나
(“말씀은 하느님과 함께 계셨는데”: 요한 1,1.2)
아버지와 가까이 계신다고 말할 때(“아버지와 가장 가까우신 외아드님”: 요한 1,18)라고 말할 때
전치사 ‘프로스’(pros)를 쓰거나 ‘에이스’(eis)를 씁니다.
이것은 사실 ‘함께’나 ‘가까이’로 번역하기 어려운 단어들입니다.
이는 움직이는 사물이 어디를 향하고 있음을 말할 때 사용하는 전치사들입니다.
요한은 결코 아드님과 아버지를 이미 고정되어버린 관계로 여기지 않습니다.
계속 움직이는 역동적인 관계로 보는 것입니다.
영원히 멈추지 않고 서로를 향하는 분으로 그리스도를 표현합니다.
하물며 우리가 마치 당연히 구원된 사람들처럼 이제 누리려고만 해서는 되겠습니까?
이 지상의 삶에서, 그리고 영원한 삶에서
우리는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방향으로 영원히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뒤처지지 않는 방법입니다.
목표를 이룬 이들이 하게 되는 것들은 불만과 죄뿐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나아가는 데 멈추지 않는 목표를 세웁시다.
量과 質의 차이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가 단독으로 전해주는 ‘포도원 일꾼의 비유’이다.
서두에서 밝히고 있듯이 이 비유는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상경하시는 길에
제자들에게 들려주신 하늘나라에 관한 것이다.
오늘 복음의 포도원 일꾼의 비유가
지난 월, 화요일의 복음이었던 ‘부자 청년의 추종거부 이야기’(19,16-22)와
‘부자의 구원 불가능에 대한 단언’(19,23-26)과 ‘예수추종의 보상에 관한 대담’(19,27-30)에
이어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은 의미심장한 일이다.
그것은 마태오가 앞서간 예수님의 가르침을 요약하는 뜻으로
오늘의 비유를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첫째가 꼴찌가 되고, 꼴찌가 첫째가 될 것이다.”(19,30)는 역설적인 말을
마태오가 단독으로 전하는 비유의 끝(20,16)에 되풀이하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종말에 이르러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면
삶의 모든 부분에서 약간의 서열변화가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전면적인 변화, 즉 처음과 끝이 뒤바뀌는 그런 변화가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은
초기 교회 안에 상당히 짙게 깔려 있던 생각이었다.
이는 마치 유행어와도 같은 것이었다.(마르 9,35; 10,31; 마태 19,30; 20,16; 루카 13,30)
그러나 이러한 처음과 끝의 뒤바뀜은 어디까지나 인간적인 생각이다.
예수께 친히 이 말씀을 發說하셨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생각은 다를 수 있다는 말이다.
비교적 사회의 피지배계층과 소외계층이 예수를 추종하였기에
그 추종의 대가로 이런 생각을 충분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 생각은 오늘 비유에 담겨있다.
오늘 비유는 하늘나라에 관한 은유법이기는 하지만 비유 자체로도 그 뜻이 충분히 전달된다.
포도원은 하늘나라요, 장터로 일꾼을 찾아 나가시는 분은 포도원의 주인인 하느님이시다.
포도원에서 한 데나리온의 삯을 약속받고 일하는 일꾼들은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마태오가 포도원 주인이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불러 일을 시키는 시간을
아침 6시, 9시, 12시, 오후 3시, 오후 5시로 구분하고 있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것은 마태오가 제시하는 하느님 백성에 대한 구분이다.
각 時間帶의 순서는 곧 구약의 선택받은 백성들, 즉 백성의 원로들과 지도자들,
대사제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 일반 서민들,
그리고 신약의 새로운 백성들, 즉 가난하고 보잘것없는 사람들,
소외받은 사람들, 죄인으로 취급받던 세리와 창녀들의 순서로 볼 수 있다.
이같이 순서의 차이는 있지만 모두가 하느님 나라에 초대받았다는 것이다.
비유 속에서 보듯이 포도원 주인의 후한 처사에 대하여
처음부터 일하던 일꾼들의 불평은 당연하다. 그것은 인간의 머리로 계산하기 때문이다.
품삯이 한 데나리온으로 약속된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중에 온 일꾼이 일찍 온 자기와 똑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배 아프다 못해 신경질 나는 일이다. 사람의 계산법은 그렇다.
적게 일하고도 많이 일한 사람과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적게 일한 사람 측에서 볼 때는 재수나 횡재같이 보이고,
많이 일한 사람 측에서 볼 때는 억울하고 불공평하며, 때로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되는 일이다.
그러나 하느님의 계산법은 다르다.
하느님의 계산법이 다르다고 해서 인간의 常識을 완전히 벗어난다고 생각하면 그것도 오산이다.
따라서 지나치게 비유 자체의 내용에 머물지 말고
비유를 통해 말씀하시고자 하는 예수님의 의중을 깨달아야 하는 것이다.
오늘 비유는 두 가지 교훈을 담고 있다.
첫째는 하느님 나라에 세상의 모든 사람이 초대를 받았으며,
초대받은 사람은 모두가 같은 대접을 받는다는 것이다.
꼴찌로 초대받은 세리와 창녀들에 대한 하느님의 후한 처사에
먼저 초대받은 사람들의 心氣가 불편한 것은 당연하겠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계산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같은 대접이라고 해서 그냥 넘겨서는 안 된다.
그곳에 두 번째 교훈이 숨어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엔 같은 대접이지만 그 내용은 다르다.
품삯의 量은 같지만, 그 質은 다르다.
아침부터 일한 사람의 한 데나리온 속에는 하루 종일 흘린 땀과 정성이 배어있다는 것이다.
늦게 왔는데도 같이 주어진 품삯의 가치는 처음 것과 다르다는 말이다.
많은 수고 없이 주어진 품삯은 같은 액수라 할지라도 그만큼 가치가 떨어진다.
이는 양만 많으면 좋아하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큰 경종의 교훈이 아닐 수 없다.
동시에 같은 양이라 할지라도 받는 사람에 따라 그 내적 가치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사공 제노 수녀
오늘 복음은 자기 포도밭에 일꾼을 사려는 포도밭주인의 이야기입니다.
이 복음은 하느님의 자비와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생각할 때 자연스레 떠오르는 이야기입니다.
포도밭 주인이 포도 수확을 위해 이른 아침 일꾼들을 사기 위해 장터에 나갑니다.
그리고 필요한 일꾼들과 하루 일당을 합의하고 자신의 밭으로 보냅니다.
여기까지는 아주 자연스러운 전개입니다.
그런데 밭의 주인은 ‘또’ 아홉 시에, 장터에 나갑니다.
그리고 ‘하는 일 없이 장터에 서 있는 이들을 자기 밭으로 보냅니다.’
이른 아침에 고용한 일꾼들이 부족해서 다시 장터에 사람을 찾으러 나간 것일까요?
그렇다면 ‘하는 일 없이 서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일을 잘할 사람들을 뽑아야 하지 않을까요?
하여간 아홉 시에 또 일꾼을 사고,
그리고 “그는 다시 열두 시와 오후 세 시쯤에도 나가서 그와 같이 하였다.”
점점 포도밭주인의 행동에 고개가 갸우뚱해집니다.
아홉 시에 일꾼을 다시 구했는데 정오와 오후 세시는 왜 또 나가서 일꾼을 찾을까요?
더 황당한 것은 하루 일이 끝나기 1시간 전인 오후 다섯 시쯤에 또다시 장터에 나갑니다.
그리고 ’ 온종일 하는 일 없이 서 있던 이들을 당신 밭으로 보냅니다.‘
포도밭 주인은 이른 아침을 시작으로
장터에 다섯 번이나 나가서 일꾼들을 자기 밭으로 보냈습니다.
그리고 일이 모두 끝나자 맨 나중에 온 사람들부터 시작해서 품삯을 지불합니다.
그런데 주인은 맨 나중에 와서 1시간을 일한 사람들에게도
이른 아침에 고용된 사람들과 동일하게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지불합니다.
그러자 맨 먼저 온 이들이 불펑을 합니다.
‘나중에 1시간만 일한 이들을 뙤약볕 아래에서 온종일 고생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 하며 투덜거립니다.
이 불평은 우리에게 정당하게 보이고, 그들의 불편한 마음에 공감이 갑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하느님의 정의와 자비를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른 아침에 고용되었다는 것은 이들이 건강하고 일이 숙련도가 높은 이들이라는 의미이고,
그들은 자주 맨 먼저 고용되고, 늘 일을 구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오후 5시까지 아무에게도 고용되지 않았다는 것은 일반적인 시각으로 보아도
그들은 품삯을 주고 고용할 가치가 없어 보이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주인이라면 누구라도 당연히 일을 잘할 수 있는 이들을 고용하지 않겠습니까?
그렇다면 오후 5시까지 장터에서 서성이던 이들은 그날만 그런 상황이 아니고
지속적으로 일을 구하지 못한 이들일 것입니다.
하루 품삯을 받아 살아가는 일용직 노동자가 일을 구하지 못함은
그가 생활비를 벌지 못한다는 것이고,
이는 그의 가족들이 기본적으로 필요한 것을 구하지도, 음식을 사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포도밭주인은 말합니다.
“나는 맨 나중에 온 이 사람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맨 나중에 온 사람도 가정이 있고, 품삯을 벌어 그의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하는 가장입니다.
밭의 주인들이 일이 마감될 시간 즈음에 일꾼을 고용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습니다.
그런데도 오늘도 빈손으로 집에 돌아갈 수 없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장터에 서성이고 있는 가장의 삶의 무게와 아픔을 포도밭 주인은 외면하지 않습니다.
‘나는 그에게도 당신에게처럼 품삯을 주고 싶소.’
이 마음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하고, 하느님 나라의 정의를 알게 됩니다.
모든 이들이 기쁘고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세상, 평화와 사랑과 자비가 가득한 세상.
좀 부족하고 약해도 그도 내일을 희망하면서 어깨를 펴고
한 사람으로서 사회 속에서 같이 걸어갈 수 있는 세상.
당신 양우리에서 건강하고 잘 난 양뿐 아니라
조금은 약하고 한계가 있어도 같이 살아가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하느님 자녀인 우리들도 이 아버지의 자비와 정의를 살아가야겠습니다.
내가 받은 은사는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 공동의 선을 위해 사용되어야 하는 것처럼
내가 건강하고 무언가를 잘한다는 것은 분명 하느님의 축복이고, 나의 자랑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 축복은 이웃에게 봉사하고 나누어 주어야 하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하느님의 선물을 받았음에도 그에 감사하고 기뻐하기보다
오히려 나보다 좀 덜 한 사람이 배려받는 것에 불평하는 인색한 이들이 되지 않기를.
인색은 하느님 나라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넘치게 꾹꾹 눌러 은총을 베풀어주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낭비하는 마음을 담아 내 이웃에게 자비로운 이들이 되길 바래봅니다.
“행복하여라. 자비로운 사람들! 그들은 자비를 입을 것이다”(마태 5,5).
[출처] 마태 20,1-16 연중 제20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