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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슬람 지배 시기의 콥트
콥트교는 이집트에 기독교가 전파된 이후, 그리스도 단성론을 따른다는 이유로 451년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으로 단죄, 결국 로마 교황청을 내버리고 독립한 교회입니다. 현재 이집트에서 콥트인은 문화적, 교육적, 경제적으로 일반 무슬림에 비해 나은 상황에 있으며, 주로 북부 이집트의 도시화 지역에 거주하고 있습니다. 가톨릭과 단절하고 나자 이들은 자기네 교회에서 그리스의 영향을 지워버리기 위해 그리스어 등을 제거하고, 고대 이집트어의 후예인 콥트어를 그들의 일상어이자 의례 언어로 사용했습니다. 일상 생활에서 콥트어는 17세기 경 아랍어에 밀려 사라졌으나 교회에서는 여전히 사용되었고, 현재에 들어와 일요학교, 성인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 등을 통해 콥트어를 되살리려는 노력이 진행중입니다.
이집트가 이슬람 세력에 정복당할 당시, 콥트교도들은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페르시아와 비잔티움의 갈등으로 이집트는 난장판이 되어 가고 있었고, 콥트인은 교파적 차이로 인해 비잔티움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죠. 오죽하면 콥트 대주교가 변장을 하고 야반도주를 해야 할 상황이 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무슬림 군대가 해방자로 받아들여 졌습니다. 아랍 정복자들도 Laa Ikraah fi al-din(어느 종교도 상관 없다)란 원칙 하에 이집트 행정권한을 콥트 총대주교에게 위임하고, 콥트인들이 행정 관료로 대거 진출하게 됩니다.
이후 콥트인들은 무슬림에게 비무슬림 딤미(Dhimmi)로써 인두세(Jizya)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이와 함께 이슬람에 대한 선교 금지, 이슬람과 예언자에 대한 비방 금지, 코란의 번역 금지 등의 조건이 붙었죠.
그러나 인두세가 콥트인들에게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는 액수는 아니었습니다. 초기 이슬람 통치 시절에는 무슬림들이 콥트인들을 형제로 보았기에 인두세 액수가 그닥 크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오스만 통치 시기인 1734년 오스만 정부가 이집트 콥트인에 대한 인두세를 증액하자 천여명의 콥트인들이 반발한 사건도 있듯이, 정치, 경제적으로 불안한 시기에는 이 인두세도 경제적 부담이 될 수 있었으며 현대 콥트 역사가들이 생각하듯이 인두세는 피정복자가 정복자에게 바치는 세금으로 이해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교회의 건축과 수리에 있어서도 조건이 붙었는데, 평화적으로 항복한 도시에 대해서는 교회를 수리하고 개축할 수 있었지만, 전투 이후 항복한 도시에 대해서는 이러한 권리를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또한 카이로와 같이 무슬림들에 의해 건설된 도시의 수도원이나 교회는 파괴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법학자도 있었지요.
그리고 무엇보다도, 교회의 건축에 대해서는 일관된 정책이 없었습니다. 맘루크 왕조 시절에는 이집트 내의 콥트교도나 유태교도들이 탄압받았지만, 파티마조 시기에는 칼리프 알 하킴이 기독교도들을 강제로 무슬림으로 개종시키자, 그의 뒤를 이은 칼리프 알 자히르가 그런 사람들에게 다시 원래 종교로 돌아갈 수 있도록 허용한 것에서 보듯이 왕조에 따라 정책이 달랐으며, 왕조의 군주에 따라 정책이 달라졌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유력자와의 친분, 뇌물 등을 통해 교회를 새로 짓거나 수리하는게 얼마든지 가능했죠.콥트인에게 있어 교회 건축 제한이 자신들의 종교의 자유를 침해하는 제재로 이해했듯이, 무슬림들에게 있어 편법을 통한 교회 건축은 이슬람에 대한 위협으로 보였습니다. 이는 콥트와 무슬림 간의 충돌의 주요 발발 이유이기도 했죠. 콥트인에게 가해졌던 복장의 제재 역시 비슷한 문제입니다. 콥트인에게는 이것이 자신들이 이집트의 2등 국민이 되었다고 느끼게 하는 이유가 되었지만, 무슬림들에게는 이슬람의 우월성의 근거가 되었지요. 만약 이런 규제가 흔들리면 무슬림들은 자신들의 우월성을 잃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극단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러한 갈등은 정치적으로 불안했으며, 흑사병 등으로 사회가 혼란스러웠던 맘루크 왕조 시기에 폭발했습니다. 1301년 이집트를 방문한 북아프리카의 기독교도 여행자는
[말을 탄 사람, 또는 공무원 직에 있는 기독교인은 하나도 없었으며 교회들은 폐쇄되었고 기독교도들은 무슬림들의 터번과는 다른 눈에 띄는 색 터번을 써야만 했다]
라고 쓰기도 했으며, 1343년에는 카이로에서의 콥트 학살, 1321년에는 이집트 전역의 60여개의 교회가 파괴되는 등의 일이 있었습니다.
이처럼 이슬람 지배 하에서 콥트인들은 이집트의 국민으로 그 생존권, 생활권, 재산권 등은 인정받았으나 결국에는 탄압 받는 소수 집단, 2등 국민으로 남아 있었죠. 이로 인해 이슬람 지배 시기 1400여년동안 콥트교회의 규모는 크게 줄어듭니다. 7세기 경 100여명의 주교가 있었지만 8세기에는 70여명, 14세기에는 40명으로 줄어들었고, 90%에 가까웠던 이집트의 기독교도들은 10% 정도로 감소되기에 이르렀죠. 언어적 측면에서도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콥트어의 자리를 아랍어가 꿰차고 들어갔습니다. 콥트인들 중 많은 수가 관료가 되자 아랍어를 배울 필요성이 증가했고, 콥트 가정 내에서도 자식의 높은 지위를 위해 아랍어를 가르치기도 했었죠. 12세기 총대주교였던 가브리얄 븐 타리크(Ghabriyaal Bn Tariik)는 콥트 교회 내에서도 아랍어를 쓰기로 결정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이러한 상황은 인두세와 같은 차별적인 정부의 정책 뿐만 아니라 아랍인의 대규모 이주에도 그 원인이 있습니다. 처음 이슬람 정복 당시 대거 아랍인이 유입되었고, 우마위야, 압바스 왕조 시기 칼리프들의 정책으로 대규모 이주가 있었으며, 파티마 왕조 시기 북아프리카의 라이벌 교란을 위해 아라비아 반도에서 베두윈 유목민을 대거 이주시켜 오는 등의 일이 있었습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 점차 토착 콥트인과 아랍인의 혼혈, 문화적 동화 현상이 일어났죠.
2. 근대의 콥트
중동 지역에는 이 시기까지도 기독교도-레바논의 마론파, 이집트의 콥트 교도, 터키의 아르메니아 정교도, 그리스 정교도-들이 남아 있었기에 서구 열강들은 이들에 대한 보호를 명목으로 중동 지역에 개입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무슬림들의 눈에는 토착 기독교도와 유럽 기독교도의 차이가 없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죠. 한 예로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하고 알렉산드리아를 점령하자 카이로에서는 콥트 주민에 대한 약탈이 벌어졌습니다.
이처럼 근대 이전에는 국가관, 민족관이 없었기에, 가장 중요한 정체성의 구분의 도구는 종교였죠. 이집트 무슬림들은 자신과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땅에 살며 같은 민족인 콥트 기독교 이집트인보다는 모로코나 터키의 무슬림에게 큰 동질감을 느꼈습니다. 콥트 기독교도들과 이와 비슷해서, 프랑스군 지휘자에게 '언제 무슬림들을 다 죽일 거냐' 라고 묻기도 했다죠.
19세기, 20세기의 격동기를 겪으면서 이집트에서도 점차 서구식의 국가관, 민족관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1805년 알바니아 출신의 무함마드 알리가 이집트의 권력을 잡고, 국가 근대화를 위해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이런 과정에서 자유주의 사상으로 콥트에 대한 차별이 크게 사라져 콥트인들은 교회의 종소리를 울리고, 십자가를 휴대하고 다니며, 정부의 관직에 훨씬 쉽게 진출할 수 있었죠.
무함마드 알리가 죽고 그 아들들이 이집트를 다스리던 시기에 콥트의 상황은 더 나아졌습니다. 콥트학교들이 문을 열고, 1863년에 문을 연 이집트 최초의 여학교도 콥트 학교였죠. 1855년에는 딤미에 대한 인두세가 폐지되었고, 무슬림과 동등해졌다는 상징적 의미로 말을 타고 다니기도 했습니다.(위에도 언급되었듯이, 이전에는 불가능했었죠) 1870년대에는 콥트의 자치집단이 등장했습니다. 관직 진출도 활발해셔, 식민 지배 당시 내무부의 69%와 재무부의 40%가 콥트 출신이었습니다.
이러한 변화의 배경에는 민족주의의 유입이 있었습니다. 즉 종교적 정체성보다는 '이집트인' 이라는 정체성이 널리 퍼지게 되었고, '콥트인은 진정한 이집트인이다' 등의 표어가 나타나게 되었죠. 이 시기 창간된 콥트 신문의 이름도 Al-Watan. 즉 '국가' 라는 뜻이었습니다. 1882년 영국의 침략 이후, 콥트인들은 무슬림들과 협력하여 반영 투쟁을 전개하기도 했죠. 그러나 이와 함께 콥트인들은 다수의 무슬림 공동체로부터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투쟁에도 나서야 했으며, 이 과정에서 영국에 대한 태도는 이중적이었습니다. 즉 민족주의 성향 콥트는 반영 운동에 나섰지만 다른 콥트 세력들은 자신들의 안전을 위해 영국 지배에 찬성했던 거죠.
3. 현대 이집트의 콥트
20세기 들어 이집트에는 크게 세 개의 사상이 나타납니다. 첫번째는 20세기 초반에 등장한 서구주의, 세속주의, 자유주의의 물결이었죠. 작가 타하 후세인, 정치가이자 와프드 당의 창당자인 사으드 자글룰과 같은 인물들은 서구화, 세속화, 자유화를 통해 이집트 사회가 바뀌고 서구를 따라잡을 수 있다고 여겼죠. 당연하게도 이들은 콥트에 대한 차별을 반대하고, 그들도 똑같은 이집트 국민으로 묶고자 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화는 오히려 콥트에게 기존에 가지고 있던 소수민족으로의 최소한의 보호막조차 사라지게 되었습니다. 1937년 밀레트 제도의 폐지, 이집트 민족주의 운동의 동참 등의 사건으로 인해 '이집트 국민'이라는 거센 조류 하에 콥트의 정체성이 쓸려나갈 위기에 놓였으며, 정작 현실에서는 콥트와 무슬림의 실질적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음에 따라 콥트인들은 정계 진출 등에 있어서 피해를 보게 됩니다. 자신들의 정체성도 위협받으면서, 평등이나 동등한 대우 역시 받고 있지 못했죠.
이에 콥트 세력은 영국의 도움을 받고자 했습니다. 1910년, 1150여명의 대표들이 아슈트의 콥트 회의에서 일자리의 차별철폐, 교육기회의 균등, 일요일의 휴식 허용 등을 요구했습니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이집트의 통치를 위해 무슬림들의 입장만을 생각했고 콥트는 중세 이슬람 시기의 '보호받는 2등 국민'였을 뿐이죠.
상황은 점차 심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이집트에 영향을 준 세가지 사상 중 하나인 이슬람 원리주의가 1928년, 하산 알 반나가 무슬림 형제단을 설립함으로써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팔레스타인 문제의 해결, 반서구, 반세속주의를 외치는 이들의 세력이 점차 확장되가는 상황에서 와프드당과 그들의 지지자인 콥트 세력은 점차 힘을 잃어갔죠.
이집트의 독립 이후 혼란기에 빠져 있던 도중, 1952년 7월 23일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이집트 왕정을 뒤엎습니다. 바로 아랍 사회주의, 또는 나세리즘의 등장이죠.
<자유장교단 이후 이집트의 초대 대통령이 된 무함마드 나기브>
<무함마드 나기브를 몰아내고 대통령이 된 자유장교단의 실세. 가말 압둘 나세르>
나세리즘이 비록 사회주의, 민족주의 성향의 이데올로기였다고는 하나 콥트인들에게는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먼저 혁명이 전적으로 무슬림들에 의해 이루어졌기에 콥트인들이 어떻게 들어가 볼 여지가 없었으며, 애국주의, 대중주의에 의존한 정권이었기에 대다수가 무슬림인 국민들의 입맛에 맞는 정치를 해야 했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세속주의 성격을 띄고 있었다고 하나 케말리즘이나 팔레비조의 백색 혁명과는 달리 이슬람 전통을 완벽하게 부인하지도 않았지요. 나세르가 주장한 '아랍 고리, 아프리카 고리, 무슬림 고리'에 콥트인들이 낄 자리는 없었습니다. 이 시기 교회 건설에 대한 허가가 지연되고, 기독교 종교법정이 문을 닫는 등 콥트인들은 다시 어려운 시기에 놓입니다.
또한 토지 국유화 정책으로 교회의 땅 및 콥트 대지주들의 땅을 분할하여 무슬림들에게 나눠주었고, 수에즈 운하 국유화로 유럽 기독교인들이 떠나가자 콥트인들은 불안감에 놓일 수 밖에 없었죠.
물론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중세 이슬람 사회에 비해 콥트인들의 상황은 나아, 교회 건설이나 주간지 출간, 콥트 문화나 언어 연구의 자유는 허용되었지만 이 시기 수만명의 콥트인들이 이집트 정부의 차별을 피해 미국이나 유럽, 호주로 이민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도 콥트 인들은 경제적으로 중산계급을 구성하였고, 교육 수준이 높았지요. 이집트의 외교담당 국무장관(외무부장관이 아닌)이자 UN 사무총장을 맡았던 부트로스 갈리 역시 콥트계입니다. 그의 이름인 갈리(Ghali)는 콥트계를 나타내는 특징 중 하나이죠.
나세르 사후 사다트의 시대에 들어 이집트는 더더욱 이슬람에 가까워 집니다. 1971년 9월 헌법 개정을 통해 샤리아가 법의 원천으로 규정되었으며, 이집트의 국교는 이슬람교가 됩니다. 정부의 이런 친이슬람정책에 이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슬람 원리주의자 운동까지 콥트에게는 점점 더 어려운 시기였죠. 80년대에도 차별은 계속되어, 교회 건설 및 수리에 대한 대통령의 허가는 내려지지 않았고, 주간지가 폐간되며 대학 입학, 교육에 있어서도 차별 대우는 계속되었습니다.
4차 중동전쟁, 팔레스타인 문제 등으로 이슬람 원리주의가 강해지고 있던 7~80년대의 분위기에서 이집트도 이런 분위기를 피해갈 수 없었으며, 콥트인들은 이런 상황에서 많은 차별을 받았습니다. 이슬람법의 확대 및 이슬람의 배교의 금지(이혼을 금지하는 콥트교도는 이혼을 하기 위해 잠깐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이혼 이후 다시 콥트교로 돌아오는 경우가 있었습니다) 등의 공식적인 차별 뿐만 아니라 무슬림 원리주의자에 의한 테러까지 일어났었죠. 몇몇 예로 1972년 카이로 북쪽 칸카 교회 방화 사건, 1978년의 콥트교도인 에마드 한나와 보슈라 바르바리가 살해당한 사건, 같은 해 9월 콥트 성직자인 가브리엘 신부가 도끼로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으며, 가장 큰 사건은 1981년 카이로 근교 알 자위야 알 하므라(Al-Zawiya Al-Hamra) 마을에서 100여명이 살해당하고 112여명이 부상 당하며, 270명이 집을 잃고 다섯 개의 교회가 불탄 사건이었습니다.
사다트 대통령은 이에 대해 우려의 뜻을 표하고, 종교의 자유를 주장하긴 했지만 스스로를 '이슬람 국가의 무슬림 대통령'이라고 부르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죠. 80년대 후반에도 콥트에 대한 테러는 계속되었습니다. 콥트 인구가 25%에 해당하는 아슈트의 시장이자 무슬림 형제단의 일원인 오스만 이스마일은 이집트의 3대 적을 '기독교도, 공산주의자, 유태인' 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충돌은 현재까지 이어지는데, 2000년 경 카이로 남쪽 440km에 있는 엘 코세흐(El Kosheh)마을에서 무슬림과 콥트의 충돌이 일어나 콥트인 12명과 무슬림 1명이 살해당하기도 했죠.
비록 현재에 들어와서 조금 자유로워진 편입니다. 콥트교 크리스마스는 이집트의 공휴일이고, 배교에 대해서도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한다고 바로 처형한다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2007년 이슬람에서 기독교로 개종하려는 45명의 시민에 대해 카이로 시정부가 신분증 변경(이집트에서는 신분증에 종교가 표시됩니다)을 거부하는 등의 일이 있기도 하고, 이에 대해 2008년, 대법원이 12명에 대해 신분증에 잠깐 이슬람이었다는 것을 표시하는 조건으로 신분증 변경을 허락하는 판결을 내리기도 했습니다.
정치적으로도 무바라크 대통령 취임 이후, 1957년 이래로 단 한 명도 의원을 배출하지 못했던 콥트 사회가 1984년 선거에서 4명, 1987년 선거에서 6명(심지어 1명은 이슬람 연합에서 출마했습니다)을 배출하는 등의 발전을 보이고 있습니다만, 이집트 자체가 민주화, 민주 선거가 워낙 취약한 국가이다보니 콥트 사회 전반적인 발전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재에도 이집트 행정부 내에는 단 두명의 콥트계가 장관이 있으며, 25개의 상이집트 행정 구역 중 단 한 개의 지방이 콥트 출신 관료 담당에 있습니다.
이처럼 현대 이집트의 권위주의 독재(무바라크 대통령은 20년이 넘게 해먹고 있습니다), 이슬람주의의 강세, 국제사회의 무관심, 세속주의, 자유주의 운동의 약화(와프드 당은 자유장교단의 혁명 이후 없어졌습니다) 등의 문제로 인해 콥트 사회는 어려운 시기에 놓여 있습니다. 콥트인들은 20세기 이후 이집트 민족으로 스스로를 생각해왔습니다. 한 예로 1992년 독일에 사는 한 콥트인이 스스로를 콥트 망명정부 수반이라고 주장하자 이에 이집트의 콥트인들이 반발한 것에서 보이듯이 이집트 민족으로의 정체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이집트에서 '종교에 따른 집단정체성'과 '국가, 민족에 따른 민족정체성' 은 서로 충돌하고 있는 듯 합니다.
<참고자료>
첫댓글 으음.... 맛있는 내공 냠냠냠냠.....
네스토리우스와 종파 싸움을 벌였던 알렉산드리아의 주교 키릴루스도 콥트교라고 할 수 있나요?
그렇게는 볼 수 없습니다. 키릴루스는 거꾸로 삼위일체 교리를 지켜낸 성인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지요. 단성론으로 단죄받은 건 네스토리우스입니다. (.....근데 사실 키릴루스 자신이 단성론에 가까운 교리를 가지고 있었다고 보여집니다. -_- 그 제자들을 봐도 말이죠. 네스토리우스가 키릴루스에게 모함받았을 개연성이 더 크긴 합니다. )
아, 그렇군요 덕분에 제대로 이해했습니다~
아주 좋은 글 감사합니다. (_ _)
공의회이후로 인종적으로 피가 많이 섞이지 않았을것 같은데요.. 콥트인은 물론 콥트인이겠지만;; 그러면 크게 이집트인+힉소스+페르시아+그리스+로마 까지만 섞인건가요??
7세기 이후의 아랍화를 빼놓으시면 안되죠.
저는 외견상 모습을 물은건데요;; 그러면 결혼도 하고 그랬단 말씀? 저는 아랍인들보다 대체로 좀 더 뽀얗지 않을까해서 질문드린거예요 ^^
1,400년이나 혼혈이 됐는데 별 차이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아랍인이 다 짙은 피부를 가진 것도 아닙니다. 인종적으로는 코카서스, 즉 백인이기 때문이지요.
항가항가.
후아.. 우리카페에 교수님도 계셨군요. 논문 잘 봤습니다.
교수님이라니요??
사실 H님은 투멘타이의 또 다른 자아랍니다. 일설에 의하면 꾸란을 아랍어로 통째로 암기하신다더군요
무장공비님//설마 진짜 투멘타이는 아니겠져 ㅋㅋ;
ㄲㄲ
한교님이 제 정체를 간파하셨....(?) 그리고 이건 진짜 교수님들이 쓰시는 논문에 비하면 레포트 정도나 되는 글이죠...
와, 그래도 여긴 게임 카페인데, 놀랍군요!
콥트교의 기나긴 여정이 참으로 고달픔의 연속이었군요... 그래도 콥트교가 이집트에 남아 있었기에 지금까지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만약, 유럽의 한 귀퉁이에 있었더라면 기독교의 엄격한 잣대로 인해 뼈도 못 추렸을거란 생각을 해 봅니다...
저기요 이거 퍼갑니다 ~ 출처는 남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