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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5일 연중 제20주간 금요일
제1독서 : 룻기 1,1.3-6.14ㄴ-16.22
복 음 : 마태 22,34-40
그때에
34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셨다는 소식을 듣고 바리사이들이 한데 모였다.
35 그들 가운데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물었다.
36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
37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38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39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40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요즘 도시에서 아이를 보기 힘들다는 말을 많이 듣습니다.
아파트 놀이터는 늘 텅 비어 있고, 아이를 보려면 학원에 가야 한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제가 사는 송도의 공원에서는 쉽게 아이들을 볼 수 있습니다.
아마 젊은 부부가 많이 사는 지역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더운 여름, 공원의 분수에서 쏟아내는 물을 맞으며 뛰어노는 아이들을 보면서,
저의 유년 시절과 다른 점을 발견합니다. 우선 보호자가 함께 있지 않았습니다.
또래 문화가 중심이었고, 같은 또래와 함께 어울려 뛰어놀았습니다.
지금처럼 부모가 함께 있었던 경우는 없었습니다.
놀이터도 없어서 그냥 공터만 있으면 충분했습니다.
그곳에서 야구도 하고, 축구도 하고, 얼마 전에 세계적인 인기를 끌었던
드라마 ‘오징어게임’에 나오는 놀이들을 하면서 하루 종일 놀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매일 놀았는데, 당시 친구들 모두 지금 자기 자리에서 잘살고 있습니다.
물론 어려움이 없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종종 만날 때마다
그때 같이 놀던 이야기를 하며 “그때가 좋았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요즘 아이를 보면 걱정이 됩니다.
방학이라서 많이 놀고 있냐고 묻자, 오늘도 학원만 여섯 군데를 가야 한다며 한숨짓는 것입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서 어떤 말을 하게 될까요?
책이나 영화를 볼 때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요? 바로 스토리입니다.
스토리가 있어야 흥미를 잃지 않고 계속 볼 수 있는 것이지요.
우리 삶도 이 스토리가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스토리를 통해서 신나고 멋진 삶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도 강조하신 것은 이 스토리입니다.
결코 이 세상 안에서 돈 많이 벌고, 높은 지위에 오르라는
세속적인 길을 강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 교사의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하시지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을 던졌던 율법 교사는 공부만 했던 사람입니다.
문제는 공부만 하니 가장 중요한 것을 잊어버렸습니다. 바로 ‘사랑’이었습니다.
사랑을 잊어버리고 율법 조항만을 바라보고 있으니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 사랑의 길이 바로 우리의 스토리가 되어야 합니다.
가정 안에서, 직장 안에서, 교회 안에서, 그 밖에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등등
우리가 만들 수 있는 사랑 이야기의 배경은 무궁무진합니다.
그런데도 스토리를 만들지 않아서 늘 사랑을 잊어버립니다.
주님과 함께하지 못한 이유였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미국 텍사스의 암 병원에서 25년간 환자를 돌보던 김의신 박사님의 강의를 들었습니다.
암과 관련해서 세계적인 석학인 박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암은 아직 정확하게 발생 원인을 모르는 병입니다.
그래서 암에 대한 완벽한 치료 방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의료 현실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미국의 암 병원은 가능하면 수술을 하지 않습니다.
암은 특정부위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암은 전신에 걸쳐 있기 때문입니다.
암이 머무는 집을 수술로 제거한다고 해서 암이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한국에서 암과 관련된 의사들이 우리 병원으로 연수를 옵니다.
그리고 우리 병원의 암 환자 치료 방법을 보고 가지만 한국에서는 그렇게 하지 못합니다.
한국은 아직도 암의 발생 부위를 제거하는 것을 최선의 치료방법으로 고수하고 있습니다.
암은 항암제를 투약하고, 증상이 호전되면 덩어리를 제거하거나 방사선 치료를 병행합니다.”
암 병원에는 매년 만 명 이상이 찾아오는데 외국에서 삼분의 일,
타주에서 삼분의 일, 텍사스주에서 삼분의 일이 온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암이 치료되는 사람과 암이 더디게 치료되거나
쉽게 재발하는 사람을 구별할 수 있다고 합니다.
소위 전문가들은, 돈이 많은 사람들은 치료하기 쉽지 않다고 합니다.
전문가들은 자신들이 검색하고, 부작용을 찾기 때문에
의사의 말을 제대로 신뢰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돈이 많은 사람들은 그 돈 때문에 신경을 쓴다고 합니다.
회사, 돈, 가족들을 신경 쓰면서 잠을 못 이룬다고 합니다.
건강한 사람도 암을 치료하기 어려운데 이렇게 스트레스로 몸과 마음이 망가지는 사람은
암을 치료하기 전에 먼저 마음을 다스려야 한다고 합니다.
반면에 시골에서 온 사람, 잘 모르는 사람은 치료가 쉽다고 합니다.
그런 사람은 우선 미국에 온 것만으로도 마음이 설렌다고 합니다.
평소에 먹지 못했던 음식도 잘 먹는다고 합니다.
그리고 말이 통하지 않으니 병원에서 치료하는 방법을 기쁘게 따른다고 합니다.
그러니 치료하기도 쉽고, 치료도 잘 된다고 합니다.
저는 박사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 영혼의 치유자이신 예수님을 생각해 보았습니다.
소위 전문가라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나자렛의 고향 사람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겉모습만 알면서 예수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전하시는 참된 행복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에 대해서는 자신들이 전문가라고 생각했습니다.
율법과 계명에 대해서도 자신들이 잘 안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들의 선입견을 가지고 예수님을 판단하였습니다.
예수님의 학벌을 보았고, 예수님의 출신 가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메시아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하느님의 아들을 단죄하였습니다.
박사님은 의사들을 치료하는 것이 어렵다고 합니다.
오히려 의사들이 자신의 몸을 잘 돌보지 않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하느님을 잘 안다고 생각하는, 매일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들도
어쩌면 눈뜬장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의사여 먼저 너의 병을 고쳐라.”
박사님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치료는 의사들이 최선을 다해서 합니다. 그런데 두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하나는 마음을 편하게 갖는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암을 치료하는데 가장 어려운 장애물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치료될 확률이 30% 정도가 된다고 하면 무척 기뻐한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치료될 확률이 30$ 정도 된다고 하면 무척 실망한답니다.
미국 사람들은 치료과정에서 생기는 부작용을 이야기하면 담담하게 받아들인다고 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부작용 때문에 죽을지 모른다고 먼저 걱정한답니다.
마음을 편하게 먹는 데서 암의 치료는 시작된다고 합니다.
두 번째는 잘 먹는 것이라고 합니다.
잘 먹고 몸의 면역력이 좋아야 암을 치료할 수 있는데
한국에서 온 사람들은 잘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고기도 잘 먹지 않는다고 합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음식을 열심히 먹으면서 암의 치료는 시작된다고 합니다.”
병원에는 1,500명의 자원봉사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분들 대부분은 암을 치료 중이거나, 암이 치료된 사람이라고 합니다.
안타깝게도 한국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이런 자원봉사자를 찾을 수 없었다고 합니다.
박사님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행복은 보람 있는 일을 하는 것이고, 보람 있는 일은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에서 롯은 바로 이런 삶을 살았습니다.
그리고 롯은 보아즈의 아내가 되었고 유다의 임금 다윗은 이 가문에서 탄생하였습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은 다윗 가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이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이다.
반영억 라파엘 신부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고(1요한4,16) 우리가 깨끗하지 못해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기에 사랑하실 수밖에 없으십니다. 따라서
“선한 사람에게나 악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햇빛을 주시고
옳은 사람에게나 옳지 못한 사람에게나 똑같이 비를 내려주십니다” (마태5,45).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그분께서 먼저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1요한 4,19).
하느님의 사랑에는 한계가 없고 그 깊이 또한 헤아릴 길이 없습니다.
그래서 십자가의 성 요한은
“하느님께 대해 어떤 특별한 것을 알려 하거나 느끼고 싶어 하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가득 찬 마음을 지닌 채 주님을 향하는 것으로 만족하시오!
사랑에 불타는 영혼은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라고 했습니다.
사막의 은수자 까롤로 까레또도
“이해하려 들지 마시오,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입니다.
알려 들지 마십시오. 결코 알지 못할 것입니다. 다만 사랑하기를 힘쓰십시오.
사랑 안에서, 사랑 안에서만 버림받은 예수님과
이 세상에서 버림받은 모든 사람에게 다가갈 수 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계명은 사랑입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고 선언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 사랑이 구체적인 이웃 사랑으로 드러나야 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고 결론지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러한 말씀은 613개 조항의 율법 규정과 10계명의 숫자에
부담을 느끼고 있던 당시 사람들을 홀가분하게 하는 선언이었습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항상 하나의 줄기입니다.
“너희가 내 형제들인 이 가장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해 준 것이
바로 나에게 해 준 것이다”(마태25,40).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가 어떻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의 형제도 사랑해야 한다는 이 계명을
우리는 그리스도에게서 받았습니다”(1요한4,20-21).
사랑은 모든 것의 근본이고 우리가 행하는 모든 일에 가치를 부여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사랑은 가까이 다가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을 산다는 것은 아무런 내색도 없이
어떤 요구도 없이 그저 베푼다는 의미입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사랑은 이유를 묻지 않으며 이익을 따지지 않습니다. 사랑이란 존재에 있습니다.
존재하기 때문에 사랑하고 사랑하기 때문에 존재합니다”(성 베르나르도). 그러므로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바를 하십시오”(성 아우구스띠노).
사랑합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주님을 사랑합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한데 묶으십니다.
아버지이신 하느님 안에서 우리는 모두 형제요 자매들인 까닭입니다.
그러니 하느님께 대한 사랑은 형제에 대한 참사랑을 가져오며,
반면에 아버지의 아들, 딸을 미워하면서 아버지를 사랑한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은 말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자기의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입니다.”(1요한 4,20)
사실 이 사랑의 계명은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합니다.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단지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 한 생명’이 있을 뿐이며,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교종 요한 바오로 2세께서는 교회문헌 <새 천년기>(43항)에서
친교의 영성에 대해서 다루면서, 바로 이러한 점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친교의 영성은 삼위일체의 심오한 신비체 안에서, 타인을 '나의 일부인 사람들'로 생각하고
형제들에게 주어진 하느님의 선물을 '나를 위한 선물'로 여길 줄 아는 능력을 의미한다."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비로소 이웃과 자신이 분리되지 않고
한 몸의 일부가 되고,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암수동형처럼 섞여 혼합되어 한 몸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한 몸의 일부로서 각각의 지체로서 머리이신 그리스도와 결합하여, 한 몸을 이루게 됩니다.
곧 생물할적인 한 몸을 이루거나 철학적이거나 관념상의 한 몸이 아니라,
사랑 안에서의 인격적인 한 몸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인격 안에서 ‘한 몸’으로 결합되어 있는 이웃에게 베푸는 사랑이 됩니다.
그리하여 형제 사랑이 진정한 하느님 사랑이 되고,
그 사랑 안에서 한 몸을 이루고 한 생명을 이룹니다.
곧 사랑의 인격체를 이루게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사고와 인식의 틀을 요구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탄생, 새로운 인격체인 자기에로의 전환입니다.
곧 남인 이웃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이며,
‘남’을 사랑하는 이웃 사랑이 아니라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곧 인격체로서 전환이요, 존재론적인 전환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처럼 사랑은 변화와 실천안에서 성취되고 완성되어 집니다.
이를 요한사도는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 사랑한다면, 하느님께서는 우리 안에 계시고
또 하느님의 사랑이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 있는 것입니다.”(1요한 4,12)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태 22,39)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아멘.
가장 큰 계명
조욱현 토마스 신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36절).
바리사이는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고 그렇게 부르고 있다.
예수께서는 그에게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37절) 말씀하신다.
이것이 가장 큰 계명이며 첫째 계명이다.
첫째 계명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것과 관련한 모든 것을 가르쳐 준다.
마음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선의 바탕이기 때문이다.
“둘째도 이와 같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39절)는 것이다.
둘째 계명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첫째 계명은 둘째 계명을 실천할 수 있도록 준비해주고, 둘째 계명으로 입증된다.
하느님의 사랑 안에 굳게 서 있는 사람들은 모든 일에 있어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안에 가치관이 확실히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고 있다.
모든 것 위에, 즉 우리의 가치관의 첫 자리에 하느님이 자리하고 계셔야 한다.
하느님보다 더 높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 첫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 첫 자리를 차지하는 것에 대한 우상 숭배가 된다. 우상 숭배는 다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이 계셔야 할 자리에 재물이나, 자식이나 사상이나 이념이 자리한다면 그것이 우상이다.
하느님-인간-세상-재물로 순서가 되어야 한다.
이렇게 가치관이 서 있을 때, 우리는 첫째 계명과 둘째 계명을 올바로 실천할 수 있다.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라고 하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창조된 사람은 사랑할 줄 알고 사랑을 해야 하고,
사랑을 받아야 하는 사랑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존재이다.
하느님께서 사람을 당신의 모습대로 지으셔서 이 세상에 당신의 대리자로 세우셨다면,
우리는 그 인간의 모습을 통해서 하느님을 볼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에 우리가 보는 나의 이웃은 바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면서
우리는 또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눈에 보이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찌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겠는가?
그런 사람은 거짓말쟁이라고 하였다.
상대방도 하느님의 모습이고 나 자신도 하느님의 모습이라면
인격적인 사랑의 나눔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
삶에서 우리는 언제 길을 잃게 되는가?
전삼용 요셉 신부
2018년 대한민국 청년 수 1,400만 명,
이 중 69.5%가 무기력증, 불안증, 우울증을 경험했고
이 수는 4년 전보다 약 30% 증가한 수치라고 합니다.
아마 코로나를 거치면서 사태는 더 심각해졌을 것입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게 맞나?”
유튜브 동영상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 삶이 힘든 20대가 보면 폭풍 오열 각인 영상」에서는
삶에 힘겨워하는 젊은이들에게 설문 조사를 하였습니다.
그들은 꿈을 잃은 사회 초년생, 매번 면접에서 떨어지는 취업 준비생,
승무원 포기한 배우 지망생, 고3 수험생 등이었습니다.
질문은 이런 것들입니다.
“하루 수면시간은 어떻게 되나요?”, “일주일에 몇 번 사람들과 어울리나요?”,
“모든 일이 힘들게 느껴지나요?”, “꿈이 있나요?”, “하루에 몇 번 소리 내 웃나요?”
그리고 뒷장에는 같은 질문 앞에 ‘어린 시절에’란 단어를 붙였습니다.
어린 시절 수면시간은 얼마였나요? 어린 시절 몇 번 소리 내어 웃어보았나요? 등입니다.
당연히 어린 시절이 앞길이 막막한 청년들보다 훨씬 행복했을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행복해지자고 사는 건데 왜 우리는 행복을 위해 살면서도 결국엔 길을 잃고 말까요?
아이 때는 부모를 사랑하고 형제를 사랑하면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른이 되면서는 부모를 사랑하지 않게 됩니다. 자신이 부모가 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이 빠진 우리도 그래서 길을 잃습니다.
‘비벡 H 머시’의 『우리는 다시 연결되어야 한다』라는 책은
‘외로움’과 ‘인간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복권 당첨자가 머시에게 말했습니다.
“제가 복권 당첨된 것은 저에게 저주가 되었어요.”
“아니, 왜요?”
“복권 당첨되기 전에는 직장 동료, 친구와 이웃들이 많았습니다.
복권에 당첨되고 부자 동네로 이사 오고 나니 모든 관계가 단절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집에 갇혀있는 외로운 사람입니다. 다시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습니다.”
행복은 하느님께 속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됩니다.
어린이는 이를 잘 압니다. 하지만 어른은 돈이나 범죄 집단에 의존하려 합니다.
그럼으로써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게 됩니다.
이렇게 쉽게 길을 잃는 이유는 행복을 위한 핵심 계명을 잊어버리기 때문입니다.
오늘 복음에서도 율법 교사가 “스승님, 율법에서 가장 큰 계명은 무엇입니까?”라고 묻습니다.
길을 잃은 것입니다. 무엇이 중요한지 알지 못하면 아무것도 모르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게 어설프게 아는 것보다 낫습니다.
영화 ‘곰돌이 푸 다시 만나 행복해’도 이런 내용입니다.
어린 크리스토퍼 로빈은 ‘100에이커 숲’에서 곰돌이 푸를 포함한 친구들과 어울리다가
기숙학교에 보내지면서 친구들에게 작별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친구들을 잊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삶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시간은 빠르게 흐릅니다.
우리는 크리스토퍼가 자라서 에블린이라는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고, 마침내 매들린이라는 딸을 갖게 됩니다.
전쟁이 끝난 뒤 그는 런던의 한 여행 가방 회사에서 효율성 전문가로 일합니다.
직업에 대한 요구와 전쟁의 트라우마로 그는 가족, 특히 딸 매들린과 멀어집니다.
주말에 일을 해야 했기 때문에 아내와 딸만 시골로 보내고 자신은 일에 매진합니다.
우연히 곰돌이 푸는 런던 도시에서 크리스토퍼 로빈을 만납니다.
로빈은 푸가 반가우면서도 귀찮습니다.
그를 100에이커 숲으로 돌려주러 왔다가 자신이 일에 지쳐서
가족과 친구들을 잊고 살았음을 깨닫게 됩니다.
그 숲에는 괴물이 있었는데 결국 자신이 괴물 헤팔럼이 되어있었던 것입니다.
100에이커 숲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곳입니다.
구덩이에 빠졌더라도 잠시 기절해 있으면 비가 와서 물이 차올라 몸이 떠오릅니다.
그러나 발버둥 치면 더 가라앉습니다. 다른 동물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에 둥둥 떠내려가면서도 걱정하지 않습니다. 운명에 자기 자신을 맡기기 때문입니다.
크리스토퍼 로빈은 자신이 그러한 동물들을 도와주면서
자신은 그런 환경에서 살지 못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래서 길을 잃은 것입니다.
전쟁터에 나가 싸우는 것도, 회사에 다니는 것도 가족을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가족과 친구를 돌볼 시간을 내지 못하였습니다.
우리 삶 안에서도 이러한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사제가 신자들을 위해 열심히 봉사한다고 하면서도
정작 친밀한 관계는 하나도 맺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도 많습니다.
왜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을 그리도 쉽게 잊을까요? ‘두려움’ 때문입니다.
나를 지켜주는 하느님이 계신다는 믿음이 없기 때문에 두려운 것입니다.
운전할 때 초보나 두려움이 많은 사람은 차선에 집중합니다.
저도 전방에서 안개가 껴서 길이 안 보일 때 길이 아닌 벽을 보며 운전한 적이 있습니다.
두려움은 중요한 것을 보지 못하고 곁가지를 보며 결국 길에서 벗어나게 만듭니다.
정말 벽만 보고 운전하다가 진짜 낭떠러지에서 떨어질 뻔한 적도 있습니다.
사탄은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게 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우리 스스로 삶을 헤쳐 나가게 합니다.
그 두려움이 하느님 사랑, 이웃 사랑을 잊게 만드는 것입니다.
곰돌이 푸와 친구들은 100에이커 숲에서 아무 걱정 없이 살아갑니다.
그럴 때 친구를 생각할 여유가 생깁니다.
길을 잃지 않으려면 두려움을 해결하십시오.
하느님께서 계심을 믿고 의탁하면 지금, 이 순간 나는 100에이커 숲에 머물게 됩니다.
동시에 발생하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박상대 마르코 신부
사두가이파 사람들이 예수와 부활에 관해 논쟁을 벌이다가 낭패를 본 모양이다.(마태 22,23-33)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종교적으로 모세오경만 경전으로 여겼기 때문에
모세오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부활 신앙을 배척한 사람들이다.
부활 신앙이 경전에 등장하는 시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서 2세기경 사이로서
이 시기에 기록된 예언서(이사야, 에제키엘, 다니엘)와
묵시문학(마카베오) 등에 부활신앙이 나타난다.
그들이 죽은 형의 가문을 이어주는 모세의 율법,
수혼법(창세 38,8; 신명 25,5-10)을 근거로 예수께 괴변을 늘어놓는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하느님은 죽은 이들의 하느님이 아니라 살아있는 이들의 하느님이다.’는 말씀으로
그들의 말문을 막아 버리신 것이다.
소문이 퍼지자 ‘세금에 관한 논쟁’(마태 22,15-22)에서
예수의 대답에 탄복을 하고 물러갔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다시 몰려왔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중 율법학자 한 사람이 예수를 시험하려고 질문을 던진다.
이 시험은 어떻게 하든 예수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
사실 율법교사들은 모세의 율법 중 248개의 行令과
365개의 禁令 모두를 똑같은 비중으로 여겼다.
이 중에서 가장 큰 계명 하나를 집어내라니(35절),
우리가 보기에도 답답하기 곤란한 질문이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를 제시하시고,
이 계명에 버금가는 제2의 계명도 잇달아 제시하신다.
그것은 우리가 사랑의 이중 계명으로 알고 있는
‘하느님 사랑’(신명 6,5)과 ‘이웃사랑’(레위 19,18)이다.
예수께서는 이 두 계명을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 천명하신다.
613개의 계명들은 분명히 서로 다른 계명들이다.
그래서 율법학자들은 모든 계명이 똑같은 비중을 지닌다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어떤 기준으로 가장 크고 첫째가는 계명 하나와
이에 버금가는 둘째 계명을 제시하시는 것일까?
기준은 간단하다. 무엇 때문에 계명이 존재하는가를 따져보면 된다.
계명의 존재 이유는 하느님과 인간(이웃) 때문이다.
그러므로 가장 큰 계명인 동시에 모든 계명의 기본적인 정신,
즉 골자가 될 수 있는 것이 바로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인 셈이다.
사랑 없이는 어느 계명도 완벽하게 준수될 수 없고, 빈 껍데기로 있을 뿐이다.
사랑이 하나의 계명을 성취시켜 충만하게 만드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누구도 구약의 율법(613개)을 몽땅 지키도록 요구받지 않는다.
그러나 모든 율법의 정신인 사랑을 실천한다면 율법을 능가하는 행위를 수행한 셈이다.
그런데 우리들 사이에는 하느님은 사랑한다면서 인간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이 바로 나라면 왜 예수께서 수많은 율법들 가운데 하나인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한데 묶어 가르치시는지를 깨달아야 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순서(first and second)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이는 동시(synchronize)에 일어나는 일이다.
“내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중에 이웃 사랑에 대한 의지가 굳건해지며,
내가 이웃을 사랑하는 가운데 하느님께 대한 순명이 확증된다.”(루돌프 볼트만)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사랑해야 한다.
한 아델라 수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마태오 22,3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똑같이 중요하며 핵심적인 계명임을 말씀하십니다.
고개를 끄덕거리지만, 특별히 누구나에게 해를 끼치거나 나쁘게 굴지 않았다고
가슴 한구석에서 안도의 숨을 쉬어보지만.....
문득 '네 이웃'이란 말씀에 숙연해집니다.
나에게 '이웃'이란 과연 누구인지.
나와 너무도 달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도
과연 나는 나의 이웃이라는 울타리 안에 넣고 있는지 되묻게 됩니다.
예수님처럼 열린 마음으로, 경계 없는 마음으로
모두를 이웃으로 받아들이고 함께 할 수 있는
너그러움과 관용을 하느님께 청해봅니다.
[출처] 마태 22,34-40 연중 제20주간 금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