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랭킹 1위인 스페인의 라파엘 나달이 2010년 US오픈을 우승하며 마침내 커리어 그랜드슬램을 달성했습니다. 유일한 약점으로 지적받던 서브가 비약적으로 발전했고, 결승 전까지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올라왔으며, 강력한 경쟁자였던 로저 페더러마저 결승에 올라오지 못했기 때문에 무난한 우승이 예상되긴 했습니다만...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는 이번 우승으로 사상 최연소 커리어 그랜드 슬램(4개 메이저대회를 모두 우승)을 달성한 선수가 됐습니다. 또한 안드레 아가시에 이어 두 번째로 커리어 골든 슬램(4개 메이저대회 우승+올림픽 금메달)을 완성하기도 했습니다. 평생 메이저 대회 결승 한 번 못 올라가보고 사라지는 선수들이 부지기수라는 점을 감안하면 불과 24세에 이런 대기록을 세운 그가 얼마나 대단한 선수인지 잘 알 수 있습니다.
메이저 대회 우승 횟수도 역사상 7위로 올라섰습니다. 페더러와 샘프라스의 기록은 몰라도 로이 에머슨, 비욘 보그와 로드 레이버, 빌 틸든의 기록은 향후 1~2년 안에 무난하게 경신할 수 있을 듯 합니다.
나달은 지난해 첫 메이저대회인 호주오픈에서 페더러를 꺾고 우승하며 하드코트에서도 충분히 우승할 수 있다는 점을 잘 보여줬습니다. 이 때만 해도 금방이라도 압도적인 그의 시대가 열릴 것 같았지만 이후 나달은 2009년 남은 한 해 동안 굉장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2008년 투어 스케줄을 너무 빡빡하게 짠 데다 올림픽과 데이비스컵까지 참가하는 바람에 생긴 혹사의 여파가 밀어닥쳤기 때문입니다.
무릎 부상으로 고전하던 그는 텃밭이던 프랑스 오픈에서는 16강에서 탈락했고, 윔블던은 부상 때문에 아예 참가하지도 못했습니다. 이 와중에 부모님의 예상치 못한 이혼으로 상당한 심적 고통도 겪었습니다. 나달이 호주오픈에서 우승한 것도 페더러 특유의 '나달 울렁증' 덕분이며, 같은 하드코트라 해도 호주오픈 코트보다 반응 속도가 훨씬 빠른 US오픈에서는 그가 우승하지 못할 거라는 회의적 시각도 상당했습니다. 체력으로만 밀어붙이는 나달 식 테니스의 한계가 드러나는 것 아니냐는 평가도 나왔습니다. 이처럼 나달이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 노쇠화가 시작됐다는 평가를 받았던 페더러는 승승장구하며 3개의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더 따냈고, 커리어 그랜드 슬램도 달성했습니다.
하지만 나달은 이런 어려움을 모두 극복하고 호주오픈을 제외한 올해 모든 메이저 대회를 휩쓸었습니다. 프랑스오픈과 윔블던은 메이저대회 결승전이라고 부르기 무색할 정도로 그가 압도적인 승리를 했고, 이번 US오픈에서도 결승전에서 조코비치에게 1세트를 내 줬을 뿐 시종일관 경기를 리드했습니다. 이에 따라 벌써부터 나달이 페더러가 세운 메이저 대회 16회 우승의 기록을 깰 수 있을지에 관한 예상도 분분합니다.
피트 샘프라스가 14번의 메이저 대회 우승을 했을 때만 해도 이 기록은 영원히 깨지기 어려울 듯 보였습니다. 하지만 곧 페더러라는 황제가 나타났고 그는 이 기록을 깼습니다. 이제는 또 나달이라는 괴물이 나타나 새로운 역사를 쓸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이와 관련, 경기 후 US오픈 홈페이지에는 흥미로운 기록이 올라왔습니다. 1986년 6월 3일 생인 나달은 우승을 확정지은 2010년 9월13일 기준으로 24세 102일입니다. 1981년 8월 8일생인 페더러가 같은 나이 때 달성한 기록과 나달의 기록을 비교한 것이죠.
Federer vs. Nadal at the Very Same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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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dal on 9/13/10 |
Federer on 11/18/05 |
Overall Record |
460-98 |
390-119 |
Winning Pct. |
.824 |
.766 |
Titles |
42 |
33 |
Major Titles |
9 |
6 |
Majors Played |
26 |
27 |
Davis Cup Titles |
3 |
0 |
Olympic Gold Medals |
1 |
0 |
Longest Win Streak |
32 |
34 |
Rank |
1 |
1 |
Weeks at No. 1 |
60 |
93 |
Record vs. No. 1 |
14-6 |
2-3 |
나달은 같은 나이에 6번의 우승을 했던 페더러보다 이미 3개의 타이틀을 더 딴 상태입니다. 같은 나이의 페더러보다 50경기 정도를 더 치르고도 통산 승률 역시 페더러보다 훨씬 좋습니다. 나달이 페더러보다 일찍 프로에 데뷔했고, 메이저대회 첫 우승 시기도 빠르긴 합니다만 어쨌든 현재의 페이스를 유지한다면 영원히 깨지기 어려운 듯한 16회 우승을 깰 가능성은 충분히 마련된 상황입니다. 가장 강력한 적수인 페더러의 노쇠화가 시작됐다는 점, 10대 후반~20대 초반 선수들 중 아직 그를 위협할만한 신성이 보이지 않는다는 점, 서브의 약점을 안고도 8개의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따냈던 그가 서브까지 보강하며 완전무결체로 거듭나고 있다는 점 등은 나달 팬들의 기대를 더욱 크게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지금의 나달에게는 딱히 적수라고 부를만한 선수가 없어 보인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페더러와 나달이 등장한 2000년대 중반 이후 메이저 대회는 사실상 둘의 대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 둘의 틈을 비집고 메이저 우승을 차지한 선수는 이번 결승 상대이자 2008년 호주 오픈 우승자인 노박 조코비치, 지난해 US오픈 우승자인 후안 마틴 델 포트로 단 둘 뿐입니다. 랭킹으로 보나 실력으로 보나 조코비치가 라이벌에 가장 근접한 선수이긴 합니다만 조코비치는 호흡기 질환과 테니스 선수 치고는 상대적으로 왜소한 체격 때문에 오랫동안 체력 부족 문제에 시달려 왔습니다. 델 포트로는 부상으로 올 시즌을 통째로 날렸고, 윔블던이나 프랑스오픈에서는 아직 4강 문턱도 밟아보지 못했습니다.
조코비치나 델 포트로를 제외한 나머지 세계 톱10 랭커 중에서도 적수가 안 보입니다. 한때는 금방이라도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딸 것만 같았던 앤디 머레이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한 끝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4강 언저리에서만 맴돌고 있습니다. 앤디 로딕은 나달보다 4살이 더 많고 페더러가 만개하기 전인 2003년 US오픈에서 우승한 게 유일한 메이저대회 우승입니다. 니콜라이 다비덴코, 토마스 버디히, 쏭가 등도 아직까지는 메이저대회에서 우승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이 보이는 선수들입니다.
즉 현재로선 잔디코트와 클레이코트에서는 나달에게 범접할 만한 선수가 없다고 봐야 할 듯 합니다. 하드코트에서도 델 포트로나 로빈 소덜링처럼 포핸드를 무지막지하게 후려갈기는 파워 히터라면 모를까 조코비치와 같은 테크니션 스타일로는 서브까지 보강한 나달에게 쉽게 대적하기 어려운 상황입니다.
다만 통산 1위 유지 기간은 아직 나달이 페더러에게 많이 밀립니다. 페더러는 나달의 나이 때 이미 93주 동안 세계 1위를 유지했고 현재까지는 285주 동안 1위를 지키고 있습니다. 이는 샘프라스의 기록에 딱 1주일이 부족한 기록입니다. 나달이 이 부문에서 페더러의 기록을 깨려면 앞으로 거의 5년 가까이 1위를 지켜야 합니다. 앞으로 7~8개의 메이저 대회 타이틀을 추가하는 일보다 이 기록을 깨는 게 더 어려워보입니다.
물론 스포츠 세계에서 가정이란 무의미합니다. 체력 소모가 극심하고, 20대 중반을 지나면 싫든좋든 경기력의 하강이 오는 테니스의 특성 상 지금 당장은 적수가 없어보이는 나달에게도 어떤 일이 벌어질 지 모릅니다. 샘프라스와 아가시도 만 30세 이후 메이저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있고, 페더러 본인이 선수 생활 연장에 강력한 의지를 보이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페더러가 앞으로 메이저 대회에서 한 두 차례 더 우승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습니다.
페더러는 전성기로 평가받던 2006년과 2007년 매년 3개의 타이틀을 가져갔습니다. 본격적으로 나달에게 밀리기 시작했던 2008년에도 2번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즉 그는 3년간 열리는 12차례의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결승에 진출했습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기록입니까. 페더러는 말 그대로 역사상 가장 dominant한 선수였습니다. 설사 나달이 16회 우승 기록을 깬다 해도 dominance라는 측면에서는 페더러를 넘기 힘들 겁니다.
24세인 나달의 전성기는 이제 시작입니다. 나달의 최전성기는 어떨까요? 페더러처럼 전성기에 완전히 압도적인 모습을 보일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16회 우승이 아니라 20회 우승도 가능할 지 모릅니다. 하지만 전성기에 압도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다면 기록 달성이 어려울 수 있습니다. 때문에 나달이 페더러의 메이저 대회 우승 기록을 넘어서려면 선택과 집중 전략이 필요합니다. 즉 랭킹 손해를 감수하고서라도 투어대회 일정을 대폭 줄이고 메이저 대회에만 집중하는 식이죠. 세계 1위를 얼마나 오래했느냐보다는 메이저 대회 우승 횟수가 몇 번이냐가 훨씬 중요한 기록이니까요. 데이비스컵, 오프 시즌 기간의 수많은 행사 등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야 작년처럼 부상과 혹사의 여파에 시달리지 않을 수 있습니다.
어쨌든 나달과 페더러 두 사람은 스포츠 역사상 가장 흥미로운 대결 구도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단 한 명도 나오기 힘든 엄청난 수준의 선수가 동시대에 두 명이나 나왔다는 것, 둘의 플레이 스타일이 완전히 상극이라는 것, 그러면서도 서로를 존경하고 배려한다는 것...매너좋고 겸손하기로 유명한 나달은 수 차례 여전히 페더러가 역사상 가장 우수한 선수이며 자신은 아직 그의 기록에 미치지 못한다고 밝혀왔습니다. 페더러 역시 결승 진출 실패 후 가진 인터뷰에서 나달이 우승하기를 바란다고 말했습니다...테니스 팬의 입장에서는 이 둘과 동시대를 살며 이들의 경기를 지켜봤다는 점만으로도 행복해지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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