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사물들, 말하자면 몸과 세계 사이에서 이미 늘 이루어지고 있는 불투명한 경계 불명의 교차와 교직을 말하고 있습니다. 보는 자와 보이는 것은 동일한 재료로 되어 있어 얼마든지 서로의 위치를 바꿀 수 있고, 실제로 그렇게 위치를 바꾸고 있습니다. 제대로 보면 보이는 것만 남고 보는 자는 사라집니다. 보는 자는 과연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보이는 것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그래서 보는 자를 집어삼킨 그 보이는 것은 이제 보는 자로 변신합니다. 그래서 보는 자인 나를 보이는 것으로 만들면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묘한 일이 생겨날 수 있는 근거는 바로 내 몸의 탁월성입니다. 내 몸은 자신의 보임을 매개로 하여 보이는 사물들을 자신의 주변에 포진시켜 몸이 움직임에 따라 함께 새롭게 배치됩니다. 하지만 그런 가운데 오히려 몸은 주변의 사물들에 몰입해서 자신의 봄을 보이는 사물들에 빼앗기듯이 이관시킵니다. 이 정도 쯤이면 정말이지 큰일이 난 셈입니다. 결국 이렇게 됩니다.
"이러한 전복(顚覆), 이러한 이율배반은 사물들의 한가운데에서 파악되거나 이루어지는 것을 말하는 다양한 방식이다. 사물들의 한가운데에서는 하나의 보이는 것이 자신에 대해 그리고 모든 사물을 봄으로써 보기 시작하고 보이게 된다. 거기에서는 결정 속의 근원적인 물처럼 감각하는 자와 감각되는 것의 미분화(未分化)가 유지된다."
메를로퐁티가 지금 주시하는 있는 봄을 둘러싼 이러한 근본 사태는 실증적으로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차라리 신비주의적인 형이상학적 사건이 벌어지고 있는 근원적인 상황이라고 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릅니다. 사물들의 한가운데에서 "하나의 보이는 것이 보기 시작하고 보이게 된다"라는 언명이 특히 그러합니다. 이는 전통적인 방식으로 바꾸어 말하면 '물질에서 주체적인 활동을 하는 의식이 발생한다'로 됩니다. 또 이를 사르트르에 견주어 말하면 '완전한 밀도를 지닌 즉자에서 존재론적인 감압이 일어나 그 간극에서 대자적인 의식이 생겨난다'는 것이 됩니다.
이러한 형이상학적인 근원적 사건이 벌어지는 장면을 목도한다는 것은 말 그대로 미쳐버린 지경에 이른 것이지요. 그런데 이에 관해 메를로퐁티가 제시하는 다음의 입론이야말로 기가 막힙니다. 우리 인간이 어떻게 해서 진정 인간일 수 있는가를 잘 묘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내부성은 인간 몸의 물질적인 배열을 앞서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 몸의 물질적인 배열에 의한 귀결은 더더욱 아니다. 만약 우리의 두 눈이 우리의 몸을 형성하는 그 어떤 부분도 시선하에 둘 수 없는 그런 방식으로 되어 있다면, 또는 만약 어떤 교활한 장치가 우리의 손이 다른 사물들은 자유롭게 만질 수 있는데 우리의 몸을 만지지 못하게 한다면 스스로를 반조(返照)하지 못하는 이 몸은 스스로를 감각하지 못할 것이고, 완전히 살이 아닌 거의 금상석처럼 굳은 이 몸은 더 이상 인간의 몸도 아닐 것이고 또한 인간성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성은 우리 몸의 유기적 결합에 따른, 우리 두 눈이 생긴 모양에 따른 결과로서 산출되는 것이 아니다(하물며 우리 몸 전체를 유일하게 볼 수 있도록 하는 거울의 현존에 따른 결과로서 산출되는 것은 더욱 아니다)."
맨처음 지적되고 있는 "이러한 내부성"은 미처 보는 자와 보이는 것으로 분기되지 못한 그 미분화된 상태를 지칭합니다. 그것이 인간 몸의 물질적인 배열을 앞서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해서 그 물질적인 배열에 의한 귀결도 아니라고 하는 메를로퐁티의 기묘한 발언은 무엇을 향한 것인가요? 관념론도 유물론도 이러한 봄의 수수께끼를 돌파할 수 없다는 점을 선언한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두 속성으로 하는 자연이자 실체인바 스피노자가 말하는 신과 무척 닮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로서는 거꾸로 말해야 합니다. 스피노자가 그런 전대미문의 기묘한 신을 말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우리 몸과 세계와의 신비로운 관계를 전 우주적으로 확대시켰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스피노자 도 참 대단합니다.
"이러한 우연한 사태들과 그와 유사한 다른 사태들은 그것들의 총합에 의해서는 단 한 명의 인간도 만들지 못한다. 몸의 생동화(animation)는 몸의 부분들을 서로 조합하는 것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 더욱이 다른 곳에 서 온 정신이 자동 장치로 침입한 것도 아니다. 이는 몸 자체를 여전히 내부도 없고 "자기"도 없는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인간의 몸은 보는 자와 보이는 것 사이에, 만지는 자와 만져지는 것 사이에, 하나의 눈과 다른 눈 사이에, 손과 손 사이에 일종의 교차가 일어날 때, 감각되면서 감각하는 자의 불길이 붙을 때, 어떤 우발적 사건이 일어나(예컨대 죽음이 찾아와) 그 어떤 우발적 사건으로도 충분히 해낼 수 없을 일을 몸으로부터 앗아갈 때까지, 그 불이 계속해서 타오를 때, 그때 거기에서 존재한다. .."
여기에서 말하는 몸의 "내부"가 물리적인 덩어리 내의 내부가 아님은 물론입니다. 몸의 "내부"와 몸의 "자기"와 거의 동일시하는 데서도 이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그 "내부"를 정신으로 보면서 몸을 정신에 의해 통제되는 자동 장치로서의 외부로 보면 더욱 곤란합니다. 그렇다고 몸의 "내부"를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몸의 "자기"라는 말과 연결되어 있는 한에서는 더욱 그러합니다. 다만 몸의 "자기" 또는 몸의 "내부"는 의식적 • 반성적 의식을 발휘하는 정신으로써는 도무지 정확하게 인지할 수도 없고 파악하려고 하면 할수록 오히려 숨어버리는 그런 것이라 해야 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