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
‘1997년 11월 21일, 베로니카는 드디어 목숨을 끊을 순간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세 들어 살고 있는 수녀원의 방을 구석구석 청소하고
난방을 끈 다음 이빨을 닦았다.
그리고 침대에 누웠다.’
파울로 코엘료의 소설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는
이렇게 시작된다.
젊고 매력적인 여인 베로니카. 어려서부터 피아니스트를 꿈꿔왔지만
외교관인 그녀의 부모들은 변호사 수업을 할 것을 권한다.
결국 부모의 권유를 받아들여 피아니스트의 꿈을 접고
법률학을 공부해 평범한 사서직을 얻는 데 그치지만
생활은 안정되어 있다.
그러나 어느 날 수면제 네 통을 먹고 자살을 시도한다.
자살의 첫 번째 이유,
그녀의 삶은 이제 모든 것이 너무 뻔했다.
젊음이 가고 나면 그다음엔 내리막길이다.
어김없이 찾아와서는 돌이킬 수 없는 흔적을 남기는 노쇠와 질병들,
그리고 사라져 가는 친구들,
이 이상 산다고 해서 얻을 건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오히려 고통의 위험만 커질 뿐이다.
자살의 두 번째 이유는 보다 더 철학적인 것이었다.
신문과 텔레비전을 통해 그녀는
세상에서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고 있었고,
모든 것이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로서는 그러한 상황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자신이 세상에 아무런 쓸모가 없는 존재처럼 느껴진 것이다.
24살의 나이에 자신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경험해 본 후에
(작가는 그녀의 경험이 아주 하찮은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염두에 두라고 이른다)
베로니카는 모든 것이 죽음과 함께 끝난다고 확신한다.
조금만 있으면 최후의 경험인 영원한 자유와 망각을 얻으리라고...
하지만 그녀의 마음 깊은 곳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다.
신이 존재하는 것일까?
수천 년 문명은 자살을 금기로, 혹은 모든 종교적 규범에 대한 모욕으로 여겼는데...
“솔직히 난 믿지 않지만 신이 존재한다면
신은 인간의 이해력에 한계가 있다는 걸 이해해야만 해.
불의, 탐욕, 비참함, 고독일 뿐인 이러한 혼돈을 창조한 건 바로 신 자신이잖아.
신의 의도는 훌륭한 것이었겠지만 결과는 형편없어.
신이 존재한다면, 그는 보다 일찍 이 세상을 떠나기를 갈망한 피조물들에게
관대함을 보여야 해.
아니, 오히려 우리가 이 땅을 거쳐 가게 한 것에 대해 사과해야 할지도 몰라.”
그러나 베로니카의 자살은 미수로 끝났고,
다시 눈을 떴을 땐 정신병원의 침대에 뉘어진 상태였으니,
그것은 영원한 자유의 하늘나라가 아니었다.
곧바로 느껴지는 것은 심한 통증이었으며,
그것은 바로 세상의 실상이기도 했다.
자살이 실패로 돌아가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기회는 주어졌지만
수면제 과다복용으로 인해 심장에 이상이 생겨
10일 동안의 시한부 인생이 주어졌을 뿐이다.
그때부터 베로니카에게 삶과 죽음은 전과는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한다.
발작적으로 오는 심장의 이상과 통증,
그리고 죽음에 대한 공포.
그녀는 다른 환자들과 함께 정신병동의 생활을 하면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다.
미쳤다는 게 무엇일까?
“이번엔 빙빙 돌리지 않고 바로 대답해줄게.
미쳤다는 건 자신의 생각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할 수 없는 상태를 말해.
마치 네가 낯선 나라에 와 있는 것처럼 말이지.”
주치의인 이고르 박사의 설명이다.
생각해 보면 그녀는 자신의 욕망과 의지를
한 번도 드러내거나 고집해 본 일이 없었다.
오로지 사회규범의 틀 안에서만 생활해 왔던 것이다.
하지 말라는 건 안 했으며 하라는 것만 해왔다.
사람들은 그 때문에 우울증이나 자폐증에 빠져드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광기를 발산해라.
한마디로 미쳐라.
그리고 그렇게 살아라."
작가는 이고르 박사의 입을 통해 이렇게 주문하고 있다.
정신병원에 수용된 사람들은
미쳤다는 이유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으며,
무엇을 가릴 필요도 없고 짊어질 책임도 없다.
하지만 병원 관계자들은 끊임없이 병원의 규범을 강요하는 한편
수용자들은 그 규범으로부터 탈출을 시도할 뿐이다.
바깥사회도 이치가 이와 마찬가지일 것이라는 각성에 이른 그녀는
이제 삶이 주어진다면 내면의 광기를 살려 자신의 삶을 살리라고 결심한다.
그녀의 옆에는 늘 에뒤아르가 서성거린다.
브라질 대사 아들인 그는 화가가 되어 천국의 환영을 그려보리라고 마음먹었지만
부모로부터 거절당하고 말았으며,
가벼운 자전거사고로 희귀한 정신분열증에 걸려 수용된 사내다.
둘은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뒤
서로의 처지를 들려주며 이해하고 사랑하게 되지만
베로니카의 생명은 얼마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녀는 에뒤아르에게 긴 입맞춤을 한 뒤에 마지막 당부를 한다.
“ 내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봐,
꼭 내 모습을 그려줘야 해.
내 마지막 부탁이야.
그러면 난 너에게 이렇게 말해줄 거야.
내 삶에 의미를 줘서 고맙다고.
난 내가 겪은 모든 것을 겪기 위해 자살을 시도하고
심장을 망쳐놓고 널 만나고 이 성에 오르기 위해,
내 얼굴을 네 영혼 속에 영원히 새기게 하기 위해 이 세상에 온 거야.
너로 하여금 너 자신의 길을 되찾게 하는 것,
그게 내가 이 세상에 온 유일한 이유야.
내 삶이 아무 소용도 없었다고 느끼게 만들지 마.”
그러나 에뒤아르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런 그림은 그릴 자신이 없다고 말한다.
그녀는 에뒤아르의 품에서 서서히 눈을 감는다.
그리고 자신이 믿지 않는 하느님에게 자신을 이대로 데려가 달라고 빈다.
결국 베로니카는 꿈 없는 깊은 잠에 들고
소설은 끝을 맺는다.
우주의 본질은 생명일까?, 죽음일까?
거대한 우주 안에 생명체를 포함한 물질계는 불과 4%에 지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우주의 본질은 죽음이요 고요다.
그 우주의 4%만이 물질계요 그중 극히 일부가 생명체일 것이요
또 그중에서도 극히 일부가 영장류인 인간이니
우리의 삶은 얼마나 귀하고도 존귀한 것인가!
바로 부싯돌에서 한번 번쩍하고 사라져 버리는 일촌광음이다.
그러나 그것이 죽음이요 고요라 할 우주를 흔들어대는
선택받은 축복이니 한껏 광기를 부려 멋을 내야 할 게 아니던가.
인간의 삶은 고요한 우주에 한 가닥 광기일 수도 있을 것이다.
있던 것이 그대로 있음은 죽음과 다를 바 없다.
아무런 변화가 없다는 건 바로 죽음이다.
순간에 주어지는 삶을 삶답게 살기 위해서는 광기를 부려야 한다.
하지만 규범을 떠나서는 살 수 없는 게 인간의 운명이기도 하다.
베로니카의 고민은 거기에 있는 게 아닐까?
이런 상황은 인간들의 공통된 고민이기도 할 게다.
예수나 다윈이나 마르크스가 꿈꿨다는 것은 바로 자신의 광기를 발휘해
인간의 이상향을 실현해 보기 위한 것이었다 한다면
작가는 이를 에뒤아르의 입을 통해 천국의 환영이라 불렀다.
광기를 부리지 못하고 죽어간 베로니카는
마지막 유언으로 에뒤아르의 가슴에 그것을 주문해 보지만
앞으로 더 살아야 할 에뒤아르는
그런 천국의 환영을 그릴 자신이 없다 할 뿐이었다.
결국 인간은 현실과 이상, 규범과 자유, 정상과 광기의 갈등구조 속에
고뇌하고 고뇌해야 하는 신세이니
이 밤엔 내 안에 가만히 숨어 꿈틀대는 광기가 무엇인지
살그머니 꺼내봐야겠다. (2006. 2. 15.)
위 글은 몇 해 전 써 어느 카페에 올렸던 단상이다.
초기엔 많은 호기심과 설렘으로 하루하루 글을 올렸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반가웠고 게시되는 글들이 반가웠으며
나에게 반응하는 모습들도 모두 반가웠다.
그러던 중 영원히 변치 않을 듯한 사람과도 간간 마주치곤 했지만
마침내 아무런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마는 것이었다.
때론 따로 불러내어 차 한 잔의 대화를 나누면서
교감이 계속 이어지길 바라기도 했지만
그건 나만의 짝사랑일 뿐이었던 것이다.
이젠 호기심과 설렘은 반감되고,
그 대신 실버세대를 위한 노인정을 돌보듯
스스로 카페 지킴이라 자처하면서
여러 부류의 사람들과 가벼운 교감을 나눠갈 뿐이다.
카페도 베로니카와 정신병동 사람들이 그러하듯
에고(ego) 와 규범(norm) 사이에서 조화를 이뤄나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
자기표현을 위해 제한 없는 자유를 누릴 수도 없는 일이요
상대방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해
자기 취향대로 간섭할 수도 없는 일이기에 그런 것이다.
카페는 시스템이요 규범이다.
그건 많은 사람들을 위한 배려일 뿐
어느 특정그룹을 두둔하기 위한 컨트롤 기능이 없는 무정물이다.
다만 그 안에서 어울리는 이들이 규범의 테두리 안에서
하모니를 이뤄 나가는 것일 뿐이니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이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제오늘 삶의 이야기방에
외로움이라거나 고독이란 주제의 글이 올라오는가 하면
정신병동 이야기도 올라왔다.
그래서 이에 화답한다는 마음으로 베로니카의 이야기를 반추해 봤다.
* 사진은 지난 수요일 수필방 모임에서의 한 컷이다
첫댓글 베로니카가
피아니스트로 살았으면
수면제를 털어 넣지는 않았겠지요?
종교적인 관점에서 자살을
죄악시 했던 적이 있었지만
지금은 자살을 보는 시각이 달라져
질병으로 분류하기도 한답니다.
우울증은 죽음을 부르는 병이라고
하잖아요.
석촌님 글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글쎄요~~~
인간이 지향점을 향해 달려가다가
진척이 없으면 좌절하기도 하고
정상에 올라도 과연 이것인가 하고
의미 상실증에 빠진다고 하죠.
그래서 색다른 길을 가보기도 하는데
그게 인류의 등불이 될수도 있고
반대로 광인에 머무를 수도 있을겁니다.
그두꺼운소설을 이렇게 딱 두페이지로...
대단하다는말밖에는...
아이구우 부끄럽습니다...
부모님이 선물하신 우리네 삶은
그것이 비록 고통의 연속일지라도
가급적이면 좋은 방향으로 받아들이면서
열심히 살아보려 노력하는 게 좋겟다는 생각입니다.
한편 이런 생각도 합니다
간혹 작은 일에 감정이 실리고
예를들어 하나의 댓글에 일희 일비하는 나약함..
그런 일로 자살하는 경우도 보게됩니다만..
저는 그런 삶이 매력없어 보입니다.
그렇기도 하지요.
얼마 전의 어느 탈렌트의 경우도 그러한데
하긴 체면을 중시하는 인간의 속성이기도 하겠지요.
베로니카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녀가 자신만의 광기를 발견하고, 삶의 의미를 찾아가듯,
우리 모두 그녀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됩니다.
"카페는 시스템이요 규범이다.그 안에서 하모니를 이뤄 나가는
것일 뿐이다"라는 말씀, 공감이 갑니다. 선배님 격조있는 멋진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비온뒤 님의 글이나 댓글은 교과서 같습니다.ㅎ
아직 읽어보지 않았지만
시사하는 바가 많은 소설이네요.
기억해 두겠습니다.항상 건강하세요.
네에 하긴 평범하게 사는게 좋아요.
이상과 현실은 벽이죠 살아서는 절대 넘을 수없는
숨쉬며 사는 날까지 작은 이상의 날개하나 키워 가는 일도 살아가는 힘이 되려나 훨훨 날아 세상 밖으로 나가는 꿈이나 미리 꾸어 놓을까 합니다
시스템과 사회규범에 너무 잘 적응되어 그 안에서 살고지고 웃고 울고 하다가 다 살았습니다
사실 울타리를 벗어난다는 것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겠지요.
그럼에도 마음만은 하루에도 열두 번
울타리를 넘는 것 같아요.
네 철학적. 문학적 그리고 인간의 삶에 대하여
깊이 생각 합니다
네에, 고마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