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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26일 연중 제20주간 토요일
제1독서 : 룻기 2,1-3.8-11; 4,13-17
복 음 : 마태 23,1-12
1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과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2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3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4 또 그들은 무겁고 힘겨운 짐을 묶어 다른 사람들 어깨에 올려놓고,
자기들은 그것을 나르는 일에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고 하지 않는다.
5 그들이 하는 일이란 모두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그래서 성구갑을 넓게 만들고 옷자락 술을 길게 늘인다.
6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7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
8 그러나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님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
9 또 이 세상 누구도 아버지라고 부르지 마라.
너희의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시다.
10 그리고 너희는 선생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선생님은 그리스도 한 분뿐이시다.
11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12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1970년대에 아이오와 주립대학교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미식 축구 코치 헤이든 파이는 원정팀이 사용할 라커룸을 분홍색으로 칠하게 했습니다.
‘계집애 같은 색’으로 적들의 남성적 저돌성을 악화시키겠다는 작전이었습니다.
이 작전은 성공했을까요? 대성공이었습니다.
그 뒤 아이오와 주립대학의 키닉 스타디움은 원정팀의 무덤으로 악명을 높였습니다.
이렇게 색깔 하나에도 영향을 받는 연약한 인간입니다.
이 점만 봐도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를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스스로 대단한 척합니다.
색깔 하나만으로도 승패가 결정될 정도로 나약한데도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내가 하는 그 모든 것은 결국 무엇이든 다 할 수 있는 전지전능하신 하느님께서 하신 것입니다.
겸손을 강조하신 주님의 말씀을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겸손을 통해서만 하느님 존재에 대한 큰 믿음을 갖출 수 있으며,
자신을 낮춤으로 인해서만 나의 이웃과 함께할 가능성을 만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없이 이 세상을 살기에는 너무 나약하고 부족합니다.
그래서 잘난 채 해봐야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철저하게 하느님을 찾아야 하고, 철저하게 하느님과 함께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없이도 충분히 잘 살 수 있다고 착각합니다.
오히려 하느님을 팔아서 자기를 더 높이려고만 합니다.
이런 이가 바로 예수님께서 그토록 위선자라고 꾸짖었던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이었습니다.
그들의 말은 하느님에 관한 것이 분명합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그들이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키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말라고 하지요. 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진정으로 하느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말만 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께서도 말씀만 하시고 아무런 행동을 보여주시지 않은 것이 아닌, 직접 행동으로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께서 하신 그 모든 일은 우리에게 본보기를 보여주기 위함이라고 하셨지요.
우리가 보고 따라 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철저하게 실천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들에게만 유리하게 율법을 지키면서 자기를 높이려고만 했습니다.
이로써 다른 사람들을 더 힘들게 하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실천하고 있을까요?
인간의 나약하고 부족함을 기억하면서 어떻게든 주님을 따르는 데 집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록 부족하고 나약하지만, 주님의 뜻을 실천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통해
주님과 더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만큼 영원한 생명을 얻을 가능성도 커지는 것입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미국에서 5년간 교포사목을 마치고
한국을 귀국하는 신부님의 송별회식이 있었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을 함께 보냈기에 정이 많이 들었습니다.
함께 캠핑 가고, 자전거 타고, 여행을 다녔습니다.
이렇게 한분 한분 귀국하는 신부님들을 보내고 보니
이제 저의 차례도 멀지 않았습니다.
송별의 자리에 빠지지 않는 것이 있으니 ‘술’입니다.
며칠 전에 술에 관련된 단어를 읽었습니다.
‘수작(酬酌)과 짐작(斟酌)’입니다.
한국의 음주문화에서는 상대방에게 술잔을 권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님이 술을 마신 후에 술을 권하는 것을 수작(酬酌)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수작이라는 말이 부정적인 의미로 쓰일 때가 있습니다.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는 것이 아니라
흑심을 품고 상대방에게 접근하는 것을 수작 부린다고 합니다.
더 부정적인 말로 표현할 때는 그 앞에 ‘개’라는 단어가 붙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나 율법학자들이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이것저것 질문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럴 때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제가 성무에는 관심이 없고 취미활동에만 전념하면 이 또한 ‘수작’ 부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생명의 물을 말씀하시는 것은 진정어린 수작이라고 하겠습니다.
예전에는 술잔이 투명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상대방의 술잔이 비었는지 살펴보고 따라주는 것을 ‘짐작(斟酌)’이라고 합니다.
저도 술자리에서는 ‘짐작’을 잘하는 편입니다.
상대방의 술잔이 비워지면 바로 채워주곤 합니다.
성격이 급한 것도 제가 짐작을 잘하는데 일조하고 있습니다.
짐작은 상대방에 대한 배려이고 관심의 표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짐작의 달인이십니다.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실 때도 미리 방을 예약하셨습니다.
많은 사람이 식사를 못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축성하신 후에 제자들에게 나눠주라고 하셨습니다.
오천 명이 먹고도 12 광주리나 남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정하신 ‘성체성사’는 예수님의 짐작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빵을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먹어라. 이는 너희를 위하여 내어줄 내 몸이다.”
포도주를 주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모두 이것을 받아 마셔라.
이는 새롭고 영원한 계약을 맺는 내 피의 잔이니
죄를 사하여 주려고 너희와 많은 이를 위하여 흘릴 피다.
너희는 나를 기억하여 이를 행하여라.”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짐작’ 못한 적이 많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피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데 제자들은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수난을 예고하시는데
제자들은 영광의 날이 오면 ‘높은 자리’를 달라고 하였습니다.
짐작도 못한 제자들은 예수님을 배반하였고,
짐작도 못한 대사제와 빌라도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하였습니다.
저 자신 술자리에서 짐작은 잘하지만,
이웃에 대한 배려와 관심에는 짐작도 못 할 때가 많았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롯과 보아즈는 따뜻한 마음으로 수작하였고, 배려와 관심으로 짐작하였습니다.
롯은 홀로된 시어머니를 정성껏 모셨습니다.
보아즈는 그런 롯이 밭에서 곡식을 얻을 수 있도록 짐작하였습니다.
수작과 짐작이 만나서 롯과 보아즈는 결혼하였고,
이 가정을 통해서 다윗이 태어났고, 다윗의 가문에서 예수님께서 탄생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진정한 수작을 하지 못하고
수작을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짐작하지 못하고 허세를 부리는 바리사이를 비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반영억 라파엘 신부
어떤 사람이 ‘아마도 죽은 후에 신부님들은 입만 천당 가고,
수도자들은 귀만 가고, 일반 신자들은 발만 갈 것입니다’ 하고 우스갯소리를 하였습니다.
신분에 맞는 삶을 산다는 것이 그만큼 어렵다는 얘기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는 것이 많거나 좋은 말을 많이 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도 그 삶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아니 오히려 걸림돌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는 내로라하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삶이
표양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아셨기에 군중과 제자들에게
“그러니 그들이 너희에게 말하는 것은 다 실행하고 지켜라.
그러나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마태23,3)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실,
“예수님께 다가가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오히려 장애가 될 때가 많습니다.
스스로 실천하지 않으면서 복음을 전한다고 하기 때문입니다”(성 마더 데레사).
생각과 말한 것, 행하는 것 사이에는 일치를 이루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로마2,13).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선한 열매는 손과 발에서 맺어진다고 합니다.
행동하는 데서 결과가 나오는 것입니다.
콩을 심으면 콩을 거두고 오이를 심으면 오이를 거두는 것은 자연의 이치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거두는 것도 달라지게 마련입니다.
바리사이파 사람들, 율법학자들이 꾸중을 듣는 것은
그들의 지향과 행동이 주님의 마음과 일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삶으로 말해야 하고
우리의 삶을 통해 주님이 말씀하시도록 나를 도구로 내놓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하셨습니다.
길다란 예복을 걸치고 인사받기 좋아하고 높은 자리를 찾으며
스승이라는 소리를 듣기 원하고 속으로는 온갖 잡생각에 사로잡혀 있으면서도
겉으로는 거룩한 척하는 사람은 어느 시대나 있었고, 지금도 있습니다. 그게 바로 저입니다.
섬기는 사람이 되고(마태23,11), 자기를 낮추는 사람(마태23,12)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하면서도
정작 대접받는 것에 익숙해져 있으니 큰일입니다.
“백성이 떼 지어 모여들듯 너에게 와서, 나의 백성으로 네 앞에 앉아 너의 말을 듣는다.
그러나 그 말을 실천하지는 않는다.
그들의 입에는 열정이 차서 그럴듯하게 행동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제 이익만 좇아간다”(에제33,31).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 오시면
“그분께서 어둠 속에 숨겨진 것을 밝히시고 마음속 생각을 드러내실 것입니다.
그때에 저마다 하느님께 칭찬을 받을 것입니다”(1고린4,5).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정성껏 하느님 마음으로 행해야 하겠습니다.
실천이 해답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사랑으로 합시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날 우리는 참된 스승이 없다고 한탄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물어야 합니다.
진정 나는 스승을 찾고 있는가?
이제민 신부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스승이 없어서 우리 시대가 이 모양으로 혼탁한 것이 아닐 것입니다.
사방천지에서 만나는 우리 삶의 동반자들을 스승으로 알아 모시지 못하고,
그들의 제자가 되어 그들에게 머리를 굽히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P. 이제민)
그러니 스승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스승이 없어서가 아니라,
스승을 곁에 두고도 눈이 먼 까닭이요,
제자가 되어 머리를 숙이고자 하는 마음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은 자신의 무지를 깨우쳐주는 위대한 스승을 찾으면서도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기보다 유식을 인정해주기를 바라기 때문일 것입니다.
무식이 드러나면 감사하기보다 오히려 상처받으니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참된 스승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오히려 고개를 쳐들어 먼 데서 스승을 찾고 있다면,
진정 우리가 눈멀어 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누가 참된 스승인가” 하고 묻기에 앞서,
진정 나는 참된 제자이고자 하는가를 물어야 할 일입니다.
아니, 고개 숙여 배우기보다 목을 뻣뻣이 세우고 가르치기를 일삼는
‘나는 참 제자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에 ‘스승’으로 대우받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죄상을 세 가지를 고발하십니다.
첫째,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는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는다.”
곧 언행의 불일치와 남에게 짐 지움을 질타하십니다.
둘째, “그들이 하는 일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
곧 표리부동과 위선을 질타하십니다.
셋째,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 사람들이 스승이라 불러주기를 바란다.”
곧 자만과 허영을 질타하십니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이가 참된 스승인가?
첫째는 가르치되, 언행이 일치하는 자, 말씀을 성취하는 자일 것입니다.
곧 가르침으로 타인에게 짐을 지우지 아니하고
오히려 자신이 실행함으로 타인의 짐을 짊어지는 자일 것입니다.
둘째는 일하되, 표리부동과 위선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곧 자신을 드러내기보다 자신을 보낸 분을 드러내는 이요,
남에게 보이기보다 보이지 않는 하늘의 아버지께 일을 바치는 자일 것입니다.
셋째는 사람들 가운데 있으되, 자만과 허영이 없는 자일 것입니다.
곧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한 자요, 섬김을 받으려 하기보다 섬기는 자일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섬김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되는 길이요, 동시에 참된 스승이신 당신의 참 제자가 되는 길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스승, 선생, 아버지라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마태 23,10-11)
<오늘의 말·샘 기도>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마태 23,11)
주님!
머리를 숙이고 겸손할 줄을 알게 하소서.
당신을 지척에 두고도 머리 굽혀 공경하기보다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먼 데서 당신을 찾지 않게 하소서.
나의 유식을 인정해주기보다 나의 무지를 깨우쳐주기를 바라게 하소서.
무지가 드러나면 상처받기보다 감사하게 하소서.
당신을 스승으로 모시고 제 머리 위에 두게 하소서!
아멘.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예수께서는 군중과 제자들에게
“모세의 자리에 앉아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그들의 행실 때문이 아니라, 가르침을 생각하며 그들의 말을 따르라고 하신다.
그들의 가르침은 따르되 그들의 행실은 따르지 말라고 하신다.
그들은 말만 할 뿐, 사람들에게 율법이라는 짐만 지워놓고
그 짐을 가볍게 해주기 위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신다.
그들은 자격도 없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하신다.
성구갑과 옷자락 술이 바로 그들이 변변치 못한 사람들이라는 것을 드러낸다.
하느님의 말씀은 마음에 새기는 것이지 달고 다니는 것이 아니다.
옷자락 술은 율법을 잘 알고 지키는 사람이라는 것을 나타낸다.
이것은 남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에 지나지 않는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만 보이기 위해 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의 유일한 장식은 선행이다. 그들의 유일한 옷자락 술은 예수님의 은총이었다.
그들은
“잔칫집에서는 윗자리를,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사람들에게 스승이라고 불리기를 좋아한다.”(6-7절)
교회 안에도 이런 성직자들과 봉사자들이 있다.
예수께서는 이러한 것들을 들추어내어 그들을 꾸짖으셨다.
주님의 제자들은 이것들을 알 필요가 있었다.
“너희는 스승이라고 불리지 않도록 하여라.
너희의 스승은 한 분뿐이시고 너희는 모두 형제다.”(8절)
우리는 물과 영으로 새로이 태어났으며, 아들의 영을 받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난(요한 1,13 참조)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하느님께서 우리의 아버지가 되신다는 뜻이다.
“너희 가운데에서 가장 높은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12절)
자신을 낮춘다는 것은 봉사하고 사랑하기 위하여 자신의 자세를 낮추는 것이다.
끝자리는 바로 봉사하기 위한 자리이다.
사랑과 봉사를 통해 하늘나라에서는 높은 사람이 된다.
말만 하고 실천하지 않는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이 아니라,
자신을 낮추어, 끝자리를 택하여 참으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삶으로
하느님 앞에 나아가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여기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권위 있게 해석하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 것이다.
가르침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말은 실행하되 행실은 본받지 말라.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마태오복음 21장부터는 예수님의 예루살렘 활동기가 보도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께서는 즉시 성전정화(21,12-17)를 통하여
대사제들과 백성의 원로들과 예수의 이런 권한을 놓고 심하게 논쟁을 벌이셨다.(21,23-27)
이어서 두 아들의 비유, 포도원 소작인의 비유, 혼인잔치의 비유(21,28-22,14) 등의 가르침을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지도층 인사들을 단죄하기 시작하셨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와 사두가이파 사람들과의
세금논쟁(22,15-22)과 부활토론(22,23-33)을 통하여
그들의 감탄을 받아냈으며, 그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
또한 모든 율법과 예언서의 골자로서 사랑의 이중계명이 새롭게 선포되었다.(22,34-40)
예수께서는 자신이 肉으로는 다윗의 자손이지만,
靈으로는 다윗이 이름 불러 칭송했던(시편 110,1) 주님이요,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유다교의 공적 지도자들 앞에서 계시하셨다.(22,41-46)
이 계시는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는 예수님의 마지막 자기 계시이다.
이제부터 예수님은 메시아 그리스도로서 유다교의 지도자들과 최후의 격전을 벌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유다교의 지도층인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을 총체적으로 책망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청중은 갈릴래아 활동기에서와 같이 군중과 제자들이다.
예수께서는 산상설교에서 새로운 정의를 선포하셨다.
오늘은 바리사이와 율사들의 잘못된 정의를 책망하신다.
예수께서는 그들의 정의가 무조건 잘못된 것으로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존경과 비난을 동시에 표하신다.
그들이 예수의 존경을 받을 수 있는 이유는
모세의 律座에 앉아 율법을 가르치고 해석하는 막중한 권한을 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이 비난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그들의 행동이 말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들은 ‘僞善者’들이다.
아직은 아니지만 곧 예수님의 입술에 ‘위선자’라는 단어가 오르게 될 것이며,
이들에 대한 일곱 가지 불행이 선포될 것이다.(23,13-33)
‘위선자’는 원래 연극용어로서 배우들을 지칭한다.
배우들은 자신의 실존을 철저히 가면 뒤에 숨기고 각본과 배역에 따라 연기한다.
자기 자신은 그렇지 않더라도 배역이 주어지면 각본에 따라 그렇게 행동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런 행동은 관객들에게 보이기 위한 행동이 된다.
바리사이와 율사들이 바로 그런 부류에 속한다는 것이 예수님의 결론이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 않으며,
무거운 짐을 백성에게만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이마나 팔에 聖句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달고 옷단에도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니며,
잔치에서 맨 윗자리와 회당에서 제일 높은 자리를 즐겨 찾고, 거리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하며,
사람들로부터 스승이다, 지도자다 하는 말을 즐겨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마치 오늘날 교회 안에 성직자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오늘 바리사이와 율사들에 대한 예수님의 비난이
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진정한 스승과 지도자는 그리스도 당신 한 분뿐이시며,
믿는 이들은 모두 한 형제자매임을 가르치신다.
예수님만이 가르치시는 先生이며 우리는 모두 배우는 학생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우리 가운데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계속 전해야 하고
다시금 가르쳐야 하는 사도직을 수행해야 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이 명심해야 할 점은 그들 또한 스승이신 예수님 앞에 늘 학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너희 중에 으뜸가는 사람은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진다.”(11-12절)는
오늘 복음의 역설을 지워지지 않는 글씨로 마음에 써 넣어야 하는 것이다.
남을 지도하는 위치에 있거나 남 앞에 자주 서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위선자가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말이 많으면 쓸 말이 적고, 말이 많으면 행동이 따르지 못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 동료로부터 神父와 組暴의 세 가지 공통점을 듣고
겉으로는 웃었지만, 속으로는 마음이 아팠다.
세 가지 공통점인즉,
첫째는 ‘검은 옷을 주로 입고 다닌다.’는 것,
둘째는 ‘밥먹고 돈을 내지 않는다.’는 것,
셋째는 ‘아무한테나 반말한다.’는 것이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이 보나벤뚜라 수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예수님의 활동은 크게 두 가지다:
예루살렘에 진을 친 유다인 종교계 권력자들(수석사제들)과
종교계 석학들(율법학자들)과 종교계 영적 엘리트들(바리사이)과 논쟁하며
스캔들이 될 만한 사건을 저지르고 다니기.
그들과 갈등이 깊어지는 가운데 그들에 대한 예수님의 평가와 가르침이 나오는데,
오늘 복음도 그런 맥락에 위치한다.
오늘 복음에서 표적이 되는 무리는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다.
얼핏 보면 예수님은 그들의 성경 해석 권위를 인정하시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고 말이다.
모세의 자리는 유대교 회당 앞자리에 설치된 권위 있는 성경 해석자의 좌석을 뜻하기도 하고,
성경 두루마리를 놓았던 자리를 뜻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율법 해석은 존중하되,
그들의 해석에 미치지 못하는 그들의 행실은 본받지 말라는 말씀이 된다.
한편으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모세의 자리에 앉아 있다는 말씀을
비꼬는 말씀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그들은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권위를 준 적도 없지만
스스로 모세라도 되는 듯이 굴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후의 말씀들은 더더욱 신랄한 어조를 띤다.
그들은 자신들이 "율법 학자"요 "신앙의 엘리트(바리사이)"라는 데에 도취 되어
권위자인 양 가르치는 자리에 기어 올라가 앉아서 꼴사나운 모습을 보인다.
자신을 들어 높이고 다른 사람들을 눈 아래 깔아보면서,
그야말로 표리부동하고 자기도취에 빠진 인간들인 것이다.
그러면 3절도 함께 비꼬는 말씀으로 읽을 수 있다.
3절의 핵심은 "그들의 행실은 따라 하지 마라,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는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예수님 말씀의 방점은 바로 이 "그들의 행실"에 찍혀 있다.
그다음에 나열될 그들의 행실 말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행실을 참 자세히도 보셨다. 조목조목 예를 드신다.
그런데 웃긴 건, 모세의 자리에 앉았음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는 그들의 행동은
온통 자신을 본새 있게 꾸미거나 남보다 높아 보이기 위한 행위가 대부분이다.
유치하기가 그지없다.
그들이 스스로를 모세라도 되는 것처럼 눈에 보이는 도구와 의식을 사용해 권위를 드높인다면,
그에 맞선 예수님은 아무도 스승, 아버지, 선생이라고 불려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겉으로 드러난 위엄있는 모습을 통해 인정받으려는 권위는 진짜 권위가 아니며,
이런 권위적 외양이나 태도, 타이틀에 자신의 믿음을 의존하는 것이
신앙의 최우선 본질이 아님을 지적하시는 중이다.
조금 축소해서 말하자면, 진짜 아버지요 스승이신 하느님은
저들이 하는 저런 유치한 행동을 하지 않으셔도 그 존재로 드러나고 인정된다.
누가 어떤 권위의 철갑옷을 둘렀든, 하느님 앞에 개개인의 본질은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그분의 자녀일 뿐이다.
자신의 종교에, 자신의 신앙에, 자신이 믿는 하느님에 투신한 이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종교 공동체의 질서 안에서 자신이 차지한 자리의 권위, 평가, 위신에 따라
자신의 가치를 저울질하며 자신을 그것과 동일시 한다면,
예수님의 이 비꼬는 말씀의 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 자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나는 조금 자주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다.
그것도 하느님, 신앙, 성경, 영성, 이런 주제로 말을 해야 한다.
어떤 때는 내 앞에서 내 말을 듣고 있는 이들에게 속으로 말한다.
제가 말하는 건 신앙생활에 조금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잘 들으세요.
저는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말하겠습니다.
하지만 저에게서 삶의 모범을 찾지는 마세요, 라고.
"앞에 서서 말을 잘한다는 것"이 내 실체의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말하는 내용이 나의 전부를 드러내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일상의 나는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건강적으로 모범이나 귀감이 되기엔 불충분하다.
내가 하는 일과 내 실상의 괴리가 때로 부담이 된다.
내 말과 내 삶 사이의 간격이 지구와 안드로메다 사이의 거리쯤 되는 건 아닐까?
지구와 달쯤의 거리만 되어도 좋으련만.
그런데 이런 걱정 자체가 내가 벌써 남에게 보여지는 무엇엔가 연연한다는 반증 아닐까?
그럼 이미 나는 나를 높여 놓고 걱정하고 있네? 복잡해진다.
내 주위의 어느 누구도 아버지나 스승이 아닌 그만큼,
나 자신도 그 누구의 아버지나 스승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이미 확실하게 못을 땅땅 쳐놓으셨네. 갑자기 안심이 된다.
너나 나나 우리의 아버지요 스승은 한 분이시고
우리는 모두 그분의 똑같은 자녀들이라는 말씀은 마음을 참 편하게 하는구나.
그냥 하느님 앞에 모든 권위와 평가와 비교를 내려놓은 다음 얻어지는
활기차고 긍정적인 도찐개찐 개념이 아닐 수 없다.
하느님 앞에 모두가 소중한 도긴개긴 자녀들.
[출처] 마태 23,1-12 연중 제20주간 토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