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가온문학, 2025년도 봄호 -
- 김우현의 시가 있는 명상여행
분진 털어내기
김우현
문득 잠에서 깨어난다. 눈꺼풀에 경련이 인다. 노쇠한 불투명의 투명막을 파고드는, 창을 투사하는 저 지루한 햇살. 하루의 시작을 알리기에는 늦은 시각이다. 그녀는 그새 또 잠이 들었나보다. 미명으로의 생을 향한 단절음 혹은 단말마, 벌써 몇 번을 깨었다 잠들었다 하였나. 검버섯 엉덩이가 욱신거린다. 구새 먹은 푸른 욕창이 백결의 시트를 적신다. 커튼을 내린다. 어디선가 불어온 바다내음이 사위에 파다하다. 한차례 뒤꼍을 후벼 판 강렬한 소나무 진이 코끝을 자극한다. 일어서야 한다. 질곡의 항아리에서 벗어나야 한다. 어떠한 불균형의 파장도 잠재워야 한다. 무색무취의 '고즈넉이'에 몸을 맡겨야 한다. 가늠키 어려운 그녀의 촉촉한 눈가에 숱하게 떨어져내리는 아슴한 별들 -.
" 하얀 신작로가 끝나는 지대/ 요양병원에는 병원이 늙고 있다/ 사람이 늙고 있다/ 늙어서 아파하고 있다/ 흰 담벼락과 흰 복도를 지나면/ 흰 시트가 흰 노인과/ 하는 둥 마는 둥 공기놀이를 하고/ 흰 창틀 사이에 흰 하늘이 끼어서/ 흰 바닥에 흰 피를 쏟고 있다/ 그러면 흰 사람들이 모두 달려들어/ 흰 맛 피를 빨며 서로는 희게 웃는다/ 흰 이가 빠진 자리에 하얀 슬픈 것들이/ 흰 우물을 만들고/ 이내 천치 웃음은 흰 눈물이 된다/ 흰 매트에 흰 끈이 묶이는/ 흰 안개 쪼개지는 하얀 꿈을 꾼다.//( 백색지대, 전문).
그녀는 고향이 카시오페이아라 했다. 멀리서 온 현해한 여자. 백색 분같은, 창백하여 차라리 청려한. 아닌 게 아니라 한때의 그녀는 상당한 미인이었을 거라는 추측이 가능했다. 그녀는 고향이 안드로메다라 했다. 그러고보면 카시오페이아의 피붙이일 가능성도 부인키는 어렵다는, 음울한 그녀의 갈라진 목주름이 암묵의 표식처럼 인식되곤 했다. 일련의 현상이 불러온 이 불가분의 가설은, 명징하게도 그녀의 고향은 참으로 멀리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뒷받침하는듯 했다.
한바탕 흐드러지게 놀다 가는 음풍농월의 세월이라면, 단 한 줄기 섬광처럼 타오르다 사그라지는 명멸하는 찬가라면 차라리 어땠을까 하는 극단의 생각도 해보는 것이다. 한낮의 단조로운 자오선을 머릿속에 그리며 명경으로의 몸씻기에 작은 전율을 느끼는 것이다.
푸른 섬광 번뜩이는 곳에/ 항상 내가 있다/ 목 마르게 질주해 다다른 곳/ 언제나 섬광이 먼저 와있다/ 푸른 섬광을 사랑한 적이 있다/ 그 사랑은 과연 나를 위한 사랑물인가/ 내가 나를 사랑하는/ 제어할 수 없는 무수한 알갱이들의 반란/ 내 안의 저 빛나는 파수꾼들/ 아, 가엾은 섬광!
어둠이 깔리면 나타나는 북극광을 나는/ 언제까지 보아야 하나/ 푸르게 지친 허기로운 사람은/ 동토의 먼 툰드라를 찾지 않는다/ 툰드라의 이끼를 키운 건/ 오로라가 아니며 그대 또한 아니라는,/ 이끼 스스로의 허기로움이 배태해/ 스스로를 키웠다는,/ 그의 배를 가르면 정녕 빛으로 가득하다/ 누구도 품지 않은 단조의 리듬!/ 음습한 음영의 영가(靈駕)!
그러므로 파랑새는 한 곳에 머물지도/ 그렇다고 영원히 떠나지도 않는다/ 섬광이 그래왔던 것처럼/ 북극광을 밴 지의류인 것처럼/ 그저 단구의 몸을 이끌고 떠나가는/ 습지대 암각화의 그저 경계를 맴도는/ 바람같은 고요, 슬픈 외마디/ 그래 내 뭐랬나, 하는 중얼거림/ 아, 가엾은 인연!/ 가야하는, 아주 먼 길.
- 길
한낮의 태양에 몸을 맡긴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싸늘한 보시(布施)와의 불구한 연애와 다름없는 일이다. 거역할 수 없는 순환진리 앞에, 창 너머 스쳐지나간 숱한 생령들을 맞는다는 것은 참으로 감개가 무량한 일이며 지울 수 없는 과거에로의 단절된 향수에 대한 집착 또는 애착인 것이다.
가릉거리는 숨소리가 바닥에 깔린다. 끝모를 심해와도 같은 타일 바닥으로 한 생이 부려지고 있다. 풀씨 한 톨 자라지 못할, 냉혈한 천착만이 투명하게 반사되는 아득한 공간회로! 공황(恐慌)의 폐쇄회로! 그러나 켜켜히 다지고 곰삭힌 생의 사각지대는 오히려 청명한 날의 메아리의 반향처럼 은은하게 내려앉는 것이다.
나무는,
아래를 내려다본다
하염없이 떨어져내린 노란 은행잎
간밤의 무서리는 사라지고
거기에 노랗게 질린 잘린 숨들
낙엽은 누운채로 스러진다
더 이상 비바람과 다투지 않는다
그리운 것이 어디 한둘이랴 만
숨이 죽은 초동의 낮과 밤
나무는,
조용히 계기(季記)를 쓴다
스스로를 만들기 위한 마디의 아픈
성갈한 생령들이 지은
송가를 기억한다
긴 겨울을 쓴다.
- 생살
사랑하는 것들아. 무심히 흘러간 세월아. 가는 길이 도화의 길이 아니어든, 창공에 뿌려지는 햇살이 아니어든, 미리내 멀고 먼 천궁이 아니어든 내 가리라, 왔던 길 되짚으며 쉬엄쉬엄 가리라.
그녀의 보조개 근처가 가늘게 흔들린다. 앙상한 쇄골 파인 곳으로 어둠이 내린다. 아픔도 슬픔도 사라진다. 이제는 인연의 근원을 생각하지 않는다. 미치도록 사랑했던 영원히 탈고 안 될 미련마저 오롯이 남겨둔 채 그녀는, 단구의 자신의 육신 이곳저곳을 더듬어 본다. 절정으로 치닫는, 순간의 달군 쇳물인 양 한 번 용써본 것이다. 끝내 부유하는 자유. 참으로 소중한 날들이었지, 참으로 감사한 날들이었지, 하는 소회의 한마디는 난망하게도 끝내 잇지 못한다.
조붓한 길을 따라 동산 아래에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람들이 영원에 갇힌 듯 영원을 살고 있었다.
구름은 들녘을 베끼며/ 찰진 낙엽을 쓸며/ 창연히 지나는 것이다/ 벽공이라, 낮은 전율/ 윤슬 그리울 땐 바다로 가자/ 너머 그리울 땐 산으로 가자/ 배반이 낳은 생령들의/ 하오가 그리운,/ 흔들린다/ 바다에 산이 눕는다/ 짠물 흥건한/ 잔영의, 잔상의, 실존의/ 그날의 낯선 파도,/ 짜디 짠 무리와의 해후/ 비속한 것들을 가까이서 만지며/ 한없이 경배하며/ 주술에 몸부림치며/ 부서지는 물보라/ 어색하게 채색된/ 고색의 청라(靑羅)는 멀리에/ 어쩌면 더 낮은 곳으로/ 한 잔의 술이 내려앉는/ 맥, 풀풀 흩어지는 것이다/ 그대는 가난한 영혼/ 그대의 쓸쓸한 거리를 지나는 것이다/ 그대는 그대를 지나치는 것이다/ 그림자, 바다로 간다/ 손끝과 손끝이 따스한/ 차갑다, 그로테스크/ 무엇이 그리운지 알 수 없는/ 공허는 바다/ 그의 익명을 끌어안고/ 낯익은 조우처럼 부등켜안는 것이다/ 모두가 떠나가버린/ 공허는 전율/ 그대 허무한 것이거나 아니거나/ 그곳이 현상이거나 적적한 허상이거나/ 안락한 자리는 아니다, 파도/ 너울로 울렁이는 파도/ 그대는 정녕 평온주의자/ 파리한 사금파리/ 그대를 향한 잔, 받아 마셔라/ 목에 차오르는 텅 빈 포만감에 감읍하며/ 그대는 기도하라/ 조아려 시원을 맞으라/ 그저 공의(公義)에 의탁하라/ 주체할 수 없는 그 무엇에/ 경련하듯/ 그대는 묻는 것이냐.
- 분진 털어내기
*글, 사진: 김우현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