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 부동지不動地와 원바라밀(3)>
-보살들이 서원을 발하는 순간 우리는 성불하게 되어 있다: 원願바라밀
관세음보살이나 아미타불을 한 번만 부르면 그 공덕으로 왕생극락한다고 합니다. 또한 세상의 어려운 일에 처해 있을지라도 관세음보살을 부르면 부모가 자식 문제를 해결해 주듯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고 합니다. 이러한 불가사의한 일이 가능한 이유는 바로 보살들의 원바라밀 때문입니다. 보살은 자비심이 있어서 가능한 일 일거라고 단순하게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렇다고는 해도 보살의 원바라밀이라는 것이 생사를 해탈하는 깨달음을 주기 위해서이지, 자식의 학업 성취를 바라는 기도, 남편의 승진을 위한 기도를 들어주는 것이 전부는 아닙니다. 중생들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에 이르게 하는 것이 보살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이 법의 비를 내리는데 누구는 더 많이, 누구는 덜 주는 게 아닙니다. 마치 대지에 비가 내리듯 누구에게나 골고루 내려준다는 것입니다. 이렇듯 모든 중생들에게 무차별의 법비를 내려 주듯이 보살은 마치 뱃사공이 이 언덕에 머물지도 않고 저 언덕에 머물지도 않고 가운데에 머물지도 않으면서 이 언덕의 중생을 건네어 저 언덕에 이르도록 하기 위해 차안과 피안을 왕래하기를 쉬지 않고 합니다.
고해의 바다에서 쉬지 않고 뱃사공 노릇을 하면서 모든 중생들을 가리지 않고 한 중생도 빠트리지 않고 전부 태워서 깨달음의 세계로 실어 나릅니다. 그러니까 중생들은 줄서서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놓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진실이 하나 있어요. 우리는 그저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다. 왜 가만히 있어도 되는가 하면, 그건 보살들의 원이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중생에게는 불성佛性이 있어서, 나도 언젠가는 부처가 될 수있다고 했습니다. 공부를 하나도 안해도 다 부처가 됩니다. 아이가 자라서 어른이 되듯이 시간이 해결해 줍니다. 그건 내가 잘나서가 아닙니다. 보살이 원을 발하는 순간 우리 중생들은 이미 성불하도록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불교는 정말로 훌륭한 종교입니다. 저는 생각만 해도 덩실덩실 춤을 추고 싶습니다. 부처님이 탄생한 이상, 보살이 있는 이상 가만히 있어도 우리를 반야선에 태워다 주니 얼마나 즐겁고 기쁜 일입니까. 우리는 불보살님들 덕분에 성불하기 싫어도 성불하게 되어 있습니다. 다만 무량한 시간이 걸릴 뿐이지요.
그렇다면 우리가 좀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계산대에서 줄서서 기다리는데, 그 중에 한 직원이 식사를 하고 와선 “여기로 오세요”라고 했을 때 맨 뒤에 있던 사람이 재빨리 뛰어가서 바로 계산을 할 때가 있잖아요. 그렇듯이 내가 좀 더 열심히 공부를 하면 좀 더 빨리 반야선에 탈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만약 극락도 없고 성불한 사람도 없다면 모르겠지만 분명히 성불한 사람이 있고, 보살이 있잖아요. 그래서 저는 평소에 강조해서 말합니다. “선업 짓는다고 애쓰지 말고 악업이나 짓지 마십시오.” 여러분들도 자식한테 갖는 마음이 성공은 못해도 제발 속만 안 썩이면 좋겠다는 심정이시죠. 제가 여러분한테 갖는 마음도 그것입니다. 불교를 이익 되게 한다고 애쓰지 말고 본인 앞가림이나 잘해서 악업이나 쌓지 말자고 합니다. 중요한 건 누구나 부처가 된다는 그런 즐거움이 우리에게는 약속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자존감을 갖는데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불법佛法 만난 걸 대단히 다행스럽게 생각해야 됩니다. 보살들이 원을 세웠기 때문에 가만히 있어도 우리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는 약속이 보장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보살들이 이렇게 끊임없이 원을 발하고 있는 덕분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우리는 다 구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앞의 6바라밀하고 달리 뒤에 나머지 네 개는 철저히 이타의 바라밀이고 나중에 부처님이 발심을 하고 성불을 한 이상은 이미 나도 같이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것으로 수기를 받은 약속을 받은 것입니다. 이것이 원바라밀의 덕성입니다.
첫댓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