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이란 이런 것…3M, 한국기업에 조언
신학철 3M 수석부회장의 혁신 "아이디어 없는 게 가장 나쁜 아이디어"
10년 전 등장한 아이폰은 인간의 삶을 송두리째 바꿔놨다. 이후 애플은 명실상부한 21세기 최고의 '혁신기업'으로 통하고 있다. 애플만큼 화끈하지는 않지만 '조용한' 혁신을 통해 100년 넘게 인간의 삶을 서서히 진화시키고 있는 기업이 있다. 바로 1902년 미국 미네소타에서 탄생한 '3M'이 그 주인공이다. 풀 네임인 '미네소타 마이닝 앤드 매뉴팩쳐링 컴퍼니(Minnesota Mining and Manufacturing Company)'에서 대문자 M이 세번 들어가 3M으로 불리는 이 기업은 우리에겐 테이프, 수세미, 포스트잇으로 친숙하다. 그런데 사실 3M은 공기처럼 우리 삶 곳곳에 존재한다. 3M의 부직포는 자동차 문 속에 들어가 소음을 줄이고, 3M의 필름은 TV모니터로 들어가 색을 더욱 또렷하게 한다. 장수기업 3M이 말하는 '혁신'은 무엇일까. 매일경제는 최근 방한한 미국 미네소타 소재 3M본사의 수석부회장을 서울 여의도 한국쓰리엠에서 만나 그들이 말하는 혁신에 대해 들었다. 수석부회장과 인터뷰는 한국어로 진행됐다. 3M 역사상 최초의 한국인 수석부회장 신학철 씨(58)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혁신이 왜 기업에 중요한가"란 질문에 그는 "혁신이 없으면 기업은 존재할 이유가 없다"고 단언하며 인터뷰를 시작했다.
―혁신이 왜 중요한가.
▷기본적으로 기업은 고객을 위한 가치를 창출하는 집단이다. 가치 창출을 해야만 이익 창출이 되는 것이다. 기술뿐만이 아니고 기존에 없던 방식으로 고객들 삶의 질을 높여줄 수 있기 위해선 혁신이 필요하다. 혁신 없이는 가치 창출이 될 수 없고, 가치 창출을 못하면 기업이 존재할 수 없다. 혁신을 못한다면 기업은 도태되고 머지않아 사라질 것이다.
―3M의 혁신 비결은 무엇인가.
▷우리가 혁신적인 기술을 가진 회사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 3M은 마케팅 회사다. 기술을 상용화할 수 있어야 한다. 3M의 보이지 않는 이면 중 하나는 임직원 모두가 사람이 사는 모습, 인류가 살아가는 방식 등을 세계 도처에서 지속적으로 관찰한다는 것이다. 이런 문제를 고민하는 시간이 과학기술에 쏟는 시간보다 많다. 그 속에서 인류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식과 수단을 만들어낸다다. 이런 분위기는 수십 년간 프로세스를 통해 형성됐다.
―그 프로세스가 뭔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아이디어와 창의력을 중시하는 기업 문화다. 3M은 파일럿 시스템이 잘 구축돼 있다. 어떤 아이디어가 있으면 소규모 예산을 줘서 시험을 해보는 것이다. 시험을 하면 여러 가지 데이터가 나온다. 생각지 못했던 부분, 미처 몰랐던 부분이 많이 나타난다.
―기술력 측면에선 특출난 게 없다는 것인가.
▷아니다. 누구도 따라오기 어려운 강점이 있다. 혁신을 하려면 기본기술이 있어야 한다. 3M에선 테크놀로지 플랫폼이라고 부르는데, 하나의 기본 기술만 수십 년간 연구하는 팀이 있다. 예를 들어 세라믹을 연구하는 팀은 상용화엔 신경을 쓰지 않고 세라믹 원천 기술만 끊임없이 최첨단으로 개발한다. 그러다보니 세라믹 기술력만큼은 다른 기업보다 5~10년 앞서가기 때문에 시대를 선도할 수 있다. 부직포만 연구하는 팀도 있다. 3M에는 이렇게 한 가지 기술만 연구하는 팀이 46개에 이른다. 이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기술혁신'이라 부를 수 있다.
―상용화를 강조하지 않았나.
▷원천기술만 있다고 혁신기업이 될 순 없다. 원천기술을 갖고 자동차회사와 항공사 등 고객을 찾아가서 어떻게 접목시킬지 머리를 맞댄다. 이를 '고객혁신'이라 부르자. 우리는 보잉사와 10년 전부터 계속 일을 해오고 있다. 함께 비행기 성능을 높일 수 있는 솔루션을 고민하고 해결책을 내놓고 있다. 3M은 소음문제도 20~30년 전부터 연구하고 있었는데 이 기술력을 갖고 자동차회사를 찾아가 자동차 소음을 줄이는 솔루션을 고민한다. 고객혁신과 기술혁신이 동시에 이뤄져야 진정한 혁신기업이 될 수 있다.
―한국기업 중 혁신기업이 있나.
▷한국기업이 경이적인 일들을 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지속가능성 측면에선 취약점이 있지 않나 싶다. 세계 시장에서 고객들의 니즈를 어느 정도 읽어낼 수 있고, 어느 정도로 새로운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느냐는 아직 의문이다.
―지속 가능성이라면.
▷기술혁신과 고객혁신을 동시에 해야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지속적으로 일어날 수 있게 해야 한다. 5년 하다가 안 하고, 10년 하다가 환경이 바뀌었다고 포기해 버리면 혁신적인 회사라고 보기 어렵다. 3M은 100년 넘게 지속되면서 대외적인 상황이 안 좋을 때, 위기가 닥쳤을때도 끊임없이 혁신할 수 있는 노하우를 갖추고 있다.
―어떻게 증명할 수 있나
▷3M에는 NPVI(New Product Vitality Index)라는 개념이 있다. 지난 5년 안에 출시된 신제품이 전체 매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을 뜻한다. 3M은 지금까지 아무리 경제가 어렵고 기업이 힘들어도 그 수치가 34% 이하로 떨어진 적이 없다. 최근엔 지속적으로 올라가고 있고, 지난해엔 40%에 달했다. 올해는 41%로 예상한다.
―한국기업의 혁신성에 대해 다시 평가해달라.
▷한국의 수직화된 의사결정 시스템 속에선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없다. (한국 기업들은) 혁신이라고 하지만 아직 모방에 가깝다. 세계인들의 살아가는 방식을 바꿀 만한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뭔지, 그것을 어떻게 만들어야하는지 모른다는 것이 한국 기업의 가장 큰 약점이다. 주어진 것을 만드는 것은 그야말로 최고이지만, 세상을 좀 더 포괄적으로 보고 그 안에서 혁신을 찾아내 상용화하는 능력은 약하다고 본다.
―3M의 혁신은 무엇인가.
▷창의성은 존재하지 않는 것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3M의 대표적인 상품인 포스트잇은 사실 그 제품이 나오기 전엔 아무도 필요성을 몰랐다. 그런 것이 존재하지도 않으니까 필요성도 몰랐던 것이다. 그런 것을 찾아내는 것이 혁신이라고 본다. 고객들도 잘 모르는 니즈를 찾아내는 부분은 경쟁도 없는 것이고, 한번 시장을 만들면 경쟁자들이 따라오기 위해선 10~20년이 걸린다.
―창의성은 어떻게 키우나.
▷관찰에서 시작한다. 관찰 없이는 혁신이 불가능하다. 사람이 살아가는 방식, 고객사가 제품을 만드는 방식, 우리가 환경에 적응해가는 방식 등 모든 문제를 관찰하는 것이다.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아내는 것이고, 고객들도 모르던 니즈를 찾아내면 향후 먹거리는 크게 걱정할 것이 없다. 기존의 틀 속에서 바라본다면 할 게 없을 것이고, 다른 관점에서 보면 틈새가 보일 것이다. 알리바바도, 델컴퓨터도 모두 간단한 상상에서 시작했다.
―관찰이 얼마나 중요한가.
▷관찰하면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기회가 무궁무진해진다. 40년 전에 강남은 진흙밭이었는데 지금보면 그 곳은 당시 어마어마한 기회가 있었던 곳이었다. 40년 뒤에 사람들이 지금 서울을 보면 또다시 '엄청난 기회가 있었구나'란 말을 할 것이다. 근데 지금 우리는 보지 못한다. 기존의 시각, 훈련된 시각으로만 보기 때문이다. 먹거리를 찾는 훈련의 중점은 관찰력이다. 살아가는 방법, 대기오염, 물 부족 모두 우리에겐 기회다.
―3M은 관찰력이 좋은 사람을 뽑는 것인가.
▷물론 기본 자질이 있는 사람을 뽑는다. 그런데 뽑은 사람들이 얼마나 특별한 사람들이겠는가. 중요한 것은 혁신이 일어날 수 있는 토양을 만드는 것이다. 관찰할 수 있는 문화·환경을 기업이 제공해주는 것이다. 그 역할은 경영자가 해야 한다.
―경영자는 뭘 해야 하나.
▷무엇보다 인내심이 있어야 한다. 조직은 모든 아이디어가 밑에서 올라오면 위에서 끊도록 돼 있다. 대부분의 의사결정 방식은 개인에게 창의성을 주는 것이 아니고, 위에서 내려오는 식이다. 이것을 역으로 본다면 여러가지 아이디어는 무질서한 상태에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런 상태에서 다양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게 한 다음 룰을 정해 우선순위를 정해야 한다. 아무리 말단 사원의 아이디어라도 룰에 따른 평가에서 앞선다면 펀딩을 쉽게 받을 수 있게 해야 한다.
―한국 기업문화에선 힘들 것 같은데.
▷신입사원이 관찰을 열심히 해서 아이디어를 만들어 과장님이나 차장님에게 보고를 한다. 근데 상사에게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을 듣는다. 이런 말을 한 번만 듣는다면 그다음부터 모든 직원들은 조직의 의도를 읽는다. 나에게 주어진 일만 해야겠다고 생각한다.
―3M은 다른가.
▷3M에는 '맥나이트 정신(McKnight Management Philosophy)'이란 것이 있다. 1943년에 나온 것인데 이 원칙이 혁신기업이 되는 토대가 됐다. 매니저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죽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모두가 자기 원하는 방식대로 일하고 싶어하고 그래야만 좋은 결과가 나온다. 매니저는 큰 범위만 정해놓고 그 안에서 직원들이 자기방식대로 일할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이것도 결국 인내심이 중요하다. 만약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쳐내는 상사라면 매니저로서 자격이 없다. 3M은 직원들의 아이디어를 잘라내는 매니저는 그 사람 먼저 자르기 때문에 매니저 이상 지위에서 살아남기 어렵다.
―누가 봐도 별로인 아이디어도 있지 않는가.
▷3M엔 "아이디어가 없는 것이 나쁜 아이디어(No Idea is Bad Idea)"란 말이 있다. 어떤 아이디어든 나쁜 아이디어는 없다. 나중에 펀딩을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나쁜 아이디어는 없다. 아이디어 자체는 격려해야지 쳐내면 안 된다. 그런 문화가 5년, 10년 반복되다보면 기업 내에선 엄청난 일이 발생할 것이다.
―신 부회장은 30~40년 뒤에도 3M이 혁신기업으로 남기 위해 무엇을 하고 있나.
▷세 가지다. 우선 아이디어에 대한 지원이다. 지금도 좋은 아이디어가 사라져가고 있다고 본다. 내가 10년 전에 만든 펀딩이 있는데, 아예 일정액을 모금해놓고 좋은 아이디어가 올라오면 심사를 해서 부서 예산과 상관없이 지원하는 것이다. 두 번째는 관찰 부분이다. 인류가 갖고 있는 문제를 좀 더 깊이 연구해서 3M이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다. 환경문제, 탄소문제, 바이러스문제 등에 대해 집중 연구하고 있다. 마지막으로 내가 맡고 있는 해외법인의 성과를 키우는 것이다. 중국과 브라질 등 핵심국가에 투자를 확대하고 있는데 지금 성과가 나오기 시작했다.
―마지막으로 한국인으로서 혁신적인 글로벌 기업에서 살아남은 비결을 듣고싶다.
▷미국은 토론이 활발하다. 일례로 내가 미국에 처음 발령받았을때 한 사업부 총책임자였다. 첫 회의를 하는데 비서는 물론 말단 사원까지 들어오더라 내가 무슨 아이디어를 냈는데 잘 먹히지가 않았고, 오히려 말단 사원 아이디어 위주로 회의가 진행됐다. 한국에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이런 문화가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있다. 의사결정이 잘 안 된다는 것이다. 누구나 동등한 위치에서 토론하고 가장 좋은 아이디어를 내는 문화에 한국 특유의 결정력을 덧붙였다. 그러다보니 좋은 아이디어가 나오면 해결책을 빠르게 선택하고,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실행력도 높였다. 한국의 의사결정 문화와 미국의 토론문화를 접목시켜서 글로벌 기업에서 인정받을 수 있었다.
■ 3M의 15%룰
아이디어 개발 위해서라면 근무시간의 15% 내맘대로
3M 혁신의 뿌리는 1920년대 초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부사장이던 윌리엄 L 맥나이트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는 어디서든 얻을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맥나이트는 이후 이 회사 사장과 회장을 역임하며 3M의 철학을 만들게 된다.
맥나이트가 사장으로 있을 때인 1943년 그는 자신이 고수하던 철학을 글로 적었다. 우선 그는 경영자의 포용력과 직원의 자율성을 강조했다. 맥나이트는 "우리의 사업이 성장을 계속하게 되면 우리 종업원들이 자발성을 충분히 발휘할 수 있도록 권한을 위임하고 격려해야 할 것"이라며 "이를 위해선 상당한 포용력이 필요하다"고 했다. 그는 또 "우리가 책임과 권한을 위임한 사람들이 선의의 사람들이라면 그들은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일을 하기를 바랄 것"이라며 책임과 권한에 대해서도 방점을 찍었다.
자율성과 책임, 권한을 강조하는 문화가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어지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맥나이트는 그것을 '실수에 대한 인정'에서 답을 찾았다. 그는 "실수는 일어날 수 있다"며 "근본적으로 올바른 생각을 가진 종업원이 저지르는 실수는 장기적으로 볼 때 경영진이 권한을 내세워 종업원에게 일하는 방식을 조목조목 지시할 때 생길 실수보다는 심각한 일이 아닐 것"이라고 했다. 이어 맥나이트는 "실수를 저질렀을 때 이를 심하게 비판하는 경영진은 종업원의 자발성을 죽이는 행위"라며 "우리가 계속 성장하기 위해선 자발적인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필요하다"고 힘줘 말했다.
맥나이트가 3M CEO로 올라선 1949년에 '15% 룰'을 만들었다. '모든 직원들은 본인의 근무시간 중 15%를 아이디어 개발을 위해 사용할 수 있다'는 원칙이었다. 3M 직원들은 근무시간의 15%에 해당하는 시간을 여유롭게 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 룰은 60여 년이 훌쩍 흐른 지금까지도 3M의 고유문화로 자리잡았다.
맥나이트 원칙에서 시작된 3M의 혁신문화는 이제 보유 특허 수가 500개 이상, 개발품이 6만개 이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전 세계 72개국에 진출해 200여 개국에서 제품을 판매하고, 40개국에 제조시설이 있으며 36개국에 연구시설이 있다.
9만명에 가까운 직원들로 지난해 매출 318억달러를 기록한 3M은 연구개발비에 여전히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지난해 연구개발비 17억7000만달러 등 최근 5년간 연구개발비 누계액은 81억달러에 달한다. 현재 3M 안에는 소비자사업부, 전기 및 에너지사업부, 의료제품 사업부, 산업서비스 사업부, 안전 및 그래픽사업부 등 주요 5개 사업군이 인류의 삶을 진화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개발과 제품 상용화를 추진하고 있다.
■ He is…
서울대학교에서 기계공학과를 전공한 신학철 3M 수석부회장은 풍산금속에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1984년 한국쓰리엠에 입사해 기술영업, 소비자사업부 본부장을 거친 뒤 1995년 3M 필리핀 사장으로 부임했다. 3년 뒤엔 미국 3M 본사에서 포스트잇 플래그 비즈니스 매니저를 맡은 후, 2002년 부사장, 2006년 산업 및 운송비즈니스 부회장을 역임했다. 2011년 5월엔 3M 수석부회장으로 올라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