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해가 짙게 깔릴 무렵,
지친 몸을 이끌고 길고 가파른 계단을 힘겹게 밟는 래인은 저도 모르게 긴 한숨을 내쉬고 있다.
"휴"
그녀의 손에 내일 아침 국거리를 위한 콩나물 봉지가 들려있다.
마지막 계단을 밟고선 래인은 잔뜩 긴장했던 허리를 곧게 펴며 조금전 보다 더 깊은 한숨을 드리내쉰다.
"휴"
한숨을 돌리는 그녀의 두눈에,
어슬프게 내려앉은 달빛탓일까?
그녀의 두눈가득 들어오는 존재..
마치 그녀의 두눈을 압도한듯한 그모습,
높은 언덕 난간에 선체 아래의 무언가를 바라보고 서있는 사람,
아니.. 남자!
달빛아래 비춰서일까? 어둠속에 비취는 그 모습이 한폭의 그림같기에 래인은 저도 모르게 가슴이 쿵 내려앉는다.
아!
다시금 두눈을 힘껏 비비어 보는 래인의 두눈엔 여전히 그 존재가 그대로 흩어러지지 않은체 있다.
조금의 움직임도 없이 그렇게 굳은듯 높은 그곳에서 먼 아래를 바라보고 서 있다.
긴 목을 길게 빼고 서 있는 그 사람의 존재가 낯설지 않음을 다시한번더 마음속으로 확인하는 래인이다.
마치 그 비탈길 언덕위에서 뛰어내릴듯 위태로워 보이는 남자옆에 살며시 다가선 래인,
남자의 커다란 등뒤에 선체 조심스레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다.
"뭐하세요?"
남자 래인의 목소리에 약간은 움찔 놀라는듯 하더니 이내 움직임이 없다.
여전히 앞만을 내려다본체 래인의 존재를 모르는듯 그래도 서 있다.
훤칠한 키의 남자는 꽤 넓은 어깨와 곧은 등을 가지고 있었다.
무반응인 그의 커다란등을 향해 래인이 장난스레 손가락으로 '쿡' 찔러본다.
"이봐요? 아저씨! 내말 안들려요?"
래인의 목소리에도 들리지 않은듯 여전히 움직임이 없는 남자다.
래인이 그에게 더 바짝 다가서며 나직한 목소리로 다시금 말한다.
"여기 위험해요! 여기서 떨어지면 사망아니면 중상이라구요?"
"....."
"아저씨! 정말 아무말도 안들려요?"
래인의 약간은 짜증인 섞인 목소리에 아래를 내려다보던 남자
나직하지만 차분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곳에서 뛰어내리면 정말 죽을수 있을까?"
그의 목소리가 꽤 굵고 차분하기에 래인 삐죽히 입술을 내밀며 ,
"아저씨 말할줄아네?"
"정말 이곳에서 떨어지면 죽을수 있을까?"
래인 그의 가라앉은 목소리를 들으며 담담한듯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아마도 그렇겠죠, 아마도 여기서 떨어지면 보기 흉할꺼예요, 근데 여기 왜 서있어요?"
"뛰어내리고 싶어서.. 여기서 뛰어내리면 정말 죽을수 있을지 궁금해서"
어둠아래 어렴풋이 보이는 남자를 향해 한순간 한심하다는 눈빛의 래인
"아저씨 죽고 싶어요?"
"그래"
"이왕 죽을려면 멋지게 죽어요, 여기서 떨어지면 끔찍할정도로 보기 흉할꺼니까요..
수면제를 먹고 깨끗히 죽거나 목을.."
래인의 목소리에 옆에선 남자 '피식' 씁쓸한 미소를 짓는다.
그런 그를 바라보며 다시금 말을 잇는 래인이다.
"아저씨 죽고 싶다면 그 죽을 각오로 살아요,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고 우리엄마가 그랬어요
그래서 전 그런 생각을 내 인생의 교훈으로 삼고 살아요, 하루를 살아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지금 이곳이 낙원일지도 모른다고 제 스스로를 위로하면 조금 슬픈일도 아픈일도 덜 속상하거든요"
사빈은 자신을 얼굴을 바라보며 당당히 말하는 어린여자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씁쓸한 미소가 나온다.
마치 철없고 꿈많은 자신을 닮은듯한 모습이다.
이 어린여자처럼 사빈도 마냥 행복하고 즐거웠던 시절이 있었다.
"나도 한때는 그런 생각을 하고 살았어, 그사람이 곁에 있으면 난 가난하고 배가 고파도 슬프지도,
허기지지도 않다고 생각했지 , 마냥 즐겁고 행복했으니까?"
사빈의 씁쓸한 목소리를 들으며 피식 웃던 래인이 그가 선 난간옆에 다가서며 말한다.
"아저씨! 실연당했구나?"
그제서야 자신옆에 겁도 없이 다가선 어린 여자를 향해 팽하니 돌아서는 사빈이다.
뒤돌아서자 또렷하고 야무진 어린여자의 당찬 얼굴이 더욱더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 그의 시선조차 물러날 기세없이 더 당황하지 않은 래인은 자신을 바라보는 사빈을 마주보고 서있다.
래인은 자신앞에 서 있던 존재가 혹시나 했던 사빈임을 알고 약간은 놀란듯 하다.
정말 그가 사빈이였기에, 애써 떨려오는 가슴을 다잡으려 마른침을 조심스레 삼키는 래인이다.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래인이 태연한 목소리로 말한다.
"이런곳에 왜 왔어요?"
래인의 반짝이는 눈망울을 바라보며 사빈이 피곤한듯 인상을 구기며 말한다.
"너 혹시 나 아냐?"
그의 물음에 대답대신 고개를 설레 젓는 래인
"몰라요? "
래인의 짧은 대답에 믿기지않은듯 의아한 표정의 사빈이 다시금 묻는다.
"너 정말 나 누군지 몰라?"
"몰라요"
그녀의 흔들림없는 대답에 믿기지 않는 얼굴의 그가 피식 웃으며,
"풋! 고맙다. 날 몰라봐주서.. 나 알아봤다면 난 지금이라도 여길 도망쳐야할 참이었거든,
이곳에서 도망가야된다면 나 솔직히 머리아팠거든?"
혼잣말처럼 피식 웃으며 말하는 사빈의 얼굴에 시선이 갑자기 멈추는 래인,
그의 귀에는 항상 착용하던 귀고리가 없어졌으면 쉽게 알수 있는 래인이다.
가장 소중한사람에게 받았다던 그 증표가 없다.
정말 그는 실연을 당했나보다라고 생각하는 래인이다.
문득 사빈을 바라보며 래인이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한다.
"나 아저씨가 누군지 뭐하는 사람인지 하나도 안 궁금하거든요, 이곳에서 뛰어내릴 생각을 가진
사람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한심하고 바보같은 사람이겠죠?"
야무진 목소리로 말하는 래인의 모습이 꽤 귀엽다고 느껴지는 사빈이다.
자신의 옆에 서있는 어린여자와 자신은 무슨 인연이 있어 이렇게 서 있는가를 생각하자
사빈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알수 없는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다.
'피식'웃던 사빈의 검푸른 눈동자가 래인의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가씨! 나랑 몇살 차이 나지 않는것 같은데 날더러 '아저씨'라니 듣기가 좀 거북하네?"
"풋! 그런가요? 근데 아저씨 갈곳 있어요? 행색보니 아무것도 없어보이는데, 아저씨 가출한거 맞죠?"
래인의 말에 급히 집을 나온체 그날 그대로의 옷차림인 자신의 모습을 내려다보는 사빈이다.
래인의 당차고 약간은 건방진 말투를 들으며 사빈은 고개를 끄덕여보인다.
"그래"
그의 대답에 래인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말한다.
"그럼 내가 좋은 하숙집하나 소개해줄까요? 아무나 들어갈수 없는 집인데요, 아저씬 잘생겼으니까 받아줄꺼예요?"
래인의 말에 재미있다는듯 피식 웃는 사빈
"그래?"
"그럼 저 따라올래요?"
"그래"
그녀를 따라 들어선 작은 골목들 사이에 초라한 집에 몇가구가 보인다.
마치 사빈을 화려한 궁전이라도 데려가는듯 당당하고 활기찬 래인의 모습에 사빈의 입술 사이로 비웃음이 흘러나온다.
이런 누추한 집 어디에도 사빈 자신이 쉴곳이 없어보이기에,
앞장서 씩씩하게 걷는 래인의 뒤를 따르는 사빈이 그녀의 등뒤에 소리친다.
"너 내가 이런곳에 어울릴것 같냐?"
"네?"
무슨 말이냐는듯한 래인의 어리둥절한 얼굴을 바라보며 사빈이 말한다.
"내가 누군지 정말 모르냐?"
래인이 가던 걸음을 멈춰서며 팽하니 뒤돌아서 사빈을 향해 말한다.
"꼭 제가 아저씨가 누군인지 알아야 하나요?"
"그런건 아니지만.."
약간은 당황한듯 말을 머뭇거리는 그를 바라보며 피식 나직한 미소를 짓는 래인이 말한다.
"알아요! 아저씨 영화배우 사빈이라는거!"
래인의 말에 알수없다는 표정의 사빈이 그녀를 향해 말한다.
"왜 그런데 날 모른척 했냐?"
"풋! 아저씨가 그걸 원하는것 같았으니까요, 이래뵈도 내가 눈치가 엄청 빠르거든요"
래인의 말을 들으며 아무말도 않는 사빈이 그녀의 뒤를 따라 걷는다.
그런 그를 향해 다시금 묻는 래인이다.
"아저씨 왜 도망쳤어요?"
래인의 말에 곤란한 얼굴의 사빈이 얼굴을 찌푸리며 말한다.
"모든게 싫어졌어, 사빈이란 이름도 , 날 숨도 못쉬게 조여왔으니까! 난 배우가 되고 싶었기보단
돈이 벌고 싶어서 배우가 된 사람이니까"
"그런데요?"
"얼마전에 왜 내가 돈을 벌어야하는지 그 목적을 잃어버렸어, 왜 내가 돈을 벌어야 하는지
왜 이런 허무한 꿈을 쫓아가야는지 그 이유의 존재를 잃어버렸어"
"....."
"돈이 있으면 내 어두운 과거도 모두 용서될꺼라고 생각했는데 부와 명예를 가진 지금
내게 그 꿈을 이루게 한 사람이 이제 내곁에 없어"
사빈의 슬픔 가득한 목소리를 들으며 래인이 씁쓸한듯 피식 웃는다.
"아저씨 보기보다 바보같구나?"
"왜?"
"그 목표를 잃었으면 다른 목표를 또다시 만들면 되쟎아요?"
래인의 생글거리며 웃는 모습에 아무말도 않는 그다.
아무 걱정없이 해맑은 래인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곳 달동네의 가난한 곳에 사는 사람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사빈이다.
이런 초라하고 가난한 삶에서 때묻지 않는듯 천사같은 미소를 짓는 어린여자를 바라보며
사빈은 그 어떤 말로도 자신이 지금 속한 현실의 아픔을 말할수가 없다.
자신의 실연의 아픔따윈 어린여자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자신앞에 씩씩하게 걷는 래인의 손에 들려 있는 검은봉지를 바라보며 가슴이 시려오는듯한 사빈이다.
그 봉지를 들고 있는 래인의 손이 너무나 거칠게 여자의 손이라하기엔 너무 까칠해보인다.
분명 귀하게 자란 효진의 손과는 너무나 틀린 그 손을 바라보며 눈을 돌릴수가 없는 사빈이다.
마치 한번도 본적이 없는 엄마의 손인듯한 그 기분에 씁쓸해져오는 사빈의 가슴이 한순간 울렁이는듯 답답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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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6.02.24 0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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