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www.youtube.com/watch?v=cIV1pUBzJv8
최선을 다한 누나의 슬픈 이야기
해가 갈수록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여행을 간다는 보도가 나옵니다. 양친이 모두 돌아가시면 그럴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부모님중 한 분이 노인병원에 누워 계시는데도 간병인에게 맡겨 놓고 간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사지가 뒤틀리고 굳어 있어도 의식은 뚜렷하신 분이 많습니다. 숨이 멎을 때까지 얼마나 자식들이 그리고 손자가
그리우실까요?
가난한 집안에
장녀로 태어나 제대로 배우지도 못하고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남의 집 식모로 팔려가
몇푼 되지도 않은 돈을 받고 살다가 조금 머리가 커지자
봉제공장에서 잠도 제대로 못 자면서 죽어라고 일만 하던 누님이 계셨습니다.
한창 멋을 부릴
나이에 얼굴에 바르는 화장품하나 사 쓰는 것도 아까워 안 사고
돈을 버는 대로 고향집에 보내서 동생들 뒷바라지 했습니다.
그 많은 먼지를
하얗게 머리에 뒤집어 쓰고
몸은 병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소처럼 일만 해서
동생 셋을 대학까지 보내서 제대로 키웠습니다.
이 누나는
시집가는 것도 아까워 사랑하는 남자를 눈물로 보내기도 했지만
이를 악물고 감내하며 숙명이라 생각하고
그렇게 늙어 갔습니다.
그러다 몸이
이상해서 약국에서 약으로 버티다 결국은 쓰러져 동료들이 업고 병원으로 데리고
갔는데, 위암말기라는 판정을 듣습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수술을 해서 위를 잘라내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누나는 미국에
살고 있는 큰 동생에게 전화를 합니다.
"동생아 내가 수술을 해야 하는데
3,000만원 정도 든단다"
동생이 골프를 치다말고 말합니다.
"누나, 내가 3만불이 어딨어"
누나는
"알았다, 미안하다"
힘없이 전화를 끊습니다.
둘째
동생에게 전화를 합니다.
둘째 동생은 변호사입니다.
"동생아, 수술을 해야 하는데
돈이 없네, 어떡하냐?"
둘째가 말합니다.
"누나 요즘 수입이 없어서 많이 힘드네"하고 바로 전화를 끊어버립니다.
막내 동생에게 전화를 했습니다 사정얘기를 하자
막일을 하며 힘겹게 사는 동생이 부인과 함께 단숨에 뛰어 왔습니다.
"누나, 집 보증금을 빼왔어, 이걸로 수술 합시다"
누나는 막내의 사정을 빤히 알고 있기에 그냥 두 부부를 부둥켜 안고 울기만 합니다.
수술하기 전날 밤
보호자 침대에서 잠이 든 올케를 바라보던 누나는
조심스레 옷을 갈아 입고 안개속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횡단보도에 서 있던 누나는 자동차 불빛속으로 뛰어 들었습니다.
그렇게 누나는 한많은 이승에서의 삶을 마감하고 맙니다.
꿈속에서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토닥이는 누나의 손길이 느껴져 놀라 깨어보니...
누나의 자리가 비어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빈 침대 위에 놓여진 편지를 봅니다.
몇 줄의 글이 눈에 들어옵니다.
"막내야, 올케야, 고맙다."
"죽어서도 너희들을
지켜주마...
내가 그나마 죽기 전에 보험을 들어 놓아서 이거라도 줄 수 있어서
참 다행이구나"
참으로 기구한 운명입니다.
누나가 죽자 장례식에도
참석하지 않은 다른 두 동생들은 누나의 사망보험금이
상당하다는 걸 알고
막내를 협박합니다.
"우리와 똑같이 나누지 않으면 가만있지 않겠다"
"법적인 모든 것을 동원하겠다"
두 형수들과 함께
욕을 하며 막내 부부에게 위협을 가합니다.
결국은 법정다툼으로 갔습니다.
막내는 그냥 줘버릴까도 생각합니다.
하지만 누나의 핏값을 두 형으로부터 지키고 싶었던 막내는 결국은 소송을 시작합니다.
그 소식을 들은
친구가 변론을 맡아 주기로
했습니다.
몇 개월의 소송끝에 판결을 받습니다.
판사는 떨리는 목소리로 판결문을 읽어 내려갑니다.
그리고 누나의 휴대폰에 저장된 문자를 읽어주자 두 형들은 두 말 하지 않고 밖으로 나갑니다.
삶이 그렇더군요.
친구의 우정도 마찬가지입니다.
곤궁에 처해 도움의 손길을 비칠 때
그 사람의 본심이 드러납니다.
좋은 때 잘 하는 것은
짐승이라도
잘 하는 겁니다.
자신에게 조금만 손해 간다 싶으면
외면 해버리는 게 인심입니다.
이렇게 불쌍하게
삶을 마감한
그 누님은 성자와 같은 삶을 살다가 그렇게 죽어 갔습니다!
살아 있을 때
효를 다하고
의를 다하고
예를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어려울 때 성심으로 대하는 참된 우정과
사랑을 베풀고 나눌 수 있어야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60~70년대
산업화를 이끌던 우리의 누나들, 형님들...
그리고 썩어 문드러져 가면서 밑거름이
되어주신 부모님 세대들에게
함부로 '꼰대'
라고 불러서는 안 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오늘날 극도의
이기주의로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삶의
모습을 돌아보게 하는 눈물겨운 이야기입니다.
*이 글을 읽어보니 필자도 누나 생각이 납니다.
수족 같은 보름달 누나
(필자의 6째 누나)
6살 위에 누나는 무학이었는데
엄마 같은 누나였다.
왕 눈에 상현 • 하현달 같은 입술에
보름달 같은 미모의 백인이다.
한글과 산수를 초등학교 5학년 때 필자가
가르쳤는데 누나는 미용기술을 배우면서
오직 막내인 필자를 끔찍이도 아끼고
사랑했다.
남의 집 식모살이로 푼푼이 모은 돈으로
돼지새끼를 사서 키우고
송아지도 사고 우리집의 가장의 역활을
어머니와 함께 헌신적으로 리더했다.
필자가 초등학교 6학년 때 안법중학교에
합격했는데 입학을 한달 앞두고 소한추위에
누나가 장만한 집채만한 황소가 구제역으로 쓰러졌다.
집안이 한바탕 난리가 났고 관할 담당공무원과
함께 앞산에 묻어야 했고 나는 중학교입학은
하지 못하고 가구점에 취직을 하게 되었다.
누나는 소자 누나 따라 서울미용실로 취직하게
되었고 나는 6학년을 두 번 다니는 수모를 겪었지만
안청중학교 전교수석으로 입학을 하게된다.
누나는 서울에서 내려와 날 부등켜안고
합격의 기쁨은 만끽했다.
뜨거운 눈물로 날 위로하면서
수많은 야심과 꿈과 희망 도전을 하라고
격려했다.
좋은 혼처가 있는데도 완강히 거부했다.
고등학교는 서울로 와서 누나랑 동거하면서
이 세상 끝까지 팔다리가 되어주겠다고
손가락 걸면서 굳게 약속했다.
그 동안 모은 돈 2만원을 주면서
참고서와 학용품을 사라고 했다.
항상 날 케어해주고
아기때부터 항상 업어주었다.
하나에서 열가지 모두다
챙겨주는 수족 같은 누나였다.
오늘 따라 누나는 격하게 포옹하며
사랑한다했다.
누나 왜 울어?
잠에서 깨어서 나는 얼결에 물었다.
누나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면서
아가야! 3년후면 울 아가와 함께 있을 생각에
너무 기쁘고 감격에 눈물이 난다.
따뜻한 밥도 해주고 맛있는 반찬에...
누나가 울아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지?
하면서 또다시 폭포 같은 눈물을 쏟는다.
누나는 눈물은 많으나
항상 건강하고 음식도 잘하고
얼굴이 보름달처럼 환하고 예뻐서
여기저기에서 중매가 많았다.
내가 걸림돌이 되어서 좋은 혼처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누나의 황소고집은 꺾을 수가 없었다.
모든 면에서 적극적이고 내게 올인한
엄마 같은 사랑과 관심이 돋보였다.
"나도 누나 많이 사랑해!
누나의 소원은 꼭 이루어 질 꺼야.
그리고 열씸히 공부해서 꼭 보답할께,"
굳게 사랑을 약속한 보름달처럼 넓고 환한
사랑이 누나!
그로부터 4개월후에
누나는 연탄까스중독으로 하늘 나라 화장터에서
사라졌다고 10살 위인 형님의 변명이다.
미쳐서 나는 서울시내를 방황하면서 노숙자가 되었다.
경찰서를 찾아서 누나를 살려내라고
생떼를 썼다.
어머니는 서울에서 내려와 미쳐가는 내 마음을
안위시켰고 급기야는 외가집 숙이 누나와의
첫사랑으로 집안의 혼란을 야기했다.
보름달은 초생달로 변하면서 사라졌다.
파란만장한 삶에 기구한 운명이다.
배꽃이 피면 누나 생각이 난다.
(필자의 7째 누나)
배꽃이 필 때면 누나 생각이 난다.
나보다 4살 위인 누나는 13년 전 간경화로 운명하였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했을 때 누나는 3학년이었다.
4학년 때까지 초등학교를 함께 다니었고 봄 가을 소풍을
갈 때면 담임 선생님은 누나부터 찾는다.
나는 한쪽 다리가 불편해서 빨리 걷지를 못하니 누나가 업고 가면 담임 선생님이 짐을 덜기 때문일 것이다.
누나는 하루가 멀다고 배앓이가 심했고 병을 달고 사는 삶이었다.
불행하게도 장독에 하얀 양귀비 화초들을 수확해서 환을 제조해서 장복해야 했고 그런 삶에서인지는 몰라도 성질이 난폭하고 운동 신경도 특출했으며
빠르고 힘도 좋았다.
소풍은 항상 고삼 호수다.
6학년까지 봄 가을 소풍은 모두 고삼호수로 갔다.
학교에서 2킬로미터 나직한 거리이다.
한 시간 거리인데 내가 걸으면 쉬었다 가다를 반복하면서 두 시간은 족히 걸린다.
소풍가는 날 아침이면 누나는 보이질 않는다.
동생 업고 다니는 것이 창피하고 힘에 버거웁기 때문에
소풍날이 오면 학교로 가는 것이 아니라
목적지인 고삼호수로 먼저 가 있는 것이다.
누나는 나에 대한 사랑과 배려가 냉담했다.
내가 중학교 때 누나는 인형과 나막신 만드는 공장에 다니고 있었는데 심하게 몸싸움을 하여 아픈 다리가
부러진 적도 있었다.
싸움 닭처럼 사생결단 난장판의 형세였다.
그런데 내가 아주 어렵게 서울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누나는 청량리에서 한국화장품을 다니었는데
모든 면에서 아낌없는 사랑을 주었다.
19년 전 누나는 간암 진단이 나왔다.
서울 신촌 연세대 세브란스병원에 입원을 했고
나는 술과 담배를 일절 끊고 누나를 위하여 신선한 간을
이식해 주기로 약속했다.
누나는 제2의 삶의 기대에 뜨거운 눈물을 보였다.
이곳 배꽃들은 누나의 사랑과 정성이 가득한 꽃들이다.
재혼할 때 얻은 구백여 평의 누나 밭에 새 삶의 기대에
밝고 아름다운 삶이다.
행복한 삶을 나 보란 듯이 환한 웃음을 유감없이 발산했던
누나의 욕망은 쪽빛 하늘과 같았다.
겨울이 지나 봄은 왔고 여름이 다가오는데
수없는 검진과 검사를 통하여 최종 이식이 불가함을 받았을 때 나는 허무했다.
아! 그런데 이개 무슨 조화인가?
죽어가는 누나를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나는 누나가 평소에 샘을 냈던 소중한
옥으로 만든 묵주를 누나의 앙상한 목에 걸어 주었다.
누나는 행복하다며 묵주를 입에 물고 가을이 익어갈 때
운명하였다.
2006년 9월 30일 바우덕이 축제 첫날이다.
아름다운 안성강변에서 화사하게 세계 민속축제가
열리는 날 동수원병원에서 운명하였다.
성혜원 장례예식장과 대천동 천주교를 거쳐 이곳
배꽃이 만발한 곳인 당신의 땅에 묻히셨다.
매년 배꽃이 만발할 때면 누나 생각에
산소에 꽃을 갖다 바치고 탐스러운 배꽃을 둘러본다.
생전에 누나의 미운 정 고운 정을 생각하면서
싱긋 웃음을 날린다.
누나의 생전의 모습이 눈앞에 가득하다.
이곳 배꽃들은 누나가 심고 가꾸던 배꽃들이라서
누나 얼굴 같다.
배꽃의 꽃말처럼 온화한 애정이 가득하게 넘친다.
하늘 나라에서 사랑과 행복을 전해온다.
온 세상이 배꽃으로 가득합니다.
산소에 민들레 꽃들도 아름답습니다.
산소에 딸기 꽃도 피었습니다.
누님! 천국에서 편히 잠드소서!
옮겨온 글 편집
첫댓글 여러 누나와의 사연을 읽고 두 누님생각이 나네요.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누나의 정을 듬뿍 받고 고마움을 기억하고 사랑으로 갚는 분들의 이야기가 감동적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