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16장
"자! 자! 조용히들 하시오."
만상투인루 지하 삼층 비무장. 오백여 인물들의 긴장된 시선이 단 위에 있는 인물을 향하고 있었고, 그들과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인물이 한 명 있었다.
육척이 넘어가는 장신의 거구와는 상반되게 작은 눈을 가진 촌놈하나.
만두를 입으로 가져가며 오물거리는 것과 장단을 같이 하여 두 다리를 건들거리는 폼이 결코 한두 해 해본 솜씨가 아니다.
무공으로 치자면 평생을 두고 한 가지 무공만을 고집하여 이윽고 절정의 경지에 든 무인이 자신의 무공을 펼치게 되었을 때
손과 발이 저렇게 조화롭게 움직일 수 있지 않을까 할 정도로 절묘한 장단이다. 백산이었다.
결국 자신의 두 번째 꿈을 위한 시작점에 도착해 있었다.
백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새하얀 대리석 바닥, 비무를 하다 죽어 가는 이의 피가 더욱 선명하게 보이도록 하고자 함인지 하얀 색의 대리석으로 만들어져 있다.
폭이 거의 이십여 장 정도의 원형으로 되어있고 관중석보다 일장 정도 아래쪽에 위치시켜 안전사고를 대비하는 구조로 만들어져 있었다.
지금 서 있는 곳이 자신들의 무덤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가. 검(劍), 도(刀), 창 등 각종 무기를 들고 있는 군웅들이 굳어진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여기 있는 이 사람이 앞으로 철혈투(鐵血鬪) 기간 동안 여러분들을 통솔하게 된 냉면살마(冷面殺魔)라고 불리는 종천수(宗千需)입니다."
"오! 저자가 바로 암기와 독의 제왕이라는 냉면살마 종천수?"
"기분에 따라 살인을 저지르다 강호의 공적이 되어 죽었다고 알려진 인물 아닌가!"
"역시 이곳이 만상투인루(萬象鬪人樓)야! 강호공적(江湖公敵)으로 지목되었던 사람이 버젓이 살아서 활동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야."
"그뿐만이 아니라 벌써 십육 년 전에 이곳에서 투신까지 되었다는 소문이네."
어디선가 들려오는 두 사람의 이야기를 듣던 백산이 고개를 들어 종천수의 얼굴을 자세하게 살펴보았다.
앞쪽에서 들린 말 중 십육 년이란 말이 마음에 걸렸다. 저놈이 십육 년 전에 투신(鬪神)이 되었고 그리고 일년 뒤 아버지가 살해당하셨다.
지금 자신들을 통솔하고 있는 것을 보면 종천수란 저놈은 이곳의 심복일 것이다. 너무 억지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종천수를 지그시 노려보았다.
"소문이 아니라 확실히 십육 년 전의 투신이었죠. 그것도 이 철혈투(鐵血鬪)에."
거렁뱅이 차림의 젊은이 하나가 백산을 향해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종천수를 쳐다보며 상념에 잠기느라 멈추었던 다리를 다시 흔들며 백산은 말을 걸어온 친구를 쳐다보았다.
비록 입고 있는 옷은 남루했지만 크고 검은 눈동자와 깔끔하게 정리된 반달형의 눈썹,
적당한 코와 작은 입술이 남색을 밝히는 놈들이 보면 입안 가득 침을 담고 달려들어도 될 만큼 상당히 미남 축에 속하는 얼굴이다.
"안녕하시오! 형씨. 이런 곳에서 인사 나누기는 뭐하지만 구소운(邱小雲)이요! 강호동도들이 소걸영(素乞英)으로 불러주고 있다오."
"소걸영? 쉽게 말하자면 거지새끼? 우 헤헤헤! 아니, 별호가 거지새끼가 뭐요? 거지새끼가. 얼굴도 예쁘장하게 잘생겼구먼 별호가 왜 그 모양이요?"
강호의 무림인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백산이 소걸영이란 말의 의미를 알 리가 없다. 개방 제 일화(一花), 백만 거지들의 웃음이자 행복.
구파일방에서 가장 강하다는 개방의 신진고수로 무공 또한 말할 나위가 없다. 그런 그녀의 별호를 가지고 가타부타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을….
얼굴이 붉어지는 구소운을 재미있다는 듯이 쳐다본 백산은, 그가 개방 인물 중에서 가장 깨끗하게 입고 다니고 더구나 여자라는 사실도 모른 채,
자신이 투신이 되면 비단으로 된 최고급 옷을 한 벌 해주겠노라 떠벌렸다.
"이런! 내 소개를 안 했군. 나 백산이요. 웃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별호를 가르쳐주겠소."
"약속하지요."
구소운이 결연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조직에서는 나를 다쇠불알이라 부르고 있소."
"다쇠불알?"
"아! 이것 때문이요. 내가 쓰는 무기지. 나는 이것을 뇌룡철구라고 부르는데 이 싸가지 없는 새끼들이 쇠불알이라 부른다니까요."
'취익.'
걸쭉한 침을 한바탕 뱉어낸 백산은 침이 튀어 구소운의 얼굴로 날아가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열을 내기 시작했다.
"보시오. 구형! 이게 어디 불알처럼 생겼어. 이렇게 큰 불알 보았냐고? 보았다는 놈이 한 놈만 있어도 나도 쇠불알이라고 인정한다고.
이 개 불알 같은 자식들이 이 뇌룡철구를 쇠불알이라고 하는 바람에 이곳 뇌룡현에 소문이 다 났어.
그래서 쪽팔리기도 해서 한동안 잠적했다가 다시 나타났는데, 아직도 이 다쇠불알을 기억하고 있더라니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뇌룡철구라고 불리는 것을 포기했지 뭐요."
점점 힘이 없어지는 백산의 목소리에 구소운은 웃음을 참느라 안간힘을 쓰고 있는 모습이 역력했다. 그리고 이 이상한 인물에 대한 첫 느낌은 당당한 사람이란 것이었다.
"그러니까 백형은 이곳 뇌룡현의 뒷골목 조직의 두목?"
"아 두목이기보다는 내가 일을 좀 봐주고 있지요."
다리를 건들거리며 말하는 폼이 영락없는 삼류건달의 표본이다.
킥! 킥! 하! 하! 하!
"미안하오, 백형. 백형의 별호도 저와 별반 다를 것이 없구먼요. 쇠불알이 뭐요? 쇠불알."
구소운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다쇠불알이란 별호는 그렇다 해도 어떻게 무림인도 아니고 뇌룡현에 있는 조직의 두목이 이곳에 참석할 생각을 했단 말인가.
이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긴장한 표정으로 있는 반면 자칭 뇌룡현의 조직 두목이란 이 사람은 마치 놀러나온 사람처럼 전혀 긴장감이 보이지 않는다.
"백형도 참 한심하구려. 지금 이곳에 와있는 무림인들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온 거요?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젊은 고수들은 물론이고 강호 공적이라 불리는 자들도 꽤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누구나 인정하는 진정한 고수들은 지금 이 자리에 참석도 않고 있다고 하오."
"에이, 구형도. 이곳에서 싸움은 어떤 꽁수를 써도 상관없다며. 꽁수 하면 이 백산인데.
꼭 무공이 높아야 이기는 것은 아니란 말이요. 걱정하지 마쇼. 내 여기서 우승하면 거하게 한잔 사지요."
"쿡 ! 쿡! 쿡! 미친 놈. 생사투인전(生死鬪人戰)이 언제부터 네놈 같은 쓰레기가 와서 노닥거리는 장소로 변했냐?"
두 사람의 맞은편에서 백산보다 머리통 하나 정도는 더 크게 보이는 거한 한 명이 자신들을 쳐다보면서 이죽거렸다.
개차반 성질의 표본인 백산이 참을 리가 없었다.
"야! 곰탱이 지금 그 말 나보고 하는 소리냐?"
백산의 입에서 거친 욕설이 튀어나오고 그곳에 있던 인물들이 일제히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내심으로는 둘이 한판 붙어서 지금의 이 긴장을 조금이라도 해소시켜주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았다.
"지금 이 사뇌영(思雷領) 보고 곰탱이라고 했냐. 쓰레기?"
"헛! 저자가 혈월 사뇌영? 혈월 사뇌영이닷!"
혈월 사뇌영이란 말에 근처에 있던 군웅들의 놀라며 그의 주의로부터 멀어지고, 사뇌영이라 소개한 인영이 싸늘하게 굳어진 얼굴로 살기를 쏟아내며 백산을 향해 다가왔다.
"귀까지 먹은 곰탱이인가? 이봐 곰 중에서도 말이야 미련한 곰 새끼는 가장 중요한 쓸개가 없다고 하더군. 혹시 쓸개 있나?"
새하얀 빛이 번쩍 하는 것 같더니 백산의 목에는 사뇌영의 애병인 혈월도(血月刀)가 살기를 피우며 다가와 있었다.
"다시 한번 말해보아라, 쓰레기."
혈월 사뇌영의 목소리가 점점 서늘해지고 있었다.
"그만!"
그때 종천수의 외침이 들려왔다.
"운이 좋았다, 쓰레기."
사뇌영이 도(刀)를 집어넣으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잠깐!"
백산이 돌아서는 사뇌영의 어깨를 움켜잡았다. 그리고 혈월 사뇌영이 돌아서는 순간 주먹을 날렸다.
퍽! 퍼퍽! 퍼버벅!
사뇌영은 연속적으로 백산의 주먹에 안면을 강타당하며 도(刀)를 뽑을 사이도 없이 무방비 상태로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그런 사뇌영의 아랫도리를 향해서 백산의 오른발에 있던 철구가 힘차게 날았다.
퍼-억!
"으-아-악!"
형언할 수 없는 고통에 아랫도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사뇌영은 온 바닥을 뒹굴며 고통스러운 비명을 질러댔다. 백산은 천천히 다가서서는 나지막하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놈은 말이야 미련한 곰탱이야. 쓸개도 없고, 이제부터는 불알도 없는…."
"그만! 그만하라고 했지 않나."
냉면살마 종천수가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상황은 종료된 후였다.
"생사비무(生死比武)를 제외하고는 상대방을 죽이거나 부상을 시키면 바로 추방당한다는 것을 모르나? 지금 추방당하고 싶나?"
"어! 그런 규칙이 있었단 말이요? 나는 몰랐는데. 그런 것이 있다면 말이라도 좀 해주지."
백산은 전혀 그런 사실을 몰랐다는 듯이 천연덕스럽게 종천수를 쳐다보았다. 종천수의 인상이 찌푸려졌다. 저놈의 말이 맞다.
자신은 그 규칙을 알려주기 위해서 이 자리에 왔고, 지금은 대전표도 나오지 않았으므로 저 두 놈은 상대라고 볼 수도 없다.
즉 이곳의 규칙을 어겼다고 볼 수 없다는 말이다. 지금 자신을 쳐다보며 빙글거리고 있는 저놈이 그 규칙을 알고 있었는지는 분명치 않아도 혈월 사뇌영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정지 외침에 중도에서 멈추었던 것인데 저놈은 그것을 깡그리 무시하고는 사뇌영을 박살내버렸다. 그것도 고자를 만들어 버리면서.
"좋소. 아직은 생사투인전의 규칙이 적용되지 않고 있으니 이번만큼은 그냥 넘어가도록 하겠소.
그러나 지금부터 바로 규칙을 적용하도록 할 것이니 생사비무(生死比武)를 제외한 어떠한 싸움도 하지 마시오. 그럼 만상투인루의 규칙을 알려주겠소."
첫째, 만상투인루에서는 비무장에서의 생사비무를 제외한 싸움은 일절 용납되지 않는다.
생사비무 이외의 싸움이 벌어지면 그 당사자들은 바로 추방되며 그들의 상대로 되어있던 투인(鬪人)들도 역시 추방된다.
둘째, 정해진 상금의 지급은 비무하는 상대방이 죽었을 때만 지급이 되며 계속해서 비무에 참석했을 경우에 한한다. 이때에도 진행자의 지시를 철저히 따라야 한다.
셋째, 생사투인의 활동 범위는 만상투인루와 그 부대시설로 한정한다.
"마지막으로 여러분의 대전표는 이틀 후 일층에 마련되어 있는 대전판에 게시될 거요.
그리고 그곳에는 지금 내가 이야기한 규칙의 더 자세한 사항까지 적혀있으니 읽어보기 바랍니다."
오백여 명의 군웅들을 천천히 쳐다본 냉면살마는 비무장을 빠져나갔다.
"백형, 이곳에서 쫓겨나면 어쩌려고 그런 짓을 한 거요. 하마터면 큰일 날 뻔했지 않았습니까?"
구소운이 백산의 행동에 기가 막힌 듯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았다.
"감히 나를 건들고도 무사하리라 생각해? 냉면살마인가 하는 그 자식만 없었으면 그놈은 오늘 죽었을 거요.
냉면살마에게 고맙다고 해야 될 거야. 그리고 내가 그런 규칙이 있다는 것을 몰랐다는데 지가 어쩔 거야?"
백산의 표정은 일말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이렇게 결말이 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한 행동이었다.
백산을 바라보는 구소운의 눈빛에 놀랍다는 표정이 가득했다. 지금 이 친구가 했던 행동이 미리 계산된 행동이었다면 단순하게 볼 만한 사람은 절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순간에 이러한 결과를 예측하고 행동으로 옮긴다는 것, 보통사람으로서는 보여주기 힘든 행동이다.
"구형! 구형-!"
백산이 부르는 소리에 구소운은 깜짝 놀라며 자신만의 상념에서 깨어나 백산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구형은 이런 곳에 뭐 하러 온 거요? 보아하니 돈이나 이런 것이 필요한 사람 같아 보이지는 않구먼."
하고 있는 행색으로 보아서 부자까지는 아닐지라도 얼굴에 나타난 표정이나 행동거지를 보았을 때 특별하게 이런 곳까지 와서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지는 않았다.
백산의 말에 흠칫 놀란 소걸영의 표정이 곤혹스럽게 변했다. 특별한 임무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다만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밝혀내기 위해서 참가했을 뿐이다.
거지인 자신이 도박을 하기 위해서 이곳에 들어올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결론은 생사투인으로 잠입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
"그 규칙이란 것 말이요! 누가 만들어낸 거요? 비무 중 반드시 한 사람이 죽을 수밖에 없게 만들어놓은 것 같은데. 혹시 이곳 루주란 놈 말이요. 어떤 놈인지 알고 있소?"
말하기를 꺼려하는 구소운을 보며 백산이 곧바로 다른 곳으로 화제를 돌려버렸다. 종천수에 대해서 상세히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이곳의 루주에 대해서도 알려나 싶어서 물었던 것이다.
구소운은 자신도 모른다는 듯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나도 궁금합니다. 그가 누군지, 무슨 목적을 가지고 있는지…."
자신이 밝히려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오십 년 전의 사건에 대해서도.
* * *
음습한 기운이 감돌고 있는 오십 평 정도 크기의 대전(大殿).
이곳저곳에 스며있는 눅눅한 기운과 천장에 박힌 푸른빛의 야명주는 이곳이 지하임을 알려주고 있다.
흑단목으로 만들었는지 새카만 색의 윤기가 번지르르한 탁자를 사이에 두고 두 인물이 앉아있다.
사-락! 사-락!
그중 복면을 한 인물이 조용히 두루마리를 넘기고 있었다.
천무맹(天武盟) 출신 정천무룡(正天武龍) 백무천. 천마맹(天魔盟) 출신 마겸(魔鎌). 천사맹(天邪盟) 출신 혈목괴(血木怪). 종남파(終南派) 출신 정검자(正劍子)
나후승. 점창파(點蒼派) 출신 천수마검(千手魔劍) 신기운. 녹림(綠林) 출신 인도부(忍刀斧) 전횡. 하북팽가(河北彭家) 출신 참마도(斬魔刀) 팽월.
혈의환사(血衣幻邪) 나염. 빙혼마녀(氷魂魔女) 조천영.
…….
"현재까지 파악된 바로는 위에 있는 열 명이 투신전(鬪神戰) 진출이 가장 유력해 보이는 자들입니다."
"천무맹의 정천무룡 백무천이 참가했단 말이냐?"
천무맹이란 말을 하는 검은 복면인의 눈에서 원한 서린 한광(恨光)이 줄기줄기 쏟아져 나오고 불끈 쥔 그의 주먹에서는 푸른색의 강기가 마치 악마의 이빨처럼 빛을 발하고 있었다.
'가장 유력한 맹주 후보이면서도 확실하게 인식시키겠다 이건가? 그렇게는 안 되지… 너희들은 더욱더 치고받고 싸워야 돼. 그래서 너희들이 가진 모든 힘을 소진시켜야 된다.
반드시 내가 그렇게 만들고 만다.'
복면인의 눈에서 살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갑자기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선 복면인이 걸음을 내딛었다.
이곳저곳에 박혀있는 야명주(夜明珠)의 희미한 빛이 없다면 무저(無低)의 공간이라고 밖에 할 수 없는 거대한 광장.
회색 빛 어둠이 일렁이는 지하 광장에는 형언할 수 없는 공포와 참을 수 없는 불쾌감이 아릿한 독향(毒香)과 함께 묻어 나왔다.
죽음만이 존재할 것 같은 이곳에도 살아있는 생명체가 있었다.
광장의 중앙에 있는 수십 개의 커다란 독들 사이에서 민둥머리의 인영이 독 속에서 무엇인가를 건져내어 옆에 있던 관에 집어넣고 있었다.
새카맣게 변색이 된 시체였다.
'휴-! 이제서야 모든 것이 끝났군.'
허리를 펴는 인영의 등에 있는 커다란 혹 하나, 꼽추였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에는 수백 개의 관들이 온 광장을 메우고 있었다. 한마디로 전율(戰慄)할 공포였다.
그러나 이 꼽추 노인네는 일상적인 일이라도 되는 양 사랑스런 눈빛으로 관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그때, 영원한 어둠만이 있을 것 같았던 광장 한쪽에서 약간의 빛이 새어 들어왔다.
"오셨습니까? 루주님."
꼽추노인이 뒤쪽으로 돌아서며 빛이 새어 들어오는 쪽을 향하여 고개를 숙였다. 저벅거리는 발자국소리가 고요한 정적을 깨트리고 있었다.
"수고한다, 독인마타(毒人魔駝)! 그동안의 진척사항은?"
"방금 전에 마지막 귀혼마강시(鬼魂魔彊屍)를 건져냈고 모든 준비가 완료되었습니다. 검강, 도강이 아니면 이놈들의 털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습니다. 한마디로 천하무적이죠."
광기에 번들거리는 눈빛으로 자신이 만들어놓은 수없이 많은 관들을 쳐다보는 독인마타의 얼굴은 만족스러운 표정이 서렸다.
루주라고 불리는 검은 복면인이 천천히 지하광장을 둘러보고 있다. 천여 개나 되는 관들이 그들을 중심으로 빽빽하게 놓여있었고 그 관들 속에 자신의 꿈도 같이 묻혀있다.
관 뚜껑이 열리면 자신의 꿈도 같이 비상할 것이다.
"수고했다, 독인마타! 이제는 조금 쉬도록 해라. 앞으로 이 개월 뒤에는 또다시 바빠질 테니…."
천여 구의 귀혼마강시가 들어있는 관에서 흘러나오는 죽음의 기운에 지하광장의 어둠이 더욱더 출렁거렸다.
* * *
"와아! 와! 또 터졌다. 저놈은 운도 좋군. 계속해서 오천왕이야."
지하 이층에 있는 도박장. 이곳저곳을 혼자서 어슬렁거리고 있던 백산은 무엇인가 이상한 듯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줄곧 한곳을 쳐다보았다.
아까부터 자신을 흘긋거리며 쳐다보고 있는 녀석의 얼굴이 왠지 눈에 익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보고 있었다. 그렇게 서로를 응시하던 두 사람의 입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반가운 외침이 터졌다.
"야! 너 낙양 거지새끼?"
"넌? 미친 곰 새끼?"
둘은 동시에 서로에게 달려들어 두 손을 굳게 맞잡았다.
"이게 얼마 만이냐, 표운."
백산의 입에서 격정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아버지를 따라서 중원을 떠돌아다니느라 거의 사람을 사귀지 못했던 그에게 친구라 불리는 유일한 녀석이다.
비록 삼 개월이라는 짧은 기간동안의 만남이었지만 영원한 우정을 다짐했었다.
표운과의 만남은 백산이 일곱 살 때였다. 낙양의 한 저잣거리에서 짐승 가죽을 팔러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을 때 소매치기를 하고 있던 표운을 발견하고 녀석을 뒤쫓아서 싸웠다.
그것이 인연이 되어 둘은 친구가 되었다.
그때를 생각하는지 백산의 얼굴에 훈훈한 미소가 어렸다. 그러나 이곳이 만상투인루라는 생각이 났는지 표정이 굳어지며 표운을 쳐다보았다.
"표운! 네가 왜 여기 있냐? 표사(驃士)가 되겠다던 네놈이 왜 이곳에 있는 거냐고. 그리고 령이는 어쩌고?"
비록 친동생은 아니었지만 표운에게는 유달리 몸이 약해서 병치레가 잦았던 여동생이 한 명 있었던 것을 기억해낸 백산이 표운에게 물었다.
백산과 표운이 처음 만나게 된 것도 동생의 치료비를 위해서 소매치기를 하다가 백산에게 들킨 것 때문이었다.
령이란 말에 행복한 듯한 환한 웃음을 지어 보이던 표운의 얼굴이 이내 고통스러운 듯 일그러졌다.
"지금은 령이의 성(姓)이 표(彪)씨로 바뀌었다. 표령(彪玲)으로 말이다. 나의 친 여동생이 된 거지. 이제서야 나에게도 친형제가 생겼다.
너무 기쁘다, 산. 그리고 시집도 갔고… 이제는 더 이상 고생은 없겠지? 아주 부잣집이니까…."
시집을 갔다고 이야기하는 표운의 마지막 말에는 형언할 수 없는 아픔이 묻어 나왔다.
표운에게는 꿈이 있었다. 부귀영화도 아니고, 만인이 우러르는 무림영웅은 더더욱 아니었다. 단지 조그마한 집에서 령이와 오순도순 사는 것이 그의 유일한 꿈이었다.
그래서 열심히 노력했고 이제는 잘살 수 있다는 자신감도 생겼다. 그러나 어두운 굴레를 안고 태어난 놈은 어쩔 수 없는 것인가. 결국은 이곳까지 올 수밖에 없었다.
"아주 부잣집에 시집을 갔다고? 그거 잘됐네. 이제 네 녀석의 고생도 끝이 났구나."
어두워진 표운의 표정 속에서 이상함을 느꼈으나 동생을 걱정하는 오빠의 마음이려니 하고 그저 흘려버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제는 아무 걱정 없는데 이곳에는 웬일이냐? 이곳이 어떤 곳인지나 알고 온 거냐?"
표운의 표정에 씁쓸함이 어리고 무엇인가 말하려고 하는 순간,
"설 공자! 그만 들어가시죠."
"아, 예. 백산아, 못 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다음에 하자."
아쉬운 듯한 표정으로 몇 번인가를 망설이던 표운이 두 중년인을 뒤따르고 있었다.
"야! 표운!"
백산이 부르는 소리에 가던 길을 잠시 멈춘 표운은 마치 백산의 얼굴을 기억이라도 하려는 듯이 천천히 아주 천천히 쳐다보고 있었다.
"설 공자?"
백산이 이상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표운이 설 공자로 불리는 것도 이상했지만 그를 데리고 가는 저 두 사람의 무공이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후로 백산은 표운을 발견할 수 없었다. 몇 번이나 찾으려고 여기저기를 기웃거렸지만 보이지가 않았다.
유일한 친구라고 할 수 있는 표운을 만났으나 제대로 이야기도 나누지 못한 백산은 조금은 언짢은 표정으로 도박장을 어슬렁거리고 돌아다녔다.
'또 만날 수 있겠지. 이곳에서 어디로 가겠어?'
혼자서 중얼거리며 도박장 밖으로 나가고 있을 때 어디서 나타났는지 구소운이 다가왔다.
"아! 구형. 구형도 이곳에 관심이 있소?"
"아니오. 저 같은 거지가 무슨 돈이 있겠소. 그냥 구경이나 하는 거지."
"가진 옷이 그것밖에 없소?"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은 생각지도 않고 구소운의 남루한 옷차림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자신에게 돈이라도 있었으면 벌써 새옷을 사 입혔을지도 모른다.
"아! 옷이요? 원래 천성이 너무 깨끗한 것을 싫어하는지라… 그래도 이삼 일에 한번씩은 빨아서 입는다오.
그리고 옷이 너무 깨끗하면 우리 조직에서는 쫓겨나요. 그러니 백형이 좀 이해해주세요."
"조직? 그럼 구형도 조직에 몸담고 있는 거요? 그래 무슨 파(派)요. 또 근거지는 어디고.
혹시 북경은 아니겠지? 앞으로 내가 북경으로 진출하려고 하는데 구형과 부딪치면 안 되잖소. 모처럼 만에 생긴 친구인데."
구소운은 웃음이 터져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이 친구는 강호무림에 대해서는 완전 백지다.
강호 방파가 죄다 무슨 조직 폭력배인지 알고 있다. 하기야 개방이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니 더 이상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런데도 직감이란 게 묘해서 이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있을 것만 같았다.
무공도 별로 세어 보이지도 않는데 저 자신만만한 표정과 유들유들한 것 같으면서도 왠지 정감이 가는 얼굴 때문인지 계속해서 이 사람의 주위를 맴돌게 된다.
정말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구형, 그럼 우리 환락전인가 뭔가 하는데 한번 가봅시다."
"백형, 돈 있소? 그곳에는 돈이 없으면 가봐야 아무 소용도 없어요. 적어도 스무 냥은 있어야 술이라도 한잔 할 수 있는데요."
"거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빨리 가기나 합시다. 이 백산이 책임질 테니까."
백산이 구소운을 끌듯이 데리고 환락전이라는 주루 쪽을 향했다.
"아, 글쎄 안 된다니까요? 아무리 생사투인(生死鬪人)이라고 하지만 한 푼도 없는 사람에게 무엇을 믿고 술을 준단 말입니까.
거기다 뭐 서역 미인을 대령하라고요? 우리는 뭐 땅 파서 장사하는지 아시오?"
백산은 구소운을 데리고 당당한 표정으로 환락전으로 들어왔다. 그러나 그것이 한계였다.
취익!
"에이, 씨팔. 야! 우린 말이야 여기 투인전에 참가하러온 투인이란 말이야. 첫판만 이기면 바로 갚아준다니까 그러네. 내가 아니면 이 친구라도 갚아줄 거야.
너 이 백산을 못 믿어? 저 밖에 뇌룡현에 가봐. 이 백산 하면 전부 공짜야 공짜. 나가서 확인해보면 알 것 아니야. 그러니 여기 술만 좀 가져다주게. 굳이 여자까지는 필요 없고…."
얼굴이 벌게진 구소운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나가려해도 백산이 손을 꽉 잡고 있어서 나갈 수도 없었다.
"안 되니까 지금 바로 나가주십시오."
"이봐요, 백형! 그냥 가자고요. 창피하게 이게 무슨 짓이요?"
"창피하긴 뭐가 창피해요. 어차피 며칠 있으면 다 갚아 줄 텐데. 그리고 세상 살면서 먹는 것 가지고 저렇게 사람 타박하는 놈들은 반드시 망해요 망해.
두고 보시오, 구형! 이놈의 주루(酒樓) 올해 안에 반드시 망할 테니."
환락전에서 쫓겨난 백산은 싫다는 구소운을 끌고 일층 주루까지 와서 또다시 점소이와 실랑이를 하고 있었다.
이번에도 이야기가 제대로 되지 않았는지 구소운이 백산의 손을 끌고 밖으로 나가려는 순간 그곳 점소이가 술과 안주를 내왔다.
"오! 그래. 자네가 이제야 사람을 알아보는구먼. 내가 다음에 와서 자네 구전까지 꼭 챙겨서 줌세. 그런데 이거 전부 얼마인가?"
"전부 스무 냥인데 공자는 걱정할 필요가 없네요. 저기 있는 분이 내는 것입니다요."
백산이 의아한 눈으로 점소이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금의를 입은 잘생긴 놈이 자신 쪽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구형, 저놈 알아요?"
백산은 아무리 보아도 모르는 사람이라 혹시 구소운이 알고 있나 싶어서 물었다.
"저 사람이 천무맹 맹주인 검신 화진악의 삼 제자 정천무룡(正天武龍) 백무천(百武天)입니다. 이번 철혈투의 가장 강력한 투신 후보이기도 하고요."
정천무룡 백무천. 정도 제 일룡으로 불리며 강호의 뭇 여성들로부터 선망의 대상이 되어있는 자.
천무맹의 삼공자라는 지위도 지위지만 잘생긴 얼굴에 그 끝을 알 수 없는 무공으로 차기 맹주후보 일 순위라는 말이 공공연하게 돌고 있는 자다. 한마디로 완벽한 신랑감이라 할 수 있다.
"오호! 저 친구 여타 명문정파(名門政派)의 싸가지 없는 놈들하고 다르네? 이 백산을 알아보고 술을 다 보내주니 말이야.
내 가서 인사나 좀 하고 와야 되겠소. 남이 사주는 것을 아무 말 없이 먹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고 있으쇼."
"고맙소. 이렇게 술까지 보내 주시고. 감사히 먹도록 하겠소."
정천무룡 백무천 앞으로 다가간 백산이 하는 말이었다.
입으로는 고맙다고 하고 있지만 행동은 전혀 아니었다.
단지 고개만 까닥하며 뒤돌아서는 것을 보고 백무천과 같이 있던 노인 중 한 명이 백산의 뒤통수에다 대고 기어코 한마디하고 말았다.
"이런 우라질, 방자한 놈 같으니라고. 이놈아, 우리 공자가 세상물정 모르고 날뛰는 네놈 같은 버러지 먹으라고 준 것인지 아느냐?"
백무천의 그림자라고 하는 공동파의 제일 장로인 운학자(雲鶴子)였다.
공동파의 독문절기인 복마장(伏魔掌)을 극성으로 익힌 고수로 공동파 문인들의 특성답게 급한 성격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사제인 백무천에 관련된 것이라면 본인의 일보다 더 흥분하는 인물이다.
명문의 자제들에게서 보이는 정중함도 없고 얼굴에 나있는 흉터 때문에 가뜩이나 인상도 안 좋은 녀석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고개만 까딱이는 것이 막돼먹은 놈의 표본으로 보였던 터였다.
이것은 분명 자신들의 위신 문제였다. '정천무룡 백무천이 이름도 없는 강호 무뢰배에게 술을 대접했는데
그 무뢰배가 고맙다는 표정도 짓지 않고 코방귀만 뀌더라.' 하는 식의 소문이 날 수도 있는 일이다.
자신들을 아는 강호상의 인물이라면 이렇게 할 수는 없다. 백무천이 누구이던가, 천무맹의 차기 맹주후보 일 순위의 인물이다.
그런 인물이 술을 한 병을 선물했다. 자신들에게 절까지는 아니더라도 황송한 표정 정도는 지어야했다. 그래서 더욱 화가 난 것이다.
"이것 보쇼. 늙은이 내가 뭘 어쨌다고 그러쇼. 내가 언제 술 달라 했소?"
황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 백산이다. 공짜로 술을 주기에 고맙다고 인사를 했는데 그것을 가지고 시비를 걸고 있다.
"이익!"
"운 사숙! 저런 버러지에게 말한다고 알아먹습니까. 괜히 입만 버립니다. 꺼져라, 이 버러지 놈!"
운학자가 뭐라고 말하려는 찰나에 옆에 있던 다른 한 명이 운학자를 말렸다.
쿡! 쿡! 쿡!
백산의 입에서 묘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술 한 병을 얻어먹은 것치고는 너무 많은 욕을 먹고 있었다. 술을 달라고 한 적도 없었고, 저들이 그냥 버리듯이 인심을 쓴 거에 대해 고맙다고 한 것뿐이다.
그런데 그 태도가 마음에 안 든다고 온 식구들이 자신을 버러지라 욕하고 있는 것이다.
"버러지라. 쓰레기에 이어서 이번에는 버러지군. 좋아, 좋다고. 이봐! 늙은이.
당신 말이야 말이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네가 당신들에게 술을 달라고 했나? 아니면 구걸을 하기라도 했나?
가만히 있는 사람에게 술을 안기고는 받는 자세가 마음에 안 든다고 시비를 거는 것인가?
그리고 자신보다 못하면 전부 버러진가. 그런 너희들은 뭐가 얼마나 잘났는데? 그 알량한 문파라도 없었으면 지금 나보다 낫다고 자신할 수 있나? 아마 아닐 거야.
좋은 가문에 훌륭한 사부에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나서는 마치 그것이 자신이 잘나서 그렇게 된 것이라고 착각하지 말라고 늙은이.
그 정도의 배경이면 여기 있는 누구라도 너희들만큼은 될 수 있는 거야. 알았어?
그리고 버러지 버러지 하는데 말이야. 그 버러지들이 꿈틀할 때도 있거든. 혹시 알아? 버러지가 잘못 꿈틀했는데 귀하디귀한 놈들의 대가리가 깨질지 말이야.
좌우간 술은 고맙게 먹지요. 버러지는 그만 물러갑니다."
운학자의 표정이 벌겋게 변했다. 버러지 놈의 말이 틀린 것은 없었다. 가만히 있는 놈들에게 자신들이 술을 주었고, 그것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지 않는다고 화를 내는 꼴이 되어버렸다.
다시 폭발하려는 운학자를 막아선 사람은 옆에 있던 백무천이었다.
"그럼 자네는 좋은 조건에 배경이면 나처럼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글쎄, 그건 두고 보아야지. 안 그런가?"
"이런 버러지 같은 놈 말끝마다 반말이야. 감히 이분이 어떤 분이라고 너같이 천한 놈이 망발을 한단 말이냐. 이놈!"
백무천의 옆에 있던 운학자를 제외한 네 명의 인물 중 한 명이 당장이라도 손을 쓸 것처럼 콧김을 씩씩대면서 소리를 질렀다.
공동 사장로. 운학자와 같은 장로 신분이기는 하지만 그들의 배분은 운학자에 비해서 한 배분 낮다.
과거의 공동파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지만 기울어가는 문파이었기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백산에게 소리친 사람은 사장로 중에서 제일 맏이인 목령자라는 도인이었다.
백무천이 나이는 어리지만 자신들에게는 사숙이 된다. 저런 놈들이 함부로 반말을 할 정도의 위치가 아니다.
"아! 아! 진정하라고 늙은이. 혈압이라도 오르면 곤란하잖소? 다 좋은데 나에게 반말 타령하지 말고 애들 교육이나 좀 잘 시키쇼.
나이도 몇 살 안 처먹은 놈이 자기보다 나이도 많은 사람에게 반말이나 찍찍하고 그러니 천마맹인가 뭔가 하는 놈들한테 개 박살이 나지.
잘들 하라고 알았소, 영감. 즐거운 시간이었소. 그럼 이만."
정천무룡 백무천의 얼굴이 살짝 굳어지며 저만치 가고 있는 백산을 향해서 젓가락 하나를 가볍게 퉁겼다.
주루 안의 모든 사람들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었다. 누가 감히 천무맹 인물들에게 저렇게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저것은 배짱이 아니라 만용이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는 자들일수록 자신들의 것을 지키는데 더욱 집착하기 마련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지키고 싶어하는 것이 바로 명예라고 일컫는 그들만의 자만심이다.
그 누구도 자신들을 욕해서는 안 되고, 깔봐서도 안 된다.
오로지 존경과 흠모의 눈빛만을 보내야만 한다. 그곳에 자신들이 존재하는 이유가 있다. 그런 그들의 자만심을 백산이 무참히 짓밟아버렸다.
구소운을 향해 가고 있던 백산이 뒤통수에 느껴지는 진득한 살기에 잠시 몸을 움찔했으나 아무 일 없다는 듯이 자신의 좌석으로 돌아왔다.
"아! 미안하이, 구형. 말이 너무 길어졌구려."
그때까지도 소걸영(素乞英) 구소운의 얼굴은 해쓱하게 변하여 백무천만을 쳐다보고 있었다.
백산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던 백무천의 오른손이 가볍게 흔들리자 뒤통수 쪽에 있던 젓가락이 그 자리에서 가루로 부서져 내렸다.
두 사람을 주시하고 있던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 멀리 떨어진 곳까지 물건을 움직이는 것은 고수라면 웬만큼 한다.
그러나 걸음걸이에 맞추어 천천히 날린 것도 대단한데 그 자리에서 멈추게 하였다가 가루로 만들어버리는 기술은 일류 고수라고 해도 흉내 내기 힘든 것이었다.
다시 한번 백무천의 공력(功力)이 확인되는 순간이었다.
백산은 태연하게 웃으며 얼굴이 풀려가는 구소운을 쳐다보고는 입을 열었다.
"이곳에서 추방되고 싶지는 않을 테니까."
구소운의 눈동자가 커졌다.
이 어눌하게만 보이는 사람은 백무천이 자신을 죽일 수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곳의 규칙에 생사비무(生死比武) 이외에는 다른 생사투인(生死鬪人)을 해칠 수 없다는 점을 이용한 것이다. 그러나 이건 너무 무모했다.
"그러다 백형이 죽을 수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까? 여기는 말려줄 종천수도 없습니다."
"저들처럼 대단한 놈들은 말이요, 나같이 하찮은 녀석들은 죽이질 못해. 아무리 기분이 나빠도 자신들의 체면이 있거든.
우리들처럼 근본도 없는 놈들을 죽이면 손만 버린다고 생각하는 놈들이잖아. 특히 저놈처럼 자신이 최고라고 착각하고 사는 놈들은 말이야.
굳이 자기 손이 아니더라도 나 같은 놈을 처리해줄 인간은 이곳에도 많이 있거든. 안 그래?"
소운은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자신도 구구절절이 알고 있는 사실이다. 정파(政派)라는 사람들, 특히 배경 좋고 힘 있는 사람들, 그들은 결코 스스로 힘을 사용하는 법이 없다.
혹시라도 일어날 수 있는 돌발사태마저도 방지하기 위하여 철저하게 다른 이들을 이용하곤 한다.
그런 다음 일이 끝났을 때 조그마한 치하(致賀)의 말마디로 모든 것을 마무리 짓는다.
그러나 일이 성공하지 못했을 경우에는 어떻게 하는가. 이번에는 완전히 수수방관해 버린다.
이제는 자신의 일이 아니다. 바로 일을 처리하려 했던 사람, 그의 형제나 자매, 또는 그가 속한 문파에서 혈안이 되어 그 일을 처리하려고 나선다.
이제는 가만히 쳐다보고만 있어도 모든 것이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결되어 버린다.
그래서 모두들 권력을 갖기를 원하는 것이다.
'백형도 무서운 사람이군. 결코 쉬운 사람은 아니야.'
혼자서 중얼거리고 있는 구소운을 향해서 백산이 소리를 팩 질렀다.
"뭐해? 잔 받아야지."
생사비무(生死比武).
드디어 생사투인전의 생사비무(生死比武) 대전표가 공개되었다.
지금 대전판 앞에서 백산과 구소운은 열심히 자신들의 이름을 찾고 있었다.
대전표는 전부 열 개조로 편성되어 있고, 각 비무의 승자가 한 계단씩을 올라가는 형식으로 되어있었다.
오백 명의 이름이 일렬로 써있는 대전표는 무척이나 길었다. 백산은 십 조에서 자신의 이름을 찾았다. 참마도(斬魔刀) 팽월(彭月)이라는 인물이 있는 조였다.
상대는 사인도(死人刀) 진천(辰泉)이란 자였고, 그들의 이름 아래에는 조그마한 글씨로 백산은 오백 대 일, 사인도 진천은 이백 오십 대 일이라는 글이 적혀있었다.
자신의 이름을 찾은 백산은 내내 대전표의 이름을 훑고 있었다. 친구인 표운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어디에도 표운의 이름은 없었다.
'이상하네. 이 녀석의 이름이 왜 없지? 그때 설씨라고 했는데 혹시….'
이번에는 설씨라는 성을 가진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너무 많았다. 거의 열 명 이상이나 되어있는 설씨 성을 가진 사람들을 보고는 백산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고 말았다.
직접 보아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도 무공은 좀 있어 보였으니까….'
"어이! 이봐 구형! 구형은 몇 조야? 그리고 저 숫자는 뭐고?"
구소운이 자신의 이름이 적힌 조를 찾았는지 백산을 향해서 웃으며 다가오고 있었다.
아마도 쉬운 상대를 첫 상대로 만나는 모양인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나는 칠 조입니다. 그리고 저 조그마한 숫자는 승률입니다. 다시 말하면 백형이 승리할 확률이라는 것이죠.
그리고 돈을 받게 되는 배율이기도 하고요. 이를테면 백형의 이름으로 한 냥을 걸었을 때 백형이 투신(鬪神)이 되면 오백 냥을 벌게 되는 거죠."
"그래? 그럼 사인도(死人刀) 진천(辰泉)인가 하는 놈은 나보다 훨씬 강하다는 말이네? 이백오십 대 일로 되어있으니. 그럼 구형은 얼마로 되어있는데?"
"저는 백오십 대 일로 되어있던데요?"
"와우! 구형도 한가락 하네? 몸이 왜소해서 별 볼일 없는지 알았더니."
"그건 그렇고. 자네 돈 있으면 속는 셈치고 나에게 한 냥만 걸어. 혹시 알아? 집에 갈 때 오백 냥을 들고 갈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뭐 싫으면 말고. 그런데 구형의 상대는 누구인가?"
"저는 마도 인물인 구월마도(九月魔刀) 창파입니다."
"창파? 그치 강한가?"
"오백 대 일로 되어있으니까 별로 어려운 것 같지는 않네요."
구소운의 말에 백산은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나도 오백 대 일인데 지금 나를 무시하는 거냐 하는 것 같았다.
얼굴에 약간 어색한 미소를 짓던 구소운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게 백형이 약하다는 것이 아니고…."
"괜찮아. 구형도 나를 잘 모르니까. 그렇게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지 뭐."
백산의 얼굴에서 뭔가 섭섭한 표정을 느낀 구소운이 재빨리 말을 바꿔 백산에게 진천에 관해서 알고 있는 것을 이야기했다.
"실력 같은 것은 필요 없고 그 친구 성격은 어때?"
"성격요? 성격은 매우 신중한 것으로 알고 있어요. 더 자세한 것은 더 알아봐야 하는데 시간이 없을 것 같네요."
"됐어, 됐어. 그 녀석 성격만 알고 있으면 돼."
첫댓글 질 보고 갑니다 감사 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