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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록 몇 개을 참고로 북부여부터 고구려의 건국 스토리를 정리해 보려고 합니다.
1. 삼국유사 북부여 건국관련
古記雲。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於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乘五龍車。立都稱王。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生子名扶婁。以解為氏焉。王後因上帝之命。移都於東扶餘。東明帝繼北扶餘而興。立都於卒本州。為卒本扶餘。即高句麗之始祖
2. 삼국유사 동부여 건국관련
北扶餘王解夫婁之相阿蘭弗。夢天帝降而謂曰。將使吾子孫立國於此。汝其避之(謂東明將興之兆也)... 移都於彼。國號東扶餘
3. 삼국사기 유화부인 관련
於是時 得女子於太白山南優渤水 問之曰 我是河伯之女 名柳花 與諸弟出遊 時有一男子 自言天帝子解慕漱 誘我於熊心山下鴨邊室中私之 即往不返 父母責我無媒而從人 遂謫居優渤水 金蛙異之 幽閉於室中 爲日所 引身避之 日影又逐而之 因而有孕 生一卵 大如五升許 王棄之與犬豕 皆不食 又棄之路中 牛馬避之 後棄之野 鳥覆翼之 王欲剖之 不能破 遂還其母
* 위에 내용은 너무 유명해서 굳이 해석은 하지 않겠습니다.
북부여와 고구려의 탄생 스토리를 정리하기 전에 우리가 반드시 염두에 두어야 할 내용이 있습니다.
1. 부여는 기원전 222년 이전에 존재했다.
2. 기원전 209년에 흉노가 동호를 공격해 동호왕이 죽었다. 여기서 동호왕은 부여왕일 가능성이 높다.
위 내용은 사기 화식열전을 통해 추정할 수 있습니다.
(* 사기 화식열전이 작성된 시기와 연나라 북쪽에 오환과 부여가 있었다는 내용을 참고함)
기원전 200년경부터 국제 정세는 흉노의 패권기 입니다.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흉노와 한나라와의 전쟁에서 흉노가 승리했기 때문입니다.
한나라는 한무제 때 흉노에 다시 도전하여 아주 긴 전쟁을 벌이게 됩니다.
양국의 벌인 전쟁의 하프타임 쯤에 위만 조선이 멸망합니다. (기원전 108년)
위만조선의 멸망은 당시 국제 정세가 흉노에서 한나라로 바뀌게 되는 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흉노는 기원전 48년경에 사분 오열되어 급속도로 쇠퇴하게 됩니다.
연대를 정리하다보면 역사 흐름을 알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흔적들이 나타납니다.
아주 극단적인 표현을 사용해서 정리를 해 보겠습니다.
기원전 222년 이전에 부여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기원전 209년에 흉노에게 망합니다.
흉노는 한나라에게도 승리하여 주변국들에게 한동안 슈퍼갑 행세를 합니다.
시간이 흐르고 한나라가 힘을 키우더니 흉노에게 도전합니다.
흉노와 한나라가 난타전을 벌였고, 고래 싸움에 새우등이 터지는 일도 이쪽저쪽에서 벌어집니다.
오랜 전쟁으로 양국의 사정은 안좋아집니다.
특히 흉노가 받은 타격은 더 컸습니다.
그러자 흉노의 갑질에 눌려 있었던 나라들이 슬그머니 머리를 들게 됩니다.
삼국유사 북부여기에 아주 중요한 내용이 있습니다.
북부여가 기원전 59년에 건국했다라는 것입니다.
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은 기원전 59년이라고 말씀들 하시니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이 시기는 흉노가 분열하여 완전히 세력을 상실하기 11년 전쯤 같은데요.
당시 국제 정세를 이해하게 되면 북부여의 건국을 이해할 수가 있습니다.
다시 정리하면...
예전에 망했어요.
한동안 쥐여 살았고요.
다행히 하늘이 보우하여 새로 나라를 열었네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우리 북부여는 부여의 후손이 맞습니다...
북부여를 건국한 사람은 자칭 해모수입니다.
삼국유사를 보면 해모수의 혈연관계가 동부여계와 고구려계로 잘 나타나 있습니다.
그런데 연대별로 해모수의 혈연관계를 따져보면 한쪽이 많이 이상해집니다.
1. 해모수 - 해부루 - 금와 - 대소
2. 해모수 - 추모(주몽) -유리
인물들의 태어난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어도 재임기간을 통해 혈연관계 여부를 알 수가 있는데요.
고구려계 혈연 관계는 정상적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해모수가 살아있었던 기원전 59년과 고구려 건국 년의 차이는 불과 22년이므로 혈연 관계의 신빙성은 매우 높습니다.
해모수(기원전 59년)- ? - 추모(주몽, 기원전 37년 건국~기원전 20년) - 유리(기원전 19년~18년)
반면 동부여계는 연대를 정리하다보면 이해가 되지 않을 정도로 완전히 엉망이 되어 버립니다.
이유는 삼국유사 기록의 자(子) 라는 글자 때문입니다.
이 내용은 나중에 설명하기로 하고, 먼저 연대부터 파악을 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해모수 (기원전 59~?년) - 해부루(?~?) - 금와 (?~기원전 20년 경) - 대소 (기원전 20년경~ 22년)
북부여가 건국되고 얼마 후에 동부여로 천도가 이루어집니다.
우리가 알고 있는 북부여의 시작점은 기원전 59년입니다.
추모(주몽)를 통해 금와왕의 재임기간이 적어도 기원전 37년 이전에 시작되었다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해모수와 해부루의 재임 기간은 기원전 59년~기원전 37년 이전으로 범위가 좁혀집니다.
대소부터 나이를 역추산해 보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를 보면 추모(주몽)이 동부여를 탈출한 이유가 나옵니다.
대소가 추모를 죽이려고 했다지요.
그렇다면 대소는 적어도 기원전 37년 이전에 태어나야만 합니다.
금와가 대소를 몇 살때 낳았을까요?
대략 15살 즈음이라고 한다면 금와가 태어난 시간도 15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하므로 기원전 52년이어야 합니다.
그런데 해부루가 늦게까지 자식이 없었다는 기록을 보면 모든 것이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기원전 52년에 해부루의 나이가 꽤 많았다면 해모수의 나이는 더 되었을 것 같으니까요.
납득이 안되는 상황입니다.
그래서 과감하게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해모수와 해부루를 동일 인물로 본 것입니다.
해모수 = 해부루
삼국유사 북부여기의 해석본을 정리해 보았습니다.
고기에 따르면 전한 선제 신작 3년 임술년(기원전 59년) 4월 8일에 천제가 흘승골성에 오룡거를 타고 내려왔다. 그 곳에 도읍을 정하여 왕이라 일컫고 국호를 북부여라 하고, 스스로 이름을 해모수라 하였다. 아들을 낳아 이름을 부루라 하고 해를 성으로 삼았다. 왕(해부루)은 후에 상제(上帝)의 명령으로 동부여로 도읍을 옮겼다. 동명성제는 북부여를 이어받아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부여를 이룩하니, 곧 고구려의 시조이다.
해석은 문맥이 좀 이상할 뿐 문제될 것이 없어 보입니다.
문맥이 이상하다는 점은 윗글은 온전히 해모수에 대한 내용이기 때문입니다.
글을 읽다보면 말하는 바가 자꾸 산으로 간다는 느낌이 듭니다.
그래서 글자 하나가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정리를 해 보았습니다.
古記雲。前漢書宣帝神爵三年壬戌四月八日。天帝降於訖升骨城(在大遼醫州界)乘五龍車。立都稱王。國號北扶餘。自稱名解慕漱。生*名扶婁。以解為氏焉。王後因上帝之命。移都於東扶餘。東明帝繼北扶餘而興。立都於卒本州。為卒本扶餘。即高句麗之始祖
기원전 59년에 천제가 오룡거를 타고 나타나 홀승골성을 왕도로 삼고 왕이 되었다. 국호는 북부여라고 하였고, (왕은) 스스로 해모수라 칭했는데, (왕이) 태어났을 때 이름(= 원래 이름)은 부루이고, 해씨를 성으로 삼았다. 왕(=해모수)은 후에 상제의 명령을 받고 동부여로 도읍으로 옮겼다. (여기서 상제의 명령이라고 함은 해모수의 자식인) 동명제가 북부여에서 흥해 졸본주에 도읍을 정하고 졸본 부여를 이룩한다는 것이며, 동명제가 고구려의 시조가 된다는 계시이다.
자(子)를 지우고 해석한다는 것이 무리가 따릅니다.
하지만 생자명이 生字名 으로 기록되어 있었다면 어떻게 해석될까요?
역사를 왜곡시킬 때 사용하는 방식이 기록 1자를 고쳐서 내용을 완전히 꼬이게 만드는 것입니다.
子 가 들어가면서 문맥이 완전히 이상해지죠.
해모수에 대한 설명인데 갑자기 해부루가 등장하죠.
字名은 뜻이 있는 호칭과 관련된 단어입니다.
찾아보시면 무슨 의미인지 아실 것입니다.
아무튼 생략하고 해석을 하면 북부여와 고구려의 가계도가 한눈에 파악이 됩니다.
스토리를 한번 만들어 보았습니다.
왕은 원래 이름은 부루였고, 해씨를 성으로 삼아 스스로 해모수라 칭했다 라고 했을때...
해모수는 해부루가 스스로 불렀던 이름이며...
남이 불러 주는 이름은 해부루입니다.
그렇다면...
북부여 건국은 해부루가 하였고, 해부루는 곧 북부여 왕입니다.
해부루는 꿈으로 상제가 계시를 받고 도읍을 옮기게 됩니다.
'네 자식이 이곳에서 나라를 세우고 왕이 될 것이다.'
해부루의 입장에서 보면 이 이야기는 좋은 내용이 아닙니다.
자식이 나라를 세운다는 것은 곧 역모니까요.
해부루는 나라의 터가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좋은 곳을 찾아 도읍을 옮깁니다.
그래서 해부루는 다시 동부여의 왕이 됩니다.
그런데...
자식 놈이 역모를 일으킨다고 해서 도읍까지 옮겼는데 정작 늙도록 자식을 보지 못합니다.
어찌되었든 후사는 이어야 하니 가까운 친척중에서 양자를 들이게 됩니다.
그 아이가 바로 금와입니다.
해부루가 죽고 금와가 왕이 됩니다.
그런데 이상한 소문이 들립니다.
해모수의 자식을 낳은 여인이 있다는 것입니다.
해모수라는 이름은 해부루가 왕이 되기 전에 스스로 사용했던 이름입니다.
해모수에 대한 히스토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결코 헛소문이 아님을 직감할 것입니다.
금와는 유화부인을 찾아갑니다.
징표가 있었는지는 잘 모르지만......
아무튼 유화부인을 궁으로 데려옵니다.
* 유화부인은 금와의 어머니 뻘이 됩니다. 부인이라는 호칭을 붙인 것으로 보아 합당한 예우를 해 준 것 같구요.
(해부루가 해모수의 아들이라고 하게 되면 유화부인은 금와의 할머니가 되는데...... 조금 복잡해집니다.)
이때부터 동부여가 발칵 뒤집힙니다.
정통성 문제가 대두되었으니까요.
금와왕은 현재 왕이지만 양자입니다.
추모(주몽)는 서자지만 해부루의 친자입니다.
대소로 대변되는 금와왕의 사람들은 추모를 죽이려고 합니다.
추모는 동부여를 탈출해 홀승골성으로 가서 졸본 부여를 세웁니다.
추모는 나라를 세우면서 북부여를 잇는 정통 후계자임을 밝히게 됩니다.
또한 과거 209년에 멸망했던 부여의 정통성까지 잇습니다.
덕분에 추모에게 부여의 탄생 시조인 동명제의 명칭도 따르게 됩니다.
추모가 살아있을 시기만 해도 동부여와 고구려 관계는 좋았습니다.
왜냐구요?
정통성과 대의 명분 때문입니다.
비록 고구려의 힘은 동부여에 미치지 못했지만 해부루의 직계 후손에게 누가 감히 딴지를 걸겠습니까.
그리고 동부여왕 대소보다 추모의 배분이 높습니다.
하지만 추모가 사망하면서 동부여와 고구려의 관계가 삐그덕거립니다.
대소왕이 힘으로 고구려를 압박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때 국력은 동부여가 갑입니다.
하지만 대소왕의 군대가 폭설로 크게 상하면서 상황이 많이 바뀌게 됩니다.
고구려는 군사적 여력도 생겨 도읍도 옮기고 확장도 가능해진 것입니다.
고구려는 유리가 죽고 무휼이 왕이 되자 본격적으로 동부여 공략에 나섭니다.
동부여는 한번의 전투로 결단이 나고 맙니다.
대소왕은 죽고 그 일가들은 뿔뿔이 흩어져 부여라는 명맥만으로 유지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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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 북부여와 동부여 그리고 고구려 건국과 관련된 내용들은 이해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그래서 좀 더 사람들이 이해하기 쉽도록 해모수를 해부루라고 놓고 정리해보았습니다.
사실 해부루를 해모수의 아들로 놓고 스토리를 만들어도
동부여와 고구려의 정통성 관계도 변하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물론 관계도는 더 복잡해 지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