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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8월 30일 연중 제21주간 수요일
제1독서 : 1테살 2,9-13
복 음 : 마태 23,27-32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27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28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
29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예언자들의 무덤을 만들고 의인들의 묘를 꾸미면서,
30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고
말하기 때문이다.
31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32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세계 최고봉은 ‘에베레스트’로 무려 해발 8848.86미터에 달합니다.
이 에베레스트를 많은 사람이 정복했지만,
하리 무다 마그르의 정상 도전은 사람들로부터 ‘불가능하다’라는 말을 듣기에 충분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두 다리는 무릎 위까지 절단되어 완전히 의족에만 의지해서
정상에 오를 수 없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다른 산악인보다 세 배가량 느린 속도였지만 결국 정상에 올랐습니다.
그는 네팔 용병으로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참여했고,
2010년 4월에 사제 폭탄을 밟아 안타깝게 두 다리를 잃게 되었습니다.
절망에 빠져 오랫동안 알코올 중독에 시달렸으며, 극단적인 시도도 여러 차례 했습니다.
그런 그에게 전환점이 찾아왔습니다. 자선 단체를 통해 스카이다이빙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다리가 없어도 많은 것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게 되었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우리는 모두 저마다 약점과 장애가 있어요.
하지만 우리의 강점에 집중해야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약점에만 더 집중하는 우리가 아니었는지를 반성하게 됩니다.
약점에만 집중하면 할 수 있는 것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할 수 없는 일만 보이면서 삶의 의미를 잃어버릴 수밖에 없게 됩니다.
결국 하느님의 창조 목적에 맞지 않게 살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향해 불행 선언을 하십니다.
겉으로는 스스로 의로운 사람인 척하면서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남들에게는 ‘죄인’이라는 무거운 짐을 지우면서 하느님께 나아가지 못하게 했지요.
약점에만 집중하게 사람들을 이끄는 것이었습니다.
과연 이런 모습을 하느님께서 좋아하셨을까요?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아주 강하게 “불행하여라.”라고 외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제일 싫어하는 위선의 허울을 뒤집어쓴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창조 목적은 “보시니 참 좋았다.”라는 말씀처럼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 자신도 보시니 참 좋을 수 있도록 ‘강점’에 집중하면서 살아야 할 것이고,
더불어 남에 대해서도 그 사람을 통해서도 보시니 참 좋을 수 있도록
‘강점’을 바라보고 이를 드러낼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모습은 여전히 그 옛날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의 모습처럼 약점만을 바라봅니다.
자기 약점만 바라보면서 할 수 있는 것도 하지 않고 있으며,
남의 약점을 바라보면서 깎아내리는 데만 집중합니다. 보시니 좋을 수 없습니다.
하느님께 “불행하여라.”라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회칠한 무덤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중하였습니다.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입니다.
‘겉은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고 지적하셨습니다.
이 말씀을 듣고 그 회칠한 무덤이 바로 저라고 생각했습니다.
신부이기 때문에 자동적으로 거룩한 삶을 사는 것은 아닙니다.
매일 미사를 봉헌한다고 성덕이 출중한 것도 아닙니다.
그에 상응하는 마음가짐과 정성을 담지 않으면
거룩한 것을 더 많이 접하기 때문에 오히려 더 불경한 잘못을 범하고 맙니다.
알면 아는 만큼 더 잘 살아야 하는데 아는 것과 사는 것은 분명 다릅니다.
사실 신부이기 때문에 더 많은 위선을 떨고 사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자들에게는 기도를 많이 하는 것처럼 말을 하지만
최소한의 의무인 ‘성무일도’조차 거르고 지나갈 때가 있습니다.
성체조배는 물론 묵주기도를 하는 것은 기본이거늘
일반 신자보다 더 많이 기도한다고 얘기할 수 없습니다.
이러저러한 인간적인 욕망에 대해서도 절제 있는 기쁨을 누리지 못할 때가 너무도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닌 척하고 목을 빳빳이 세우고 다닙니다.
이런 모습에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아프실까? 생각하면서도 몸은 여전히 육정을 따르고 맙니다.
‘마음은 간절하나 몸이 말을 듣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겉과 속이 다른 위선자를 얘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이 그렇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내 눈 안에 들보를 지닌 채 남의 눈의 티를 빼주겠다고 허우적거리는 모습이 부끄럽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말합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셨다.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에게 다가오고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지만,
그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있고 나에 대한 그들의 경외심은 사람들에게서 배운 계명일 뿐이니
나는 이 백성에게 놀라운 일을, 놀랍고 기이한 일을 계속 보이리라”(이사29,13).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아우구스티노).
과거는 성찰의 바탕이고 새 삶을 시작 한 날이 중요합니다.
신앙인에게 있어 과거는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입니다.
과거를 하느님의 자비에 맡기고 앞날을 하느님의 섭리에 맡겨 드리며
주어진 이 순간을 사랑으로 살아야 하겠습니다.
이런 말을 하고 저런 행동을 하며 위선과 허물로 누벼놓은 이날에 하느님의 크신 자비를 청합니다.
주님, 자비를 베푸소서.
주님, 저의 허물을 용서하소서.
구원을 허락하소서. 아멘.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우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저녁 모임이 있어서 ‘제주도’라는 횟집으로 갔습니다.
먼저 갔던 분에게 주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오늘 주방에 기계가 고장 나서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비가 오는 날은 손님도 별로 없어서 오늘은 영업을 하지 않습니다.”
먼저 갔던 분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 오늘 여기서 신부님을 만나기로 했는데요.”
그러자 주인이 이렇게 말하였다고 합니다.
“아! 신부님이랑 만나기로 하셨어요.
그럼 들어오세요. 오늘은 딱 한 팀만 손님을 받겠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를 식당에 도착해서 나중에 들었습니다.
우리는 비가 내리는 오후에 탁 한 팀만 있는 식당에서 편안하게 저녁식사를 할 수 있었습니다.
저를 기억해 주고, 우리만을 위해서 영업을 해 준 주인에게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나중에 식당을 나오는데 주방장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 주인은 신부님이 오시면 좋아합니다. 뭐라도 하나 더 드리려고 합니다.”
주인은 신자는 아니었지만, 사제를 존중하는 마음이 더 고마웠습니다.
자주 가는 단골이기에 주인이 특별히 배려했을 수도 있습니다.
단골 이전에 사제를 위하는 주인의 마음이 더 컸다고 생각합니다.
식당 주인의 따뜻한 배려를 고맙게 생각하면서
예전에 읽었던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상”이 떠올랐습니다.
“침묵 속에 그리스도의 향기가 드러나는 사제.
어른들에게 공손하며, 청소년을 따뜻하게 대하는 사제.
강론을 성실하게 준비하고, 고백성사를 성심껏 주는 사제.
미사 집전을 정성스럽게 하는 사제.
성체조배를 자주 하는 사제.
사제복을 즐겨 입는 사제.
본당 재정을 투명하게 운영하는 사제.
수도자와 보좌신부와 원만한 관계를 가지는 사제.
가난하고, 아픈 이들을 먼저 돌보는 사제.
특별한 일이 아니면 언제나 본당을 지키는 사제.
겸손하며,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끝까지 경청하는 사제.
후배 양성에 힘을 쓰며 생활하는 사제.
죽기까지 사제직에 충실한 사제.”
생각하면 부끄럽습니다.
저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의 모습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한 가지 있다면 사제복은 즐겨 입고 다녔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우리가 신자 여러분에게 얼마나 경건하고 의롭게 또 흠 잡힐 데 없이 처신하였는지,
여러분이 증인이고 하느님께서도 증인이십니다.”
바오로 사도는 평신도가 바라는 사제, 예수님께서 바라는 사제의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어제에 이어서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의 위선과 가식에 대해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우리 속담에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제사 밥에만 관심이 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핵심인 십자가와 희생에는 관심이 없고
율법과 계명으로 얻어지는 보상에만 관심이 있으면 안 된다고 하십니다.
본인들은 지키지 않는 율법과 계명을 다른 사람들에게만 강요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말은 따르지만 그들의 행동에서는 배울 것이 없다고 하셨습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겉모습만 꾸미고 내면의 세계는 텅 비어있는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의 위선을 말씀하십니다.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기 위해서는 생명을 이어주던 탯줄을 끊어야 합니다.
교회가 하느님께로부터 멀어졌을 때는 세속의 권력에 취해서 십자가와 희생을 외면했을 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시대의 사목자들에게도 엄중하게 말씀하십니다.
오늘의 사목자들이 바오로 사도가 보여주었던 삶을 살아간다면
예수님께 칭찬받는 사목자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을 추구한다면 예수님께 야단맞는 사목자가 될 것입니다.
“하늘로 올라가도 거기 당신이 계시고, 저승에 누워도 거기 또한 계시나이다.”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도 ‘위선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 대한 불행선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 바리사이들을 “회칠한 무덤”(마태 23,27)에 비유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의 삶이 생명의 본성을 뿜는 것이 아니라, 무덤의 냄새를 뿜고 있기 때문입니다.
민수기(19,16)에 따르면, 무덤에 닿으면 칠일간 부정하기 때문에
무덤을 회칠하여 표시함으로써 사람들이 불결해지지 않도록 했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회칠한 무덤과 같다’는 것은 그들이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고,
겉은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마태 23,27-28)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악'보다 더 추악한 것은 '거짓된 선', 곧 '선으로 꾸며진 위선'입니다.
마치 자신이 '선'인 양 꾸미고 사람들을 속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위선’ 중에서도 ‘종교적 위선’은 악취가 더 심합니다.
예를 들어, 기도나 자선이나 단식, 혹은 미사나 전례나 성사도 그럴 수 있습니다.
하느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드러내기 위해서 한다면 그럴 것입니다.
나아가서, ‘위선’(ùποκρισισ)은 단지 못된 속셈을 교묘한 방법으로 감추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상대방에게 올가미에 씌우기도 합니다(예레 18,18).
실제로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이 예수님께 그러했습니다(마태 22,18).
또한, ‘위선’은 자신을 완고하게 하고 자신의 탐욕과 방종을 위해 하느님을 두구로 삼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여기기도 합니다.’(루카 18,9;20,20)
그래서 ‘눈먼 길잡이’(마태 15,3-14)가 되어 잘못 가르치는 ‘나쁜 누룩’(루카 12,1)이 되기도 합니다.
혹 우리가 그러고 있지는 않은지 잘 들여다보아야 할 일입니다.
앞 구절에서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눈 먼 이들’이라고 부릅니다(마태 23,25-26).
눈을 부릅뜨고 다른 사람들을 속이려고 애쓰면서도
정작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보는 데는 눈을 감아버린, 그리고 오히려 빛을 핍박하기 때문입니다.
예언자들의 무덤은 꾸미면서도 실은 그의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박해하고 죽였듯이,
지혜이신 당신을 핍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듯 진실을 가려보지만,
진리는 가리고 있는 허울을 어김없이 벗기고 맙니다.
비록 어둠이 드러난 진실마저 덮고 조작하려 할지라도,
빛은 끝내 가려지지 않고 오히려 가림막을 태우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낼 뿐입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더러운 속을 감추고 겉을 그럴싸하게 꾸미고 치장하고
은폐하고 기만하고 심지어는 조작하기도 하는 우리의 위선을 주님께서는 환히 아십니다.
하오니, 주님!
오늘 저희가 위선의 껍데기를 벗어 던지고, 당신이 담아주신 마음 속 진리를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마태 23,31)
주님!
위선의 껍데기를 벗고 진리 편에 서게 하소서!
허물이 드러날까 두려워 얼굴을 가리고 있는 제 손바닥을 치우게 하시고,
감추어진 탐욕과 위선을 드러내소서.
핍박과 폭행을 당해도 물러서지 않게 하시고,
불의에 대한 무관심과 침묵으로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게 하소서.
아멘.
겉은 그럴싸해 보이지만
조욱현 토마스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을 책하시면서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27~28절)라고 하신다.
의인들의 몸은 하느님의 성전이다. 언제나 하느님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반대로 죄인들의 몸은 죽은 자들의 무덤이라고 한다. 영혼이 죽어있기 때문이다.
생명을 살리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그 몸은 이미 죽은 몸이나 다름없다.
무덤은 닫혀있는 한 겉모양은 아름다울 수 있지만, 무덤을 열면 그 광경은 참혹하다.
위선자들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의 실체를 모르면 모두 칭찬받을 만한 이들로 보일 수 있지만,
그들의 실체가 드러나면 그 모습은 역겹다.
위선은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그것은 선이 아니다.
이것은 의로움을 가장한 모든 것은 죽은 것이며, 의로움이 아니다.
하느님을 위하여 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 때문에 거짓으로 행하는 덕은 죽은 것이다.
이러한 것들은 자신이 아니면서도 그 사람과 똑같이 하는 배우들과 같다.
이런 사람들은 속은 죽은 이들의 뼈로 가득 찼지만, 겉으로는 의로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겉만 아름답게 보이는 회칠한 무덤이 된다.
회칠한 무덤의 이야기는 우리의 삶에 있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의 경고이다.
그렇게 보이는 행동이 아니라, 참사랑이 담긴 진정한 주님의 자녀로서의 삶의 자세를
항상 가질 수 있도록 하라는 말씀이다.
겉이 아무리 아름답다고 해도 속이 썩어있다면 그것은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닌가?
주님께서는 인간이 살아있는 것을 원하시지, 죽는 것을 원하시는 분이 아니다.
주님의 뜻을 올바로 실천하는 그래서 주님의 참된 영광이 될 수 있는 삶이 되도록 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하신 것은
그들이 예언자들을 죽인 자들의 자식들로 더 나쁜 짓을 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여 너희는 예언자들을 살해한 자들의 자손임을 스스로 증언한다.”(31절)
그들은 결국 똑같이 사악한 짓, 아니 훨씬 더 사악한 짓을 벌이려고 한다.
그들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다.”(사도 3,15) 그리고 사도들까지도 죽였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러니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32절) 하신다.
우리는 회칠한 무덤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올바로 따를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할 것이다.
“당신의 조상은 누구입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의 대답은?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바리사이들과 율법학자들의 위선을 꼬집으십니다.
겉으로는 회칠한 무덤처럼 깨끗하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찼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그렇게 판단하시는 이유는
예언자들을 죽였던 이들을 자신들의 조상으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예언자들을 죽이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말합니다.
비록 조상이기는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으려고 하면 되는 것 아닐까요?
그러나 예수님은 조상들이 한 행위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짓을 마저 하여라.”
예수님은 인간의 힘으로 조상의 전통 방식에서 벗어날 수 없다고 여기십니다.
조상은 곧 우리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전갈이 개구리와 함께 살고 싶었지만, 결국 자신이 전갈이라는 사실을 잊지 못하여
개구리도 죽이고 자신도 죽는다는 동화가 있습니다.
자신이 전갈이었다는 믿음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결국엔 전갈의 본성이 나옵니다.
우리도 인간이라는 본성을 완전히 잊지 않으면 언젠가는 인간의 본성이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원탁의 기사’로 유명한 아서 왕에 대한 전설을 많이 들었습니다.
아서 왕의 전설은 돌에서 검 엑스칼리버를 뽑은 후
자신이 영국 왕위 계승자임을 알게 된 어린 소년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자신의 혈통을 깨달은 아서는 왕의 역할을 맡아 원탁의 기사단을 결성하고
이 땅에 정의를 가져오려고 노력합니다.
이것을 극화하여 영화로 만든 것이 ‘킹 아서: 검의 전설’(2017)입니다.
아서의 아버지는 한 왕국의 왕이었지만, 동생에 의해 살해당합니다.
그는 전설의 검 엑스칼리버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
자신이 돌이 되어 자신의 등에 칼을 꽂아 죽습니다.
나중에 자신의 혈통만이 그 검을 뺄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어렴풋한 기억으로 천하게 자란 아서는 우연히 그 칼을 뽑을 기회가 생겼고
사람들 앞에서 그가 진정한 왕족임이 증명됩니다.
하지만 어린 아서는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합니다.
그러나 이 때문에 자기 친구들이 죽어가는 것을 볼 수 없어서 검을 다시 집어 듭니다.
그러자 검에서 큰 힘이 나와 자기 부모를 죽인 왕을 이기고 새로운 왕이 된다는 내용입니다.
영화 슈퍼맨도 그렇고, 듄이라는 영화화된 소설도 같은 내용입니다.
모두가 자신의 혈통을 새롭게 깨닫고 새로운 소명과 완전히 다른 삶을 살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우리는 조상의 전통적인 삶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믿음이 되고 그 믿음이 나의 본성을 형성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의 모세는 자신의 혈통에 대한 믿음으로 삶이 완전히 변화된 대표적인 성서의 인물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그리스도와 한 몸이 된 새로운 존재임을 믿고, 인간이었음을 잊어야 합니다.
그 길만이 조상의 죄에서 벗어나 하늘의 백성이 될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조상을 바꾸도록 초대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조상은 교회이고 그 시조는 그리스도와 성모님이십니다.
단군신화에 따르면 우리는 곰의 후손들입니다.
잘 참아낼 줄 알았던 곰이 결국 인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인간의 후손이 되었습니다.
만약 자신을 곰의 후손으로 여긴다면 곰처럼 살 것입니다.
그러나 곰의 본성을 벗고 인간의 본성을 입었기에 우리는 곰을 닮지 않습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창조된 교회의 백성입니다.
우리 조상은 교회의 선조들입니다. 성인들이십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이 세속의 사람이냐, 교회이냐에 따라 우리 삶이 결정됩니다.
이는 우리 힘으로 바꿀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조상이 운명을 결정합니다.
왜냐하면 누구나 자기 조상의 운명대로 살 것이라 믿기 때문입니다.
예언자의 삶은 언제나 고되고 슬프고 외롭습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언젠가 예수님 입에서 직접 흘러나온 말씀들만
따로 모으고 추려서 나름, 분석하고 정리해본 적이 있는데, 참으로 흥미롭고 은혜로웠습니다.
참으로 다양한 유형, 다양한 빛깔의 말씀들이 잘 어우러져 있었습니다.
때로 신음하며 죽어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일으켜 세우고 되살리시는
따뜻한 위로와 생명의 말씀을 선포하셨습니다.
때로 끝까지 회개하지 않고 죽음을 향해 걸어가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강력한 경고의 말씀이 선포되었습니다.
말씀의 강도가 너무 센 나머지 깜짝 놀랄 정도로 직선적이고 공격적입니다.
그러나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하느님께 돌아선 사람들을 향한 어투는
더없이 자상하고 친절하며, 과할 정도로 칭찬하십니다.
제대로 배우지 못한 사람들, 가난한 사람들, 어린이들을 향해서는
가르침의 내용이 너무나 쉽고 명쾌합니다.
그 누구도 당신 구원의 메시지에서 소외되는 사람이 없도록 하기 위한 예수님의 배려가 돋보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언어는 신선하고 파격적입니다.
때로 직선적이고 공격적입니다. 거의 독설과도 가깝습니다. 그러나 세상 쉽고 재미있습니다.
그래서인지, 그분 말씀에 매료된 수천, 수만 명이 언제나 그분 뒤를 따라다녔습니다.
산상설교 때 예수님은 진복팔단(眞福八段)에 대해서 가르치셨는데, 오늘은 분위기가 완전 반대입니다.
지난번은 가르침의 서두가 ‘행복하여라’였는데, 오늘은 ‘불행하여라.’입니다.
“불행하여라, 너희 위선자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아!
너희가 겉은 아름답게 보이지만 속은 죽은 이들의 뼈와 온갖 더러운 것으로 가득 차 있는
회칠한 무덤 같기 때문이다.
이처럼 너희도 겉은 다른 사람들에게 의인으로 보이지만,
속은 위선과 불법으로 가득하다.”(마태 23, 27-28)
특히 마태오 복음 23장은 제목부터가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꾸짖으시다.”입니다.
23장 전체가 위선자들을 향한 예수님의 신랄한 질책의 말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거듭 ‘불행하여라.’른 반복하시며, 그들의 위선과 이중성, 형식주의와 권위주의를 강력하게 경고하십니다.
2천 년 세월이 지난 지금 읽고 있는 저도 섬뜩하고 가슴이 찔리는데,
예수님 시대 당사자들을 얼마나 더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을까요?
또 많은 당사자들은 분노와 적개심으로 이를 갈았을 것입니다.
계속되는 예수님의 강력한 경고 말씀은 적대자들의 마음속에 차곡차곡 쌓여갔을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목숨을 걸고 말씀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언자의 삶은 고되고 슬프고 외롭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주어진 사명입니다.
거대한 구조적인 악 앞에서, 그칠 줄 모르는 불의 앞에서,
정말이지 웃픈 현실 앞에서 ‘이건 정말 아니다.’며 크게 외치는 것은
곧 예수님을 가장 가까이 추종하는 길입니다.
마지막 불행 선언!(6,7)
박상대 마르코 신부
권력(power)이란 참으로 묘한 것이다.
딱 잘라 말하면 권력이란 아주 ‘위험한’, 그러면서도 아주 ‘필요하고 유용한’ 도구로서,
직무나 직책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부터 권력에 대한 많은 고찰이 있었다.
그러나 ‘정치의 시대’라고 하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권력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다.
넓은 의미의 권력은 ‘물리학적 에너지’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의도한 효과를 만들어내는 힘’(러셀)이다. 그러고 보면 권력은 좋은 것이다.
그러나 의도하는 바가 불순하거나 부당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惡을 위해 사용되는 도구로서의 권력이 아무리 중립적으로 善하다 하더라도
목적을 정당화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일의 ‘결과’도 간과할 수 없는 요인이다.
그런데 목적이 항상 결과와 일치하지는 않는다.
필자는 권력을 ‘善이라고 생각되는 장래의 어떤 것을 획득하기 위하여
그가 현재 가지고 있는 방법’이라고 정의한 홉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예수님 시대의 율법학자들은 구약시대를 통틀어 백성들의 지도자로서
율법을 보호하고 전수하는 임무를 수행하기 위하여 권력을 행사하였다.
그들이 지향하는 권력의 목적이 善이었다고 하나 그 결과는 惡을 초래하였다.
선의의 목적이 악을 초래한 결과를 보지 못한 것은 그들의 눈이 멀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판단이다.(마태 13,16.17.19.24.)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파 사람들에 대한 예수님의 엄중한 심판이 고조되는 가운데
오늘은 여섯 번째와 일곱 번째 치욕적인 불행선언이 잇따른다.
여섯 번째 불행선언은 율사들의 속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향한 것이다.
예수께서는 율사들의 ‘겉과 속’을 회칠한 무덤에 비유하신다.
무덤의 외부를 회칠하는 이유가 내부를 덮어버리기 위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외부를 덮어버린다고 해서 내부가 달라질 리는 없다.
그것은 무덤을 아무리 아름답게 겉치장한다 하더라도,
화려한 겉치장으로 그 속에 잠들어 있는 사람이 화려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속은 속이고 겉은 겉이다.
다소 옳게 보이는 겉모양이 속내를 가릴 수는 있으나, 예수님의 눈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분은 율사들의 속내에 가득 찬 위선과 불법을 꿰뚫어 보시기 때문이다.
일곱 번째 불행 선언은 예수님 당대의 지도자들이 구약의 성자들과 예언자들의 죽음에
그 책임을 회피하려는 태도에 대한 고발이다.
그들은 자기들을 조상들과 조상들이 죽인 예언자들과 차별을 두면서
“우리가 조상들 시대에 살았더라면 조상들이 예언자들을 죽이는데 가담하지 않았을 것이다.”(30절)고
자신 있게 말한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바로 이 주장이 그들 스스로를
살인자, 박해자의 후손임을 자백하는 것으로 지적하신다.(31절)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너희 조상들이 시작한 일을 마저 하는 것’(31절)이다.
이것으로 예수님의 율사들과 바리사이에 대한 불행선언이 끝났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더 심하고 치욕적인 예수님의 언변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이 언변은 유다교의 총체적인 종말을 의미하며,
야훼 하느님의 이스라엘 지도자들에 대한 마지막 심판이다.
어쩌면 겉과 속이 무덤의 겉과 속처럼 판이하게 다른 사람들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툿찡포교베네딕도수녀회> 한모금 / 수도자매일복음묵상
전 요세피나 수녀
뜨내기 군중에게조차 행복 선언(마태 5장)을 통해
하느님 나라의 참 행복에로 우리를 초대하시던 예수님께서
오늘은 무슨 연유에서인지 호통을 치십니다.
언제나 우리에게 행복을 주고 싶어 하시는 예수님께서
불행을 선언하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여쭙게 됩니다.
자타공인 하느님을 섬김에, 하느님의 법에 능통한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에게 불행 선언을 선포하십니다.
열심 하기로 유명한 그들이 무엇 때문에 예수님께 야단을 맞고 있을까?
남의 이야기 같지 않아
오늘은 더욱더 세밀하게 들여다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싫어하시는 모습은 "표리부동"이 아닌가 합니다.
물론 당장 마음이 따르지 않더라도 복음적 가치 때문에
의지적으로 선행을 실천한다면
조금 다른 문제이겠지만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더 많이 받은 이에게는 더 요구하시고,
하느님을 안다고 자처하는 이들에게는 한 단계 더 많이,
더 진실한 봉헌을 바라십니다.
하느님 앞에 투명한 마음을 내어드리는 일,
그 투명함이 하느님의 뜻에 온전히 일치되는 것,
이것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궁극적인 목표가 아닐까 합니다.
불행을 선언하시는 예수님 호통의 목적이
우리를 참 행복에로 이끄시고자 하는
안타까운 마음에서 나오는 것임을 깨닫는 우리들이기를 희망합니다.
"행복하여라, 마음이 깨끗한 사람들,
그들은 하느님을 뵈올 것이다."
[출처] 마태 23,27-32 연중 제21주간 수요일|작성자 베네지기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