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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그리스 시절,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패권을 두고 다투던 펠로폰네소스 전쟁 시기, 아테네는 밖으로는 전쟁이 생각대로 술술 풀리지 않았고 안으로는 대중, 평민, 빈민 중심의 민주주의자와 엘리트, 귀족, 부자 중심의 반민주주의자의 대립이 격화된 상황이었고 이 상황을 타개할 한 가지 수가 필요해졌습니다.
그 방법으로 택한 것이 멜로스 섬을 침공하는 것이었습니다. 멜로스 섬은 당시 스파르타와 동맹관계에 있었고 이를 빌미삼아 침공하려고 한 것이었습니다. 거기다가 해군이 강한 아테네의 특성상 스파르타가 지원하러 오기도 힘든 상황이었으며 해상 무역을 통해 부를 쌓는 아테네의 특성상 제해권 관련해서도 멜로스 섬을 침공할 필요성이 있었고 과거 멜로스 섬과 전쟁을 치뤘을 때 이기기는 했지만 굴복시키지 못한 점도 이유가 되었습니다.
물론 아테네는 멜로스를 무작정 침공한 것이 아니라 일단 항복을 요구하는 '관용'을 보여주기는 했습니다. 단, 델로스 동맹군을 소집해 멜로스로 향한 상태로요. 하지만 이유와는 관계로 멜로스 섬은 스파르타와 동맹이지만 그렇게 강한 동맹은 아니라서 특별히 아테네에 의해 조져져야 할만큼의 짓을 저지른 것도 없었기에 멜로스 섬 사람 입장에서는 황당할 뿐이었습니다.
그랬기에 항복을 요구하려 간 아테네인과 어떻게든 전쟁을 피하려는 멜로스 섬 사람간의 대화가 진행되었습니다. 이게 그 유명한 '멜로스의 대화'입니다.
멜로스의 대화는 간단합니다. 아테네 사람이 힘을 내세우며 위압-멜로스 사람이 명분을 내세우며 설득/협박-다시 아테네 사람이 힘을 내세우며 위압-다시 멜로스 사람이 명분을 내세우며 설득/협박-이하 반복 이 내용을 아주 간단히 요약하면 이렇습니다.
아테네: 우리가 강자로서 약자인 너희에게 요구한다. 그러니 말 들어라
멜로스: 이 침공은 보편적인 정의와 맞지 않는다.
아테네: 죽기 싫으면 항복해라
멜로스: 2: 그건 우리보고 당신들 노예(델로스 동맹은 이 시기 무렵엔 그냥 아테네의 독주 체제였습니다. 델로스 동맹을 아테네 제국이라고도 부르는 이유가 이것 때문입니다.)가 되라는데 이게 옳다고 생각하나?
아테네: 너희가 항복하면 우리가 보호해주겠다.(말이 이렇고 사실상 속국이나 보호국이 되라는 소리)
멜로스: 정히 그렇다면 우리는 중립국이 되겠다.
아테네: 거절한다 너네가 바로 항복해버리면 기껏 동맹군 출동시켰는데 우리 이미지가 나빠진다.(동맹군을 출동시킬 정도면 힘으로 뭔가를 보여줘야 하는데 아무것도 안 하고 돌아가면 무력해보이므로)
멜로스: : 우리를 침공하면 중립국들이 어떻게 생각하겠나?(멜로스가 중립국은 아니었지만 스파르타와는 별로 협력이 없던 상태)
아테네: 그딴 생각이 위안이 될것 같나?
멜로스: 스파르타가 우릴 도와줄거다. 괜찮겠나?(실제론 아무도 안 도와줌) 그리고 정의는 우리 편이다.
아테네: 스파르타가 당신네를 도우러 올 리가 없다.
멜로스: 스파르타는 자신들 이익 때문에라도 올 것이다.(스파르타인들이 멜로스로 가서 식민도시를 세웠습니다.)
아테네: 우리에겐 힘이 있다는걸 잊었나?
멜로스: 그래 붙어보자
아테네: 그래보시든가
이후 아테네는 멜로스를 침공하여 전투가 일어났고 전투 결과 멜로스는 점령되었으며 아테네는 멜로스의 모든 남성을 학살하고 여성과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는 당대 그리스권에서는 경악할만한 만행으로 당시 그리스권에서는 그리스계 폴리스끼리는 그래도 동족 의식이 있어서 이러한 행위는 '야만인' 그러니까 바르바로이나 하는 행동이라고 여겼습니다.(야만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그리스권의 시선입니다. 그러니까 광대한 대제국인 페르시아도 그리스권에선 야만인입니다.)
그 결과 일단 이렇게 처참하게 멸망한 멜로스를 보며 소국들이 일단 아테네의 말을 따르게 되었지만 그저 힘으로 찍어누른 것에 불과했기에 겉으로는 따르지만 속으로는 꺼려했습니다. 결국 아테네가 불과 1~2년만에 시칠리아 원정에서 참패한 이후 아테네의 동맹국들은 잇달아 동맹에서 탈퇴하기 시작했고 시칠리아에서 참패한지 10년 뒤 결국 아테네는 수륙 양면으로 포위당합니다.
결국 멜로스에서 겨우 10년만에 자신들이 멜로스인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자신들 또한 멜로스와 같은 운명을 맞을 상황이 되었고 실제로도 아테네에서 먼저 해당 행위를 해서 스파르타에게는 명분이 있었고 테베나 코린트 같은 도시들고 그러자고 했지만 테베를 견제하고자 했던 스파르타에서는 제안을 거절하고 아테네에게 아테네의 국체와 국민을 보존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는 항복을 요구했고 아테네가 이를 받아들여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끝납니다.
멜로스의 일은 아테네의 삽질이자 만행이며 당시 아테네는 민주정이었습니다. 그것도 모든 안건에 대하여 시민 전원이 결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국정은 곧 민의였기에 아테네라는 도시만이 아닌 아테네인의 책임이기도 합니다.
이는 당시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행태가 한몫을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페르시아 전쟁에서 완승을 거둔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패권마저 위협할만큼 강해졌고 동지중해의 여러 지역과 교역을 하여 부를 쌓을만큼 풍요로워졌습니다. 때문에 아테네와 스파르타 주도였던 델로스 동맹에서 아테네의 위상이 높아졌고 이에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이 델로스 동맹에서 탈퇴하여 델로스 동맹은 아테네가 독주하게 됩니다.
문제는 아테네가 너무 강하다보니 아테네는 슬슬 힘만 믿고 동맹국에 행패를 부리기 시작합니다. 멜로스에서 앞서 타소스라는 도시가 멋대로 동맹에서 탈퇴했는데 아테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타소스를 멸망시키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버린 바 있으며 페리클레스가 집권한 후에는 임의로 동맹의 금고를 델로스 섬에서 아테네로 옮기고 동맹국들에게 많은 공납금을 요구하며 내정간섭과 동맹군을 멋대로 운용하는 등 그 정도가 점점 더 심해지기 시작합니다.(이는 2000년 정도 뒤 제국주의 시대에 반복되며 그 당시 열강들의 행동은 아테네의 행동에서 아이디어를 얻은 것이라고 합니다.)
즉 멜로스의 일은 아테네의 오만함, 그리고 그에 젖은 국민들의 잘못된 판단이 합쳐져 벌어진 사건으로 2000년 뒤부터 시작된 제국주의 시대의 악명높은 식민제국들도 대부분 제국주의가 진행될주록 자국에서 드높아진 자유주의 등의 영향으로 민주공화정 혹은 입헌군주정을 택한 나라입니다.
결국 민주주의의 부작용은 민주주의의 시작과 함께했다고 봐도 좋을 것으며 부활한 후에도 그런 문제점을 저질렀으니 민주주의 역시도 완벽한 제도는 아니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고대 그리스 시대나 현대나 민주주의는 선망의 제도입니다. 독재 국가라고 해도 형식상 민주주의 체제를 갖추는 경우가 상당할 정도입니다.(그 북한도 투표, 헌법, 삼권분립 정도는 '명목상' 존재) 그리고 그 이유는 '정치참여'라는 면에선 고대 그리스 시절이나 현대나 딱히 다르지 않습니다.
아테네가 이런저런 문제점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아테네는 '모든 시민'(자국에서 태어날 것+남성)이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체제였지만 아테네만 벗어나고 보면 귀족공화정 혹은 과두정 체제였고 그리스권만 벗어나면 왕정수준이었습니다. 결국 그 당시 전세계 국가들 중에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사람의 비율은 아테네>고대 그리스>그 이외 순이었고 '일반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도 정치에 참여할 수 있는 아테네의 민주정을 선호할 수 밖에 없었고 실제로도 아테네에서는 가진 것 없고 평범할수록 민주주의를 좋아했고 가진것 있을수록 민주주의를 싫어했습니다.(민주주의 극혐가인 플라톤도 명문 귀족 태생) 그리고 이는 아테네 밖에서도 별로 다를게 없었습니다.
그리고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패배한 뒤 아테네는 민주주의와 제해권을 잃었고 스파르타의 주도로 30인 과두정이 세워져 사실상 스파르타의 속국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아테네를 다시 일어서게 한 것도 민주주의였습니다.(사실 이전부터 아테네의 패권은 민주주의 하에서 이뤄졌고 오히려 귀족, 부자, 엘리트 등은 민주주의 덕에 그래도 나름 권력과 엉향력을 유지했지만 민주주의로 줄어든 권력과 영향력을 위해 적국인 스파르타와도 내통하기도 했습니다.)
물론 그 원인에는 30인 과두정의 폭정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정적들을 불법적으로 처형시켰으며 민주주의 지지자들을 마구 죽이는 폭거를 저질렀고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 다시 한번 민주주의를 요구하는 물결이 높아졌고 결국 과두정은 버티지 못하고 붕괴되었으며 아테네는 스파르타에 불만이 많아지던 테베, 코린트와 손을 잡고 다시 한번 재전쟁을 선포하여 스파르타의 패권을 무너뜨렸고) 예전만은 못하지만 그럭저럭 테베, 스파르타급의 강대국으로 복귀합니다.(이후 스파르타는 테베랑 또 전쟁했다가 지는 바람에 국력이 갈려나가고 다시는 회복 못합니다.)
여기서 짚어봐야 할 점은 아테네의 대항마 격이었던 스파르타의 행보입니다. 아테네를 이긴 후 그리스권의 패권은 다시 스파르타에게 돌아갔습니다. 하지만 아테네가 자국에서는 정상적인 정치를 하면서 외부적으로 제국주의적 행보를 보이기도 했다면 스파르타는 내부도 엉망이지만 밖으로는 아테네보다 더한 제국주의적 행보를 보인 것입니다.
스파르타는 공화정인 아테네와는 달리 2명의 왕이 공존하는 왕정이며 이 2명의 왕, 5명의 집정관, 원로원(왕2명+의원 28명) 그리고 민회가 서로서로 견제하며 돌아가는 정치 시스템을 갖춰서 정치제도는 문제가 없었지만 내정 면에서 문제가 많았습니다. 스파르타는 소수의 스파르타인이 주변을 정복하여 발전하였고 이 때문에 소수의 정복민(스파르타인)과 다수의 피정복민(헤일로타이)이 공존하게 되었는데 시민계급인 스파르타인은 노예계급인 헤일로타이를 가혹하게 수탈하고 반항하면 무자비하게 때려잡아 그들을 공포로 복종시키려고 했습니다. 이러다 보니 스파르타에서는 수시로 헤일로타이의 반란이 일어나 대외팽창은 힘든 구조로 나라가 돌아갔고 반대로 자국의 이러한 행태를 패권을 잡자 타국에게도 비슷하게 적용했습니다.
그 결과 스파르타는 오히려 아테네보다도 심한 폭정을 일삼아(아테네가 동맹국에 강요한 공납금도 무거웠지만 스파르타는 그것보다도 더 거뒀습니다. 정작 아테네는 그래도 이걸로 패권을 유지하기 위한 함대를 건설하는 등 좀 알뜰하게 썼지만 스파르타는 사치로 낭비했습니다.) 아테네에게 치를 떨어하던 동맹국들 입장에선 이리를 몰아냈더니 호랑이가 온 상황이 되었고 이것이 반발을 부른 것입니다. 물론 스파르타의 강요로 세워진 각지의 과두정들의 폭정은 덤이고요. 심지어 스파르타는 아테네와는 달리 패권을 유지할 능력도 국력도 없었습니다.
스파르타는 분명 당시 기준으로 세련된 정치시스템을 갖추었습니다. 훗날 중세 유럽의 공화정 국가들은 스파르타의 정치시스템을 참고했고 오히려 아테네의 민주주의는 아주 오랫동안 잊혀진 체제였습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그런 시스템을 두고도 소수의 지배층만이 이 시스템의 혜택을 보고 나머지 피지배층은 가혹하게 대하는(중간계층인 페리오이코이는 그래도 인간적으로 살긴 했습니다.) 구조를 유지했고 결국 아테네보다도 더한 내정의 불안정성에 시달려야 했으며 나중에 테베와의 전쟁에서 진 후에 테베의 강요로 이 피지배민들이 해방되자 국가 자체의 역량이 박살나는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적어도 자국민이라면 누구든 평등하게 대하는(남녀차별은 있었지만 이 시대에는 당연한 거니까 넘어갑니다.) 아테네는 무너져도 일어설 역량이 있었지만 스파르타는 그러지 못한 것입니다.
물론 이는 스파르타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스파르타는 그래도 서로 권력균형을 이뤄가게 설계하여 정치까지 막장은 아니었지만 전근대까지 수많은 왕조들은 훌륭한 명군들이 등장하면 전성기를 맞았지만 암군이나 폭군이 나타나면 나라가 쇠하다 망하기 일쑤였고 어떤 정치체제를 갖춰도 암군이나 폭군이 1명 혹은 연속으로 나타나면 망하였기에(백년 이상 거진 4연속 암군이 나온 명나라도 결국은 망했습니다.) 결국 1인에 의존해야 하는 체제이며 군주 대신 여러가지 다른 이름의 직함을 달고 공화정 탈을 쓴 독재체제 역시도 여기에서 벗어날 수 없으니 결국 정치참여를 하는 사람이 적은 모든 체제의 단점이라 봐야 할 것입니다.
인구구조도 일단은 스파르타에게만 죄가 있는건 아닙니다. 당시 그리스권에서 자유시민이란 무장하여 군대에 복무할 수 있는 남성이고 무장을 위해선 재력이 필요해서 웬만하면 재력이 있어서 시민이 될 수 있습니다. 반면 아테네는 강한 해군을 운용했고 이 때문에 빈민층들은 재력이 없어 무장할 순 없지만 대신 군함의 노잡이가 되어 전쟁에 참가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어 두 국가는 인구구조에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스파르타의 경우는 아테네처럼 대규모 함대를 동원하기에는 가난했고 또 이미 헤일로타이와의 악연은 수백년전부터의 일이라 그들을 써먹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그래도 스파르타에서 먼저 잘못된 정책을 통해 인구구조를 이렇게 만든 면이 있습니다.(시민계급의 비율에서부터 스파르타는 6% 정도지만 아테네는 55%였고 둘 다 노예가 있지만 스파르타는 인구의 2/3이 노예고 아테네는 1/3이 노예이며 그나마도 아테네의 노예에 대한 처우는 그리스권에서는 제일 좋은 편이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이런 스파르타 VS 아테네 구도는 작품에서도 비슷하게 나타납니다. 골덴바움 왕조는 은하연방을 이어받았고 국력이 강한 국가이지만 극소수의 문벌귀족이 부와 권력을 독점하고 다수의 평민들을 돌보지 않았기에 왕조가 멸망의 위기에 이르자 문벌귀족들만이 왕조를 지키려 했을 뿐(그마저도 지들끼리 의견 갈리고) 평민들은 방관하였으며 나중에 라인하르트가 선정을 펼치자 골덴바움 왕조 따위는 어찌되든 말든 라인하르트만 지지하게 되며 결국 골덴바움 왕조는 문벌귀족 잔당은 정통정부 세웠다가 망한 뒤 행적이 없고 왕조는 라인하르트의 찬탈로 멸망합니다. 물론 황가도 이후 언급이 없고요.
반면 동맹은 소수 도망자 집단이 세웠으며 국력이 약한 나라지만 적어도 동맹은 멸망하는 그날까지 시민들에게는 제국보다 더 많은 권리를 주었고 시민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누군가는 들고 일어서며 나라가 망한 뒤에는 제국을 상대로 끊임없이 투쟁을 하며 양 함대의 실적과 더해져서 결국 바라트 성계 자치령이라는 제한적인 영역과 제한적인 주권이지만 그래도 뭔가 결과물은 만들어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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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물론 민주주의가 잘 돌아가는건 그걸 돌아가는 대중이 똑똑하고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그렇게 행동할 줄 알 때 한정입니다. 안 그러면 멜로스 섬을 초토화시킨 아테네나 꼴에 민주주의 국가라면서 인종주의, 제국주의, 우생학에 잔뜩 취한 제국주의 국가같은 나라가 되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