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저께, 비 오는 날에 우산을 잃어버렸다. 이런 덴장... 비가 오는데 우산을 잃어 버리다니....
기분이 하도 엿같아서 야간 수업도 째고 집으로 향했다. 빗방울 조금이라도 가늘 때 가야겠다고 나서서, 조금이라도 빨리 가야겠다며 버스 두번 탈 셈에 정류장으로 나섰는데, 평소에 잘만 다니던 81번 버스가 그날 따라 오질 않아 약을 바짝바짝 올린다. 가늘던 빗방울은 점점 굵어졌고, 길 맞은 편 차선에선 81번이 다섯 대째 지나간다. 같이 기다리던 사람들 두엇은 버스 기다리는 것을 포기하고 아예 택시를 잡는다. 어깨 죽지 쪽이 적당히 젖어들어갈 즈음에야 버스가 온다. 궁시렁...
왕십리에서 갈아타는 버스 정류장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는데 저만치 정류장에 내가 타야 할 570-2번이 정차해 있다. 어지간하면 뛰지 않는 성격이나, 그 버스를 놓치지 않으려고 냉큼 뛰어갔다. 근데 잘만 기다리고 있던 버스가 내가 도착하자 마자 움직이기 시작한다. 이런, 씨바.. 갖고 노냐...? 운전기사는 내 시선을 의도적으로 외면하고 핸들을 잡아 튼다. 머리에 스팀도는 소리가 들렸다. 궁시렁 궁시렁 거리며 다음 버스를 기다렸다. 빗방울은 점점 더 굵어진다. 입고 있던 봄잠바에 모자가 달려있음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주먹이 부들부들 거리는데, 참고 다음 버스를 잡아 탔다.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집에 당도해서 보니, 가방에 늘 달고 다니던 The Beatles <One> 뱃지도 어디서 떨어졌는지 없어져 버렸다. 줴기랄.. 오늘 아주 날 제대로다.....
아이 씨...... 어떻게 비가 오는 날 우산을 잃어버리냐... 마치 요즘 내 나사 풀린 생활을 그대로 반영하는 듯 하다. 어이가 없는 것은 우산을 언제 어디서 잃어버렸는지 통 기억하질 못하겠더라는 것이다. 과실에서 흘린 것인지, 식당에 두고 나온 것인지, 아니면 오전 수업 강의실에 떨궜는지 오후 수업 강의실에서 갖고 나오는 걸 잊었는지 도통 기억이 나질 않는다. 그러니 당근 찾을 방도도 없다. 자괴감이 드니깐 기분 진짜 드럽다.
우산을 잃어버리게 되는 경우가 아주 가끔씩 있어 오기는 했다. 그 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우산 분실 사건은 고등학교 1학년때의 일이었다. 아침부터 비가 오는 날 학교에 가려고 나서는데 어머니께서 그 전전날 쯤 백화점에서 사셨다는 '비싼 우산'을 챙겨주시며 한마디를 덧붙이셨다. "이거 비싼 우산이니깐, 잃어버리고 오지 마...?" 그 우산이 비싼 만큼 '좋은 우산'이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난 아직도 왜 어머니께서 그런 걱정을 하시면서까지 굳이 그 비싼 우산을 내게 챙겨주셨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어쨌든 그날, 꼭 그 말이 씨가 됐다는 듯, 비싼 우산을 처음 쓰고 가서는, 끝내 잃어버리고 집에 오고 말았다. 그 일로 아주 오랫동안 난 어머니한테 부주의한 넘으로 면박을 받아야 했고, 아직까지도 '우산 잘 잃어버리는 넘'으로 찍혀있다.
근데 사실 억울하게도, 정확히 말하자면, 그날 우산은 내가 잃어버린 게 아니었다. 누군가 훔쳐간 것이었지... 아침에 우산을 들고 가서는 책가방과 함께 책상 고리에 고이 걸어두었던 것이었고, 그러므로 누군가 작심하고 훔쳐가려고 맘 먹었다면 도리가 없는 상황이었다. 어딜 가든 그 우산을 들고 댕길 수는 없었으니깐. 그리고 누가 설마하니 돈도 아닌 우산을 훔쳐갈 것이랴 하고 생각했더랬으니깐. 그 우산이 훔쳐가고 싶을만큼 '좋은 우산'이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하지만 어쨌든 집에 갈때 고리를 확인해보니 어느새 우산은 사라져 있었고, 누가 훔쳐갔는지도 모르는 채, 나 역시 어머니만큼은 속상해 하며 집에 왔던 것이었는데, 제대로 항변도 하지 못한채 어머니한테 혼쭐이 나야 했었다.
비 오는 날 우산을 잃어버렸다. 날씨도 우중충한데 뭘 잃어버리면 기분 무지 나쁘다. 게다가 그 잃어버린 게 하필 그날 가장 요긴한 물건 -- 우산이면 기분 나쁜 걸 넘어서 막 화가 날라구 그런다.
기분이 너무 안 좋아서 집에 오자 마자 라면을 끓여먹었다. 너무 속상해서 어머니한테 하소연을 했다가, 긁어 부스럼을 만들어버렸다. 어머니는 아직도 날 맨날 우산을 잃어버리는 넘으로 알고 계신다... 이번 우산은 2년이나 가까이 쓰고 다니던 전용우산이었는데...괜히 말했다가 혼만 나고, 에이... 본전도 못 건졌다.
우산은 2000년도에 명동에 있는 롯데백화점에서 세일할 때 2만원 주고 샀다. 미치코 런던 상표의 하늘색 체크무늬 3단 자동 우산이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내가 산 건 아니고, 전에 사귀던 아이가 사 준 것이다. 아이는 자기 것으로는 분홍색 체크무늬를 골랐다. 비 오는 날 이 우산을 잃어버림으로써, 내게 있던 또 한 개의 그녀가 사라져 버렸다. 기분, 정말 엿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