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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에마예수교회
신우인 목사
인자가 올때에 믿는 자를 보겠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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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 18:1-8
지금으로부터 60여 년 전, 뉴욕시립 병원 정문 앞에 생후 6개월 된 아기가 버려져 있었습니다.
그 아기는 날 때부터 소경인데다가 뇌성마비에 걸린 정신박약아였습니다.
병원 당국은 이 일을 어떻게 하나 고심하고 있는데, 메이 렘케라는 간호사가 나섰습니다.
당시 52세로 따뜻한 마음과 깊은 신앙심을 가진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약속했습니다.
“내가 죽는 날까지 이 아이를 돌보겠습니다.”
그러나 메이는 아기를 보는 순간 너무나 비참한 인간 생명의 무기력함에 울어야 했습니다.
우유를 주어도 빨아먹는 반사 본능마저 없었습니다.
반응도 없는 아기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이야기도 해주며
온갖 사랑과 정성을 다해 돌보아 주었습니다.
그러나 식물 인간 레슬리는 단 한 번의 움직임도, 웃음도, 눈물도, 말 한마디도 없었습니다.
메이는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주님, 제가 스스로 레슬리를 찾아 나선 것이 아닙니다.
주님께서 제게 맡기신 것입니다.
거기엔 이유가 있을 것 아닙니까?
언제 그 이유를 가르쳐 주시겠습니까?”
기도라기보다는 절규였습니다.
별의별 치료 요법을 동원하였지만 레슬리에게는 어떤 변화도,
살아있다는 신호 하나 보이지 않았습니다.
레슬리가 18세 되는 날, 남편과 친척들은 그만 포기하고 기관에 보내자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메이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랑의 주님, 성경의 기적을 믿습니다.
이 아이에게도 기적을 허락하소서.
그를 가두어 놓은 감옥을 깨뜨리시고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나게 하옵소서.”
그러던 어느 날, 메이는 레슬리가 엄지손가락으로 기타를 튕기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실로 18년 만에 처음으로 보여준 이 기적 앞에서 메이는
“음악이다. 음악!” 이라고 소리쳤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레슬리의 방에 피아노 전축, 라디오 등을 가져다 놓고
온통 음악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그러나 레슬리는 한 번의 기적으로 만족한 듯,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실망도 너무나 컸습니다.
그러던 1971년 어느 겨울 새벽, 메이와 남편은 음악소리에 잠이 깼습니다.
누군가가 차이코프스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치고 있었습니다.
순간 메이는 무엇에 홀린 듯, 레슬리의 방으로 달려갔습니다.
거기에는 레슬리가 미소를 머금은 채,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습니다.
기절할 듯이 놀란 메이는 순간 무릎을 꿇고 감사의 기도를 올렸습니다.
“하나님 참으로 감사합니다. 레슬리를 잊지 않으셨군요.”
순간 레슬리의 눈에도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실로 21년 만에 처음으로 흘리는 눈물이었습니다.
레슬리는 노래까지 불렀습니다.
레슬리의 성량은 너무나 풍부하였습니다.
레슬리는 뉴욕 텔레비전에 출연하여 피아노를 연주하고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음악은 사랑입니다.”
이 말이 레슬리가 한 첫말이었습니다.
미국 매스컴은 이 실화를 메이 부인의 사랑과 기도의 기적 이라고 보도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현재 제자들과 함께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입니다.
예루살렘으로 가는 마지막 여행입니다.
그 곳에는 십자가 고난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잘 알고 계셨습니다.
그러므로 몇 주에 걸쳐 살펴본 예수님의 가르침은 대단히 중요한 내용들입니다.
한 치 앞을 내다 볼 수 없는 세상,
생명의 위협이 도처에 깔려 있는 상황에서 예수님 없이 어떻게 제대로 살아갈 수 있는가,
그 길을 유언처럼 남기신 것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시작과 끝을 특별히 눈 여겨 보셔야 합니다.
시작은 이렇습니다.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을 비유로 하여 가라사대”
끝은 이렇습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길은 곧 항상 기도하고 낙망하지 않는 것인데,
그렇게 믿음을 지킨 사람들이 얼마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비유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어떤 도시에 한 재판관이 있었는데,
그 재판관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았고, 사람들을 무시하였습니다.
힘 있고 돈 있는 사람에게는 유리한 판결을 내리는 그런 재판관이었습니다.
그런데 한 과부가 매일 찾아와서는 하소연을 합니다.
저의 억울함을 풀어주소서.
그 과부는 힘도 없고 가난한 사람이었습니다.
너무나 졸라대므로 그 불의한 재판관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한을 풀어 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나를 괴롭게 하리라.
그래서 그 과부의 억울함을 해결해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판관의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으로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한을 풀어주지 아니하시겠느냐?”
세상은 불의한 일로 가득 차 있어 살기가 만만치 않습니다.
애를 써야 살아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불의한 세상에서도 노력하고 애를 쓰면 원하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그런데 우리 하나님은 절대로 불의하지 않습니다.
사랑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시는 것은 너무나 당연합니다.
기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그 어떤 기도도 하나님께서는 듣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 사실을 절대로 잊으셔서는 안됩니다.
제가 가장 좋아하는 성경 구절 중에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 51:17)
다윗은 군대 삼천을 거느리고 자신을 쫓는 사울 왕을 피하며 10년을 떠돌아다녔습니다.
목숨이 촌각을 다투며 오락가락하는 상황에 놓인 적도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상황이 나아지지 않았습니다.
과연 내게 소망은 있는가?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너무나 멀어 보입니다.
때로는 유혹에 빠져 몹쓸 짓을 하였습니다.
심한 자괴감에 괴로웠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기도 외에는 할 것이 없었던 다윗이 문뜩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도저히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은 죄책감,
바늘 틈만한 출구도 보이지 않는 절망감,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무력감.
바로 그때 그 상한 심령으로 그래도 주 앞으로 기어나가는 기도,
너무나 기가 막혀 아무 말도 못한 채 엎드려 있을 수밖에 없더라도,
그 기도야 말로 하나님께서 가장 기뻐 받으시는 기도, 최고의 기도라는 것입니다.
우리들의 작은 신음에도 응답하시는 하나님이심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내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어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약 4:3)
내 욕심으로 구하는 기도는 하나님께서 들어주지 않으십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일을 저질러놓고는 그 수습을 하나님께서 해달라는 기도도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그런 기도도 하나님께서 들어주십니다.
그런데 매사에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기도를 통하여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 깨닫게 되고,
점점 성숙해지기 때문입니다.
기도에서 기억해둘 만한 법칙이 있습니다.
NWSG 법칙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 기도에 응답하십니다.
그런데, ‘No!’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하지 말아야 합니다.
때로는 ‘Wait!’라고 하십니다.
아직 때가 아닙니다. 참고 기다리셔야 합니다.
‘Slow!’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완급을 조절하며 천천히 서두르지 말고 해나가야 합니다.
마침내 ‘Go!’라고 하실 때가 있습니다.
그때는 주저하지 말고 과감히 나가셔야 합니다.
‘가라’하시는 하나님의 응답을 들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 같지요?
네 그렇습니다.
그런데 기도도 하지 않으니까 ‘가라’는 응답을 받지 못하고,
또한 ‘가라’는 응답을 받았음에도 주저하다가 아예 주저앉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무슨 일이든지 기도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크고 작은 모든 일에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기도는 세상을 이기는 가장 강력한 수단입니다.
기도처럼 큰 선물도 없습니다.
유다서 1:9 말씀입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
모세는 가장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모세가 죽자 사탄과 실랑이가 벌어졌습니다.
그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사탄이 모세의 허물을 들춰내며 지옥으로 가야한다고 주장합니다.
사탄의 참소에 천사장 미기엘도 감히 그 참소를 논박할 말을 찾지 못합니다.
그런데 미가엘이 말합니다.
“주께서 너를 꾸짖기를 원하노라.”
그러자 사탄도 꼬리를 내리고 물러나 버립니다.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합니다.
기도가 사탄도 능히 물리치는 강력한 이유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름 때문입니다.
그런데 명심, 또 명심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날, 귀신들린 아이를 고치기 위하여 제자들이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명령했지만
귀신은 비웃기만 하지 도무지 나갈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께서 오셔서 제자들을 꾸짖는데,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얼마나 너희를 참으리요”
(마 17:17)라고 하셨습니다.
기도는 주문이 아닙니다.
주문은 그 자체에 힘이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주문처럼 되뇌이고,
목사의 기도가 더 능력이 크다고 생각하는 것이 기도의 최대 맹점입니다.
이것이 다름 아닌 미신입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곧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입니다.
누가 귀신을 내쫓으려고 했습니까?
일개 목사가 아닙니다.
바로 예수님의 제자들이었습니다.
누구 이름으로 했습니까?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입니다.
그래도 사탄의 졸개인 귀신들이 비웃기만 했습니다.
귀신에게 쩔쩔매던 제자들이 훗날 기도하면,
아픈 사람이 나았고 기적도 일어났습니다.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하나님과 가장 강력한 관계가 생겼기 때문입니다.
죽음조차도 그 사랑의 관계를 끊지 못했습니다.
죽음보다 강한 하나님과의 관계.
이것이 기도를 강력하게 만드는 유일한 근거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과의 가장 강한 라인을 만들어야 합니다.
가장 잘못된 말은 목사님이 기도해주셔서 나았다는 것입니다.
이 말처럼 목사의 버릇을 나쁘게 하는 것도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마지막으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러자 멀리 떨어져 있는 하나님 성전의 두꺼운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쫘악’하고 갈라졌습니다.
이 휘장은 하나님께서 임재하시는 지성소와 세상을 가르는 것으로,
이 휘장 안에는 오직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다른 사람이 들어갔다가는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숨을 거두자 이 휘장이 갈라진 것입니다.
예수님의 대속적인 죽음으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또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은혜 중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상태도 별로 좋지 않은 목사를 세우는 일은,
예수님께서 죽음으로 찢으신 이 휘장을 다시 치는 일입니다.
그 일을 한국 교회가 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찌 이를 방치할 수 있겠습니까?
물론 목사에게 기도를 부탁해야 됩니다.
당연히 목사는 성도들을 위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또한 교우들과 함께 합심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서로를 위하는 간절한 마음들이 모아지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께서 칭찬하십니다.
그러나 기도는 내가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기도는 잘 하고 못하고가 없습니다.
말 못하는 아기도 엄마와 가장 긴밀하게 의사소통을 합니다.
바로 엄마와 아기 사이의 사랑으로 인한 것입니다.
주님을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무슨 말이든지 토로하십시오.
그것이 가장 아름답고 훌륭한 기도입니다.
기도가 하나님께서 주신 최고의 선물인 이유는 의식이 있는 한 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숨 거두기 직전까지 행할 수 있게 하신 하나님의 놀라우신 조치, 이 자체가 은혜입니다.
내가 하는 기도로 맞이하는 죽음 얼마나 행복하고 평안하겠습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근심과 걱정을 기도로 대치해야 합니다.
화나는 일 속상한 일을 모두 기도로 바꿔야 합니다.
기도의 생활화입니다.
기도의 최고는 푸로슈케의 기도입니다.
예수님 승천 이후, 마가의 다락방에서 드렸던 기도입니다.
푸로슈케의 기도는 ‘찬양의 기도’입니다.
하나님께 부탁하는 간구의 기도와는 달리,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는 기도요,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는 그 놀라운 모습을 본 마당에 무슨 소원이 있겠습니까?
그저 감격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뿐입니다.
그 푸로슈케의 기도를 드리자 하늘 문이 열리고 성령이 강림하였습니다.
어떤 처지에서도 하나님께 영광과 감사를 돌리는 푸로슈케의 기도가 터져 나오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포이에마(걸작품)이 되고 싶은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께서 물으십니다.
“인자가 다시 올 때에 믿음을 보겠느냐?”
우리 모두 다 당당하게 “예 있습니다!”라고 대답하기로 합시다. 2010.02.16 19:3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