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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 사 (스페샬) 스크랩 4.19혁명의 횃불, 김주열열사 이야기
(정태하) 추천 0 조회 127 10.04.19 08:2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19 혁명의 횃불, 김주열열사 이야기

 

 

지난 11일은 4.19 혁명의 도화선이 된,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희생하신 김주열 열사의 50년만의 장례식이 이뤄진 날입니다. 근현대사를 배운 학생이라면 교과서에서 한번쯤은 들어보았을 법하지만 김주열 이름에 '열사' 를 자연스레 붙인지는 겨우 10년도 채 되지 않고 아직도 김주열 열사의 묘지나 비석에는 '김주열군지묘' 라고 쓰여 있지 '열사'란 단어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이번 4.19 혁명 50주년을 맞아 조명된 김주열 열사의 장례식이 사망 50년 만에 처음 범국민장 으로 경남 마산중앙부두에서 열렸습니다.

저도 교과서를 통해서 4.19혁명의 시작점이 된 김주열 열사에 관해서는 알고 있었지만 교과서 내용 몇줄로 그쳤는데요, 그럼 4.19 혁명 50주년인 해를 맞이해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불꽃을 당긴 김주열 열사에 관해서 좀 자세히 알아볼까요 ?  

 

 

- 1부 , 김주열 열사는 어떻게 살았는가?

 

1 김주열 열사는 1944년 10월7일 부친 김재계, 모친 권찬주여사와의 슬하에서 3남2녀 중 둘째 아들로 남원시 금지면 옹정리 9번지에서 태어났습니다.

 

2. 1956년 금지동초등학교, 1959년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같은 해 남원농업고등학교(현, 용성고등학교)에 장학생으로 진학하였으나 그 해 7월 퇴학, 당시 가세가 기울어 부득이 선택한 학교였기에 적성과 진로가 맞지 않은 진학이었습니다. 이후 서울에서 잠시 재수를 준비했습니다.

 

3. 1960년 그 당시 전국의 가난한 수재들이 몰려들어 명문고로 손꼽히던 교통고등학교 입학시험에 응시하였으나 낙방. 은행원이 되어 가계를 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지인의 권유로 마산 상업고등학교에 응시, 합격자 발표를 확인과 유학준비를 위하여 마산 이모할머니 댁에 간 것이 역사적 운명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부, 김주열 열사에게 무슨 일들이 있었는가?

 

 

 

 

 

 

 4. 1960년 3월15일, 이승만 독재정권의 악랄한 부정선거에 분노한 마산시민들이 봉기하여 거리 곳곳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습니다. 이날 밤 무학초등학교 앞에서 개표장인 마산시청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 열사는 경찰의 총탄에 맞서 격렬한 투석전을 벌이던 시위대열에서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고 마산 무학초등학교 근처에서 숨졌습니다. 시위대가 흩어진 후 경찰은 참혹한 모습의 시신을 숨기기 위해 열사 시신에 돌을 달아 마산 앞바다에 수장시켰습니다. 이날 거리 곳곳에서 붉은 피를 흘리며 희생된 민주열사들이 여럿입니다. 열사는 이후 27일 동안 행방불명으로 처리되었다고 합니다.

 

5. 행불소식을 접한 어머니 권찬주여사는 바로 마산으로 달려와 관계기관은 물론 마산의 시장바닥과 골목골목을 헤매며 열사를 찾아 달라 호소했고, 시내에 파다하게 퍼진 소문대로 마산 시청의 연못을 다 퍼냈으나 허탕. 아들을 애타게 찾는 권찬주 여사의 애절한 사연이 마산시민들의 심금을 울렸고 전 국민들의 비상한 관심사가 되었습니다.

 

6. 전국을 뒤흔들었던 3.15 의거를 불순분자들의 책동으로 몰아가는 자유당 독재정권의 최후발악적 탄압으로 민심은 더욱 흉흉했고, 겉으로는 불안한 침묵이 계속되던 중. 4월11일, 행방불명 27일만에 열사의 주검이 마산 중앙부두에서 떠올랐습니다.

거룻배를 타고 홍합을 채취하던 한 어부에 의해 오른쪽 눈에 최루탄이 박힌 열사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시신발견의 긴급 정보를 접한 부산일보 허종 기자는 옷 속에 사진기를 숨기고 경찰들 몰래 사진을 찍었고, 이 참혹한 열사의 사진 한 장이 전국은 물론 전 세계를 경악하고 분노케 했습니다.

 

 

 

 

 -3부 , 김주열 열사가 남긴 것은 무엇인가?

 

 

 

7. 마산도립병원에서 열사의 참혹한 시신을 확인한 마산시민들의 분노는 2차 마산시민 항쟁으로 터졌습니다. 이날 마산시민봉기의 거센 불길이 전국으로 번져 마침내 4.19혁명을 이루었고 독재자 이승만은 4월26일 하야 성명을 내고 하와이로 망명하였습니다.

 

8. 3월15일 밤 열사는 독재의 억압과 불의, 부정, 부패에 항거한 마산시민항쟁에 이름없는 의로운 한 청년학생으로 참여하였으나 열사가 민주의 횃불로 부활한 4월11일, 바로 그날부터 4월 혁명의 선봉장이 되어 우리 현대사의 한 획을 긋는 위대한 역사를 만든 인물이 되었습니다.

 

9. 3.15의거가 청사에 길이 빛나는 역사가 된 것은 4.19때문이며 4월 혁명은 4.11마산시민항쟁으로 쟁취한 위대한 민중승리의 역사입니다. 김주열 열사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민주혁명의 횃불로 자유, 민주, 정의를 지키고자 하는 모든 이들의 가슴속에 아직도 살아있습니다.

 

 

 

  김주열 열사는 이렇듯 16살의 어린 나이로 휘몰아치는 정부의 탄압과 부정 비리의 잔재 속에서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그들 권력의 틈바구니에 작은 숨결이 짓밟히게 됩니다. 그러나 열사의 참혹한 죽음은 일순간에 이는 바람이 아닌 마산지역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을 지폈고 결국 민주주의 실현을 위한 과감한 한발을 내딨게 하는 4.19의 원인이 됩니다.

 

 

  김주열 열사에 관해 조사하던 중 가까운 지인과의 인터뷰를 찾을 수 있었는데요, 하씨는“시위대에서 주열이를 발견한 광열(김주열의 형)이가 사람들을 헤치고 고함을 치며 다가가 동생의 손을 잡았지만 밀리는 사람들의 힘에 그냥 놓치고 말았다”며 “그게 두 형제의 마지막 만남이 되었다”고 전하였으며“마지막 가는 길까지 시신을 깨끗이 닦지 않고 수의조차 입히지 않은 만행을 결코 용서할 수 없다”며  그 당시의 안타깝고도 처절한 상황을 가늠해 볼 수 있었습니다. 

또 하씨는 그동안 김 열사에 관한 기록들이 왜곡되거나 폄훼되는 일이 있었다며 몹시 마음 아파했습니다. 그는“주열이가 당시‘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다’는 식으로 죽음의 의미가 훼손되는 일이 있어 너무 안타깝다”“그때는 모두가 처음엔‘구경’하러 나갔다가 데모꾼이 됐지, 80년대처럼 계획을 세워 시위를 한 게 아니었다”고 지적했습니다.

 

  4.19 혁명 50주년인 올해를 맞아 김주열열사기념관, 범국민장 및 생가복원 등 다양한 각도로 김주열 열사를 기념하는 사업들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그 지인의 인터뷰에서 알 수 있듯이 김주열 열사를 단순한 사건 희생인물로 일부에서는 평가하고 있다는 부분입니다. 민주주의의 꽃을 이루기 위해 노력했던 수많은 여린 목숨들이 한줌의 재로 흩어져버리는 것이 아닌 민주주의란 이름 안에 뿌리를 내리고 지탱하는 기반이라는 것을 우리는 모두 잊어서는 안되며 민주주의의 꽃이 아릅답게 영원히 피어가도록 지키는 것은 지금의 세대와 다음, 그 다음의 후손들에게  남겨진 몫입니다.

 

 

사진 및 자료출처_

꾸러기보훈광장  http://kids.mpva.go.kr/

국민일보  http://www.kuk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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