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려(張起呂,
1911-1995) 선생님은 1911년 음력 8월 14일 (호적상으로는 1909년 7월
15일) 평안북도 용천군(龍川那) 양하면(揚下面 입암동(立岩洞) 739번지에서
한학자였던 장운섭(張雲燮)과 최윤경(崔允柳)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부유한 가정에서 자란 그는 여섯 살 때인 1918넌 부친이 설립한 의성학교(義聖學校)에
입학하였다. 이 학교에서 5년간 교육을 받은 그는 1923년 졸업하였다.
목사가 된 김치묵(金致默), 전 대법원 행정처장을 지낸 김병화(金炳華)는
동기동창이었고 테너 가수인 이인범(李仁範)은 3년 후배였다. 의성학교를
졸업한 그는 송도(松都)고등보통학교에 진학하였고 이 학교에서 5넌
간의 과정을 마치고 19B년 졸업하였다. 한 때 모교인 의성학교 교원으로
일할 것을 고려하기도 했으나 상급학교에 진학하기로 하고 경성의학전문학교(京城醫專)에
지원하였다. 이때에는 가정 사정이 좋지 못했으므로 단순히 학비가 싼
학교를 선택한 것이라고 했다. 이때 그는 이 학교에 들어가게만 헤 준다면
의사를 한번도 못보고 죽어 가는 사람들을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아마 이것이 ‘선한 의사’로서의 생에를 결단했던 첫 출발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이 학교에 입학한 그는 5년간의 과정을 마치고
1932넌 3월 졸업하였고, 그해 4월9일 김봉숙(金鳳淑)과 결혼하였다.
이때 그의 나이는 22세였다.
그는 장인이 된 김하식(金夏植)의
권유로 백인제(白緣濟) 선생 문하에서 외과를 전공하였다. 그후 그는
후복막 봉과직염(後煩模 峰案織失) 과 패혈증(敗血在)에 관한 연구를
하였고, 1940년 3월에는 "충수염 및 충수복막염의 세균학적 연구"라는
제목의 의학박사 학위 청구논문을 나고야 대학에 제출하였고 그해 9월에
통과되어 의학박사가 되었다. 그동안 경성의전 외과에서 봉사했던 그는
이용설의 소개로 1940년 3월의 평야의 연합 기독병원 외과 과장으로
갔다. 이 병원은 1981년 의료선교사로 내한한 감리교의 윌리엄 홀(Dr
William Hall, 1860-1895)이 1984년 11월 34세의 나이로 한국에서
사망하자 그의 미망인에 의해 1%년 설립된 기흘병원(The Hall Memorial
Hospital)으로 시작되었는데, 1923년 평양의 장로교병원과 병합한 후
평양 연합병원으로 개칭된 평양지방의 기독교 병원이었다. 이 병원을
연합병원이라고 한 것은 감리교 선교부와 장로교 선교부가 연합하여
운영하던 병원이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이 이 병원으로 옮겨 간지 두달
후인 그해 11월에는 원장이었던 북감리교 선교사 안도선(安道宣, Albin.
Garfield Anderson, 재한기간 1911-1941)이 귀국하게 되자 장기려는
박사학위 소지자라는 이유 때문에 병원장에 취임하였다. 그러나 인사에
불만을 가진 이들의 질시와 텃세때문에 불과 두달만에 원장직에서 물러나
외과과장으로 강등되었지만 변함없이 성실히 봉사한 일은 아름다운 일화로
희자되고 있다. 그는 이 때를 회고하면서 “환자 치료에만 전념할 수
있는 강등 자체는 조금도 서럽지 않았으나 텃세는 서러웠다”고 술회하고
다시 외과 과장직으로 돌아와 일한 10개월 동안은 그의 생애를 통해
“7}장 밀도 있는 신앙생활을 했다고 했고 이곳에서 믿음으로 사면초가를
극복한 일은 “평생을 통해 신앙생활로서 가장 보람이 있었을 때였다"고
회고했을 만큼 시련의 기간을 통해 영적 성숙을 이루는 경건한 자세가
있었다.
평양 연합기독병원에서 일한 기간인 1942년에는
후학인 민광식(閔批植)과 함께 “농흉(嗤商)에 관한 세균학적 연구”라는
논문을 조선의학회지(朝雜醫學會誌)에, 단독연구인 “근염(第失)의 조직학적
소견”을 일본외과학회에서 발표한 일이 있다. 1943넌에는 간상변부에
발생한 간암의 설상절제수숭(複狀切除手術)올 실시하고 그 결과를 조선
의학회에서 발표하여 주목을 받은 일도 있다. 신경쇄약으로 휴양중에
해방을 맞은 장기려선생은 그헤 11월에는 평양도립병원장 겸 의과과장으로
약 일년간 일했다. 1947년 1월부터는 김일성대학의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겸 부속병원 외과과장으로 일했다. 그는 주일에는 일을 할 수 없다는
조건으로 이 대학으로 갔고, 이 학교에 근무하면서도 주일을 지키고
환자를 수술할 때는 먼저 기도하는 등 일관된 신앙의 길을 갔다. 그의
성실함과 신실함, 그리고 검소한 생활때문에 이곳에서도 그는 인정을
받았고, 1948넌에는 북한 과학원으로부터 최초로 의학박사 학위를 수여
받기도 했다.
1950년의 한국전쟁과
분단은 선생님의 가족에게도 큰 시련을 안겨 주었다. 그는 1950년 12월차남
가용(家勳과 함께 남하하여 그 달 18일 부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평양
종로앞에서 마지막 본 아내와 다른 가족이 함께 남하하지 못한 것은
일생동안의 가장 가슴아픈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부산에 온 그는 곧
부산 제 3 육군병원에서 근무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약 6개월간 봉사했던
그는 1951년 6월 경남구제위원회의 전영창(全永昌)선생과 한상동(韓尙東)목사의
요청으로 부산 영도구 남항동에 위치한 제 3교회 창고에서 무료의원을
시작했는데 이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이 때부터 그는 1976년 6월까지
25년간 복음병원 원장으로 그리고 의사로 일했는데 초기 복음병원 시절은
의사로서 가장 보람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그는
복음병원에서 근무하면서 동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외과학 교수로(1953.3-1956.9),
부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및 학장으로 (1956.9 -1961. 10) 서울 카토릭
의대 외과학 교수로(1965-1972.12) 봉사하기도 했다. 이 당시 부산,
경남지방에는 의료기관이 많지 않을 때였으므로 복음병원은 이 지역
보건증진을 위해 큰 기여를 했다. 특히 그가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기간은 기독교정신에 입각한 구호, 자선병원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였다.
선생님이 복음 병원 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동안에 부산대학교 의과대학에
외과를 창설한 일도 이 지역 의료계를 위한 기여라고 볼 수 있다. 장박사님은
1959넌 2월에는 간의 대량절제수술을 성공하였는데 당시에는 간에 대한
연구가 거의 이루어지지 못했던 때이므로 그는 이 분야에 중요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간암에 대한 연구로 그는 1961년 대한의학회 학술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의료활동 의에도 그는 1956년 전도 및 성경공부를 위한 목적으로 “부산모임을 시작하였고, 1959년에는 일신병원 설립자였던 매켄지(Dr Helm Mackenzie), 내과의사인 이준철(李俊哲), 치과의사인 유기형(劉基亨) 등과 함께 ’부산기독의사회’를 조직하였는데, 이것은 복음에 대한 그의 관심의 일단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특히 1968년 부산시 동구 초량동에 위치한 복음병원 분원에서 채규철(蔡奎哲), 조광제(趙光濟), 김서민(金瑞敏), 김영환(金永煥) 등과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조합을 발족한 것은 그가 남긴 소중한 유산이다.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라는 취지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순수 민간단체에 의한 의료보험 기구로서 영세민들에게 의료 복지혜택을 주기 위한 기독교적 자애정신에 기초한 기구였다. 정부가 의료보험제를 실시하기보다 10년 앞서 시작된 이 의료보험조합은 1975년에는 의료보험조합 직영의 청십자의원 개원을 가능케 했고, 이듬해에는 한국 청십자 사회복지회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그의 지역사회 봉사활동에 대한 공헌을 인정받아 1979년 8월에는 막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선생님은 복음병원에서 은퇴한 후에도 청십자의원에서 진료하는 등 여러 사회봉사활동을 계속하였고 은퇴가 없는 일생을 살았다. 사랑, 생명, 평화는 그의 생애를 엮어간 주요어(Key Word)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