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의 알려진 비밀 - 5% 리베이트
1968년 월간 ‘신동아’는 12월호에 정부의 차관도입 실태, 차관배정 과정, 차관도입의 공과 등에 대해 심층취재하면서 차관 일부가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 정황을 보도하였다.
동 기사는 ‘신동아’ 정치부 기자 김진배, 경제부 기자 박창래가 1968년 9월 ‘외자도입특별국정감사특위’ 취재 및 국회의원 면담과정을 거쳐 작성하였다. 주요 내용은 차관의 국내기업 배정과정에서 일부 재벌들에게 특혜성 차관이 배정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집권여당은 차관배정의 대가로 불법 정치자금을 조성했다는 것이었다. 정치자금 ‘4인 공동관리설’ ‘5% 커미션설’ 등 당시 공화당 및 집권층의 뇌물·정치자금 수수 의혹을 제기함으로써 박정희 정권의 도덕성을 공격하였다.
신동아 차관 기사 요지
○정부지급 보증하에서 들여온 차관이 산업을 일으키고 수출을 촉진하여 국민소득을 높인다는 점이 인정되나 거대한 정치자금 조성수단이 되고 있음을 간과할 수 없음.
○현금 차관, 외화 대부, 연불 형식으로 들어온 차관은 20억달러에 이르고 1963년부터 1968년까지 6년간 도입된 상업차관 약 8억달러의 5%가 정치자금으로 흘러들어간 것으로 가정하면 4000만달러(100억원** 오늘날 가치 1~10조원)로 추산됨.
○공화당이 중앙선관위 기탁금액의 61%를 가져갈 경우 1억5000만원에 불과한데 이 정도 돈으로 두 번의 선거를 치렀다고 보기 어려움.
○집권당의 위상으로 볼 때 일부 정치자금이 체제안정을 위한 긍정적인 부분에서 소비될 가능성이 있으나 세간의 ‘4인 공동관리설’과 관련 정치자금이 일사불란하게 수금, 관리, 배포된다는 설이 있음.
○이는 최근 도입된 외자가 특정 재벌에만 배정되는 결과를 낳게 되고, 결국 권력과 재벌의 결탁 심화 및 차관배정의 불투명성으로 인해 비난을 면키 어려움.
이와 관련 중앙정보부는 동(同) 기사 게재와 연관된 ‘신동아’ 기자 5명(박창래 기자, 김진배 기자, 손세일 부장, 홍승면 주간, 유혁인 차장)을 연행, 반공법 위반혐의를 두고 취재, 집필, 게재 경위에 대해 심층조사하면서 동 기사가 기밀사항으로 당시 세간의 ‘차관망국론’을 퍼뜨려 결과적으로 북한을 이롭게 했다고 주장하였다. ‘차관망국론’은 차관경제가 미·일에 대한 경제적 예속을 가중시켜 궁극적으로는 빈부격차가 심화된다는 주장이다.
[기사출처: 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
shin/2007/12/10/200712100500015/200712100500015_1.html]
1963-1968 년 들어온 차관 중에 박정희가 서독에 가서 눈물을 흘리고 얻어왔다는 - 박빠들이 자랑하는 - 차관 3천만 불이 있었다. 그것의 5%면 150만불이다. 당시 돈으론 6억이며, 오늘날 가치로는 6백억 규모, 그 이상이다. 이유는 현재는 나라경제가 워낙 확장되어 6백억도 별 큰 돈이 아닐지 몰라도 63년도는 안팍이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이었다.
그런 차관을, 설혹 박정희가 눈물을 흘려 얻었든 고하 간에 , 국민들 몫이다. 그렇지 않은가? 박정희가 눈물 흘렸다고 그게 박정희 것이 되야 하는가? 박정희가 얻어온 차관이라서 박정희가 거기서 5%를 떼가는가? 박정희가 그 돈을 갚았는가? 누가 갚았는가? 전부 국민들과 한국기업들이 갚은 것이다.
그렇다면 대한민국은 박정희에게 무어였는가?
63~68년 겨우 5년 사이에 거둔 리베이트가 1조 이상이라면, 남은 13년 통치기간 중에는 훨씬 더 큰 규모의 차관들이 들어왔으므로 박정희에게 들어간 정치자금 규모는 실로 엄청나다.
헌데, 박정희는 그런 것에까지 전부 손을 대어 5% 이상 씩 리베이트를 수뢰했다. 그 결과로 우리가 보는 것이 군사혁명주체들의 엄청난 거부 축적이다.
그렇게 빼돌려진 리베이트 금액 해외대출금은 박정희가 갚은 것이 아니라 전부 국민과 기업들이 복리이자까지 계산하여 갚아나간 것이다.
당장 박근혜 형제들에게 상속 - 공익이란 미명하에 - 된 재산가치만도 일조를 상회한다라고 조선일보는 보도한 바 있다.
곧, 박정희 일당은 국가를 세우기 위해 혁명한 것이 아니라 자기들의 출세를 위해 일어선 것이다.
혁명 첫날밤 그 일당이 벌인 짓은, 청와대 뜰에다 윤보선대통령의 비서관들에게 명령, 돗자리를 깔고 국빈접대용으로 비치돼있던 청와대 소장 양주병들을 까고 술파티를 벌인 짓이었다.
며칠 후에는 근정전에서 반나의 무희들로 하여금 선정적인 춤공연을 혁명군인 몇백명이 모여 관람했다.
박정희가 서독에 가서 광부들 앞에서 눈물을 흘렸건 안 흘렸건, 힘들게 빌려온 차관은 국민들 몫이다. 서독정부는 대한민국 국민을 위해 빌려준 것이지, 박정희 족당의 수탈을 위해 빌려준 것이 아니었다.
그것을 박정희는 수탈했다. 모든 들어오는 차관, 심지어 해외상사들에게는 먼저 손을 내밀고 액수를 불러 책정했다.
똑바로 알자.
박정희 신화가 깨져야 박근혜 왕국도 사라진다.
이 나라가 잘 살게 된 것은 국민들의 피,땀, 눈물 때문이지, 박정희가문 덕이 아니다.
파아란.
박정희는 도합 전과몇범일까?====================
박빠들이 걸핏하면 이명박대통령을 전과14범이라고 조롱하고 있다. 하지만, 그 전과들은 모두 한국의 기업법규상, 기업체가 기소되면 그 책임을 무조건 경영자에게도 절반 지우는 후진적 법체계때문에 생긴 것이지, 이명박대통령이 직접 지은 것들이 아니다.
반면 박정희를 만약 오늘의 법체계로 재어본다면 박정희의 전과는 얼마나 될까.
우선 당장, 박정희가 독재권력으로 잠자리용 여자로 만든 200여 건이 있다. [ 박선홍 비서관의 채홍사 증언]
현대법 상, 그 건들은 전부 성폭력에 해당한다. 성폭력 200 전과범이다.
매번의 차관에마다 5%씩 공직에 앉아 돈을 떼먹은 껀수들도 있다.
또 선거철이면 한국에 오는 외국기업들과 한국기업들로부터 돈을 요구하고 받아 선거비용으로 썼다.
걸프는 1971년에 선거비용 천만달러를 요구받고 깎아서 3백만달러로 낙착받았다고 말한다.
미쓰비시는 1963년에 선거비용으로 백만달러[현재환율10억]를 내었다.
당시 환율 400원에다 현대 돈가치 100배를 하면 미쓰비시가 1963 선거 때 박정희에게 준 돈 액수는 무려 4백억원이다. 한 기업체에서 받은 액수가 그러했으니 다른 기업체들까지 합하면 정말로 천문학적 숫자를 넘어갈 것이다.
그 모든 박정희가 빼돌린 리베이트 비용과 그 이자들[리보 플러스 1.5~2%]은 전부 국가빚으로 산더미같이 불어나 후세들에게 넘겨졌다.
박정희가 더 교활한 것은, 차관 리베이트를 보다 원활히 떼기 위해 1964년경 민간차관 도입 전면금지법안을 만들고 시행한 일이다. 즉, 정부 통로 아니고는 외화를 들여오지 못하게해 리베이트 떼는 작업이 자동으로 감시되도록 정지작업을 한 것이다. 심히 악질적이다.
이토추상사가 영동화력발전 단 1기[125메가와트]를 수주할 때 180만달러를 박정희에게 넘겼다는 것은 당시 대한민국에 수입되던 모든 기계, 설비, 오일, 물품마다 박정희가 리베이트를 매겼음을 의미한다.
그야말로, 대한민국이란 거대한 곳간 입구를 틀어쥐고 앉아 오가는 것에마다 통행세를 갈취한 산적두목 짓이나 다름없다. 그러기에, 공사, 수입 껀수 마다 돈이 마구마구 들어오니, 마구잡이 개발을 조국근대화란 미명으로 벌이게 된 것이다.
이후락의 아들[전 J투자 회장]은 미의회에다 박정희에게 스위스 비밀은행계좌가 있다는것을 증언했다.
박정희는 도합 전과 몇 범일까 ? 아마 수백만건이 넘을 것이다. 줄여 잡아도. 박정희에게 충성하는 세력들이 지금까지 넘쳐나는 이유 뒤에는 그 숱하게 도둑질한 돈으로 쳐바른 검은 돈에 대한 향수가 아닐까 한다.
뻔뻔스런 날강도들인 것이다.
참조글-보수필독: 처음 계산해본 박정희 횡령 규모 ** 엄청납니다. 반드시 읽고 널리 알립시다.
박정희의 전과는 또 더 있다. 사면되어서 없어졌지만, 원래는 대한민국을 뒤엎으려던 남로당 군사총책이었고 사형까지 언도받았었다. 이대통령의 전과 운운하는 박파들은 양심조차 없는 것들이다. 박정희의 전과부터, 사상전력부터 챙기기 바란다.
박정희에게 스위스 비밀은행계좌가 있다는 말은 허경영도 선거철에 떠들던 주장이다. 헌데 그 사실을 이번에 중앙일보 자료를 통해, 다른 사람도 아닌 바로 이후락의 아들이 미국의회에서 그 비밀계좌가 자기 아버지 것이 아니고 박정희 것이었다고 증언한 자료를 확인한 것이다.
솔직히 박근혜가 청와대에서 제1비밀금고 안의 것을 통째로 가져간 후 그 안에 서류만 있었다고 오리발 내미는 일을 파악했을 때 까지는 박정희 스위스 비밀금고까지는 생각도 한 적 없었다.
하지만, 이제 이후락 아들의 증언을 확보하고 보니, 박근혜 및 그 변함없는 지지자들의 행태와 스위스 비밀계좌와 아무 상관이 없을까 는 의구심이 드는 것이다.
박정희가 그 자녀들을 위해 남긴 것이 영남대, 육영재단, 정수장학회,에다 스위스 계좌까지 있다면, 엄청난 현대사 비극일 것이다. 박정희 비밀계좌 돈은 다 어디로 갔을까? 박정희 비밀계좌의 돈은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국고환수되어야 하며, 그 자녀들이 갖고 노는 공익재단이란 것도 마찬가지다.
2010.2.25. 파아란 한은경.
http://cafe.daum.net/paaranhome
이하 박정희 기념관에 올려진 박정희 시대 벌어진 국내 각종 프로젝트들:
아래 껀마다 리베이트 5%가 붙었다고 상상력을 조금이라도 동원해 들여다보기 바란다.
1961년06월10일 농어촌 고리채 정리법 공포
1961년06월11일 재건국민운동전개(국민의식개혁)
1961년06월14일 부정축재 처리법 공포
1961년07월03일 반공법 공포
1961년06월30일 능의선 개통
1961년07월14일 원자력개원
1961년07월22일 경제기획원신설
1961년08월03일 김포가도 포장 기공
1961년08월08일 황지지선 기공(1961.6.13~1962.12.10)
1961년08월19일 섬진강 수력발전소 건설
1961년09월21일 춘천수력발전소 기공
1961년09월23일 대한 중선창연(蒼鉛)자가제련공장 준공
1961년12월22일 첫 학사자격 국가고시
1962년01월01일 연호를 서력으로 변경(연호에 관한 법률 제정)
1962년01월13일 제1차경제개발5개년계획 발표
1962년01월20일 상법제정공포
1962년02월01일 국민은행 발족
1962년02월02일 기술진흥 5개년계획 발표
1962년02월03일 울산공업지구설정 및 기공
1962년02월10일 국토건설단 창단
1962년03월01일 공문서의 한글전용실시(70년1월1일 관계법 제정)
1962년03월19일 핵분열 연쇄반응 일으키는 원자로의 임계도달 시험-양주군 노해면
1962년04월02일 농촌진흥청 발족
1962년04월30일 해양경비대창설
1962년05월12일 반공센터창설
1962년06월01일 무역진흥공사발족
1962년06월18일 건설부 신설
1962년07월13일 국민 의무교육 실시
1962년07월19일 국립소년직업훈련소 낙성
1962년09월10일 남양송신소 준공
1962년10월20일 해운센터기공식
1962년10월23일 한국케이블공업주식회사 송배전신 및 케이블공장 기공
1962년11월04일 광주디젤발전소 준공
1962년11월06일 동해북부선(옥계-경포대간)개통
1962년11월18일 과학자 우대정책 발표
1962년11월20일 제4시멘트공장건설
1962년11월25일 부정거래단속법을 제정
1962년11월28일 난민정착사업장 제방준공
1962년12월01일 마포아파트준공
1962년12월15일 김포,강화간 대교건설(~1970.1.26)
1962년12월24일 생활보호법제정
1962년12월28일 호남 비료 나주 공장 준공
1963년01월01일 교육자치제 실시
1963년01월10일 외자도입 강력추진
1963년01월18일 원호센터 준공
1963년01월21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 발족
1963년02월01일 장충체육관 건립
1963년02월04일 지방문화재육성
1963년03월15일 동진강지역 종합개발공사 기공, 김해, 진도(63~69)
1963년03월21일 감사원 개원
1963년03월30일 원자로 가동식
1963년04월02일 무제한송전실시
1963년04월10일 부녀회관 건립 기공
1963년05월14일 남대문중수공사 준공
1963년07월20일 제대군인 개간농장 입주
1963년08월08일 한국나이론 공장 건설(대구)
1963년08월08일 국사교육통일방안 확정
1963년09월01일 철도청 발족
1963년09월01일 노동청 발족
1963년09월06일 국토종합개발계획조사착수
1963년09월06일 동대문 개축준공
1963년09월10일 문화재 보수 5개년계획확정
1963년09월17일 가족계획사업추진
1963년09월25일 직업재활원 개원
1963년09월26일 PVC 제조공장 기공
1963년10월10일 가정법원 개원
1963년12월22일 서독광부·간호원파견(1963.12.22~1966.1.30)
1964년01월01일 미터제 실시
1964년05월07일 울산 정유공장 건설
1964년05월07일 국립 중앙 의료원 설립
1964년07월01일 경주석굴암복원준공
1964년08월20일 감천화력발전소건설(부산)
1964년11월29일 울산 제3비료 공장 기공식-매암동, 충주비료와 미국 스위프트 투자단의 공동투자
1964년12월05일 제1회 수출의 날 제정, 1억불 달성/70년 10억불/77년 100억불/82년 200억불/85년 300억불/88년 500억불 달
1964년12월06일 서독방문(유럽국가 첫 방문), 8일 뤼프케 대통령, 9일 에르하르트 수상과 정상회담
1965년01월25일 제2한강교 개통
1965년02월24일 한국원양어선단 결단(원양어업추진)
1965년03월19일 방공 포병대대 창설
1965년03월23일 청소년 선도 국민 궐기 대회
1965년04월01일 치산녹화 10개년 계획 확정
1965년06월01일 김해간척공사 기공
1965년06월22일 한일협정 정식조인(동경), 8월14일 국회비준(야당불참), 12월18일 비준서 교환(서울) 즉시 발효, 국교정상화
1965년08월31일 해인사 경판고 보수
1965년09월15일 제2 영월 화력발전소 준공
1965년10월15일 율곡사 및 율곡기념관 낙성
1965년11월13일 경호천 종합개발 준공식-칠곡군 북삼면
1965년11월23일 민방위법 제정(민방위대창설:1975.9.22)
1965년12월02일 식량증산 5개년계획 확정
1965년12월03일 서울·춘천간 도로포장공사 준공
1965년12월07일 진삼선 개통(사천~삼천포)
1965년12월16일 국내(텔레스)개통
1966년01월19일 정선선 개통(예미, 증산, 고한 간)
1966년01월27일 경북선 개통(점촌~예천 간)
1966년01월27일 한국과학기술원 설립
1966년02월04일 한국과학기술 연구소(kist)발족
1966년03월03일 국세청 발족
1966년03월03일 수산청 발족
1966년04월09일 인천제철공장 기공
1966년04월29일 경인공업단지 건설
1966년05월03일 울릉도 추산 수력발전소 준공
1966년06월08일 충청남도 부여군 남면 지구 전천후 농업용 수원개발사업 준공
1966년06월09일 팔당수력발전소 기공
1966년06월22일 한군군장비현대화계획발표
1966년08월03일 산림청 신설
1966년11월09일 김삼선 기공
1966년11월09일 충남선 기공
1966년11월28일 서울 분묘 보수
1966년11월30일 밀양 영남루 보수
1966년11월30일 서울 종각 보수
1966년12월06일 부여 정림사지 정비
1966년12월17일 아시아 개발은행 건설
1966년12월18일 법주사 대웅전 보수
1967년01월24일 청평·의암 ·화천 수력발전소 건설
1967년02월10일 대도시 그린벨트설정(서울, 부산 등)
1967년03월04일 영남화력발전소 제2호기 기공
1967년03월30일 원자력청 발족
1967년03월30일 과학기술처 신설
1967년04월01일 구로동 수출 공업단지 준공
1967년04월13일 서해안 철도건설
1967년04월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준공
1967년04월26일 안중근의사 동상 이안
1967년04월29일 천체과학관 준공
1967년05월01일 국립광업연구소 설립
1967년09월19일 구미전자공업단지건설
1967년09월23일 제1한강대교, 강변도로건설
1967년10월01일 국립묘지정화, 현충탑건립
1967년10월03일 포항종합제철공업단지기공(1973. 7. 3 완공)
1967년11월23일 한국수자원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01일 농어촌개발공사발족
1967년12월20일 성산포 어업전진기지 준공
1968년00월 0일 포항항 건설(~1973)
1968년01월22일 대간첩작전본부발족
1968년02월07일 경전선개통
1968년02월11일 병기공장(M16소총)건설착수
1968년03월22일 석유화학계열공업 기공
1968년04월01일 예비군 창설
1968년04월13일 서울대학교 이전 건설
1968년06월13일 「레이다」기지 준공
1968년07월05일 방위산업육성3개년계획확정
1968년07월22일 중앙선,태백선전철화(~1974.6.20)
1968년07월23일 동해안공업도시개발착수(묵호,북평, 삼척)
1968년07월24일 해양주권선언발표(대륙붕 자원확보 및 개발)
1968년07월29일 축산개발 4개년계획 확정
1968년08월30일 영남화력발전소(울산가스터빈)건설
1968년09월09일 제1회 한국 무역 박람회
1968년02월01일 경부고속도로(대구-부산간)기공식
1968년11월01일 제주도 포도당공장준공
1968년11월08일 동양화학공업주식회사준공
1968년12월02일 소수서원 해체 복원
1968년12월05일 국민교육헌장 선포
1968년12월07일 지리산 등 9개지역국립공원지정
1968년12월11일 광화문복원
1968년12월16일 한국 투자개발공사 설립
1968년12월21일 경인·경수고속도로준공
1969년00월00일 교육제도개혁(중학교무시험, 고교평준화, 대학입시예비고사제)
1969년02월05일 농업진흥공사 발족
1969년02월15일 지하수개발공사발족
1969년02월15일 한국도로공사발족
1969년02월22일 농업기계화 8개년계획확정
1969년03월01일 국토통일원 개원
1969년03월01일 가정 의례 준칙 공포
1969년04월28일 현충사 중건 준공식
1969년04월28일 불국사 복원 정화작업(1969~1973)
1969년06월04일 부산 화력발전소 준공(21만Kw)
1969년06월17일 마산수출자유지역공업단지조성
1969년07월03일 울산 알미늄 공장준공
1969년07월29일 서울신도시건설착수(한강이남.여의도.한강개발)
1969년08월19일 범어사 대웅전 보수
1969년10월07일 남강「댐」준공
1969년11월01일 농어촌근대화촉진법발표
1969년11월29일 관악산 기상레이더 건설
1969년12월26일 제3한강대교 건설
1970년02월29일 금산사대적광릉 해체 복원
1970년03월07일 비적성공산권에 문호개방
1970년03월22일 정부장기종합교육계획시안마련-86년까지 단계적으로 실시(의무교육9년으로로연장,교육제신설,교원에게병역
1970년04월15일 남해고속도로기공(~1973.11.14)
1970년04월22일 새마을운동 제창
1970년05월16일 서울대교 건설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0년06월02일 금산 위성통신지구국 개통
1970년07월01일 우편번호제 실시
1970년07월04일 배창 방직 기계 준공식 참석(충북 옥천군 옥천읍 양수리)
1970년07월05일 직기 공장 준공-유사시엔 총포 생산도
1970년07월07일 경부고속도로 전면 개통
1970년07월25일 남산 어린이회관 건립
1970년08월02일 낙동, 영산강 종합개발안 영구수해방지 위해 다목적댐 건설 수운 개설
1970년08월15일 8.15기념식에서 북한이 무력포기하면 남북간의 인위적 장벽 단계적 제거 선언
1970년09월16일 공군 전천후 해상소형공격기 S2A배치
1970년10월22일 수도권(경인,경수,경원)고속전철화(~1974.8.15)
1970년11월10일 행주산성 복원 준공
1970년11월19일 세종대왕기념관 준공
1970년12월08일 도산 서원 보수 정화 공사 준공
1970년12월17일 4대강유역 종합개발계획 확정(한강,낙동강,금강,영산강)
1970년12월25일 화엄사 대웅전 보수
1970년12월31일 남원 광한루 보수
1971년01월31일 제주도 일주 도로 준공
1971년03월19일 원자력발전소 기공
1971년03월23일 금강·평택 지구 다목적 농업 개발 사업 기공
1971년04월08일 거제대교 건설
1971년04월12일 서울 지하철 기공
1971년04월13일 칠백의총 보수 정화 준공
1971년06월12일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제의, 북한측 거부
1971년08월12일 한국적십자연맹, 남북가족찾기회담을 북측에 제의
1971년08월30일 속리산 법주사의 사천왕문 복원
1971년09월08일 국토종합개발계획 확정
1971년09월10일 서울 북악 터널 개통
1971년09월25일 태릉 국제사격장 준공
1971년09월29일 여의도 5·16광장 준공
1971년11월14일 각종 무기 생산 개시
1972년01월04일 전국 10대 관광권 개발 확정
1972년01월05일 군산항 개발 착수
1972년00월00일 제주관광개발사업추진(~1977년)
1972년02월09일 녹색혁명추진(통일벼 개발)
1972년03월10일 경주 고도개발 10개년획확정
1972년03월23일 현대 울산 조선소 기공
1972년04월05일 산림보호, 육성, 산지개발(입산,수렵금지)
1970년05월29일 인천 화력발전소 준공
1972년04월21일 새마을 운동 노래 작사, 작곡
1972년06월07일 교육용 한자1,781자 선정 발표
1972년06월26일 전국702개섬 개발계획확정
1972년07월04일 한국 개발연구원 설립
1972년07월04일 7.4 남북공동성명 발표
1972년09월30일 영동화력발전소 건설
1972년10월31일 석유화학공장 합동 준공, 울산 석유화학8개공장 건설
1972년11월04일 육산리 고분군 정화
1972년11월13일 시외전화 자동화
1972년11월24일 부산항 대단위종합개발 추진(~1978.9.29)
1972년11월25일 소양강 다목적댐 담수
1972년12월11일 지리산,설악산,낙동강 하류철새보호지역 지정
1973년00월00일 이리 수출 자유 지역
1973년01월12일 공업진흥청 신설
1973년02월16일 제주도 종합개발 착수
1973년03월03일 한국방송공사 설립
1973년05월04일 8개 공업장려지구지정 공업개발(춘천,청주,원주,대전, 전주, 이리, 목포, 군산)
1973년05월05일 어린이대공원 개원
1973년05월11일 해운항만청 신설
1973년05월24일 중화학공업건설발표
1973년06월20일 중앙선(청량리-제천)전철 개통
1973년06월22일 남해대교 건설
1973년06월23일 평화통일외교정책 7개항 발표(6.23선언)
1973년06월26일 대덕연구단지 건설(10개연구소)
1973년07월03일 포항 종합 제철 준공
1973년07월05일 한일대륙붕 협상 완전 타결
1973년07월10일 전국91개 공업고등학교 신설, 확충계획발표
1973년07월20일 여천 석유화학 공업단지 건설
1973년08월15일 남북 UN 동시가입촉구
1973년10월11일 옥포 조선소 기공
1973년10월17일 국립극장 개관
1973년07월18일 정수직업훈련원 개관
1973년10월19일 문예중흥5개년계획추진
1973년06월06일 창원 기계 공업단지 조성
1973년11월07일 국민연금복지법 제정
1973년11월10일 죽도조선소 건설
1973년12월15일 이스라엘의 점령지 철수 등 4개항의 친 아랍성명 발표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체결 제의
1974년01월24일 최대임해공업벨트개발(제2제철-조력발전소 건설)
1974년03월28일 영동.동해고속도로기공
1974년05월22일 아산·남양방조제 준공
1974년06월10일 낙성대 정화 사업 준공
1974년01월18일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 제의
1974년12월10일 금산사 미륵전 해체 복원
1974년12월27일 이경관문 해체 복원
1975년01월10일 구미대교 건설
1975년01월21일 농어촌지역의 상수도 시설5개년계획추진
1975년02월01일 대단위농업개발사업추진(금강,평택,광주, 삽교천,계화도)
1975년03월27일 대청 다목적댐 건설
1975년04월11일 중앙민속박물관 개관
1975년05월20일 학도호국단 창설
1975년09월01일 국회의사당 준공
1975년10월10일 서울 어린이회관 이전 개관
1975년10월28일 전국 성곽 보수 사업 추진
1975년10월30일 정립회관 건립(장애인보호육성)
1975년11월07일 함대함 미사일 개발
1976년01월20일 옥산서원보수
1976년01월20일 강화 지역 유적 개발
1976년01월20일 신안 해저 문화재 발굴
1976년03월17일 모산 저마 공장 준공-충남 아산군 배방면 공순리
1976년04월10일 밀양 포충사 정화사업
1976년04월10일 유관순 유적지 정화사업
1976년04월17일 국어 정화, 순화 운동 전개
1976년05월10일 강릉 오죽헌 정화사업
1976년05월18일 한국 인력 검정공단 법안 확정(기술인력관리,자격,검정의 일원화)
1976년06월24일 유적지전적지 개발을 위한 특별법제정
1976년06월24일 구마고속도로 착공
1976년07월16일 잠수교 개통식 참석
1976년10월02일 반월공업도시 건설
1976년10월12일 쌀의 완전 자급자족 달성
1976년10월14일 영산강 유역 농업개발 제1단계사업준공
1976년10월30일 한산성 충무공 유적 정화사업 준공식 참석
1977년01월12일 대북식량원조 제의, 남북한 불가침 협정 체결되면 주한미군 철수를 반대하지 않는다고 밝힘
1977년01월28일 국방부 순시에서 핵무기와 전투기를 제외한 모든 무기를 국산화하고 있음을 천명
1977년00월00일 남서울대공원 건설
1977년02월15일 산업체부설학교 및 특별학급설치
1977년02월17일 증권감독원 개원
1977년00월00일 전국 도서관 확충
1977년04월30일 초고압송변전시설 완공
1977년05월25일 미군철수 정책 저지(선보완, 후저지)
1977년06월15일 월성 원자력발전소 건설(1977.6.15 ~1982.3.10)
1978년07월01일 부가가치세, 의료보험 실시
1977년07월10일 자동차공업 육성책 발표
1977년07월30일 경주통일전조성
1976년11월03일 안동 다목적댐 건설
1977년09월22일 소비자보호기본법제정
1977년10월07일 육림의 날 선포
1977년10월09일 여주 영육 성역화 사업
1977년10월09일 부석사 정화 작업(1977~1979)
1977년10월25일 군산화력발전소
1977년10월25일 부평화력발전소
1977년11월04일 아산화력발전소건설
1977년12월07일 전주권 광역도시개발 및 공업단지 조성
1977년12월22일 1백억불 수출달성 기념
1978년01월01일 동력자원부 신설
1978년01월09일 충주 다목적댐 건설
1978년01월18일 군수산업의 육성(헬기, 대포, 탄약, 장갑차, 함정, 레이다, 미사일을 생산하고 있으며, 항공기 산업과 특수전차 개발에 착수)
1978년02월20일 행정전산화 10개년 계획 확정
1978년03월30일 호남선 복선 개통
1978년04월01일 국민체조보급
1978년04월14일 세종문화회관 개관
1978년05월03일 월정사복원
1978년05월10일 김덕령장군 유적지 정화사업(광주)
1978년05월10일 임경업장군 유적지 정화사업(충주)
1978년05월22일 부마고속도로건설(1978.5.22 ~ 1980.10.5)
1978년06월05일 태양에너지 연구소 발족
1978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8년06월23일 남북간의 교역, 기술, 자본 협력 위한 민간 경협기구 구성을 북한에 제의
1978년06월30일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개원
1978년08월15일 해남 표충사 보수
1978년09월26일 국산 장거리 지대지 유도탄, 중거리 유도탄, 다연발 로케트, 대전차 로케트 시험발사에 성공, 세계 7번쨰 개발 보유국됨.
1978년10월05일 자연보호헌장 선포
1978년10월20일 서해안 일부지역 국립 해안 공원 지정
1978년10월30일 직지사 정화사업
1978년11월08일 관광산업진흥책 발표
1978년11월30일 곽재우장군유적지 조성 정화사업
1978년12월06일 광주박물관 개관
1978년12월30일 장거리 자동 공중전화 시대 개막
1979년03월27일 토지개발공사 설립
1979년04월06일 경주 보문 관광단지 개장
1979년04월18일 잠실체육관 건립
1979년05월30일 상주 정기룡장군 유적지 정화 사업
1979년06월12일 경북 울진 원자력 발전소 기공
1979년06월13일 수도권 광역수도사업 추진(팔당)
1979년07월05일 천호대로 준공
1979년10월02일 환경청 신설
1979년10월12일 국제 올림픽대회 서울 유치 언명
1979년10월26일 삽교천 방조제 준공
1965년 육영수 국모화 사업 =================================
우리가 짚을 것은 더 있다.
1963년 국민들의 제조업체 종사자 평균 월급여가 3,180원이었다. 그렇던 배고프던 시절에 박정희 부부는 문화재보수 5개년 계획을 시작하는데 이미 그 해2월에 지방"문화재" 보수사업을 시작했다. 이 일은 한 마디로 부족한 국가재원을 허물어져가던 전국 사찰들을 - 문화재란 이름으로 - 포장하고 부흥시키는 데 퍼붓게 했다. 그 결과 산속 깊은 곳까지 사찰들 앞마당까지 - 전국 도로도 안 깔리던 때 - 포장도로가 닦였다.
이 문제에 대해 본 필자가 보는 관점은 이것이다. 1963년은 박정희가 민정이양을 선언하고 스스로 군복을 벗고 윤보선과 치열한 대선접전을 벌였던 때다. 선거일은 10월15일로 잡혀 있었다. 헌데 바로 그 해에 국책사업과는 전혀 관계없는 지방사찰 도로 닦아주고 현판 달아주는 사업이 그 해2월에 시작되고 게다가 9월12일엔 소위 문화재 5개년보수계획이란 거창한 이름까지 달고 나온 것은, 그들 부부가 육영수의 불심을 이용, 전국 사찰들의 힘을 빌어 선거에 이기기 위한 정략적 이유가 컸을 것이다.
또 하나 이들 박정희 부부가 종신형 독재정치를 꿈꾸었던 것 아니냐는 짐작이 가게 하는 항목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박정희 대통령 업적의 1965.10.15.에 기록된, 뚱딴지 같은 "율곡기념관" 사업 때문이다. 더 조사해보면 바로 한 달 후, 육영수를 고대로 닮은 모습을 한 신사임당 영정이 이 때 탄생한다. 그리고 신사임당 대회가 매년 개최되고 신사임당상 수상자가 배출되었다.
육영수를 국모급으로 올리기 위한 고도의 이미지 정치를 박정권이 폈던 것이다.
지금의 오만원 권에 등장한 신사임당 모습이 박근혜와 그대로 닮아서 박빠들이 환호하게 된 것도 바로 1965년 그려진 신사임당의 영정- 이전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 이 육영수를 그대로 바꿔치기해 그려놓았던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그들 부부가 진정 1963년 선거하며 단선만 하고 그만 둘 것이라고 외쳤던 대로라면, 육영수를 고차원적 국모 이미지 만들기 작업은 필요하지도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1979년까지 걷은 42조원대의 정치자금 용 리베이트들 중에서 소위 정치자금이 박정희가 김정렴에게 말한 대로 기껏 매년 30~40억만 필요했다면, 남았을 돈은 엄청나다. 게다가 이자까지 감안한다면. 전두환이 7년간 걷은 7천억의 100배에 해당하는 돈이 박정희 18년간 사라진 것이고 보면, 지금 수도권의 엄청나게 오른 부동산 가격의 거품과 막대한 외채빚은 그 때 해외로 사라진 - 박정희의 비밀계좌 뿐 아니라 이후락, 김형욱 들의 - 검은 돈들이 남긴 그림자인 지도 모른다.
정부는 스위스 은행에 박정희 비밀계좌가 과연 이후락 아들의 증언대로 지금도 있는지, 정말 있었는지, 박정희 시대에 치부했던 집단에 대해서도 반드시 조사에 나서야 한다. 이것이야말로, 일제과거사나 민주화과거사를 밝히는 일보다 더욱 중대하지 않을까. 자칫했으면 이 나라도 김일성의 북한과 같은 종신세습독재체제로 갔을 지 모를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지 않고는 저토록 막대한 리베이트가 박정희에게는 필요없었으며, 육영수 국모만들기 역시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글에는 박정희가 강탈한 김지태 부산장학회나 영남대학교 같은 사안들은 건드리지 않았다. 이미 알고 있는 내용들이므로.
솔직히 이런저런 자료들을 조사하면서 놀라게 되는 것은, 저토록 뜯기고도 이 나라 경제가 성장한 것은 - 아프리카 짝이 나지 않고 - 그야말로 기적이구나 는 생각이다. 그리고 저토록 만반의 준비를 해놓았던 독재자가 하루 아침에 부하의 총구에 의해 사라지게 된 일도 기적이다.
퍼스트 레이디로 박근혜를 당시 세웠던 것도 박정희 일가의 장기집권을 더 확실히 하기 위해서 였다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국모 육영수의 이미화 사업에 이어. 박정희가 그토록 열심히 조국근대화를 일군 이유는, 모르는 국민들이 본다면, 박정희의 위대성 때문이라 말할 것이고, 오퍼나 리베이트 개념을 조금이라도 아는 국민이 본다면, 엄청 해먹었고 해먹을 만 - 저리 열심히 - 했구나 고 보게 될 것이다.
박정희가 얼마나 횡령하고 얼마나 남겼던지 그가 국가외채에 끼친 영향과 국민들에게 대신 물게 한 이자금액까지도 조만간 누군가에 의해서는 조사되어야 할 것이다.
2010.2.24. 파아란 한은경.
http://cafe.daum.net/paaranhome
참조사진] 신사임당 영정과 오만원권 신사임당, 육영수, 박근혜 닮은꼴
5.16 며칠 후 근정전에서 벌어진 반누드쇼공연[1961.5.29]
박정희가문이 검소했다는 허위에서 벗어나자 ======================
댓글:
박근혜가 자주 쓰는 말에 자기 어머니가 티슈를 반으로 갈라서 쓰게 했다라고 한다.
그것을 들으며 사람들은 검소하구나 라고 믿는다. 웃기는 소리다.
그 당시에 국내에서 곽티슈라는 게 생산됐는 지부터 입증돼야 할 것이다.
안가 술자리에 불려온 여배우들에게 주는 사례비면 그딴 런닝, 허리띠 수백, 수천개라도 사겠다.
박근혜는 딸이면서 왜 자기 아비 헌속옷은 안 챙겼는가.
이런 질문은 할 줄 모르는가?
신동아에 가면 김재규를 변호한 이동일 변호사의 증언이 있다.
또 윤보선 비서관의 증언도 있다.
나의 돌아가신 친척어르신 중 지방에 알려진 연주가 한 분이 계시다. 작고하신 그 분이 60년대 - 내가 학교 들어가기 전 - 박정희가 지방내려올 적마다 밤이면 동래별장 춤파티에 악사들과 함께 불려가서 연주하고 악수 나누곤 했다 말하셨다. 그 당시 동래별장이라고 하면 유명했다.
박근혜는 지금 벌당 가격을 상상할 수도 없을 정도 고가의, 디자이너가 직접 방문, 마춤해주는 비싼 옷들로 매번 바꿔입고 나오고 있다.
박정희가 에어콘 전기요금을 아꼈다고들 말한다. 웃기지 말라.
박정희 술좌석의 양주병들 몇개만 헐면 그 딴 에어콘 펑펑 돌리고도 남는다.
박근혜가 그 당시 입고 나오던 옷 사진들은 일반인은 꿈꾸기도 힘들 정도의 패션이다.
박정희 가문이 검소했다는 허위신화에서 이제는 벗어나자.
파아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