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님이 병중이시니 이번 추석은 조용히 보내기로 했다 덕분에 하루 장을 보고 하루 음식을 준비하고 하루 손님을 치르는 삼일간 맏며느리의 의무가 사라지게 되어 나는 정말 오랜만에 자유로운 추석을 맞았다 누구는 음식 준비하랴 손님 대접하랴 종종 걸음으로 바쁜데 누구는 해 놓은 음식만 먹고 영화관으로 친정으로 휭하니 사라지는 걸 보면서 얼마나 부러워했던 나날들이 많았던가! 특히 자신의 막내딸은 얼른 오기를 기다리시면서 며느리는 당연히 저녁 늦게까지 손님 대접을 하게 만드는 시어머님의 태도가 젊은 시절에는 얄밉기까지 했었다 친정어머니와 시어머님의 차이점과 며느리와 딸의 차이점을 수용하고 이해하려는 과정은 많은 시간과 지혜와 노력이 필요했다 식혜 한통을 만들어 요양원에 계신 어머님께 갖다 드리는 일로 내 추석은 마무리 되었지만 떠들썩했던 지난날의 추석에 비하면 너무도 썰렁한 하루가 그리 좋기만 하고 기쁘기만 한 것도 아니었다 좋은 일 뒤에는 나쁜 일이 따르고 나쁜 일 뒤에는 좋은 일이 따른다는 옛 선인들의 말씀은 하나도 그른게 없는것 같다 어머님이 아프신 일은 나쁜 일이요.추석에 일이 적어진 것은 좋은 일이요 손님이 없어 쓸쓸한 일은 나쁜 일이 아니겠는가 세상일은 돌고 돌아 그리 좋기만 한 것도 아니고 그리 나쁘기만 한 것도 아니게 골고루 살아가게 만들어져 있어서 모진 아픔도 슬픔도 견뎌내고, 그래서 나이를 먹을수록 둥글둥글해진 돌을 닮아가는것 같다
보름날에 종자골이라! 이 가벼움의 기쁨을 누구에게 말해볼까나 둥근 달이 동쪽 산 어두운 능선을 딛고 둥실 떠올랐다 '달이 뜬다 달이 뜬다 둥근 둥근 달이 뜬다' 노래가 절로 나왔다 무슨 말이 필요하랴 소원 한가지를 빌어본다 다 건강하게 하소서! 전등불을 끄고 보름달 달빛 아래 그대와 나 나이와 상관없는 낭만이 스멀스멀 돌아다니고 사랑이 그 뒤꽁무니를 쫒아 달빛 아래서 수건 돌리기를 하듯 원을 그리며 논다
적막을 깨고 윗집 차사장님네 차소리가 들려온다 '오셨네요. 소주 한 잔 합시다' 씩씩한 차사장님 말씀에 거절을 할 줄 모르는 청솔님은 '예 그러지요 '인사말을 선뜻 건넸지만 청솔님의 대답은 그냥 지나가는 말인줄을 나는 알고 있다 그는 절대 아니오 라는 말을 모르거나 잊어버린 남자라는 사실을 이십여년간 살면서 알아낼 수 있었으니까 그래서 예스맨인 청솔님은 친정식구들에게 나보다 훨씬 인기가 높다 아닌걸 아니라고 냉정하게 딱 잘라 말해버리는 나는 착한 남자와 사는 나쁜 여자로 주위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음을 알게 된 것은 이미 오래전이다 '종갓집 맏녀느리인 윗집 언니는 제사 지내랴 손님 접대하랴 얼마나 고된 날들이었을텐데 그래서 당장이라도 휴식이 필요한 시간인데 한잔은 무슨 한잔이예요 그냥 자는 척 해요. 눈치가 있으신지 없으신지 어디 보자구요'ㅋㅋㅋ... 달빛아래 더 머물고 싶은것을 억제하고 방으로 들어와 창문으로 보이는 달을 누워서 바라본다 아직 잠자기는 사실 아까운 시간이다 발소리가 들리고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려온다 어쩌나! 그 사이에 보쌈을 푸짐하게 준비해서 한 쟁반 가득 들고 오셨다 추석 선물까지.황송해라 잠깐이지만 나는 내가 얼마나 이기적이고 편협한 여자인지를 스스로 알아채게 된다 물론 내어 놓을 음식은 없지만 최소한 냉장고 안에 있는 사과와 맥주 정도는 준비해 볼 수 있지는 않았을까? 종갓집 맏며느리와 그냥 맏며느리의 차이점이라고 하기에는 석연치 않은 창피함을 감추려고 나는 목소리를 높여서 수다를 떨어본다 오늘 어머님도 '베풀며 살아야 하느니라'말씀하셨지만 욕심의 주머니를 풀어놓을 줄 아는 아량을 지닌 윗집 내외분이나 청솔님을 나는 언제나 따라갈 수 있으려나?
보름달이 둥실 앞산쪽으로 움직여 왔다 이런날은 얼큰하게 취해 말도 되지 않는 어설픈 싯귀라도 한 수 주절주절 읊조리고 싶어진다 아니 음정이 맞지않는 노래라도 한 귀절 불러보고 싶어진다. 아니 누구의 노래라도 청해서 들어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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