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사정(孝思亭) : 노량 나루터 남쪽 언덕에 있는데, 우의정 노한(盧閈)의 별장이다.
강희맹(姜希孟)이 지은 기문에, "삼성산은 곧 금천 진산이다. 거기에서 한 가닥이 꿈틀거리면서 북으로 뻗다가
한수와 만나는 곳에 한 지역을 이루었는데, 곧 의정 노 공숙공(恭肅公)의 선영이 있다.
공숙이 어느 해에 그곳에다 어머니를 장사하고 시려(侍廬)하였는데, 효성이 극진하였다.
복을 마치고는 서러워하던 그대로 그곳에서 살았다. 그 집 북쪽에 깎아지른 듯한 둔덕이 강에 임했다.
드디어 그 위에다가 정자를 짓고 때로 올라 구경하며 오래도록 사모하는 정을 품고 자손에게 유언하여
자기도 그곳에 묻혔다. 공숙의 맏아들 돈령공과 나의 선군 대민공(戴愍公)과는 동서 사이였다.
일찍이 정자에서 함께 놀다가 돈령공이 정자 이름과 기문을 지어 주도록 청하였다.
대민공이 정자 이름을 효사라 하였으나 기문은 짓지 못했다.
그리고 30여 년 뒤에 돈령공과 대민공이 모두 죽었다. 표종제(表從弟)되는 공숙의 손자 좌찬성 선성 노자반(盧子胖)이
내게 청하기를, '내가 젊었을 때 아버님께서 정자 이름 짓던 그때를 보았다. 산수를 둘러보며 창문을 열었다 닫았다 하여
요점을 짐작함이 있는 듯하더니, 마침내 효사로써 이름 하였으나 기문은 없다. 형이 잇달아 지어 달라' 하였다.
나는 글이 졸렬하다며 세 번이나 사절하였으나, 노자반은 오직 선인의 뜻을 저버린다며 책망하였다.
의리상 사절하지 못하겠기에 다시 노자반에게 청하기를, '무릇 한수를 끼고 지은 정자가 몇인지 모르지만,
경치가 온전하고 또 요긴한 지역은 실상 이 정자를 첫째로 친다.
그런데 선자께서 이름 지으면서 형승은 빼고 효사라 하였음은 뜻이 있음이다. 일찍이 하무시(下武詩)를 보니,
오래도록 효사하고 효사를 법한다 하였다. 이는 무왕(武王)이 길이 효사 하면서 잊지 못했다는 뜻을 말한 것이다.
이러므로 그 효가 법 될 만하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효를 하면서 혹 잊는다거나 혹 법도에 합당하지 않으면 모두 구차할 뿐이다.
효란 감싸두면 한마음의 덕이 되고 발하면 온갖 행실의 밑바탕이 된다.
천자로부터 서인까지 효 하는 바가 비록 크고 작고, 멀고 가까움이 같지는 않으나 그 효는 같다.
이러므로 왕후가 효 하지 못하면 천하와 나라를 보존할 수 없고, 경대부가 효 하지 못하면 종묘를 보존할 수 없으며,
사서(士庶)가 효 하지 못하면 제 몸도 보존할 수 없다. 그 도리를 다하고자 한다면 생각하는 바가 없을 것인가.
천하의 모든 백성은 선왕한테서 받은 것이니 잃지 아니하고, 문정(門庭)과 가업은 선조한테 받았으니
감히 떨어뜨리지 아니하고, 몸과 터럭 살갗은 어버이한테서 받았으니, 감히 상하게 하지 못할 것을 생각함이 마땅하다.
정성어린 마음으로 한 번 숨 쉬는 동안이라도 잊지 않는 것은 천자와 공경ㆍ사서까지 동일한 효도다.
아, 세상에 자손을 위한 계책을 하는 자가 누구인들 대마다 아름다운 아들이 있어 무궁하게 전하고자 하지 않으리오.
그러나 천운과 명수로서 될 수 없어 호화 문벌과 세도하던 씨족도 한두 세대 전한 뒤에 쇠망하여 떨치지 못하는 자가 흔하다.
이때를 당하면 비록 선조가 물려준 전원과 제택이 있다 하더라도 다 권세 있고 지위 높은 자의 자리가 되고 말 뿐이다.
그렇다면 자손으로서 효사하는 직분을 다했다고 할 것인가.
옛적 당나라 이위공(李衛公)이 평천 십리장(平泉十里莊)을 점유하고자 손을 경계하기를,
"진실로 평천장 꽃 하나, 돌 하나라도 남에게 주는 자는 내 자손이 아니다." 하였다.
이공(李公)도 또한 당나라 유명한 재상이다. 어찌 자질구레한 꽃 하나, 돌 하나 따위를 위해 이처럼 경계하였으리오.
공숙공은 공명이 세상을 뒤덮을 만하였다. 젊은 나이에 벼슬에서 물러나 구룡(丘隴)에 배회하면서 효성으로써
가법(家法)으로 하여 노자반까지 벌써 3대다.
자반이 공명 덕업이 조상의 뒤를 이어 세상 사람의 심복하는바 되고, 여러 아들도 또한 뛰어나게 두각을 드러내
경사가 다하지 않으니, 이는 그 효도하는 도리를 다했기 때문인가. 어찌 효자가 끊어지지 않는가.
뒷자손이 이 정자에 올라 송추(松楸, 무덤가에 심는 나무)의 가지가 서로 닿고 상재(桑梓, 무덤이 있는 마을에 심은 나무)가
그늘의 두터움을 보고 백세 도구를 남이 감히 엿보지 못하게 한 다음 그 유래를 궁구하면, 우리 선자께서 명명한 것이
속임이 아니라는 것을 더욱 알 것이다.
만약, 강정(江亭) 한 굽이는 우리 것이라 하여 잃지 않을 뿐이라면 근본을 안 것이 아니다.
자반은 어떠하다 하는가. 받아들일 만하다면 기문으로 하기를 청한다.
창룡(蒼龍) 계사 첫 겨울 하순에 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