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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많이 죄송합니다.
제가 바쁘다는 핑계로...이제서야 자료를 올립니다.
담달에는 빨랑 올리겠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1. 강원도(江原道) 강릉대도호부(江陵大都護府)
신증동국여지승람 제44권
동쪽으로 바닷가까지 10리, 서쪽은 평창(平昌)군 경계까지 1백 59리, 횡성(橫城)현 경계까지 1백 90리, 서남쪽으로 정선(旌善)군 경계까지 90리, 남쪽으로 삼척부(三陟府) 경계까지 94리, 북쪽으로 양양부(襄陽府) 경계까지 60리인데, 서울과 거리는 6백 리이다.
【건치연혁】 본래 예국(濊國)인데, 철국(鐵國) 또는 예국(國)이라고도 한다. 한(漢) 나라 무제(武帝)가 원봉(元封) 2년에 장수를 보내, 우거(右渠)를 토벌하고 사군(四郡)을 정할 때에, 이 지역을 임둔(臨屯)이라 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하서량(河西良)이라 하였다 하슬라주(何瑟羅州)라고도 하였다. 신라 선덕왕(善德王)은 작은 서울을 설치하여, 사신(仕臣)을 두었다. 무열왕(武烈王) 5년에 이 지역이 말갈(靺鞨)과 연접하였다 하여 작은 서울이라는 명칭을 고쳐 주(州)로 만들고, 도독(都督)을 두어서 진무하고 지키도록 하였는데, 경덕왕(景德王) 16년에 명주(溟洲)라 고쳤다. 고려 태조 19년에는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고, 성종 2년에 하서부(河西府)라 불렀다. 5년에는 명주도독부라 고쳤으며, 11년에 목(牧)으로 고쳤다. 14년에 단련사(團練使)라 하였다가, 그 후에 또 방어사(防禦使)라 개칭하였다. 원종(元宗) 원년에는 공신(功臣) 김홍취(金洪就)의 고향이라 하여 경흥도호부(慶興都護府)로 승격하였고, 충렬왕 34년에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부로 만들었다. 공양왕 원년에 대도호부로 승격하였고, 본조에서도 그대로 하였으며, 세조(世祖) 때에는 진(鎭)을 설치하였다.
【속현】 연곡현(連谷縣) 부 북쪽 3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지산현(支山縣)이며 양곡이라고도 한다. 신라 경덕왕 때에 명주 속현으로 만들었고, 고려 현종(顯宗)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그대로 예속시켰다. 우계현(羽溪縣) 부 남쪽 60리에 있다. 본래 고구려 우곡현(羽谷縣)이며 옥당(玉堂)이라고도 하였다. 신라 경덕왕이 지금 명칭으로 고쳐서 삼척군 속현으로 만들었는데, 고려 현종 9년에 본부로 이속시켰다.
【진관】 도호부 2 삼척ㆍ양양. 군 4 평해(平海)ㆍ간성(杆城)ㆍ고성(高城)ㆍ통천(通川). 현 2 울진(蔚珍)ㆍ흡곡(谷).
【관원】 부사(府使)ㆍ판관(判官)ㆍ교수(敎授) 각 1인.
【군명】 예국(濊國)ㆍ임둔(臨屯)ㆍ하슬라(何瑟羅)ㆍ하서량(河西良)ㆍ명주(溟州)ㆍ동원(東原)ㆍ임영(臨瀛)ㆍ동온(東溫)ㆍ경흥(慶興)ㆍ명원(溟源)ㆍ예국(蘂國) 이하는 이곡(李穀)의 〈염양사(艶陽寺)〉 기문(記文)에 있다. 철국(鐵國)ㆍ도원경(桃源京)ㆍ북빈경(北濱京).
【성씨】 본부 김ㆍ최ㆍ함(咸)ㆍ박ㆍ곽, 왕 임금이 하사(下賜)한 성인데, 그 후에 옥(玉)으로 고쳤다. 이 평창(平昌). 원(元) 원주(原州). 연곡(連谷)ㆍ명(明)ㆍ이ㆍ진(陳)ㆍ신(申)ㆍ장(蔣). 우계(羽溪) 이ㆍ변(邊)ㆍ노(盧)ㆍ심(沈), 유(劉) 속성(續姓)이다.
【풍속】 욕심이 적다 《후한서(後漢書)》에, "그 지역 사람은 성품이 어리석고 성실하며 욕심이 적어서, 청하거나 구걸하지 않는다." 하였다. 같은 성씨끼리 혼인하지 않는다 《후한서》에 있다. 질병을 싫어한다 《후한서》에, "질병을 아주 싫어하여, 사람이 죽으며 살던 집을 홀연히 버리고 다시 새 집을 짓는다." 하였다. 삼[麻]을 심고 누에를 치며 면포를 만든다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핀다 《후한서》에 있다. "별을 살펴서 그해의 풍ㆍ흉을 미리 안다." 하였다. 벌할 때에는 우마를 받는다 《후한서》에, "촌락에 서로 침범하는 자가 있으면 문득 서로 벌하며 우마(牛馬)를 받는데 책화(責禍)라 부르며, 살인한 자는 죽음으로써 보상하게 한다. 도둑이 적고 보병으로 하는 싸움을 잘한다." 하였다. 학문을 숭상한다 다박 머리 때부터 책을 끼고 스승을 따른다. 글 읽는 소리가 마을에 가득히 들리며, 게으름 부리는 자는 여럿이 함께 나무라고 꾸짖는다. 놀이를 좋아한다 그 지역 풍속에 명절을 만나면 서로 맞이하여 함께 마시며, 보내고 맞이하는 일이 끊임없다. 그러나 농사에 힘쓰지 않아서 살림살이가 넉넉하지 못하다.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구름 속에 개간한다 이제현(李齊賢)이 박안집(朴安集)에게 준 시에, "진흙이 섞인 물결을 같이하고, 불을 놓아서 푸른 구름 속에 개간한다." 하였다. 예의(禮義)를 서로 먼저한다 황희(黃喜)의 시에, "예의로 오래된 지역인데, 어찌 괴이쩍게 신선을 말하리." 하였다. 청춘경로회(靑春敬老會) 고을 풍속이 늙은이를 공경하여, 매양 좋은 절후를 만나면 나이 70 이상 된 자를 청하여 경치 좋은 곳에 모셔놓고 위로한다. 판부사 조치(趙가 의롭게 여겨서 관가의 재용에서 남은 쌀과 포목(布木)을 내어 밑천을 만들고, 자제들 중에서 부지런하며 조심성 있는 자를 가려서 그 재물의 출납을 맡아 회비(會費)로 하도록 하고, '경춘경로회'라 명명하였다. 지금까지 없어지지 않았으며, 비록 노부의 천한 사람이라도 나이 70 된 자는 모두 모임에 오도록 하고 있다.
【형승】 산맥은 북쪽에서 왔고, 바다가 동쪽 끝이 된다 이곡(李穀)의 시에, "산맥이 북쪽에서 왔는데 푸름이 끝나지 않았고, 바다가 동쪽 끝이어서 아득하게 가이 없어라." 하였다. 산수가 천하에 첫째이다 김구용(金九容)의 시에, "강릉의 산수 경치가 천하에 첫째이다." 하였다. 창해가 넓고 크며, 골짝이 천 겹이다 안축(安軸)의 기문에, "먼 데 있는 물을 창해가 넓고 크며, 먼 데 있는 산은 골짝이 천 겹이다." 하였다. 일도(一道)에서 큰 부(府)이니, 부상(扶桑)을 당기고 양곡(陽谷)을 잡는다 서거정(徐居正)의 〈운금루(雲錦樓)〉 기문에 있다.
【산천】 오대산(五臺山)- 부 서쪽 1백 40리에 있다. 동쪽이 만월(滿月), 남쪽이 기린(麒麟), 서쪽이 장령(長嶺), 북쪽이 상왕(象王), 복판이 지로(智爐)인데, 다섯 봉우리가 고리처럼 벌려 섰고, 크기와 작기가 고른 까닭에 오대라 이름하였다. 우리 세조대왕께서 12년에 관동(關東)에 행차하다가 이 동구에 보연(寶輦)을 머물고, 과거를 베풀어 진지(陳祉) 등 18명을 뽑았다.
○ 진화(陳의 시에, "당년에는 그림 속 오대산을 보았는데, 구름 속에 높고 낮은 푸른 산이 있더니, 지금 만 골짝 물이 다투어 흐르는 곳에 와서 보니, 구름 속에서도 길은 어지럽지 않음을 스스로 깨닫노라." 하였다.
대관령(大關嶺)- 부 서쪽 45리에 있으며, 이 주(州)의 진산이다. 여진(女眞) 지역인 장백산(長白山)에서 산맥이 구불구불 비틀비틀, 남쪽으로 뻗어내리면서 동해가를 차지한 것이 몇 곳인지 모르나, 이 영(嶺)이 가장 높다. 산허리에 옆으로 뻗은 길이 99구비인데, 서쪽으로 서울과 통하는 큰 길이 있다. 부의 치소에서 50리 거리이며 대령(大嶺)이라 부르기도 한다.
보현산(普賢山)- 부 서쪽 35리에 있다.
금강연(金剛淵)- 오대산 월정사(月精寺) 곁에 있으며, 부에서 서쪽으로 1백 10리이다. 4면이 모두 반석이고 폭포는 높이가 열 자이다. 물이 휘돌아 모여서 못이 되었는데, 용이 숨어 있다는 말이 전해온다. 봄이면 여항어(餘項魚)가 천 마리, 백 마리씩 무리지어서 물을 거슬러 올라오다가, 이 못에 와서는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자맥질한다. 힘을 내어 낭떠러지에 뛰어오르는데, 혹 오르는 것도 있으나 어떤 것은 반쯤 오르다가 도로 떨어지기도 한다.
우통수(于筒水)- 부 서쪽 1백 50리에 있다. 오대산 서대(西臺)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는데, 곧 한수(漢水 한강)의 근원이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서대의 밑에 솟아나는 샘물이 있으니, 물 빛깔과 맛이 딴 물보다 훌륭하고 물을 삼감도 또한 그러하니 우통수라 한다. 서쪽으로 수백 리를 흘러 한강이 되어 바다에 들어간다. 한강은 비록 여러 곳에서 흐르는 물이 모인 것이나, 우통 물이 복판 줄기가 되어 빛깔과 맛이 변하지 않는 것이 중국에 양자강(楊子江)이 있는 것과 같으니 한강이라는 명칭도 이 때문이다." 하였다.
『신증』 【궁실】 동헌(東軒) 성현(成俔)의 시에, "바다와 산 아름다운 경치 새해가 되어서, 봄빛이 봉호(蓬壺) 동리(洞裏)의 하늘에 가득하네. 오도(鰲島)에는 나는 새 위에 아지랑이 날고, 주루(珠樓)에는 저녁 볕 가에 노래와 피리로다. 한 줄기 시냇물은 천 집을 감싸 담을 이루고, 나무에 가득한 꽃은 십 리 연기를 머금었네. 경포(鏡浦)에 개인 물결이 파랗게 일렁이는데, 목란(木蘭)배에 술을 실어 신선을 끼고 노네"
【누정】 운금루(雲錦樓)
『신증』 박시형(朴始亨)의 기문에, "임영은 예국(濊國)의 터이다. 예전 명도(溟都)이며, 삼한(三韓) 때에는 북빈경(北濱京)이었다. 고려 동원경(東原京)이라 불렀는데, 이는 신라 태종(太宗)의 5대손 주원공(周元公)이 도읍하여서 여러 대로 살았던 까닭에 이름한 것이다. 그 후에는 혹 명주목이라 혹은 도독부라 불렀으며, 지금은 도호(都護)에다 대(大)자를 붙여서 구별하게 하였다. 그런데 이름난 구역의 훌륭한 경치가 사방에 알려져서, 고관으로 풍류를 좋아하는 사대부 누구나 그 지역에 한번 가서 평소의 소원을 이루고자 하였다. 인걸(人傑)은 지령(地靈)으로 말미암고, 물화(物華)는 하늘이 내린 보배인 것으로서 그 절묘하고 장함이 대관령 동쪽에서는 집대성(集大成)하여, 유독 으뜸이 되게 한 것이로다. 그 호수와 산의 훌륭함이 유람하기에 좋은 것은 이곳의 어디를 가든 그러하나, 그중에서도 한두 가지를 든다면, 관도(官道)에 있는 누각은 의운(倚雲)이라 현판하였고, 연당(蓮塘)에 있는 누각은 이름이 운금(雲錦)이다. 동쪽으로 바닷가에 있는 정자는 한송(寒松)이며, 북쪽으로 호수에 가까운 누대는 경포(鏡浦)다. 이것이 모두 명승의 으뜸이다. 손님을 접대하는 자리에서 술 마시며 시가를 읊고, 강산에 취미를 붙이고 우주에 눈을 들어 회포를 헤치고 기상을 펴는 곳이다. 운금의 높은 누(樓)는 예전에는 객관 동쪽에 있었는데, 계미년에 관사를 개축하면서 옛 제도가 좁고 작다 하여 동쪽으로 터를 넓혀, 추녀를 크게 하므로써 누는 드디어 없어졌다. 그 후로 중건하지 않은 지가 15년이나 되었다. 이리하여 운금이라는 이름만 있고 누는 없어졌다. 매양 누렇게 매실이 익을 무렵의 무더위나, 연꽃이 향기로울 때나, 봄바람 가을달에 대숲 그림자가 너훌거리는 때에 누대와 정자에 유람하여 회포를 펼 만한 곳이 없었다. 심지어는 선배들의 제영(題詠)조차 높은 다락에 묶어 두어서 부르고 화답하는 자가 없으니, 시인 재자(詩人才子)들이 한스럽게 여겼다....' 하였다." 하였다.
경포대(鏡浦臺)- 부 동북쪽 15리에 있다. 포의 둘레가 20리이고, 물이 깨끗하여 거울같다. 깊지도 얕지도 않아, 겨우 사람의 어깨가 잠길 만하며, 사방과 복판이 꼭 같다. 서쪽 언덕에는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는 누대가 있으며, 누대가에 선약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 포 동쪽 입구에 판교(板橋)가 있는데 강문교(江門橋)라 한다. 다리 밖은 죽도(竹島)이며, 섬 북쪽에는 5리나 되는 백사장이 있다. 백사장 밖은 창해 만 리인데, 해돋이를 바로 바라볼 수 있어, 가장 기이한 경치다. 또한 경호(鏡湖)라 하기도 하며, 정자가 있다. 일찍이 우리 태조(太祖)와 세조(世祖)께서 순행하다가 여기에 어가를 멈추었다.
○《동인시화(東人詩話)》에, "박혜숙 신(朴惠肅信)이 젊어서부터 명망이 있었다. 강원도 안렴사(按廉使)로 있으면서 강릉 기생 홍장(紅粧)을 사랑하여 애정이 매우 깊었다. 임기가 차서 돌아갈 참인데, 부윤 조석간 운흘(府尹趙石磵云이 홍장이 벌써 죽었다고 거짓으로 고하였다. 박은 슬피 생각하며 스스로 견디지 못하였다. 부(府)에 경포대가 있는데 형승이 관동에서 첫째이다. 부윤이 안렴사를 맞이하여 뱃놀이하면서, 몰래 홍장에게 화장을 곱게 하고 고운 옷을 입게 하였다. 별도로 배 한 척을 준비하고, 늙은 관인(官人)으로서 수염과 눈썹이 희고, 모습이 처용(處容)과 같은 자를 골라 의관을 정중하게 하여, 홍장과 함께 배에 실었다. 또 채색 액자(額子)에다, '신라 적 늙은 안상(安詳)이 천 년 전 풍류를 아직 못 잊어, 사신이 경포에 놀이한다는 말 듣고, 꽃다운 배에 다시 홍장을 태웠노라.'라는, 시를 적어 걸었다. 노를 천천히 저으며 포구에 들어와서 물가를 배회하는데, 거문고 소리와 피리소리가 맑고 또렷하여 공중에서 나는 듯하였다. 부윤이 안렴사에게, '이 지역에는 옛 선인의 유적이 있고, 산꼭대기에는 차 달이던 아궁이가 있고, 또 여기에서 수십 리 거리에 한송정이 있고, 정자에 또 사선(四仙)의 비석이 있으며, 지금도 신선의 무리가 그 사이에 오가는데, 꽃피는 아침과 달 밝은 저녁에 간혹 본 사람도 있소. 그러나 다만 바라볼 수는 있어도 가까이 갈 수는 없는 것이오.' 하니, 박이 말하기를, '산천이 이와 같이 아름답고 풍경이 기이하나, 마침 정황이 없소.' 하면서 눈에 눈물이 가득하였다. 조금 뒤에 배가 순풍을 타고 눈깜박할 동안에 바로 앞으로 왔다. 노인이 배를 대는데 얼굴 모습이 기괴하고 배 안에는 홍기(紅妓)가 노래하며 춤추는데 가냘프게 너울거렸다. 박이 놀라서 말하기를, '필연코 신선 가운데 사람이다.' 하였다. 그러나 눈여겨 보니 홍장이었다. 온 좌석이 손바닥을 치며 크게 웃고 한껏 즐긴 다음 놀이를 마쳤다. 그 후에 박이 시를 보냈는데, '소년 적에 절(節)을 잡고 관동을 안찰할 때, 경포대 놀이하던 일 꿈속에도 그리워라. 대 밑에 다시 배 띄우고 놀 생각 있으나, 붉은 단장과 늙은이가 비웃을까 염려된다." 하였다.
『신증』 성현(成俔)의 시에, "대관령이 공중에 솟아 여러 산의 아비인데, 새끼 산이 동쪽으로 줄기줄기 뻗었네. 줄기가 갈라져서 호수를 감쌌는데, 푸른 멧부리 흰 물결이 서로 머금고 뱉는다. 평평한 호수 십 리인데 물결 고요하니, 거울 빛이 경대에서 나온 듯 갈매기 날아와 눈을 차니, 봄바람에 흰 날개가 펄럭인다. 대는 푸르러 오도(鰲島)를 덮었는데, 지는 해 홍교(虹橋)엔 사람 그림자가 거꾸러졌다. 긴 길 바다에 임했는데, 들 해당화는 찬란하게 푸른 풀에 비친다. 물결은 아득하게 큰 바다에 잇닿았는데, 구름 돛은 만 리에 부상(扶桑) 끝이네. 부상은 어디인가 갈 수 없고, 용퇴(龍堆)와 신각(蜃閣)은 멀리 서로 마주했네. 기이한 구경 훌륭한 경치 어디에 짝 있으리. 이 세상 안에서 제일이 되리라. 동정호(洞庭湖)와 운몽택(雲夢澤)은 공연한 이름일 것을, 제인(齊人)이 자랑하고 초인(楚人)이 풍치지만 우열을 가리기는 어려우리. 선인의 놀이는 이미 먼 세월 구름만이 아득한데, 바람 맑고 달이 밝아 빈 강에 가을이네. 시인과 묵객이 몇이나 오갔나, 해마다 술 싣고 봄놀이가 많았네. 내 걸음은 바로 늦은 봄 3월이라, 산꽃이 어즈러이 떨어져 붉은 비 쏟아지네. 시를 지어 옛일을 생각하고 긴 휘파람 부니, 맑은 바람이 슬슬 불어 푸른 나무 흔드네." 하였다.
해송정(海松亭)- 경포대 남쪽에 있으며, 동쪽으로 푸른 바다가 바라보인다.
쾌재정(快裁亭)- 부 동쪽 9리에 있으며, 곁에 이끼낀 비석이 있다. 예전에 병사를 주둔시키던 곳이다. 취원대(聚遠臺)- 부 동쪽에 있다. ○ 조운흘의 시에, "성 동쪽 취원대에 걸어 오르니, 들 복숭아 산 살구가 성에 가득 피었다. 세상이 시끄러워 한창 일이 많은데, 묻노니 봄빛이 어데서 왔나." 하였다.
【학교】 향교 부 북쪽 3리에 있다. 동쪽 모퉁이에 항아리 같은 바위가 있으며, 항간에서 연적암(硯滴巖)이라 부른다. ○ 고려 김승인(金承印)이 존무사(存撫使)가 되어, 화부산(花浮山) 밑에다가 처음으로 학사(學舍)를 창설하였다.
【불우】 상원사(上院寺)- 오대산에 있다. 사자암(獅子菴)- 오대산에 있다.
관음암(觀音菴)- 오대산에 있다.
문수사(文殊寺)- 부 동쪽 해안(海岸)에 있다.
○ 김극기의 시에, "절을 두른 구슬 같은 시내와 옥 같은 봉우리, 청량한 경계가 지금도 예 같다. 공중을 향해 바로 솟음은 솔의 성질을 알겠고, 물(物)에 응해도 항상 공(空)함은 대[竹]의 마음을 보겠다. 바람소리는 자연의 풍악을 울리고, 외로운 구름은 가서 세상 장마가 된다. 사신이 해마다 경치를 찾으니, 연하(煙霞)는 특별히 깊어라." 하였다.
월정사(月精寺)- 오대산에 있다.
○ 정추의 시에, "자장(慈藏)이 지은 옛 절에 문수보살이 있으니, 탑 위에 천년 동안 새가 날지 못한다. 금전은 문 닫았고 향연이 싸늘한데, 늙은 중은 동냥하러 어디로 갔나." 하였다.
수정암(水精菴) 오대산에 있다.
○ 권근(權近)의 기문에, "우통물 근원에 수정암이 있다. 옛적에 신라 왕자 두 사람이 여기에 숨어서 참선하여 도를 깨쳤다. 그리하여 지금도 중으로서 수도하고자 하는 자는 모두 여기에 머물기를 즐겨 한다." 하였다.
등명사(燈明寺)- 부 동쪽 30리에 있다.
지장사(地藏寺)- 보현산(普賢山)에 있다.
【사묘】 사직단- 부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부 서쪽 백 보(百步) 지점에 있다. 여단- 부 북쪽에 있다. 김유신사(金庾信祠)- 화부산에 있다. 『신증』 지금은 성황사에 합쳤다. 대관산신사(大關山神祠)- 부 서쪽 40리 지점에 있다.
【명환】 신라 이사부(異斯夫)- 내물왕(奈勿王)의 4대 손(孫)이다. 지도로왕(智度路王) 때에 하슬라(何瑟羅) 군주(軍主)가 되어 우산국(于山國)을 합병하기로 꾀하였다. 그 나라 사람이 어리석으나 사나워서 위세로 항복받기는 어려우니, 계략으로써 항복받는 것이 옳다 하여, 나무로 가짜 사자를 많이 만들어서 전선(戰船)에 나누어 싣고 그 나라 해안에 가서 속이기를, "너희들이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이 짐승을 풀어 놓아서 밟아 죽이겠다."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곧 항복하였다. 진주(眞珠) 선덕왕(善德王) 8년에 사창(沙滄) 진주에게 이 지역을 진수하게 하였다.
【인물】 신라 김주원(金周元)- 태종왕(太宗王)의 손자이다. 당초에 선덕왕(宣德王)이 죽고 후사가 없으므로, 여러 신하가 정의태후(貞懿太后)의 교지를 받들어, 주원을 왕으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나 왕족 상대장등(上大長等) 경신(敬信)이 뭇사람을 위협하고, 먼저 궁에 들어가서 왕이 되었다. 주원은 화를 두려워하여 명주로 물러가고 서울에 가지 않았다. 2년 후에 주원을 명주군 왕으로 봉하고 명주 속현인 삼척ㆍ근을어(斤乙於)ㆍ울진(蔚珍) 등 고을을 떼어서 식읍으로 삼게 하였다. 자손이 인하여 부(府)를 관향(貫鄕)으로 하였다. 왕순식(王順式)- 본주의 장군이 되어서 태조(太祖)가 신검(神劍)을 토벌할 때에 순식은 명주에서 그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싸워서 격파하였다. 태조가 순식에게 이르기를, "짐의 꿈에 이상한 중이 군사 3천 명을 거느리고 온 것을 보았더니, 그 이튿날에 경이 군사를 거느리고 와서 도우니 이것이 꿈의 감응이다." 하니 순식이 아뢰기를, "신이 명주에서 출발하여 대현(大峴)에 오는데 이상한 절이 있으므로 제사를 베풀어 기도하였더니, 임금께서 꿈꾸신 것은 반드시 이 때문입니다." 하였다. 태조는 기이하게 여겼다.
2. 허균(許筠)
1569( 선조 2)∼1618(광해군 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양천(陽川). 자는 단보(端甫), 호는 교산(蛟山)·학산(鶴山)·성소(惺所)·백월거사(白月居士). 아버지는 서경덕(徐敬德)의 문인으로서 학자·문장가로 이름이 높았던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엽(曄)이다.
어머니는 후취인 강릉김씨(江陵金氏)로서 예조판서 광철(光轍)의 딸이다. 임진왜란 직전 일본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온 성(筬)이 이복형이다. 봉(燈)과 난설헌(蘭雪軒)이 동복형제이다. 허균은 5세 때부터 글을 배우기 시작하여 9세 때에 시를 지을 줄 알았다. 12세 때에 아버지를 잃고 더욱 시공부에 전념하였다. 학문은 유성룡(柳成龍)에게 나아가 배웠다.
시는 삼당시인(三唐詩人)의 하나인 이달(李達)에게 배웠다. 이달은 둘째 형의 친구로서 당시 원주의 손곡리(蓀谷里)에 살고 있었다. 그에게 시의 묘체를 깨닫게 해주었다. 인생관과 문학관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허균은 26세 때인 1594년(선조 27)에 정시문과(庭試文科)에 을과로 급제하고 설서(說書)를 지냈다. 1597년에 문과 중시(重試)에 장원하였다. 이듬해에 황해도 도사(都事)가 되었다. 서울의 기생을 끌어들여 가까이하였다는 탄핵을 받고 여섯 달만에 파직되었다.
그 뒤에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注官)·형조정랑을 지냈다. 1602년 사예(司藝)·사복시정(司僕寺正)을 역임하였다. 이 해에 원접사 이정구(李廷龜)의 종사관이 되어 활약하였다. 1604년 수안군수(遂安郡守)로 부임하였다가 불교를 믿는다는 탄핵을 받아 또다시 벼슬길에서 물러나왔다.
허균은 1606년에 명나라 사신 주지번(朱之蕃)을 영접하는 종사관이 되어 글재주와 넓은 학식으로 이름을 떨쳤다. 누이 난설헌의 시를 주지번에게 보여 이를 중국에서 출판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공로로 삼척부사가 되었다.
그러나 석 달이 못 되어 불상을 모시고 염불과 참선을 한다는 탄핵을 받아 쫓겨났다. 그 뒤에 공주목사로 기용되어 서류(庶流)들과 가까이 지냈다. 또다시 파직 당한 뒤에는 부안으로 내려가 산천을 유람하며 기생 계생(桂生)을 만났다. 천민 출신의 시인 유희경(柳希慶)과도 교분을 두터웠다.
허균은 1609년(광해군 1)에 명나라 책봉사가 왔을 때에 이상의(李尙毅)의 종사관이 되었다. 이 해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고 이어 형조참의가 되었다. 1610년에 전시(殿試)의 시관으로 있으면서 조카와 사위를 합격시켰다는 탄핵을 받아 전라도 함열(咸悅)로 유배되었다. 그 뒤에 몇 년간은 태인(泰仁)에 은거하였다.
허균은 1613년 계축옥사에 평소 친교가 있던 서류출신의 서양갑(徐羊甲)·심우영(沈友英)이 처형당하자 신변의 안전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이첨(李爾瞻)에게 아부하여 대북(大北)에 참여하였다. 1614년에 천추사(千秋使)가 되어 중국에 다녀왔다.
그 이듬해에는 동지 겸 진주부사(冬至兼陳奏副使)로 중국에 다녀왔다. 이 두 차례의 사행에서 많은 명나라 학자들과 사귀었으며 귀국할 때에 ≪태평광기 太平廣記≫를 비롯하여 많은 책을 가지고 왔다. 그 가운데에는 천주교 기도문과 지도가 섞여 있었다고 한다.
허균은 1617년 좌참찬이 되었다. 폐모론을 주장하다가 폐모를 반대하던 영의정 기자헌(奇自獻)과 사이가 벌어지고 기자헌은 길주로 유배를 가게 되었다. 그 아들 기준격(奇俊格)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허균의 죄상을 폭로하는 상소를 올렸다. 허균도 상소를 올려 변명하였다.
1618 년 8월 남대문에 격문을 붙인 사건이 일어났다., 허균의 심복 현응민(玄應旻)이 붙였다는 것이 탄로났다. 허균과 기준격을 대질 심문시킨 끝에 역적모의를 하였다 하여 허균은 그의 동료들과 함께 저자거리에서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허균에 대한 평가는 당시의 총명하고 영발(英發)하여 능히 시를 아는 사람이라 하여 문장과 식견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러나 그 사람됨에 대하여서는 경박하다거나 인륜도덕을 어지럽히고 이단을 좋아하여 행실을 더럽혔다는 등 부정적 평가를 내리고 있다. 그의 생애를 통해 보면 몇 차례에 걸친 파직의 이유가 대개 그러한 부정적 견해를 대변해 주고 있다.
허균은 국문학사에서는 우리 나라 최초의 소설인 〈홍길동전〉을 지은 작가로 인정되고 있다. 한때 그가 지었다는 것에 대하여 이론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보다 18년 아래인 이식(李植)이 지은 ≪택당집 澤堂集≫의 기록을 뒤엎을 만한 근거가 없는 이상 그를 〈홍길동전〉의 작가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의 생애와 그의 논설 〈호민론 豪民論〉에 나타난 이상적인 혁명가상을 연결시켜 보면 그 구체적인 형상화가 홍길동으로 나타났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허균의 문집에 실린 〈관론 官論〉·〈정론 政論〉·〈병론 兵論〉·〈유재론 遺才論〉 등에서 그는 민본사상과 국방정책과 신분계급의 타파 및 인재등용과 붕당배척의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내정개혁을 주장한 그의 이론은 원시유교사상에 바탕을 둔 것이다. 백성들의 복리증진을 정치의 최종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허균은 유교집안에서 태어나 유학을 공부한 유가로서 학문의 기본을 유학에 두고 있다. 그러나 당시의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도교에 대하여 사상적으로 깊이 빠져들었다. 특히, 불교에 대해서는 한때 출가하여 중이 되려는 생각도 있었다.
불교의 오묘한 진리를 접하지 않았더라면 한평생을 헛되이 보낼 뻔하였다는 술회를 하기도 하였다. 불교를 믿는다는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파직당하고서도 자기의 신념에는 아무런 흔들림이 없음을 시와 편지글에서 밝히고 있다.
허균은 도교사상에 대해서는 주로 그 양생술과 신선사상에 깊은 관심을 보이고 있다. 은둔사상에도 지극한 동경을 나타내었다. 은둔생활의 방법에 대하여 쓴 〈한정록 閑情錄〉이 있어 그의 관심을 보여 주고 있다.
허균 자신이 서학(西學)에 대하여 언급한 것은 없다. 그러나 몇몇 기록에 의하면 허균이 중국에 가서 천주교의 기도문을 가지고 온 것을 계기로 하늘을 섬기는 학을 하였다고 하였다. 이 점은 그가 새로운 문물과 서학의 이론에 남다른 관심을 보였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허균은 예교(禮敎)에만 얽매어 있던 당시 선비사회에서 보면 이단시할 만큼 다각문화에 대한 이해를 가졌던 인물이며, 편협한 자기만의 시각에서 벗어나 핍박받는 하층민의 입장에서 정치관과 학문관을 피력해 나간 시대의 선각자였다. 허균은 그의 문집 ≪성소부부고 惺所覆螺藁≫를 자신이 편찬하여 죽기 전에 외손에게 전하였다고 한다. 그 부록에 〈한정록〉이 있다. 그가 스물다섯살 때에 쓴 시평론집 ≪학산초담 鶴山樵談≫이 ≪성소부부고≫ 가운데에 실려 있는 〈성수시화 惺馬詩話〉와 함께 그의 시비평 안목을 보여 주는 좋은 자료가 된다.
반대파에 의해서도 인정받은 그의 시에 대한 감식안은 시선집 ≪국조시산 國朝詩刪≫을 통하여 오늘날까지도 평가받고 있다. 허균의 저서 ≪국조시산≫에 덧붙여 자신의 가문에서 여섯 사람의 시를 뽑아 모은 ≪허문세고 許門世藁≫가 전한다. 이 밖에 ≪고시선 古詩選≫·≪당시선 唐詩選≫·≪송오가시초 宋五家詩抄≫·≪명사가시선 明四家詩選≫·≪사체성당 四體盛唐≫ 등의 시선집이 있었다고 하나 전하지 않는다.
또, 임진왜란의 모든 사실을 적은 〈동정록 東征錄〉은 ≪선조실록≫ 편찬에 가장 중요한 자료가 되었다고 하는데 역시 전하지 않는다. 전하지 않는 저작으로 〈계축남유초 癸丑南遊草〉·〈을병조천록 乙丙朝天錄〉·〈서변비로고 西邊備虜考〉·〈한년참기 旱年讖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惺所覆螺藁, 허균의 생각(이이화, 뿌리깊은 나무, 1980), 허균의 문학과 혁신사상(김동욱편, 새문社, 1981), 許筠論(李能雨, 숙대논문집 5, 1965), 許筠硏究(金鎭世, 국문학연구 2, 서울대학교, 1965), 許筠論 再攷(車熔柱, 亞細亞硏究 48, 1972), 許筠(鄭泄東, 韓國의 人間像 5, 新丘文化社, 1972), 蛟山許筠(金東旭, 한국의 사상가 12인, 현암사, 1975), 許筠(조동일, 한국문학사상사시론, 지식산업사, 1978).
※ 蛟山 許筠의 自撰人物評
僕早失嚴訓。母兄嬌愛之。不加誨勑。任誕自放。浮湛於里社中。茶肆酒坊。靡不出入。人見之者。固已相輕。稍長所習乃小技。不足取嘲哂決剔。務快人耳目。不自覺其陷於輕薄。不幸早決科。以爲功名可俯拾。揚袂得意。唐突觸忤。積成寡過。旁觀者固已耽耽矣。[與李大中第一書, 惺所覆瓿藁卷之九 文部六]
저는 일찍이 부친을 여의어 엄한 훈계(訓戒)를 받지 못하였고, 어머니와 형은 어여삐 여기기만 하고는 가르침과 경계를 가하지 않아서 제멋대로 방랑하여, 항간(巷間)에 떠돌아 다니면서 찻집이나 술집까지 드나들지 않은 곳이 없었으니, 이것을 본 사람들은 분명히 나를 경시하였습니다. 점점 자라면서 익혔던 것들도 자질구레한 기예(技藝)였을 뿐, 취할 것이 없었으며, 남을 비웃고 잘잘못을 가려 남의 이목(耳目)을 유쾌하게 하는 데만 힘쓰느라 저도 모르게 경박(輕薄)한 데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불행하게도 일찍이 등과(登科)하여 공명(功名)을 손쉽게 얻으리라 여기고는, 옷소매를 떨치며 자신만만하게 당돌하고 촉오(觸忤)하여 죄와 허물을 쌓았으니, 옆에서 보는 자가 노리고 있었을 것은 사실입니다.
僕不幸厚罹謗毀。毀者一人。足以破百譽之口。況毀者通一國。而譽者僅兄輩數人。[與李大中第二書 惺所覆瓿藁卷之九 文部六]
저는 불행히도 엄청난 훼방(毁謗)에 걸렸습니다. 그리하여 훼방하는 자 한 사람이 족히 나를 기리는 사람 백 명의 입을 깨뜨릴 수 있는데, 하물며 훼방하는 자들은 온 나라에 가득하고 기리는 사람은 겨우 형들 몇 사람뿐입니다.
許子性疏誕。不與世合。時之人群詈而衆斥之。門無來者。出無與適。
[四友齋記 惺所覆瓿藁卷之六 文部三]
허자는 성격이 소탈하고 호탕하여 세상과는 잘 맞지 않으므로, 당시의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꾸짖고 떼지어 배척하므로, 문에 찾아오는 이가 없고 나가도 더불어 뜻에 맞는 곳이 없다.
僕平生得謗最甚。歲復歲日復日。謗益新奇。聞之毫不動念。亦不掛口。以自解久之。或自消歇。今十五年于玆。[答長姪書 惺所覆瓿藁卷之十 文部七]
나는 평생 동안 가장 심하게 비방만 받았다. 해가 가고 날이 갈수록 비방이 더욱 신기(新奇)해졌으나 들을수록 털끝만큼도 괘념치 않았으며 또한 스스로 해명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래가면 혹 저절로 해소되기도 하는데 지금까지 15년 동안을 그렇게 해 나왔다.
吾性鄙拙。疏而且麤。無機無巧。不諂不諛。有一不協。不忍須臾。談及譽人。口卽囁嚅。足躡權門。其跟卒瘏。軒裳拱揖。如柱在軀。將此惰容。去謁公孤。見者輒憎。欲斮其顱。不得已焉。[對詰者 惺所覆瓿藁卷之十二 文部九]
내 천성 비졸하여 엉성하고도 거칠다오 권모 없고 술수도 없고 아첨 또한 하지 못해 하나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잠깐도 참지 못해 남 칭찬에 말이 미치면 입이 벌써 더듬거리고 권문에 발을 디디면 발꿈치가 곧 쑤셔댄다
높은 이와 서로 인사할 땐 몸이 매우 뻣뻣하네 이같은 오만한 자세로 가서 재상 뵙는다면 그 재상 날 미워서 목이라도 자르고 싶을걸
※ 교산의 편당에 대한 견해
西人之扶松江。亦各寸渠所見。木不可盡非。至於成,李門人。滯才甚多。官爵是國家公器。而天地四時。亦有循環。詎可專授一邊人。使賢才虛老於下僚耶。若此不止。則恐乖上天生才之仁。而國非其國也 [上完城第二書惺所覆瓿藁卷之九 文部六]
서인(西人)들이 송강(松江 정철(鄭澈)의 호)을 부축하는 것은 또한 각기 그 소견을 지키는 것이기에 다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겠으나, 성혼(成渾)ㆍ이이(李珥)의 문인(門人)에 이르러서는 인재의 진출을 막음이 너무도 많습니다. 관작은 국가의 공기(公器)이며 천지사시가 또한 순환이 있는데, 어찌 한편 사람들에게만 오로지 관작을 주어 훌륭한 인재로 하여금 하급 관료로 헛되이 늙게 한단 말입니까. 계속 이렇게 나가다가는 곧 하늘이 인재를 낳는 인(仁)을 어기게 되고 나라가 나라 꼴이 안될까 두렵습니다.
※ 불교관련자료
李畫佛祖讚 幷引 惺所覆瓿藁卷之十四 文部十一
이나옹(李懶翁)이 그린 부처와 조사(祖師)의 찬 병서
余在遼山。乞石峯倣歐率更書。以金字寫般若心經爲帖。因命李楨繪三佛一菩薩二祖二居士像。係之于後。遂成兩絶。余以贊辭附之。名曰禪門法寶云。
내가 요산(遼山)에 있을 때, 석봉(石峯)에게 부탁하여 구양순(歐陽詢)의 체를 모방해서 《반야심경(般若心經)》을 금자(金字)로 다시 써 달라고 요청하여 첩(帖)을 만들고, 뒤이어 이정(李楨)에게 명하여 불상(佛像) 셋, 보살상(菩薩像) 하나, 조사상(祖師像) 둘, 거사상(居士像) 둘을 그리게 하여 뒤에 붙였다. 그리고 드디어 절구(絶句) 두 수씩을 지어 찬사로 덧붙이고 선문법보(禪門法寶)라 이름하였다.
석가문불(釋迦文佛)
흐르는 샘물은 옥을 씻고/流泉潄玉 그윽한 꽃 붉게 피어나는데/幽花吐紅
저 법 들으러 온 이는/彼問法者 아낙네와 어린아이/伊女曁童
패다경(貝多經) 갓 두지자/貝多初繙 단향 이미 꺼졌구려/旃檀已滅
유정과 무정이/情與無情 둘이 다 부처 되었네/二俱成佛
아미타불(阿彌陀佛)
아마도 극락세계에선/惟極樂國 땅에서 푸른 연이 솟아나겠지/地湧靑蓮
청련을 받든 두 옥동은/擎二玉童 사람이 되고 하늘이 되겠지/爲人爲天
애당초 인연이 아니라면/本非因緣 타고난 본성도 아닐 테지/非自然性
아미타불께 여쭈어 보니/我問彌陀 미타불은 입정하여 말씀이 없네/彌陀入定
미륵불(彌勒佛)
과거는 까마득하고/過去窈冥 현재는 오탁세계라/見在惡濁
오직 미래만이 있어/唯有未來 원각(圓覺)을 증험하겠구려/可證圓覺
불현듯 선재동자(善財童子)가/翩然善財 왜 앞에 와 있었던고/何居于前
법을 잊고 법을 물으니/忘法問法
바다에 비친 달만 창공에 흐르는구나/海月流天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
구슬 목걸이에 장엄한 머리 꾸밈새/瓔珞花鬘 바닷속에 둥실/于海之中
용궁이고 물나라고/龍宮水府 어디라 못가리오/奚往不通
손에는 큰 마니주(摩尼珠) 들고/手大摩尼 돌 물결에 뛰노누나/躍于湍瀬
저 보장님은/彼寶藏主 신도 또한 자유자재/神亦自在
초조 달마(初祖達磨)
우뚝한 사라쌍수(沙羅雙樹) 숲이여/亭亭雙林
옥호광(玉毫光)이 비치네/照玉毫光
능가경(楞伽經)은 책상에 있는데/楞伽在案
상아 축에 푸르고 누른 거죽 입혔네/牙軸縹緗
법을 전하기란 마음에 있거니/傳法在心
마음을 전함은 물에 있나니/傳心在物
당신 스스로 머물러 둔 건/汝自留着
가사(袈裟)와 바리때 하나씩이지/一衣一鉢
육조 노능(六祖盧能)
나부산은 땅을 솟아 나오고/羅浮拔地 유령(庾嶺)은 하늘을 가리웠는데/庾嶺隱天
그 누가 나의 자취를 밟아/孰躡余蹤 스승의 전함을 엿볼 것인가/覵師之傳
수미산은 오히려 옮길 만해도/須彌可移 의발(衣鉢)은 움직이기 어려워라/衣鉢難動
움직이지 않는 건 마음이거니/不動者心 겨자씨도 역시 무겁도다/芥子亦重
유마힐 거사(維摩詰居士)
조그만 방 안에/一丈室內 보좌에는 제천들이라/寶座諸天
거사의 병은/居士之疾 사람마다 병 돌보아 사람마다 낫네/醫人人痊
누가 와 묻는가/伊誰來問 문수사리로다/文殊師利
말씀은 없어도/無有言語 법문이야 하나인걸/法門不二
방 거사(龐居士)
수정구슬 버리고/抛水晶珠 결가부좌하였네/結跏趺坐
저 거사님은/彼居士者 말 없이 장차 화(化)하려나/嗒焉將化
제죽이며 녹리라/提竹鹿離 방하하는데 무엇이 혐의되리/放下何嫌
시험삼아 백일이/試着白日 내 손가락 끝에 있음을 보라/在我指尖
※ 愛日堂記
惺所覆瓿藁卷之七 文部四
江陵府之三十里有沙村。東臨大海。北眺五臺,靑鶴,菩賢等諸山。大川一派。出百屛山而注于村中。環川而居者。上下數十里殆數百家。皆依兩岸而面川開戶。川東之山。從北臺而來。蜿蜒如龍。至海上斗起。爲沙火山戍。戍之下。舊有大石。當川之潰。老蛟伏其底焉。嘉靖辛酉秋。蛟決其石去。分兩段而谺如爲門。後人號曰蛟門。巖稍南有一阜當中。名曰雙閑亭。府人朴公達,朴遂良之所遊。故以名之。其山形水勢鬱紏而沈深。氣扶輿滃然。故其中多產異人焉。余之外王父參判公。擇地之最近於海者。構堂其上。晨起拓囱。則可見日出。而公方侍慈親。當喜懼之年。故以愛日而扁之。吳黃門希孟以大額額之。龔太史用卿作詩以詠。一時諸名人無不屬和。堂由是而擅名江陵也。壬辰秋。余侍母大夫人避賊。自北方舟泊于蛟山。掃堂而居之。蓋去外王父捐館之歲。今四十三寒暑也。庭除不薙。而野蔓榛翳。羅生檜蔚。垣藩圮缺。屋宇將挫。屋坼壁剝。詩板半無存者。雨漏汚梁。桷或有朽者。囱櫳戶牖有壞敗者。母夫人爲之哭涕。余亟督奴隷。糞其穢獮其蕪而洒掃以處之。噫。先祖之費力經營。爲奉老之所者。如是勤渠。而後孫衰弱不能庇。數椽之室。將至頹廢。其罪大矣。余雖不敏。適侍老母。嗣守玆堂。其愛日之念。豈替於先祖乎。唯當竭心量力。拮據苟完。俾安母夫人之志。俾修先祖之業。優游安處。以終吾世。則庶幾下從外王父於九原也歟。遂記之。以示後人云。
애일당기(愛日堂記)
강릉부(江陵府)에서 30리 되는 곳에 사촌(沙村)이 있는데, 동쪽으로는 대해(大海)에 임했으며 북쪽으로는 오대(五臺)ㆍ청학(靑鶴)ㆍ보현(菩賢) 등 여러 산이 바라보인다. 큰 내 한 줄기가 백병산(百屛山)에서 나와 마을 가운데로 흐르는데, 이 내를 빙 둘러 거주하는 이가 상하 수십 리에 거의 수백 가(家)나 되며, 모두 양쪽 언덕에 의지하여 내에 면해서 문을 내었다. 내의 동쪽 산은 북대(北臺)로부터 내려와 꾸불꾸불 연속된 것이 용처럼 생겼는데, 바닷가에서 홀연히 솟구쳐 사화산(沙火山)의 수자리가 되었다. 수자리 아래에는 옛날에 큰 바위가 있었는데, 내가 무너질 때 늙은 교룡(蛟龍)이 그 밑바닥에 엎드려 있었다. 그 교룡이 가정(嘉靖) 신유년(연산군 7, 1501) 가을에 그 바위를 깨뜨리고 떠나는 바람에 두 동강이 나서 구멍 뚫린 것이 문과 같이 되었으므로, 후세 사람들이 교문암(蛟門巖)이라 호칭하였다. 조금 남쪽으로 언덕 하나가 한 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데 이름을 쌍한정(雙閑亭)이라 한다. 그 고을 사람인 박공달(朴公達)과 박수량(朴遂良)이 노닐던 곳이라 그렇게 이름지었다. 그 산수의 형세가 울창하고 깊숙하며, 기운이 힘차게 일어나 용솟음치는 까닭에, 그 중에서 특이한 인물이 많이 났다.
나의 외조부 참판공(參判公)께서는 바다에 가장 가까운 땅을 택해 당(堂)을 지었다. 새벽에 일어나 창을 젖히면 해돋이를 볼 수 있는데, 공은 마침 모친을 모시고서 희구(喜懼)하는 처지에 있었으므로 애일(愛日)로써 이름을 삼았으며, 황문(黃門) 오희맹(吳希孟)이 큰 액자를 썼고 태사(太史) 공용경(龔用卿)이 시를 지어 읊었더니, 일시에 여러 명인들이 잇달아 화답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당(堂)은 이로 말미암아 강릉에서 이름을 떨치게 되었다. 임진년 가을에 나는 어머니를 모시고 왜적을 피해 북쪽으로부터 배를 타고 교산(蛟山)에 닿아, 당(堂)을 청소한 뒤 거기에 거주하였다. 대개 외조부께서 세상을 떠나신 해로부터 지금 33년이 된 것이다. 뜰에는 풀도 베지 않아 덩굴이 묵어 엉키고 잡목들이 무성하며, 담은 무너지고 집은 장차 내려앉으려 했으며, 지붕은 금이 가고 벽은 벗겨져 있었다. 시를 쓴 현판은 반도 남지 않았으며, 비가 새어 들보와 서까래를 더럽혔으므로 혹은 썩은 것이 있었고, 창문과 지게문도 썩어 문드러진 것이 있었다. 어머님께서는 이것 때문에 통곡하고 우셨다. 나는 빨리 종들을 독촉하여 더러워진 것은 쓸어 내고 덩굴은 걷어 내어 깨끗이 청소하고 거처하였다.
아아, 선조께서 힘써 터를 닦고 노부모를 모시는 곳을 마련하기에 이처럼 부지런히 하셨는데, 후손들이 쇠약하여 이 몇 칸의 집도 보호하지 못하고 무너지게 하였으니 그 죄가 실로 크다. 나는 비록 불민하나 마침 노모를 모시고 이 당(堂)을 이어 지키게 되었으니, 그 애일(愛日)의 생각이 어찌 선조에서 끊어지게 하겠는가. 오로지 마음을 다하고 힘을 쏟아, 노력하며 정성스레 보전함으로써 어머님의 뜻을 편안케 하고 선조의 터전을 개수(改修)하여 한가히 노닐고 편안히 처하여 일생을 마친다면, 그래도 외조부를 구원(九原)에서 모시게 될 것이 아니겠는가?
드디어 기록하여 뒷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한다.
3.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 명종 18)∼1589(선조 22).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본관은 양천(陽川). 본명은 초희(楚姬). 자는 경번(景樊), 호는 난설헌. 강원도 강릉(江陵) 출생. 엽(曄)의 딸이고, 봉(燈)의 동생이며 균(筠)의 누이이다. 가문은 현상(賢相) 공(珙)의 혈통을 이은 명문으로 누대의 문한가(文翰家)로 유명한 학자와 인물을 배출하였다. 아버지가 첫 부인 청주한씨(淸州韓氏)에게서 성(筬)과 두 딸을 낳고 사별한 뒤에 강릉김씨(江陵金氏) 광철(光轍)의 딸을 재취하여 봉·초희·균 3남매를 두었다.
허난설헌은 천재적 가문에서 성장하면서 어릴 때에 오빠와 동생의 틈바구니에서 어깨너머로 글을 배웠다. 아름다운 용모와 천품이 뛰어나 8세에 〈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을 지어서 신동이라는 말을 들었다. 허씨가문과 친교가 있었던 이달(李達)에게 시를 배웠다.
허난설헌은 15세 무렵에 안동김씨(安東金氏) 성립(誠立)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원만한 부부가 되지 못하였다. 남편은 급제한 뒤에 관직에 나갔다. 그러나 가정의 즐거움보다 노류장화(路柳墻花)의 풍류를 즐겼다. 거기에다가 고부간에 불화하여 시어머니의 학대와 질시 속에 살았다.
사랑하던 남매를 잃은 뒤에 설상가상으로 뱃속의 아이까지 잃는 아픔을 겪었다. 또한, 친정집에서 옥사(獄事)가 있었고, 동생 균마저 귀양가는 등의 비극이 연속되었다. 삶의 의욕을 잃고 책과 먹(墨 묵)으로 고뇌를 달래며, 생의 울부짖음에 항거하다 27세의 나이로 생을 마쳤다.
조선 봉건사회의 모순과 계속된 가정의 참화 때문에, 허난설헌의 시 213수 가운데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신선시가 128수나 될 만큼 신선사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허균이 허난설헌의 작품 일부를 명나라 시인 주지번(朱之蕃)에게 주어 중국에서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다.
≪난설헌집≫은 1711년에는 일본에서도 분다이 (文台屋次郎)가 간행하여 애송되었다. 유고집에 ≪난설헌집≫이 있다. 국한문가사 〈규원가 閨怨歌〉와 〈봉선화가 鳳仙花歌〉가 있다. 그러나 〈규원가〉는 허균의 첩 무옥(巫玉)이 지었다고도 한다고 하고 〈봉선화가〉는 정일당김씨(貞一堂金氏)가 지었다고도 한다.
≪참고문헌≫ 蘭雪軒詩集, 역대여류한시문선(김지용 편역, 대양서적, 1975), 許筠全集(成均館大學校大東文化硏究院, 1981), 女流詩人 許蘭雪軒考(朴鍾和, 成均 3, 成均館大學校, 1950), 許楚姬의 遊仙詞에 나타난 仙形象(金錫夏, 國文學論叢 5·6合輯, 檀國大學校, 1972), 허난설헌연구(문경현, 도남조윤제박사고희기념논총, 1976).
★ 허난설헌 생가
이 가옥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여류 시인 허난설헌(1563∼1589)이 태어난 집터로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사실과 건립 연대는 미상이다.
안채와 사랑채, 곳간채가 'ㅁ'자 배치를 하고 있으며 외부를 둘러싼 담이 있다. 남녀의 구분이 엄격하여 남자들은 솟을대문으로, 여자들은 우물간과 방앗간 옆의 협문으로 출입하였다. 또한 사랑마당과 구분하는 내외 담을 사랑채 옆에 쌓아서 출입 시선을 차단하고 있다. 사랑채는 넓은 대청과 방들로 구성되며 전면에 툇간마루가 놓여 있다.
팔작기와지붕의 높은 처마를 갖춘 장혀에 소로 받침이 있는 구조로 전면 기둥은 둥글게 되어 있다. 안채는 정면 5간, 측면 2간의 겹집으로 넓은 부엌과 방, 대청마루가 있다.
사랑마당, 행랑마당, 뒷마당을 담으로 넓게 나누어 놓아 한국의 아름다운 조경을 볼 수 있게 하였다. 주변의 소나무 숲이 전통적인 한옥의 멋을 더해 주고 있다.
4. 강릉선교장(江陵船橋莊)
강원도 강릉시 운정동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중요민속자료 제5호. 이 집은 집터가 뱃머리를 연상하게 한다고 하여 선교장이라고 하는데, 전주 사람 이내번(李乃蕃)이 지었다고 한다.
사랑채인 열화당(悅話堂)은 1815년(순조 15)에 오은처사 이후(李厚)가 건립하였고, 정자인 활래정(活來亭)은 1816년(순조 16)에 이근우(李根宇)가 중건하였다고 한다. 안채·사랑채·동별당·서별당·사당·정자·행랑채를 골고루 갖춘 큰집으로 조선시대 상류주택의 대표적인 한 예이다.
집의 배치는 간좌곤향(艮坐坤向)으로 서남향을 하고 있다. 전면에는 줄행랑이 서 있고, 그 가운데 솟을대문이 자리잡고 있는데, 이 대문을 들어서면 중문간행랑이 나오고 서쪽으로 가면 사랑마당에 이르게 된다. 사랑채인 열화당은 정면 4칸, 측면 3칸의 크기로 거의 一자형 평면을 이룬다.
그 구성은 대청·사랑방·침방·누마루로 되어 있고, 대청 앞에 반 칸 너비의 툇마루가 붙어 있다. 특히 사랑채 전면에는 차양(遮陽)이 가설되어 석양의 강한 햇볕과 눈, 비를 가리게 되어 있다. 오량(五樑)가구의 단순한 민도리집 양식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랑대청의 천장은 널판으로 일부 빗천장을 하고 우물천장을 한 것이 특색이다. 안채는 행랑채 동쪽에 있는 평대문으로 들어가는데 부엌·안방·대청·건넌방으로 구성된다.
동쪽으로는 동별당, 서쪽으로는 중문간행랑채와 연결되어 있다. 안채도 오량가구의 민도리집 양식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고 처마는 홑처마이다.
동별당은 안채 동쪽 부엌 앞에 ㄱ자형으로 위치하는데, 서쪽에서부터 온돌방·대청·마루방·온돌방 순서로 배열되어 있다. 건물의 가구나 구조는 안채나 사랑채와 비슷하다. 행랑채 앞 넓은 터에는 커다란 연못이 있고 정자인 활래정이 있다. 정자는 ㄱ자형으로 방과 누마루로 되어 있다.
민도리소로수장집으로 처마에는 부연을 달고 사면에는 모두 띠살창호를 달았다. 연못 가운데에는 삼신선산(三神仙山)을 모방한 산을 인공적으로 쌓아만들었는데, 소나무가 한 그루 심어져 운치를 더하여준다.
≪참고문헌≫ 文化財大觀-重要民俗資料篇 上-(文化財管理局, 1985).
5. 경포대(鏡浦臺)
강원도 강릉시 저동에 있는 누각. 정면 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건물. 강원도 유형문화재 제6호. 1326년(충숙왕 13) 강원도 안렴사(按廉使) 박숙(朴淑)에 의하여 신라 사선(四仙)이 놀던 방해정 뒷산 인월사(印月寺) 터에 창건되었으며, 그뒤 1508년(중종 3) 강릉부사 한급(韓汲)이 지금의 자리에 옮겨지었다고 전해진다.
1626 년(인조 4) 강릉부사 이명준(李命俊)에 의하여 크게 중수되었는데, 인조 때 우의정이었던 장유(張維)가 지은 중수기(重修記)에는 태조와 세조도 친히 이 경포대에 올라 사면의 경치에 찬사를 아끼지 않았으며, 임진왜란으로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었다고 쓰여져 있다.
현재의 경포대 건물은 1745년(영조 21) 부사 조하망(曺夏望)이 세운 것으로서, 낡은 건물은 헐어내고 홍수로 인하여 사천면 진리 앞바다에 떠내려온 아름드리 나무로 새로이 지은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1873년(고종 10) 강릉부사 이직현(李稷鉉)이 중건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현판은 헌종 때 한성부 판윤을 지낸 이익회(李翊會)가 쓴 것이다. 이 밖에도 유한지(兪漢芝)가 쓴 전자체(篆字體)의 현판과 '第一江山(제일강산)'이라 쓴 현판이 걸려 있는데, '第一江山'이라는 편액은 '第一'과 '江山'의 필체가 다른 점이 특이하다.
또한, 숙종의 친서와 이이(李珥)가 지은 시가 있다. 옛사람이 "해 뜨는 이른 아침이나 달 밝은 가을밤에 경포대에 올라 경포호를 굽어보거나 호수 너머 동해의 푸른 바다를 대하면 속세는 간 데 없이 온통 선경이요."라고 표현한 것처럼, 누각 주위에는 소나무와 상수리나무 등이 알맞게 우거져 운치 있는 경관을 이루고 있다.
≪참고문헌≫ 江原文物(江原文物編纂室, 1973), 鄕土의 傳說(江原道, 1979).
6.강릉객사문(江陵客舍門)
강원도 강릉시 용강동에 있는 고려시대의 문.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맞배기와건물. 국보 제51호. 본래 강릉객사의 정문으로, 오늘날 주건물은 모두 없어지고 그 정문만이 강릉경찰서 마당에 남아 있다.
전해 오는 말에 따르면, 승려 범일(梵日)이 관사(官舍) 터에 절을 지었으나 절은 병화(兵火)로 소실되고 그 문만이 남아 있다가 그 자리에 부관(府館)을 옮겨 지음으로써 객사문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염양사(艶陽寺)의 삼문(三門)을 객사로 옮겨 지었기 때문에 사문(沙門)이라 불려 왔다고도 한다.
양식은 주심포식(柱心包式)으로 되어 있고, 그 평면은 측면 중앙칸 자리에 세운 기둥들 사이사이에 커다란 널판장문을 쌍으로 정면 3칸에 달아 실(室)은 하나도 없다.
본래의 기단 모양은 어떠했는지 알 수 없고, 막돌초석 위에 배흘림이 뚜렷한 두리기둥을 세웠는데, 측면 중앙 옆에서 문짝을 달게 된 기둥들만은 방주(方柱)를 세운 것이 주목된다.
기둥 윗몸은 창방(昌枋)으로 결구(結構)하고, 거기에서 헛첨차를 내어 주두(柱頭 : 대접받침) 위에 놓은 초제공(初諸工) 위의 첨차를 받치고 있다.
기둥 위에 놓은 주두와 헛첨차 위에 놓은 소로〔小累〕들은 굽면이 모두 곡면이고 굽받침이 있으며, 또 헛첨차가 있고 첨차의 밑면은 모두 연화두형(蓮花頭形)으로 조각되어 있어서 부석사 무량수전이나 수덕사 대웅전의 주두 및 첨차와 그 모습이 흡사하다.
그러나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헛첨차의 안쪽에 보아지가 있어 퇴보〔退樑〕를 받치고 있지만, 이 객사문에서는 보아지가 없고 창방이 직접 결구되어 있다.
공포(慊包)는 외이출목(外二出目)·내일출목(內一出目)으로, 초제공 위에는 일반적으로 살미첨차를 놓는 것과는 달리 보를 놓고, 보머리〔樑頭〕끝을 쇠서〔牛舌〕로 하였음이 특이하다.
문루에는 고려시대 공민왕의 친필인 '臨瀛館(임영관)'이라는 가로 3m, 세로 1.2m 크기의 현판이 걸려 있다.
≪참고문헌≫ 韓國建築美(朱南哲, 一志社, 1983), 國寶 11-宮室建築-(申榮勳 編, 藝耕産業社, 1985).
7. 신복사(神福寺) 터
강원도 강릉시 내곡동에 있었던 절. 850년(문성왕 12)경에 범일국사(梵日國師)가 창건하였다. ≪임영지 臨瀛志≫에는 이 절의 창건과 관련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즉 신라 말기에 어느 처녀가 우물에 비친 햇빛을 보고 그 물을 마시자 임신을 하였다. 집안 사람들이 낳은 아기를 얼음판 위에 내다버렸으나, 나르는 새가 아이를 품었고, 서광(瑞光)이 주위를 맴돌았으므로 괴이하게 여겨 다시 데려와서 이름을 '범(梵)'이라 하여 길렀다.
범은 어려서 출가하여 고승이 되었으며, 고향에 신복사와 굴산사(掘山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창건 이후의 역사 및 폐사시기는 전하지 않으며, 현재의 절터에는 보물 제84호로 지정된 신복사지석불좌상과 보물 제87호로 지정된 신복사지삼층석탑이 있다. 석불좌상은 원통형의 관을 쓴 얼굴에 미소가 가득하며, 풍만한 몸의 굴곡과 자연스럽게 내려진 옷자락의 사실적인 묘사는 생동감마저 느끼게 한다.
삼층석탑은 고려 초기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안정감과 중후감을 주는 특이한 탑이다. 원래 이 절은 '심복(尋福)' 또는 '신복(神伏)'으로 표기되었으나 1936년과 1937년에 '신복(神福)'이라고 쓴 기왓장이 발견되어 현재의 명칭으로 통일하여 부르게 되었다. 1938년에 발견된 기와는 감정 결과 880년 전후의 것으로 분석되었다.
≪참고문헌≫ 韓國寺刹全書(權相老, 東國大學校出版部, 1979), 臨瀛文化大觀(江陵文化院, 1982), 전통사찰총서 1(사찰문화연구원, 1992).
8. 굴산사지(屈山寺址)
강원도 강릉시 구정면 학산리에 있는 절터. 강원도 기념물 제11호. 당나라에서 참선 공부를 하고 847년(신라 문성왕 9)에 귀국한 범일(梵日)이 851년에 창건한 절이라 알려져 있으나, 이 해에 명주도독(溟州都督) 김공(金公)이 범일에게 굴산사에 머물도록 요청한 것으로 보아 그 전에 절이 있었으리라 여겨진다.
범일은 왕경(王京)의 귀족으로서 15세에 출가하여 831년(흥덕왕 6)에 왕자 김의종(金義琮)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범일의 법맥은 개청(開淸)·행적(行寂) 등에게 이어져, 이른바 신라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의 굴산사파를 형성하였다.
폐사된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성터에서 출토되는 기와나 청자 조각으로 보아 고려 중기까지는 존속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이 일대는 일찍이 농경지로 변하여 절의 위치나 가람배치 등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없었는데, 1949년(己丑年)의 대홍수로 경작지에 뭍혀 있는 초석(礎石)이 노출됨으로써 절의 규모가 비로소 확인되었다.
1983 년의 발굴조사에서 '五臺山'이 새겨진 기와조각이 나옴으로써, 굴산사는 오대산 성지(聖地)의 권역(圈域)에 속함을 확인하였고, 이러한 사실은 범일의 문인(門人) 신의(信義)가 오대산 월정사에 살았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출토된 명문기와의 '屈山寺'와는 달리 문헌에서는 '掘山寺·堀山寺·戈山寺' 등으로 표기되어 있는데, '굴산'은 곧 사굴산(斤屈山)의 약칭이다.
현재 이 절에 남아 있는 석조유물로는 범일국사의 부도라고 전해지는 굴산사지부도(보물 제85호)와 우리 나라에서 가장 큰 당간지주인 굴산사지당간지주(보물 제86호)가 있다. 이 밖에도 4구(驅)의 석조(石造) 비로자나불좌상
이 있다.
하나는 높이 1.5m로 당간지주에서 동남쪽으로 조금 떨어진 곳에 얼굴과 오른팔 일부가 떨어져 나간 것으로서 보호각 안에 있다. 두·세번째 것은 당간지주에서 서북쪽으로 100m 떨어진 암자(현재의 굴산사)에 마멸이 심한 채로 모셔져 있는데, 본존(本尊)은 높이가 1m가 채 안된다. 나머지 하나는 석천(石泉)이라 불리는 마을 우물가의 8각 중대석 위에 올려져 있는데, 목과 얼굴이 결실되었다.
마을 북쪽 소나무 숲에는'학바위'가 있는데, 위의 석천과 함께 범일의 탄생 전설에 등장하는 곳이다. 즉 이 마을 처녀가 석천에서 해가 떠 있는 물을 마시고 잉태하여 아기를 낳자 학바위에 버렸는데, 그 뒤 학들이 날개로 아기를 감싸고 키우는 것을 보고 집으로 데려와 기른 아이가 바로 범일이라는 이야기이다. 이렇듯 범일은 강릉 지역 민간신앙의 대상이 되어, 강릉단오제 때 모시는 대관령국사성황당신(大關嶺國師城隍堂神)이 곧 범일국사라고 알려져 있다.
≪참고문헌≫ 祖堂集, 三國遺事, 戈山寺址發掘調査略報告書(강릉대학박물관, 1983), 韓國佛敎史上에서 본 梵日의 위치와 屈山寺의 역사성 검토(신천식, 영동문화 1, 관동대학교, 1980), 新羅下代 戈山門의 형성과 그 사상(김두진, 성곡논총 17, 1986).
9. 선종구산문(禪宗九山門)
선종(禪宗)이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후 신라 말 고려 초에 형성된 9개의 산문(山門:문파).
〔종 류〕도의(道義)의 가지산문(迦知山門), 홍척(洪陟)의 실상산문(實相山門), 혜철(惠哲)의 동리산문(桐裏山門), 도윤(道允)의 사자산문(獅子山門), 낭혜(朗慧)의 성주산문(聖住山門), 범일(梵日)의 사굴산문(斤戈山門), 지증(智證)의 희양산문(曦陽山門), 현욱(玄昱)의 봉림산문(鳳林山門), 이엄(利嚴)의 수미산문(須彌山門)을 말한다.
선종은 석가가 영산(靈山) 설법에서 말없이 꽃을 들자, 제자인 가섭(迦葉)만이 그 뜻을 알았다는 데서 기원하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기 때문에 불심종(佛心宗)이라고도 한다.
중국에서는 달마대사 (達磨大師)가 전한 뒤 혜능(慧能)·신수(神秀) 등에 의해 선양되었다. 우리 나라의 경우는 9세기 초에 이르러서야 크게 대두되었다.
〔성 립〕 선종은 불립문자(不立文字)를 주장하여, 경전에 의하지 않고 자기 내에 존재하는 불성(佛性)을 깨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러기 위하여 밖으로부터의 모든 인연을 끊고〔外息諸緣〕, 깊숙한 산간에 파묻혀 수행하는, 이른바 좌선을 행하였다. 절대적인 불타(佛陀)에 귀의하려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가진 불성의 개발을 중요시하였다.
이러한 선종사상은 개인주의적인 성향을 지녀, 중앙정부의 간섭을 배제하면서 지방에 웅거하여 독자적인 세력을 구축하려는 지방호족의 의식구조와 부합하게 되었다. 따라서 신라 말기 선종의 유행은 지방호족이 대두되는 사회상과 떼어 생각할 수 없다.
신라 중엽 무열왕계가 의도한 전제정치는 점차 귀족세력의 반발을 받으면서 실패로 기울게 되었다. 혜공왕대가 되면 족장으로 생각될 수 있는 96각간(角干)이 서로 다투는 속에, 왕은 난중에 살해되고, 전국이 혼란의 도가니 속으로 빠져들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왕실을 중심으로 한 권력쟁탈전에서 패배한 중앙귀족이 지방의 연고지에 내려와 지방호족으로 되어 갔다.
한편, 신라 중엽 이래로 촌(村)의 장에 불과한 촌주(村主)들도,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진 틈을 타서 꾸준히 그 지위를 향상시켜 왔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그들은 하나 내지 수개의 성을 다스리는 지방의 토착 호족세력으로 성장하여 성주나 장군으로 자처하였다. 해상무역이라든가 그 밖의 수단으로 부를 축적한 이들은,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그 지방에 강한 지반을 가졌을 뿐 아니라 지방 민중과 쉽게 결합할 수 있어서, 사회의 명망과 권세를 한꺼번에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이, 신라 말기에 중앙 왕실의 권위가 떨어지면서, 지방호족이 대두하여 그 사회를 실질적으로 움직여 가는 분위기 속에서, 선종은 크게 유행하게 되었다.
선사(禪師)들은 중앙의 지배층에서 몰락한 6두품 이하의 하급 귀족 출신이거나 중앙 진출이 불가능한 지방호족 출신이다. 나말여초의 선종 승려 가운데 30인 정도의 행적을 알 수 있는데, 그 중 절반 가량이 김씨(金氏)로 나타난다. 아마 김씨가 아닌 나머지는 6두품 이하의 신분층에 속해 있었고, 김씨라 하더라도 경주 출신이 아닌 선사들은 역시 6두품 이하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굴산사(戈山寺) 범일의 할아버지인 술원(述元)이 명주(溟州)도독을 지냈으며, 실상사 수철(秀澈)의 증조부는 소판(蘇判)을 지낸 진골이었다. 이들은 아마 할아버지 때까지만 하더라도 진골이었으나, 낙향하여 6두품으로 떨어졌을 것으로 추측된다.
특히, 낭혜의 가계는 본래 진골이었으나, 그 아버지 범청(範淸)대에 6두품으로 떨어지고 있는데, 그 이유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단정할 수 없다. 낭혜가 무열왕의 8대손이어서 7세대 동일 친족의 방계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거나, 아니면 범청이 김헌창(金憲昌)의 난에 가담해 있었기 때문에, 난이 평정된 뒤 6두품으로 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가장 일찍 성립된 실상산문 건립에 선강태자(宣康太子)나 단의장옹주(端儀長翁主)와 같은 왕실세력이 관여하기도 했지만, 9산선문은 지방호족의 세력 기반을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가지산문 건립에는 김언경(金彦卿) 등이 관여하였고, 희양산문은 심충(沈忠)과 가은현(加恩縣)의 장군인 희필(熙弼)에 의하여 건립되었다.
봉림산문 건립에는 진례성군사(進禮城軍事)인 김율희(金律熙)와 김해부 진례성군사 명의(明義)의 장군인 김인광(金仁匡) 등 가야계 김씨 세력이 관여하였으며, 수미산문 건립에는 왕건(王建) 및 그 외척인 황보씨(皇甫氏) 세력이 후원하고 있었다.
보령은 김인문(金仁問)의 수봉지(受封地:임금으로부터 하사받은 토지)로서, 그 후손인 김흔(金昕)의 세력 근거지였으며, 그가 성주사를 건립하고 낭혜를 머물게끔 하였다. 김주원(金周元)계 세력을 배경으로 실제로 강릉지방을 다스리고 있던 왕순식(王順式, 혹은 王荀息)은 사굴산문을 후원하고 있었다.
9 산선문의 선사들은 때때로 왕실의 부름을 받고 이에 응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왕실과의 관련보다 지방호족과의 연계에 더 유의하였다. 경문왕의 부름에 응한 낭혜나 대통(大通)·지증 등이 왕실에 계속 머물지 않고 산문으로 돌아오고 있으며, 그 뒤의 부름에는 아예 응하지도 않았다.
★ 사굴산문- 사굴산문은 범일에 의하여 개창되었다. 범일은 831년에 중국에 들어가 마조의 제자인 염관(鹽官, 齊安)의 법을 받아, 846년(문성왕 8)에 귀국하였다.
그는 평상의 마음이 바로 도라 하였는데, 석가가 보리수 아래에서 깨침은 진실한 것이 아니며 그 뒤 진귀대사(眞歸大師)를 만나 깨친 것이 바로 조사선의 경지라고 하여, 여래선보다 우월한 조사선을 주장하였다. 그의 제자에 행적·개청·신의(信義) 등이 있었다.
행적은 870년에 중국에 들어가 석상(石霜, 慶諸)의 법을 받아 855년(헌강왕 11)에 귀국하였다. 처음에 그는 김해부의 소충자·소율희의 후원을 받았고, 915년에 신덕왕의 요청으로 실제사(實際寺)에 거주하였는데, 이 절은 왕건과 연결되어 있었다. 그는 일심(一心)을 강조하는 사상 경향을 가져, "일심을 보존하라."든가 "한 번 지켜 잃지 말라."고 하였다.
개청은 범일 문하에 있다가 889년(진성왕 3)에 강릉 보현사(普賢寺)에 거주하였는데, 이때 명주군사 왕순식과 인연을 맺었으며, 그 뒤 왕건의 귀의를 받았다. 한편, 범일의 문인인 신의가 오대산 자장의 구거(舊居:후의 月精寺)에 거주하고 있었다. 이로 보면, 사굴산문은 강릉과 오대산 일대에 세력을 미치고 있었다.
★ 범일(梵日)
810( 헌덕왕 2)∼889(진성여왕 3). 신라시대 승려. 선승(禪僧).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사굴산파(斤堀山派)의 개창조이다. 성은 김씨. 계림 출신. 품일(品日)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명주도독을 지낸 김술원(金述元)이며, 어머니는 문씨이다.
태양을 머리 위로 받드는 태몽을 꾸고 13개월 만에 태어났으며, 15세에 출가하였고 20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으며, 831년(흥덕왕 6) 왕자 김의종(金義宗)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중국의 여러 고승들을 순방하던 중 제안(齊安)을 만나 성불(成佛)하는 법을 물었다. 제안이 "도는 닦는 것이 아니라 더럽히지 않는 것이며, 부처나 보살에 대한 소견을 내지 않는 평상의 마음이 곧 도이다."라고 하였다. 이 말에 범일은 대오(大悟)하였다. 그 뒤, 제안의 문하에서 6년 동안 머물다가 유엄(惟儼)을 찾아가 선문답(禪問答)을 나누고 크게 인가를 받았다.
〔업 적〕 844년(문성왕 6)에 무종이 불교를 박해하는 법난(法難)이 일어나자 상산(商山)의 산 속에 숨어서 반년 가량 지내다 소주(韶州)에서 6조 혜능(慧能)의 탑에 참배하였고 847년 귀국하였다.
그 뒤 851년까지 백달산에 머무르며 정진하다 명주도독의 청으로 굴산사(戈山寺)로 옮겨 40여 년 동안 후학들을 교화하였다. 그 때 경문왕·헌강왕·정강왕이 차례로 국사(國師)로 받들어 계림으로 모시고자 하였으나 모두 사양하였다.
수도자의 본분에 대해서는 "부처의 뒤를 따르지도 말고 다른 사람의 깨달음도 따르지 말라. 앞뒤 사람을 바라보고 돌아볼 것도 더 이상 닦고 얻을 바도 없는 본래 부처로서의 철두철미한 자기 본분의 자각을 수행의 목표로 삼을 것"을 강조하였다.
임종 직전에 "내 이제 영결하고자 하니 세속의 부질없는 정분으로 어지러이 상심하지 말 것이며, 모름지기 스스로의 마음을 지켜 큰 뜻을 깨뜨리지 말라."고 당부한 뒤 입적(入寂)하였다. 시호는 통효대사(通曉大師)이며, 탑호는 연휘(延徽)이다. 대표적인 제자로는 행적(行寂)과 개청(開淸)이 있다.
〔사 상〕 그가 독특하게 주창한 것으로는 진귀조사설(眞歸祖師說)이 있다. 진귀조사설은 진성여왕이 불교의 선(禪)과 교(敎)의 뜻을 물은 데 대한 대답이다. 석가모니는 태어나자 곧바로 사방으로 일곱 걸음을 걸으면서 오로지 존귀한 것은 자아(自我)뿐이라고 하였으며, 뒷날 설산(雪山)으로 들어가 수행하다가 새벽 샛별을 보고 진리를 깨달았으나 궁극의 경지가 아님을 느꼈다.
그 뒤, 진귀조사를 만나 교 밖에 따로이 전하는 선지(禪旨)를 얻고 대오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라의 무염(無染)이 ≪능가경 楞伽經≫을 배우다 조사의 길이 아니라고 하여 이를 버리고 당나라로 가서 선법을 익힌 것이나, 도윤(道允)이 ≪화엄경≫을 읽다가 심인(心印)의 법과 같지 않다 하고 당나라로 가서 선을 공부한 것 등이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석가모니가 샛별을 보고 도를 깨우친 뒤 진귀조사에게서 선을 배웠다는 것은 불교의 정설에는 없는 것이며,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達磨)의 밀록(密錄)에만 있는 것이라고 하여 여러 가지 의문점을 남기고 있다.
그러나 조선시대 후기에 와서 크게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여래선(如來禪)과 조사선(祖師禪)에 대한 구별이 범일에 의해서 처음으로 제시되었다는 사실만은 주목되는 일이다.
≪참고문헌≫ 三國遺事, 禪門寶藏錄(天刎), 景德傳燈錄, 祖堂集, 朝鮮佛敎通史(李能和, 新文館, 1918), 新羅時代의 佛敎思想(金東華, 亞細亞硏究 6·2, 1963), 韓國佛敎史上에서 본 梵日의 位置와 戈山寺의 歷史性 검토(申千湜, 嶺東文化 創刊號, 關東大學嶺東文化硏究所, 1980).